“자신을 위해서만 부를 소유하는 이는 죄를 짓는 것이며,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빚을 갚는 것과 같다.” “가난한 이들의 필요를 돌볼 때,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을 돌려주는 것이다. 우리는 자비의 행위를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정의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애덕의 실천은 자선 행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빈곤 문제의 사회적 정치적 차원들에 대처하는 것도 포함하고 있다.”
동의하십니까? ‘무한 경쟁’의 세상살이가 당연이며 필연이라고 믿는 분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일 것입니다. 혹시 그리스도인 가운데에 앞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가톨릭교회의 교리서에 실려 있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번역 출판한 ‘가톨릭교회 교리서’와 ‘제2차바티칸 공의회 문헌의 사목헌장’과 ‘간추린 사회교리’에서 관련된 부분의 일독을 권합니다.
구약과 신약성경을 관통하는 주제 하나를 꼽으라면, 필자는 주저하지 않고 ‘하느님의 인류 구원’이며, 구약의 소재는 이스라엘의 이집트 노예생활에서의 해방(탈출), 신약의 소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의 부활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노예생활이든 어둠과 죽음의 굴레이든, 비구원과 억압의 상태는 있게 마련일 수도 있으나, 신앙의 길은 끊임없는 해방과 탈출의 몸짓으로 땀과 피를 흘리는 고난의 여정입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에서 “맥 풀린 손”과 “꺾인 무릎”으로라도 기어서라도 걸어야 할 길입니다. 눈과 귀가 멀고 말을 못하고 다리를 절더라도 결코 멈출 수 없는 길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구원”과 “주님의 해방”을 향한 길이기 때문입니다(1독서와 복음).
혹여 신앙의 길이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 하며, 슬픔과 탄식이 사라진”(1독서) “고운 옷을 걸친 자들”의 “왕궁”(복음)을 보장해주는 지름길 혹은 부적이라고 믿는다면, 성경과 교회의 고백과 가르침은 귀에 거슬리고 심기를 불편하게 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끈기의 본보기로 삼아야 하기 때문입니다”(2독서). 고난과 끈기는 누구나 건너뛰고 싶은 장애물이지만, 이를 피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대림 제3주일입니다. 한국천주교회는 오늘을 특별히 자선주일로 기념합니다. 우리 교회가 예수님의 재림을, 구원과 해방을 갈망한다면, 끈기를 갖고 정의의 의무와 애덕(자선, 빈곤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대처)을 실천해야 하고, 그 때문에 영광을 탐하기보다는 고난의 잔을 마셔야 합니다.
“힘을 내어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우리 하느님이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시리라”(영성체송).
[수원] 누구를 찾아야 합니까?/조원기 신부
무언가 기대하던 일이 기대와 다르게 돌아가기 시작하면 갸우뚱해집니다. 오늘 요한 세례자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의아해합니다. 요한 세례자가 기다리고 있던 메시아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와 ‘쭉정이’를 불에 태워버리는 심판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요한의 기대와는 다르게 죄인들의 용서와 화해, 사랑을 통해 나타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던 것입니다. 감옥에 갇혀있던 요한은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묻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살아가면서 기대대로 되지 않는 일은 수없이 많습니다. 대부분은 약간의 실망과 조정을 통해 넘어가지만 그렇지 못한 일들도 있습니다. 특히 각자가 정당하다고 여기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큰 실망이 상처를 남기거나 다툼을 일으켜 사람들 사이의 일치를 해치는 경우를 종종 만납니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성당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봉사한다고 하면서,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하느님의 이름을 내세워’ 다투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주님의 대답을 들어야 합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예수님께서는 직접적인 대답이 아니라 결과를 보여주십니다. 사실 올바른 일, 정당한 일은 하느님의 뜻에 맞는 일이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일뿐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처럼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고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가져옵니다.
내가 하는 일이 아무리 올바르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인간적인 눈으로 봤을 때 정의롭다고까지 할지라도, 그 결과가 우리들 사이를 갈라놓는다면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정당하고 올바른 일을 찾고 더 나아가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시작하지만 점차 서로 미워하게 되고 갈라서서 등을 돌리게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이럴 때 어서 눈치채야 합니다. 무언가가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지고 ‘나’의 만족을 위해 치닫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이 단지 무조건 갈등을 피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진정으로 따라야 할 것이 무엇인지 다시 돌아보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우리가 갈등과 고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찾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왔다 갔다 하면서 이익만 따르고자 하는 것도, 화려한 옷을 입고 떵떵거리며 대우받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예언자’,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목소리를 들을 때에 비로소 자신의 삶에 구원이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명이 우리에게는 가장 중요합니다. 인간의 눈에는 아무리 훌륭하게 보여도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일일 뿐입니다.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그러니 늘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특히 우리의 기대가 어긋날 때, 내가 옳다고 여기는 일이 좌절될 때, 우리 안에서 울리는 주님의 말씀을 확인하십시오. 우리가 진정으로 찾고자 하는 것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어느새 성큼 다가와 계신 주님을 발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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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3)/김규봉 신부
사람의 길, 생명의 길을 묻는 이에게 그 길을 먼저 살아가고 있는 이를 만나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입니다. 그런 이의 존재감은 극대화됩니다. 그의 말뿐 아니라, 그의 억양이나 표정, 몸짓 하나 하나까지 관심이 집중됩니다. 요한은 사람을 보내 예수님께 묻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 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 질문에 예수님은 직답을 피하며 말씀하십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나 메시아로서의 당신의 능력이 드러나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해 이 땅에서 이루고 계시는 그 현실, 그 사실에 사람들이 집중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 안에서 눈먼이들이 보게 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들으며, 그분의 창조질서 안에서 모든 만물이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그 사실에 주목하여, 그 길을 당신과 함께 만들고 살아가자고 사람들을 초대하십니다.
대림 제3주일이며 자선주일입니다. 자선을 실천하고 정의를 세우는 일, 사람과 생명의 길을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에게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의 스승이요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만들어 가신 길이고, 우리에게도 초대하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민과 열정, 그분이 걸어가신 길에 대해 더 많이 묵상해 보고, 그 길로 더 깊이 접어드는 은혜로운 대림시기 되시면 좋겠습니다.
[인천] ‘당신은 내게 희망을 주는 사람입니다’라고 일컬어지길/유승학 신부
세상엔 아픈 사람이 수없이 많은데 별로 신통치도 않은 것을 가지고 이 지면을 채우자니 조금은 부끄럽다. 그러나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으니 너그럽게 들어주시길….
7년 전 전방 십자 인대의 파열로 그럭저럭 지내다가 작년에 격한 운동으로 심하게 재 파열되어 1년의 망설임의 시간을 가진 뒤 뒤늦게 수술을 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지금은 수술 후 한 달의 시간이 지나고 있다.
모든 환자들이 그러하겠지만 자신이 갖고 있는 병의 치료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기에 불안한 상태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필자 역시 가끔씩 굳어져 버릴 것 같은 무릎의 상태를 보면서 불안한 맘이 들곤 한다. 그래서 언젠가 재활 치료를 해주는 물리 치료사에게 넌지시 질문을 던진 말이 있었다. “희망이 있겠죠?” 희망을 전해주어야 하는 사제가 거꾸로 희망을 물어보다니 참 부끄러웠지만 간절히 누군가로부터 “당연하죠”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 같다. 다행히도 ‘당연하죠’라는 답변에 마음이 안도가 되었고 잠시지만 그 물리치료사의 말이 참 고마웠다. 그냥 단순한 한 마디인데 큰 위안이 되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오죽할까? 병자성사나 환자 영성체 중에 만나는 환자들과 연로하신 어른들의 마음이 그러할 것이다. 지속되는 육체적 고통, 불안한 육체적 상태, 몸의 회복에 대한 불확신. 이 모든 것의 극복을 위해 희망이라는 어떠한 메세지가 그들에게 주어진다면 힘겹고 고통스러워도 작은 위안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그 역할을 누가 해야 할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세례자 요한이 물어본 것이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 그 말에 예수님의 대답은 “내가 그 사람이요”가 아니라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신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약하고 병든 자들, 힘없고 가난한 자들에게 희망을 주신 분이시다. 물론 이 말씀 안에는 더욱더 심오한 뜻이 숨겨져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러한 치유의 역사 가운데 소외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실제적인 도움을 얻어 희망을 얻은 것이다. 되살아났고, 생명을 다시 찾은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 모습이 선포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단순히 예수님의 정체성만을 알리기 위한 것은 아니다. 희망과 위안을 주는 역할은 다른 이가 아닌 예수님과 함께 하는 우리가 해야 함을 알려주는 것이다. 망설이지 말자. 그래서 이런 말 한번 들어보자. ‘당신은 내게 희망을 주는 사람입니다.’
[부산] 마태 11, 2-11. /서공석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요한과 예수님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요한은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며, 예수님의 길을 닦아 놓기 위해 파견 된 인물이고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그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요한에 대한 이런 극찬의 말씀 끝에 오늘 복음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 나라의 질서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요한의 차이를 분명하게 하려는 복음서의 의도가 보입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이 감옥에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에게 과연 오실 그 메시아인가 물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답하십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메시아가 오시면 일어날 일이라고 이사야서(29,18-19; 35,5-6; 61,1)가 말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행적을 회상하면서 찾아낸 이사야서의 구절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불행과 악을 퇴치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초능력으로 기적을 행하는 예수님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신앙은 초능력을 얻어 우리의 소원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신앙이라면, 그것은 동�(童話)에 나오는 “열려라 참깨!”의 위력을 얻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동화는 어린이들의 상상력을 키워주는데 도움을 줄 수는 있어도, 그리스도 신앙을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초능력을 찾아 나선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자연 질서 안에 세상을 창조해놓고, 몇 사람에게 기적의 능력을 주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의 제자 되는 길입니다. 인간의 불행과 고통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믿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그런 벌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양 한 마리도 잃지 않으려는 목자와 같은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죄인들과 세리들과 어울려 먹고 마신다고 바리사이와 율사들은 자주 불평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달리 하느님을 자비로운 아버지라고 믿으셨습니다. 죄인들과 세리들에게도 하느님은 아버지로 계신다고 예수님은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소경, 절름발이, 나병환자, 귀머거리 등을 고쳤다는 말은 그분이 아버지라 부르던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기 신앙공동체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베푼 생명을 산다고 믿던 시대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일을 배워 실천하면서 그분의 자녀가 됩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실천되는 곳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여러분 가운데 있다.”(루가 17, 21)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인류 역사 안에 사람들은 불행과 악을 퇴치하는 노력을 해 왔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이든, 아니든, 사심 없이 인류의 복지를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생을 바쳐서 일한 이들이 많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일한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는 관대하지만, 우리와 특별한 인연이 없는 이들에게는 인색합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먼저 대가(代價)를 생각합니다. 하느님이 무상(無償)으로 베푸신 우리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은총이라는 단어는 하느님이 대가없이 베푸셨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우리는 그것도 우리 노력의 대가로 만들고자 합니다. 지키고 바쳐서 얻어내는 은총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질서에 익숙한 우리는 하느님까지 그 질서 안에 계신다고 상상합니다. 우리는 지키고 바친 만큼 받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랑스에 신부이면서 샹송 가수로 유명한 분이 있었습니다. 바쁜 연주 일정과 심한 불면증 때문에 술을 가까이 했다가 알코올중독자가 되었습니다. 그분은 우여곡절 끝에 신부로서 또 인기 가수로서 자존심을 접고 중독자 모임에 참석하여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중독에서 헤어나자 다른 중독자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중독자 한 사람을 자기 방에 데려다 사흘 동안 함께 머물면서 자기의 경험을 그에게 들려주며 회유하였습니다. 그의 그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그 중독자가 중독자 모임에 나가기로 마음을 정하자, 그는 그 중독자를 집에 데려다 주고 돌아오면서 차 안에서 혼자 말합니다. “나는 보잘것없는 인간입니다. 인류가 범하는 죄에 내던져진 인간입니다. 그런데 보잘것없는 나라는 이 인간은,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소경을 보게 하고, 절름발이를 걷게 하고, 나병환자를 깨끗이 낫게 하는 그 인간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이 말은 물론 제일 먼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는 말이지만, 술을 끊은 알코올중독자에게도 조금은 적용되는 말입니다.”(뒤발, ‘달과 놀던 아이’, 141). 알코올중독이라는 불행을 퇴치하는 노력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신다는 고백입니다.
이웃의 불행을 퇴치하는 우리의 보잘것없는 노력들 안에 하느님이 살아계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고치고, 살리면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하느님의 자녀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군종] 내가 처한 현실 속의 희망/유한빈 신부
오늘 제1독서는 우리에게 가슴 뭉클한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제1독서의 말씀을 통해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뭔가 부족한 사람들, 무릎에 힘이 빠져 일어서지 못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잘 걷고, 잘 뛰고, 잘 보고, 잘 듣고…. 모든 것이 충족된 사람들에게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의 말씀은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난함, 부족함, 결함, 죄 등은 우리와 하느님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입니다. 이러한 부족한 것들로 인해 하느님이 우리 곁에 계실 수 있습니다.
대림 3주째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1주는 기다림, 2주는 회개, 3주는 기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을 기다리며 기뻐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까? 어려운 경제 사정, 가정의 불화, 자녀문제, 여러 가지 문제로 우리의 어깨는 자꾸 쳐지고 두 무릎은 힘이 빠져 갑니다. 기뻐하라는 소리가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오늘 말하고 있는 기쁨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소리입니다. 비록 힘이 빠져 있지만 우리가 부족한 만큼, 힘이 빠져 있는 만큼 하느님께서 함께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당장 우리 눈앞에는 어려움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독서와 복음에서처럼 기쁨을 느낄 만한 것들은 별로 보이지 않는 듯합니다.
우리는 시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비록 어려움뿐이지만, 어려움을 넘어 삶의 희망을 발견하라 하십니다. 예수님은 5천명의 군중을 먹여 살려야 하는 그러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먼저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썩어서 냄새가 진동하는 라자로의 시체 앞에서도 먼저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에도 기적을 써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바로 내가 처한 현실 안에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해 그렇게 행동으로써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신앙인 입니다. 신앙인의 시각답게 우리가 처한 현실을 바라봅시다. 우리에게 있어서 부족함은 어렵고 힘든 상황일 뿐이지만, 하느님이 바라 보시기에는 완성을 위한, 만족과 행복을 위한 충분한 조건이 됩니다.
오늘은 대림 제3주일로 기쁨을 묵상하는 주일입니다. 우리의 자리에서 기쁨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먼저 고통과 시련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과 함께 있음으로 희망과 행복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고통과 어려움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 위한 매우 적합한 조건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가까이 오셨음을 기뻐하는 대림 3주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춘천] 기다림의 자세/이일환 신부
대림 제3주일이며 자선주일이고, 전통적으로 기다림의 기쁨을 의미하는 장미주일입니다. 이 날 사제가 입는 분홍색 제의는 그 기쁨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저는 분홍색 제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제가 되어 처음 분홍색 제의를 입던 날, 그렇지 않아도 얼굴이 상기되어 발그스레했는데 제의까지 분홍색이어서 저의 별명은 그날부터 한동안 ‘핑크 돼지’가 되었습니다. 하하하.
지난 주에 이어 오늘도 우리는 세례자 요한에 대하여 듣습니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며, 여인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가장 큰 인물로서 겸손한 모습으로 주님을 기다렸던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우리는 겸허한 마음으로 배워야겠습니다.
기다림은 어쩌면 쓸쓸하게 여겨질지 모릅니다. 언제 올지도 모르고, 어떻게 올지도 모르기에 때로는 지칠지도 모르지만, 반드시 온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 기다림은 희망으로 변하고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저는 가끔씩 고향집에 내려갑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아들 사제가 왔다고 있던 밥은 그냥 놔둔 채, 따뜻한 밥을 지어 주십니다. 남아 있던 밥은 언제 드실지 모릅니다. 냉장고를 보면 수많은 것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아들을 위해, 아들이 좋아했던 것들, 아들이 좋아하는 것들, 아들이 좋아할 것 같은 것들, 먹을지 안 먹을지 모르지만 오직 아들을 위해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몇 달이 지나도 꽁꽁 쌓아두십니다. 그러나 무심한 아들은 당장 냉장고 비우라면서 그동안 기쁘게 마련하셨던 어머니의 ‘기다림’은 무시한 채 제 할 일만 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기다림은 어머니의 기다림과 참으로 닮았습니다. 기다림 그 자체는 즐거운 일입니다. 오셔야 할 분, 오시기로 한 분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기다리면서 이것저것 준비도 하고, 어떻게 하면 더 좋을까 고민도 하고, 무엇으로 함께 기쁨을 나눌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기다림은 오로지 오실 분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라 오실 분, 오시기로 한 분이 주인공입니다. 그러기에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고 우리도 세례자 요한을 본받아 ‘기다림의 자세’를 다시 한 번 점검해야겠습니다.
우리 형제자매님들 중에는 “예수님, 오실 때 꼭 이런 모습으로 오세요!”라든지 “예수님, 꼭 이때나 저때에 오세요!”라고 말하는 분은 없겠죠? 우리의 초점은 항상 오실 분, 그리스도 예수님이어야 함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김성한 신부
오늘 복음에는 요한이 감옥에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예수님이 과연 오실 그 메시아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예수님이 이사야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그대로 인용하며 말씀하십니다.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 바로 구원 사건을 징표 하는 것이며 요한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뒤이어 예수님은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심판자의 모습 이였지만 실제로 오신 예수님은 '구원자', '해방자'로서의 메시아입니다. 예수님은 종말의 심판자라기보다는 오히려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고 그리하여 우리를 해방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같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예수님의 모습 때문에 요한은 의구심을 가졌던 것이고 이런 까닭에 요한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들을 잘 이해하도록 요청받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의심을 품었던 세례자 요한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꾸짓기 보다는 오히려 모든 예언자 중 첫째이며 모든 사람중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는 극찬을 보내십니다. 예수님께 이러한 칭송을 듣는다는 것 자체가 구원이며 은총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기쁨’의 색체가 진하게 깔려 있습니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은 하느님의 구원을 실현하실 분이고 그것은 이미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를 제대로 걷게 하는 등 기적행위로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것들은 이미 구원의 징표로 우리에게 나타나 있는 것이며 그 자체가 기쁜 소식입니다. 즉 구원이 보잘 것 없는 이들에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오늘은 교회가 정한 자선주일이기도 합니다. 이 땅의 가난한 이, 병든 이, 소외된 이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며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오25.40)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림시기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구체적인 자선을 통해 오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랑의 나눔을 통해 온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게 하고 하느님의 구원에 초대하여 함께 하는 것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야곱의 우물
시작 기도 오소서, 성령님. 저희에게 주님을 알아뵙는 믿음을, 그리고 주님의 예언자들을 알아보는 지혜를 주소서.
독서 오늘 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 부분은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것이고 (2–6절), 둘째 부분은 세례자 요한의 신원에 관한 것입니다 (7–11절). 앞부분에서는 요한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확인하려 합니다. 어쩌면 요한만큼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도 드물었을 것 같습니다. 요한은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던 이들에게 예수님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심을 알려주었고 (마태 3, 11), 자신이 예수님께 세례를 드리기에 부당함을 알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분께 세례를 드렸으며, 그때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이라는 하느님의 목소리까지 들었습니다 (3, 17). 그렇게 다른 이들에게 예수님을 알려주던 요한 자신이 지금은 마치 그 확신을 잃어버린 듯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 (11, 3) 라고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요한이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이 그러한 의혹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 예수님이 오실 그분이라면 일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아니면 세례 받은 후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이 요한의 예상과 달랐던 것일까요 ? 어쨌든 요한은 믿음의 어둠을 겪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님은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알아볼 수 있는 표지가 무엇인지를 밝혀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너희가 보고 듣는 것’ 곧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입니다. 눈먼 이들, 나병 환자들, 귀먹은 이들이 치유를 체험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 그 외에 다른 증거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다른 어떤 설명보다도 그 응답을 끝맺는 예수님의 말씀이 복음을 읽는 제 눈길을 멈추게 합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6절)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토마스 사도에게 말씀하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 29) 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선포가 ‘보고’ 믿었던 토마스 사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뵙지 못하는 다음 세대, 곧 우리에게 우리의 믿음이 복되다고 선언하는 것이듯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는 말씀 역시 이미 의심을 드러낸 요한한테보다 오히려 우리를 향해, 우리가 의심을 품지 않는다면 요한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마지막 말씀이, 오늘의 복음을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 질문한 것은 우리를 위해서였습니다. 요한에게 하신 예수님의 응답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묻는 우리를 위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러나 의문이 생깁니다. 지금 우리에게 “너희가 보고 듣는 것” 이 믿음의 근거라고 하신다면 (마태 11, 4)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보고 믿으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 2천 년 전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를 저는 이들이 걸었다는 것 ? 그것은 너무 멀리 있는, 확인할 수 없는 증거가 아닐까요 ? 복음의 뒷부분을 보며 다른 시각에서 한번 생각해 봅니다. 군중이 떠나간 다음 예수님은 이제 세례자 요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요한은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고,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사자였습니다. 그가 바로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인물인 것입니다. 그 요한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은 군중에게,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 하고 물으십니다. (7절) 다른 말로 하면 ‘너희는 세례자 요한을 알아보았느냐 ?’ 는 것이겠지요.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이를 나는 알아볼 수 있을까요 ? 예수님보다 앞서 왔던 세례자 요한이 아니라 지금 이 세상 안에서 눈먼 이들을 보게 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또 그들 안에서 ‘오실 분’ 이 와 계심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 ‘믿음은 환하지만 믿음의 길은 어둡다.’는 노래 가사가 생각납니다. 요한이 감옥에서 겪은 것과 같이 지금의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도 믿음의 근거를 찾습니다. 그들한테도 예수님께서 제시하는 근거는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는 것입니다. 고운 옷을 입은 자들을 보러 왕궁에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 구석구석에 눈길을 돌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선포되는 것을 볼 수 있다면, 거기에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성찰 이 세상에서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는 것이 믿기 어렵다면 그것을 ‘보고 들을’ 수 없다면 ….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방법이 있습니다. 내가 그것을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세상의 한 조각, 내가 있는 그곳에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기도 주 저의 하느님 당신께서는 저희를 위하여 기적과 계획들을 많이도 행하셨으니 그 누구도 당신께 견줄 수 없습니다. 제가 알리고 말하려 해도 헤아리기에는 그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시편 40, 6)
안소근 수녀(성도미니코선교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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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주일 강론모임이 제에가 많은 도움이 되였습니다. 감사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