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해혼解婚 하다
지난 5월 21일은 부부의 날이다. 둘이 만나 하나가 되는 날이라나. 둘이 하나가 될 때야 모래에 물이 스며들 듯 서로에게 속수무책으로 빠져들어 눈에 뵈는 게 있나? 허나 뿅! 가다 떨어지면 남자는 오뉴월 개구락지처럼 허무가 밀려들게 마련이다.
사범학교시절 우린 섹스를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었다. 졸업을 하고는 사랑이란 걸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뉘었다. 결혼을 한 후 오늘까지 우린 가장 가까이 있는 웬쑤를 견뎌 낸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으로 나뉜다. 우리 부부는 웬쑤를 견뎌냈다? 사랑하였다?
여자끼리의 모임에서 집으로 전화를 하는 그녀의 친구가 놀란 표정으로 말한다.
“부부 사이에 무슨 전화를 해! 너 남편을 사랑하는구나? 오, 불쌍한…. 하필 같은 집에 사는 남자를 사랑하다니"
연극 ‘꽃의 비밀’에 나오는 대사다.
부부의 날, 자주 드나드는 식당에서 아내가 좋아하는 흑태찜을 시켜 놓고 완곡어법 대신 단호하게 선언했다. 결코 애드립은 아니었다. 식당은 TV 소리가 둥둥 떠다녀 부부젤라 수준이었고, 내 목구멍에선 쇠 긁는 소리가 났다. 나는 오만방자하게 말했다.
“우리 해혼解婚 하자.”
“그 게 무시기 말쌈?”
아내는 가자미눈을 한 채 흑태 뼈를 발라 살다구를 씹으며 낭창거렸다.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는 투다.
“말 그대로 혼인 관계를 풀자는 말쌈.”
“여자 생겼어? 젊어? 예뻐?”
옛날 같으면 칠색(七色)팔색, 팔짝 뛰었을 텐데 남의 말 하듯 수제비 씹다만 얼굴로 농담 따먹기를 했다. 출발어 보다 도착어는 디테일이 달랐다.
마하트마 간디는 서른일곱 살에 아내에게 '해혼解婚'을 제안했는데, 해혼이란 부부가 불화로 갈라서는 이혼과는 다르다. 도긴개긴이지만 각자 하고 싶은 일 하며 간섭하지 말자는 거다. 서로 신경 쓰지 말고 친구 만나고 여행도 다니고, 당신 같으면 마음 놓고 장애인 수발들라는 배려도 숨어있다. 간디는 독립운동에 나섰지만 나는 소크라테스처럼 철학자가 될 작정이다. 일본에서도 졸혼(소츠콘; 결혼 생활 졸업)이 한창 유행이란다. 또 황민복 시인의 시 ‘부부’를 예로 들며 ‘우린 이제 긴 상도 마주 들고 잘 옮겼잖아’ 어쩌고저쩌고 해혼에 대해 질펀하게 사설을 늘어놓는데, 아내는 무를 깍 뚝 썰듯 내 말을 잘라먹으면서
“배냇병이 도지네. 우린 벌써 해혼 상태 아닌가?”
했다. 나는 멱살 잡히듯 입이 닫혀졌다. 하긴 그랬다. 우린 이미 해혼 상태다. 아내는 전만해도 곁을 잘 내주지 않는다고 징징거리더니 몇 해째 사회의 소외계층을 위해 봉사한답시고 새벽 같이 집을 나서 늦은 저녁에야 돌아온다. 아내란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꽃이 진다고 바람을 원망하랴. 그런 아내에게 야박하게 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술과 친구를 좋아해 흥청망청한 내 꼬임에 빠져, 수저 한 벌 물려받지 않은 외벌이 집안을 건사해 오느라 현실에서 소외된 채 살아온 세월이 그 얼마인가. 우리나라 전래동화인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의 떡장수 엄마처럼, 아내는 자식들마다 팔과 다리를 하나씩 떼어주면서 폭폭하고 가파른 인생 고개를 넘어왔다. 진자 운동하듯 바쁘게 허덕였지만 그래도 아내는 "우리 모두는 시궁창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중 몇몇은 하늘의 별을 바라본다."는 아일랜드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오스카 와일드의 시어처럼 하늘의 별을 쳐다보며 웃음을 읽지 않았다. 항상 돈에 자유롭지 않아 돈은 아끼되 몸은 아끼지 않았던 젊은 날이었다.
우린 필부필부匹夫匹婦로 서로에게 길들어 갔다. 길든다는 것은 익숙하게 되는 것이지. 정 붙이고 의지한다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선 주고받는 것이 있어야 한다. 눈빛과 조용조용한 귓속말과 작은 몸짓. 특히 피아노 연주하듯 손가락으로 몸이 알아들을 수 있는 속삭임을 일깨워야 한다. 오늘까지 우리 부부 사이를 유지시킨 비결이다. 돈 없는 놈이 할 일은 몸 쓰는 일 뿐이었으니까.
퇴임 후부터 아내가 등에 지고 온 짐이 하나하나 내 등으로 옮겨졌다. 청소와 빨래는 아예 내 몫이 되었고, 어느 시인처럼 그대 위하는 길은 ‘모르는 새에 해치우는 설거지일 뿐’이라는 시구를 몸소 실천했다. 내가 손수 해먹는 레시피도 다양하다. 백종원 데려오너라. '파스타' '간짜장' '오바루소바' '오무라이스'는 먹어본 사람들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언젠가 TV에서 홀로 사는 노인들을 위한 음식 만들기 강좌를 개설할 작정이다. 아내가 드라마를 본방사수하면 나는 안마(남자는 아귀힘이 세야 한다. 아귀힘을 키우는 데는 사랑하는 사람 팔다리를 주무르는 것 이상 좋은 운동이 없다)를 하며 역조공을 드린다. 드라마를 같이 본 탓인가, 어지간한 드라마는 다 꿴다. tvN의 ‘또!오해영’ ‘디어 마이 프렌즈’ SBS의 ‘미녀 공심이’ KBS2의 ‘마스터 국수의 신’ 등. ‘또!오해영’은 밤 11시에 방영한다. 그러다 보면 이틀에 걸쳐 안마 봉사할 때도 있다.
몇 해 전에 흉허물이 없는 친구가 말했다.
“그릇은 밖으로 돌리면 깨진다, 했다. 그러다 손 타면 어쩌누?”
걱정도 팔자다.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손 좀 타면 어떤가. 아내가 나만 한 평생 바라보고 살라는 무지막지한 ‘나’ 아니다. 아내가 나보다 더 멋진 놈 만나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러면 아내 몰래 짱 박혀 끊은 담배를 한 대 물거나, 소주를 ‘다모토리’로 한 잔 던지며 달래야지. 인명은 재처在妻요 순처자順妻者는 흥하고 역처자逆妻者는 망하느니, 마누라한테 순종하면 복을 받고 거스르면 칼을 받는다는 진리를 터득했다. 세상 재미 암만 좋아도 조강지처 치마폭이 젤로 따숩다 하지 않는가, 친구가 말했다.
“별종이다!”
언젠가 건계(김상동)도 흡사 당해본 것처럼 말했다.
“당해봐라!”
술 친구였던 여자가 이죽거렸다.
“놀고 있네요?!”
그나저나 황혼에 접어들어 건강하고 씩씩하게 봉사활동을 하는 게 정말 대견스럽지 않는가. 대구 동기들 중에 사모님 병구완 하느라 등이 휘어버린 친구들을 보노라면 간이 다 오그라든다.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아내는 양손 엄지와 검지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그것은 일종의 신호 같았다. 당신의 뜻을 받아 들여 해혼 하자는….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삶을 사랑하며, 우리 각자 팔을 흔들어 멋있는 인생을 마감하자는 ‘머뭇거림’에서 치환되는 신호 같기도 했다.
모재(석오균) 부부(본시 찰떡 궁합이다)처럼 연리지가 되어 붙어 다니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그럴 형편이 안되면 해혼하라고 권한다. 평균 기대 수명 60세 시대와 100세 시대 결혼생활은 같을 수가 없다. 자식들을 다 키운 후 각자의 생활을 즐기며 서로를 친구처럼 지켜보는 것도 '백년해로'라고 부를 수 있지 않는가.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얼마나 좋을까!―
"긴 상이 있다/ 한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도 안된다/ 걸음의 속도도 맞추어야 한다/ 한 발/ 또 한 발."
함민복 시인의 '부부'
첫댓글 세탁기 돌리는 방법만 좀 알면
나도 사랑하는 아내를 조 도을 수 있으련만
실은 나도 잘 모르는데^^
@야성 신성장 자네들 본시 쑥맥 아닌가. 배워 남 주나?
@고제홍 글쎄?숙맥인지도 모르지 자넨 팔방미인이시고.배워봄세 돋보기 쓰고 반복을 그듭해야지
현란한 문장력, 부부해방 공감이가는 내용일세.
♥♬♨ 난 지금은 무조건 나를 아내에게 맟주어 살고 있어.
그러니 편터라. 곁에 있어 준것만 해도 고맙지 뭐.ㅡ義 峰ㅡ
금연,금주하더니만 금혼(해혼,졸혼)까지...어디 간덩이가 커졌나보내.우리 다모토릿집에 가서 한 잔 시작해 볼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