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3.17 이사할 집 가서 방이며 거실이며 줄자로 재서 가구 놓을 자리 미리 계획 잡고 페인트칠하기 전에 도배지 상태 점검하고 떨어진 데 손봐야 하는데 서각 주문 있어서 미루다 보니 자꾸 미루고 있다. 줄자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 새로 사놓았다. 줄자 비싸더라. 내일 판소리 수업 있으니 오늘은 기어코 가리라. 지난 달 배운 심청가 심청이 밥 빌러 가는 대목과 심청이 장승상댁 건너가는 대목은 소리 가는 길이 참 이상하고 교묘하다. 흔히 가는 길 아니고 올라가는가 싶으면 내려가고 하여간 다른 어법이다. 배우기도 힘들고 입에 붙이기도 어렵다. 선생님 따라 부르면 제대로 가는 듯싶다가도 혼자 부르면 길을 잃고 엉뚱한 데로 가고 만다. 다시 작정하고 한 음씩 한 음절씩 분석하며 정간보를 만들고 있다. 파고들어 여러 번 다시 들으면 새로운 음정과 목이 들리니 파고드는 수밖에 없다.
2011.3.20 이사 갈 집에 도색을 했다. 도배지 위에 수성 내부 페인트를 칠했다. 종일 작업했더니 손아귀가 뻐근하고 고개 들어 올려다보며 칠해서 목이 아프다. 건희가 쓸 방은 깨끗한 편이라 그냥 두려고 했더니 남이 쓰던 거 싫다고 제 방도 해달라고 해서 오늘 다시 나가 건희 방과 소영이 방 확장한 데 곰팡이 닦아내고 칠해야 한다. 무척 힘들다고, 어지간하면 그냥 쓰라고 했는데도 싫다고 해서 오늘 일요일이라 건희 데리고 가기로 했다.
어제 곤해서 일찍 골아 떨어졌는데 새벽에 깨 잠이 안 온다. 새벽부터 비 내린다. 3월 중순 지났으니 봄비겠다. 이 비 내리고 나면 봉오리들 벙글고 꽃샘추위 오고 꽃샘추위 견디려고 꽃이 온 산으로 들로 필 것이다. 봄 반갑다.
2011.3.20 이사할 집에 건희와 함께 가서 마저 남은 도색을 했다. 가자마자 소영이 방 확장한 데 있는 곰팡이 얼룩을 닦으라고 했더니 종알종알 투덜투덜 한참 떠드는데 못 들은 체하고 지켜보다가 건희 방 빙 둘러 마스킹 테이프 두르는 거 보여주며 하라고 시켰다. 우습게보더니 테이프 찢어지고 엉겨 붙고 한다. 혼내지 않고 음정 낮춰 부드럽게 설명하며 알려줬다. 부드러운 음정, 이거 아주 중요하다. 가족에게 지나친 동일시로 실수에 대해 엄격하게 구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실수와 잘못에 대해 부드러운 음정을 유지하는 것이 가족을 괴롭히지 않는 지름길이라는 걸 근래 중요하게 느낀다.
가기 전부터 제 방은 제가 다 칠하겠다고, 하도 우습게 여겨서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라고 해도 '그래도 제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인데 페인트칠 하나 못하겠어요, 설마? 그림 그리는 사람이야 붓질이 기본이죠.' 잘난 체 뻐기더니 붓에 페인트 묻히는 방법, 칠하는 붓의 각도, 붓 누르는 세기 등을 알려주며 방 모서리부터 빙 둘러 붓으로 칠하는 거 시켰더니 금세 끙끙대더니 바지에 흰색 페인트 몇 방울 묻혔기에 수건에 물 묻혀 닦아주었다. 그러게 도배하는 게 왜 그렇게 비싸냐고 말도 안 된다고 말하는 거 아니라고, 도배하는 사람들도 다 고생해서 배운 것이고 또 힘들여 일하는 건데 네가 생각만 하면서 이유는 짐작해보지도 않으면서 말이 되네, 안 되네, 그러는 거 아니라고, 잘 타일렀다. 함께 도와가며 테두리 다 두르고 넓은 면에 롤러로 바르는 것도 페인트 묻히는 것부터 바르는 법까지 알려주고 함께 발랐다. 어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혼자 하느라고 점심 먹는 것도 잊고 내내 작업하면서 지루하고 지치더니 오늘은 건희가 있으니 정신사납기는 하지만 재미있다. 함께 일하니 자연히 말이 서로 많다. 공부 이야기며 그림 이야기며 생일파티 때 연락 없이 밤늦게까지 놀던 이야기며 연락이 안 돼 중국에 있는 재영이 아빠한테까지 전화했던 이야기며 재영이 초등학교 때 저 혼자 한 달이나 있게 될 때 우리 집에서 밥 먹고 학교 다니며 재영이네서 잔 이야기며 재영이 할아버지 할머니 이야기, 또 시골 할아버지 이야기, 나 어릴 때 이야기, 건희 어릴 때 이야기, 누나 이야기, 설악 살던 이야기, 거기에 아이들에게 나쁘게 굴고 남의 물건 훔치고 아이들 때리며 다니던 아이 이야기, 생일파티 때 아빠가 일부러 그 아이 초대해서 같이 먹고 텀블링하며 놀던 이야기, 그 아이 이름이 뭐더라. 아, 동준이. 신동준. 그 아이는 고모와 함께 산다고 했다. 건희 생일파티에 내가 일부러 불렀는데, 건희는 영 싫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초대한 것도 잘한 일이고 나중에 서로 어울려 잘 지내게 된 것도 잘한 일이라고 한다. 또 용필이 이야기, 사람의 성품과 환경에 대한 이야기, 범죄와 처벌, 처벌과 치료, 비난과 이해, 국어선생님 이야기, 체육선생님 이야기, 이야기는 이야기의 실마리를 사슬로 엮으며 끝도 없이 이어졌다. 건희는 말도 많고 말하는 걸 좋아한다. 더구나 이제 제법 커서 말도 잘 통하고 말하는 재미가 있다. 일하다가 점심때가 되어 집 앞 중국집에 갔는데 일요일이라 그런지 문을 닫아서 평소 다니는 집까지 걸어가 볶음밥을 먹었다. 작업복 헐게 입고 페인트 몇 군데 묻히고 건희와 함께 식당에 앉았으니 나는 기분이 좋은데 건희는 신경이 쓰이는 것 같다.
오후에는 소영이 방을 칠하고 어제 칠한 데 중 얼룩이 있거나 얇게 도포된 데 골라 덧칠했는데 4시 되자 일이 끝났다. 건희도 힘들다고 하고 나도 온 몸이 결려서 방문과 문틀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일단 끝냈다. 돌아오는 길에 약수터 들러 물 떠 집에 와서 둘 다 늘어졌다. 건희 데리고 가기를 잘했다. 평소에 이야기 좀 하려고 하면 혼낼 일 있을 때나 작정하기 마련인데 윽박지르는 일 없이 모처럼 이야기를 많이 해서 나도 좋다. 오늘 건희에게 들은 말 중 가슴이 뻐근했던 말은 '아빠가 돈을 많이 벌면 더 좋은 아빠가 되고 더 좋은 집에서 살게 해줄 텐데 그렇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아빠가 돈이 많아서 더 바쁘고 이야기도 많이 못했으면 존경하기 힘들었을 거라고, 지금도 충분히 좋다'고 한 거다. 정말 미안하고 정말 고마운 말이다.
첫댓글 이사하셨어요? 어데로?? 새록새록 소영이 건희가 위로가 되는군요~~
학교 때문에 가까운 데로 했습니다. 속 썩이는 대신 위로도 있어야 살지요. ㅎ
나무결 하나하나에 깊은 감동이예요. 아름다운 자연.
느티나무는 워낙 재질이 좋아서 그냥 둬도 보기가 좋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최고의 재료로 썼다는군요.
썩 정갈한 느낌.^^*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