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머리 아레스(외 2편)
서호준
깔고 앉은 돕바에서 파란 머리 아레스가 자랍니다. 나는 그것을 관상식물로 여겼어요. 그런데 그것이 먼저 나를 보고 있었고 어쩐지 조금씩 헛간 쪽으로 움직이는 것도 같았어요. 1990년대 일본 작화풍의 칼날 머릿결로 말이죠. 마침내 이곳에 왔구나, 쉬어도 되겠구나, 하면서 파란 머리 아레스는 살기를 거둡니다. 오늘은 먼지가 앉았습니다. 이렇게 작은 변화도 두렵고 좋아요.
작은 술래잡기
제리코는 마음을 다잡고 스미는 것 치미는 것 유년의 도시락 반찬을 먹었습니다. 매미를 잡아야 하는데 매미 우는 곳에 올라도 찡그린 사람들밖에 없었습니다.
아뜰리에에서 아저씨들이 하는 팔씨름 그것도 재미져 보였습니다. 두지 아저씨한테 걸었는데 끝까지 보지 않아 결과는 모르겠어요. 케이블카 타러 갔거든요.
구름이 움직인다, 너무 멀리 와서 유배당한 기분까지 들었다니까요. 귀에는 작은 솜뭉치를 끼고 있었고 ― 누워서 하늘을 보았습니다. 휘휘 젓다가 일제사격에 놀라 그만 구릉 아래로 굴렀습니다. 구르면서도 하늘을 봤어요.
제리코에게는 세 곳의 고향이 있는데 어디로 가든 마중 나오는 사람은 수라처럼 커다랗고, 계절을 잘 아는 사람이었어요.
나는 전생에 슬라임이었어요
왜 그렇게 흐느적거리냐고 물어보면 나는 전생에 슬라임이었어요 아 어쩐지, 답하는 사람과는 반드시 친구가 됐다 친구에게는 비밀도 술술 털어놓았다 화장실 청소를 좋아하는 슬라임이었다는 것 배출구가 없어 말년에는 크기가 고대종 드래곤만 했다는 것 그날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삼켜 버렸다는 것 아 어쩐지, 답하는 사람과는 애증을 깊게 쌓았으므로 나는 아직 존재할지도 모르는 슬라임을 찾아다녔다 내가 생겨났던 곳과 내가 살던 곳 끝내 몸이 터졌던 곳까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었는데 슬라임은 없었다 나는 전생에 최후의 슬라임이었어요 그때는 몰랐지만 아 어쩐지, 답하는 사람이 있다면 위험해 지구가 거대한 슬라임이며 우리는 소화되는 중이라고
―시집 『엔터 더 드래곤』 파란, 2023.5 --------------------- 서호준 / 1986년생. 문학 플랫폼 '던전'을 운영함. 시집 『소규모 팬클럽』 『엔터 더 드래곤』을 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