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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3년 1월 1일 일요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세계 평화의 날)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루카 2,16-21)
When they saw this,
they made known the message
that had been told them about this child.
All who heard it were amazed
by what had been told them by the shepherds.
And Mary kept all these things,
reflecting on them in her heart.
말씀의 초대
복을 기원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바람이다. 주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당신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들을 지켜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모든 복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상기시키시고 계신다(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여인에게서 태어나게 하셨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기쁨을 얻었다(제2독서). 목자들은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님을 찾아낸다. 그리고 자신들이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전한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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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새해 아침이 밝았습니다. 우리는 새해 아침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서로 주고받습니다. 이렇게 새해 아침에 복을 기원하는 것, 이것은 모든 이의 염원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은 과연 어떤 삶을 복 받은 삶이라고 할까요?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삶은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지를 잘 전해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 옛날 자기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거의 죽음과 같은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고향을 떠나려고 길을 나섭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길을 떠난 아브라함이 인생의 여정에서 만난 것은 행운이나 성공과 같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복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시련과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시련과 고통을 겪으면서 그 안에서 하느님을 깊이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은 하느님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역경과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고 믿는 것, 인간은 하느님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그것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믿고 사는 삶, 이것이 신앙인으로서 축복받은 삶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성모님을 두고 우리는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많이 받으셨다고 하는 이유는, 성모님께서는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대로 사셨고, 하느님께서 늘 함께 계시는 분이심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하느님 말씀대로 살아감으로써 하느님의 축복을 많이 받는 한 해가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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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복음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모든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무엇이나 기억하고 싶어 합니다. 마리아께서도 이렇게 어머니의 삶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러 가십니다. ‘레위기’의 명에 따라 할례 받으러 가신 것입니다. 율법을 실천하는 모습입니다. 평범한 ‘아기 엄마’로서의 삶입니다. 마리아께서는 평생을 그렇게 사셨습니다. 어떤 순간에도 ‘특별한 삶’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답게’ 사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는 이렇게 해서 생겨났습니다.
어머니는 누구나 위대합니다. 하지만 어머니답게 살지 못하면 위대함은 반감됩니다. 때로는 지탄을 받습니다. 모든 어머니는 자녀들을 위해 참고 인내합니다. 그 모습이 바로 ‘어머니다운’ 모습입니다.
어머니의 삶이 건강하면 그 힘과 은총은 자녀에게 전달됩니다. 하늘의 기운이 그들에게 닿는 것이지요. 위대한 어머니는 이렇게 해서 등장합니다. 마리아께서는 이런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특별한 삶’을 사셨기에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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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들은 아기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그러고는 천사가 일러 준 그대로임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마리아에게 천사 이야기를 합니다. 어쩌면 천사의 표정과 생김새까지 다 이야기했을 겁니다. 마리아께서는 예수님의 잉태를 알려 준 그 천사였음을 직감하십니다.
천사를 목격했으니 목자들은 이제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영적 체험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고, 성모님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분을 처음으로 만났고,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따뜻함을 안고 떠나갔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을 잘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지식으로는 마리아께서 어떤 분이신지 잘 압니다. 그러나 그분을 진정으로 알려면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아니면 천사를 통하여 깨달음을 얻어야 합니다. 성모님을 알려 주는 천사는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성모님께 진심으로 매달림으로써 그분께서 주시는 기적을 체험해 본 사람들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어머니이십니다. 자식이 온몸으로 다가가는데 외면할 어머니는 없습니다. 그렇게 성모님을 만난 이들은 모두 천사가 됩니다.
우리 역시 성모님을 어머니로 부르면서 또 한 해를 시작합니다. 그분께서는 분명 사랑으로 지켜 주실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만난 목자들처럼 성모님을 새롭게 만나고 천사가 되어 이 한 해를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경하드립니다, 어머니
-장재봉 신부-
순명·겸손·사랑·믿음의 삶
새해 첫날, 하늘에서도 ‘천주의 성모 마리아’를 위한 잔치가 한창이겠지요. 천국 가족들께 세배를 올린다 생각하니, 새삼 삶의 매무새를 살피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 말씀은 명절마다 봉독되는 특별한 성경 구절입니다. 요점은 대사제 ‘아론과 그의 아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축복해 주면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복을 내려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분의 사제가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상대에게 복을 빌어주는 행위가 그분께서 가장 기뻐하는 일이며 원하고 바라는 일이라는 걸 알려주는 것이라 싶은데요. 아론의 사제직을 이어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야말로 세상을 지키는 힘이며 은혜를 부르는 통로이며 그분 사랑을 전하는 축복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제2독서를 읽는 마음이 울적해집니다. 아론 사제의 축복으로 한껏 고무된 우리에게 한 술 더 떠서 듬뿍, 축복을 보태주고 있음에도 그렇습니다. 당시 갈라티아 교인들이 ‘다른 복음’으로 돌아서고 교우들을 ‘교란시켜’ ‘복음을 왜곡’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답답하고 애가 타는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적어 내렸을 바오로 사도를 생각하니, 낼름 받아넘기기가 쑥스러웠습니다. 우리 안에도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일’을 또 저지르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은총 안에서 불러주신 분’을 ‘그토록 빨리 버리고’ 돌아서는 우리 모습에 마음이 뜨끔했기 때문입니다(갈라 1,6-7 참조). 그분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그분의 것을 외면하고 그분 길을 따르지 않는 천방지축인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하느님 자녀의 긍지’를 추스르도록 ‘하느님 상속자의 자존감’을 되살리도록 호소하는 그분 사랑에 마음이 아렸습니다. 이 좋은 날, 그분의 기쁨이 되지 못하고 되레 근심덩어리가 되어 있는 우리를 향한 딱한 시선이 따갑더라는 얘깁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서 그저 교회 주위를 어슬렁대는 군중의 모습으로 지낼 뿐이라면 하느님께서 보내신 ‘당신 아드님의 영’을 아프게 할 뿐이라는 질책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에서 한참이나 동떨어진 생각으로 주님 말씀의 주변에서 서성댈 뿐이라면 그분의 자녀가 아니라는 따끔한 일깨움입니다. 말씀이며 생명이며 빛이며 은혜이며 진리이신 그분을 믿는다면서 그분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아픈 외침을 깊이 새깁니다.
우리는 그날 외양간으로 찾아갔던 목자들처럼 특별한 일을 목격하고 놀라워합니다.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신 하느님의 뜻을 찬양하고 찬미합니다. 그럼에도 세상의 풍요와 성공에 매달려 땅의 생각과 가치관을 털어내지 못합니다. 너무나 쉬이, 바르지 않아도 빠른 길을 택합니다. 눈앞의 이익이 있는 것만을 그분의 축복인양 오해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공을 위해서 가장 빠르고 잽싼 길로 들어서는 사람이 아닙니다. 더디어도 그분께서 이르신 바른 길을 고집하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하여 헛되고 헛된 세상의 방법에 흔들리지 않고 응하지 않는 배포가 있습니다.
세상의 가장 약한 존재,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기로 당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후에 하느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은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단 한 말씀뿐입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그분의 약하고 낮고 보잘 것 없고 초라한 길을 묵묵히 따르신 성모님께서는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고 당부하셨을 뿐입니다.
오늘, 성모님께서 이렇듯 높고 영광스런 칭호를 얻으신 이유는 바로, 아무도 몰라주던 그분 심정을 오직 믿음으로 동행하며 꿋꿋하게 살아 준 마리아의 진심에 감격하신 결과라 믿습니다. 시골 처녀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로 등극되신 엄청난 신분상승은 그분을 낳은 혈연 덕이 아니라 ‘알 수 없는’ 그분의 뜻을 겸손과 순명과 사랑과 믿음으로 채워 산 삶의 결실임을 믿습니다. ‘그의 말을 들으라’는 하느님의 부탁을 기억하고 ‘시키는 대로 하여라’는 어머니의 당부를 새기며 살아가는 단순한 삶이야말로 완덕에 이르는 첩경임을 일깨움 받습니다. 그분께서 원하시는 일을 실천하며 지내는 삶이야말로 주님께 바치는 최고의 경배이며 봉헌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께 ‘신앙이 많이 자랐구나’라는 덕담을 듣고 ‘믿음이 몰라보게 컸구나’라는 성모님의 칭찬을 듣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축원해 드립니다.
-임숙희-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새해 모든 나날을 어머니 마리아를 바라보며 말씀을 읽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성탄절 “말씀이 사람이 되신”(요한 1,14)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 묵상하고 새해 첫날인 오늘은 “하느님이셨던 말씀”(1,1)이신 존귀한 아기를 낳으신 어머니를 바라보도록 초대받습니다.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동들이 천사가 아기에 대해 한 말을 전하자 모두 놀랍니다. 특히 이 지상에서 “구원자, 주 그리스도”(루카 2,11)인 이 아기의 부모가 되도록 선택된 요셉과 마리아는 더 놀랐을 것입니다. 그들은 앞으로도 이 아기 때문에 몇 차례나 더 놀라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2,33.48) 루카는 홀로 마리아만이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19절)고 전하며 우리가 마리아에 대해 무엇인가 배우기를 강조합니다. 마리아가 마음에 간직한 ‘이 모든 일’은 지금 포대기에 싸인 채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의 장래에 대한 계시입니다.(1,38; 2,17) 마리아는 세례자 요한이 탄생했을 때 그 소문을 들은 이들이 그랬듯이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를 생각하며 하느님의 손길이 그 아기를 돌보고 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1,66)
‘간직하다’라는 말의 그리스어 시제는 마리아가 이 모든 일을 한 번 간직한 것이 아니라 되풀이하여 간직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달리 말하면 늘 간직하는 것이니 ‘기억하다’라는 의미로도 풀이할 수 있습니다. 아들에게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한 기억은 이 세상의 모든 선한 어머니들처럼 마리아의 생애 내내 지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끊임없는 기억은 아들에 대한 기도를 낳습니다. 2장 51절에 되풀이되는 ‘마음에 간직하다’라는 표현은 이 말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하게 도와줍니다. 이 구절에서는 다른 그리스어를 사용하는데, 마리아가 성전에서 율법학자들과 토론하는 아들에 대한 일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마음의 보물처럼 소중하고 견고하게 간직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실 구약에서 ‘마음에 간직하다.’라는 표현은 하느님이 꿈이나 천사를 통해 알려주시는 하느님의 계획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 또는 ‘당황하거나 놀라워하면서’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전형적 자세이기도 합니다.(창세 37,11; 다니 7,28) 오늘 본문에서 마리아는 목동들이 전한 성탄 메시지를 놀라워하면서도 그 일들이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언젠가는 그대로 이루어지리라고 믿습니다. 이런 마리아의 자세는 사촌 엘리사벳이 그녀에게 바친 노래를 떠올리게 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마리아가 어떤 식으로 ‘마음에 간직’했는지는 바로 이어지는 말 ‘곰곰이 생각하다.’에서도 드러납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함께’라는 말과 ‘연결하다’라는 말을 합한 것인데 마리아가 아들에 대해 듣고, 보고, 기억한 모든 일을 서로 연결하면서 마음에 간직했다는 것을 문자 그대로 알려줍니다. 마리아는 아기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 곧 호구조사, 베들레헴으로의 여행, 목자들에게 천사가 아기를 알아보도록 알려준 표징(2,12.16) 등을 그분이 가진 신앙의 안목으로 서로 연결하는 과정을 통해 하느님께서 자신과 아이를 위해 최선의 계획을 세우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마리아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신비스런 말과 사건 앞에서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신앙에 비추어 해석하려고 노력합니다. 나중에 예수님은 이런 자세로 말씀에 귀 기울이라고 제자들한테도 당부하십니다.(8,1115)
마리아는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에는 ‘몸 안에’ 예수님을 담고 다녔지만 태어난 후에는 ‘마음 안에’ 평생 아들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 다닙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의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그곳에서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늘에 올라가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면 그 어머니가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단테)
묵상(Meditatio)
오늘 복음 말씀은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가 기도를 동반하는 하느님 말씀 읽기라는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기도가 하느님께 귀 기울이며 하느님 앞에 머무는 것이라면 렉시오 디비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하느님 앞에 머무는 것이지요. 우리 인생에 이보다 더 본질적인 일이 있을까요? 교회는 렉시오 디비나의 모든 단계가 하느님의 말씀이신 아들에 대한 모든 것을 기억하고 깊이 생각하며 그것을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연결할 줄 알았던 말씀의 해석자 마리아 안에 들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우리 삶의 모든 축복의 원천이신 하느님, 새해에는 더욱더 어머니 마리아를 바라보면서 마리아의 자세로 하느님의 말씀을 읽어 하루하루가 은총의 나날이 되게 하소서.
기도(Oratio)
하느님께서는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강복하소서. 당신 얼굴을 저희에게 비추소서.(시편 67,2)
되돌아봄과 바라봄
-고준석신부-
항상 해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할 때 괜스레 가슴이 떨리고 설렘과 더불어 어떤 희망이 자리 잡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아쉽고 못다이룬 꿈이 남아 있는 지난해를 보내고 맞이하는 첫날이기에, 무언가를 바라고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되돌아봄과 바라봄, 이 두 가지가 얽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해를 보내고 2012년, 새로운 해를 맞이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나를 기쁘게 하고 나의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올 한 해 동안 내 가슴 속에 무엇을 남겨야 하는가?”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슬픔이 많은 사람보다 아쉬움이 많은 사람의 삶이 더 힘들고 괴롭다.” 진정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들의 아쉬움이란 무엇입니까?
사실 지나고 나서 우리가 늘 후회하고 아쉬움이 남는 것들은 특별한 실패나 부족함이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것들입니다. 물질이나 능력이나 지위나 명예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은 그리 오래가지 않고 크게 마음 상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진실하지 못하고, 성실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않고, 겸손하지 못한 데서 생긴 후회나 아쉬움은 오래갑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늘 우리를 우울하게하고 가슴을 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목자들이 천사의 기쁜 소식을 들은 후 서둘러 베들레헴으로 가서, 아기 예수님을 보고 경배합니다. 한편,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깁니다. 사실 마리아는 누가 그 목자들을 불렀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그들은 그 아기가 누구인지 알고는 있는지 등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 모든 것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묵상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인의 참된 모습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중심으로 일어난 모든 신비를 마음속 깊이 새겨 간직하면서 하느님의 길을 발견하려 합니다. 바로 이와 같은 태도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는 나약하고 미약한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을 모두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그 모든 것을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하느님께서 어떻게 활동하시는지를 관찰하고 그 의미를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 삶의 부정적이고 긍정적인 체험은 그 나름대로 가치를 지닙니다. 비록 고통스러운 경험일지라도 우리를 좀 더 성숙한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게 합니다. 우리가 저지른 잘못도 새롭게 사랑의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 역시 성모님처럼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마음 속에 곰곰이 간직하고 묵상한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지난 한 해에 복을 주셨고 올 한 해에도 축복을 리라는 사실을 믿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곰곰이 되새겼다.”
-양승국신부
<예, 좋습니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성모님의 말씀이나 태도, 하느님을 향한 자세를 보십시오. 언제나 한결같습니다. 침묵, 기도, 철저한 겸손, 앞 뒤 따지지 않는 순명, 단순하고 확고한 믿음입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구세주 잉태 예고 앞에 성모님의 말씀: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장 38절)
아기 예수의 탄생 앞에: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장 19절)
예루살렘 순례 길에 소년 예수를 겨우 되찾고 난 후 이해할 수 없는 언행 앞에: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장 51절)
그 외에도 성모님께서 공생활 중이신 예수님을 찾아갔을 때 보여주셨던 예수님의 태도(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엄청 서운할 말씀): “누가 내 어머니요 형제들인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골고타 언덕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그저 함께 눈물 흘리시며, 함께 아파하시며, 함께 기도하시며 마냥 서계셨던 성모님...
성모님처럼 우여곡절이 많았던 인생도 드믈 것입니다. 그녀의 생애는 정말 이해하지 못할 일들, 불가사의한 일들, 어쩌면 억울하고 속 터지는 일들로 가득 찬 파란만장하고 특별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단 한번도 No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단 한 번도 불평불만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번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가서 힘들다, 괴롭다, 못살겠다고 투덜거리지 않았습니다.
그저 삶의 다양한 국면, 이런 저런 기묘한 초대, 모든 이해 못할 일들 앞에서 성모님은 한결같이 Yes였습니다. 단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도망가지 않고, 늘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너무 부족해서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하느님께서 그렇게 원하시니 한번 해보겠습니다.”
여기에 성모님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성모님의 앞뒤 따지지 않은 무조건적인 순명, 하느님 계획에 대한 전적인 믿음, 단순한 Yes가 결국 이 세상 구원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마리아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더 나아가서 인류의 어머니, 결국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출중한 외모, 뛰어난 학식, 타고난 재능, 내놓으라하는 가문 때문에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지극한 겸손,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앙, 어린이 같은 단순성으로 인해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셨고, 그 결과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올 한해도 어김없이 우리 앞에는 다양한 삶의 국면들이 펼쳐질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겪으셨던 것 못지않게 여러 가지 이해하지 못할 일들, 기가 막힌 일들, 하느님께서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하고 여겨질 일들도 벌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힘들고 슬퍼 눈물 흘릴 것입니다.
그럴 때 성모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다양한 하느님의 초대 앞에 앞뒤 따지지 않고, 불평불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지 않고, 그저 예, 좋습니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라고 응답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호의적이고 적극적인 우리의 응답으로 인해 하느님께서는 다시 한 번 우리 안에, 우리 인생 안에 기쁘게 탄생하실 것입니다
소통(疏通)의 비밀
-전삼용신부-
비가 많이 내리던 날 한 자매님이 비에 젖어 성당으로 들어와 저와 상담을 하자고 하였습니다. 집무실에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는데 자신 안에는 마귀가 있다는 것입니다. 길을 지나는데 자신 안에 있는 마귀가 이 성당에 들어가 보좌신부와 상담을 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사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또 마귀와 이야기한다고 하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그랬듯이 교만과 육욕과 세상 것에 집착해 사는 사람이라고 해석 됩니다. 이런 사람은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에 외로운 사람이고 그래서 자기 자신이나 마귀와도 사귈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제 예상대로 그 자매는 보험 설계사를 하면서 경쟁을 하여 남들 위에 서기 위해 노력해 온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마귀와 밤에 관계를 한다고 하며 실제로 남자와 사귀어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적인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임을 자신도 인정하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어디 사는지 다시 궁금해져서 “서울 목동 사신다고 했나요?” 라고 물었더니, 목소리가 목이 쉰 남자 목소리로 변하며, 저를 무섭게 노려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언제 목동이라고 했어요? 마포라고 했지.”
비도 오고 작은 방에 둘이 있는데 그렇게 변하는 모습을 보니 겁이 덜컥 났습니다.
그러나 겁먹은 것을 보여주어서는 안 되었기에 오히려 제가 야단을 쳤습니다.
“자매님은 한 번 들은 걸 다 기억하세요?”
그랬더니 다시 수그러들었습니다.
역시 이런 분은 자아가 너무 강하여 남이 실수하는 것을 못 받아줍니다. 또 남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대화의 소통이 되질 않습니다. 그러니 외로워하면서도 다른 사람과 온전한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그저 기도 해 주고 보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로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살게 됩니다. 사회적 동물이란 이유는 혼자서는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다운 삶이란 관계를 맺으며 사는 삶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알지 못하면 끝까지 남자가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통해서 자신이 남자임을 알게 되고, 여자는 남자를 사랑할 때 비로소 참으로 여자가 됩니다.
결혼한 여자는 임신을 하게 되고, 아이를 낳게 되고, 또 젖을 먹이는데, 그런 모든 경험들은 관계 맺지 않으면 알 수도 또 체험할 수도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모든 관계는 서로를 알아가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즉 한 사람이 누구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대충 이름과 나이까지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 아픈 상처는 없는지, 주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종교관은 무엇인지를 대화를 통해 알아갑니다. 이렇게 서로 알아가면서 서로는 서로의 심장 속에 들어가 살게 됩니다.
문제는 서로 소통이 되지 않을 때입니다. 소통의 문제에 대해 장자는 이러한 비유를 듭니다.
노나라 시절입니다. 창가를 보고 있던 임금 앞에 바닷새 한마리가 날아들어 왔습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임금은 그 바닷새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임금은 바닷새를 위해 매일 잔지를 열었고 귀한 음식과 술을 주고 풍악을 울렸습니다. 하지만 그 바닷새는 시름시름 앓다가 사흘 뒤에 죽고 맙니다.
노나라 임금은 자기 안에서 나오지 못하고 바닷새를 자기 식으로만 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관계 맺기 위해서는 자신을 떠나서 상대 안으로 들어가 상대의 언어를 배워야합니다. 따라서 자아가 강한 사람은 항상 외로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장자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상대를 보려고 하는 폭력적인 사람은 ‘우물 안 개구리’로 비유합니다.
무너진 우물 안 개구리가 저 멀리 넓은 동해에서 온 자라에게 말했다.
“나는 여기, 무너진 우물이 좋아. 밖으로 나가면 난간 위에서 뛰어놀고, 안으로 들어오면 벽돌 빠진 구멍 속에서 쉴 수 도 있어.
겨드랑이까지 물이 차오르게 하고, 턱을 받치고 놀지. 진흙을 차고 놀 때는 발등까지 흙에 묻히고 말이야. 장구벌레, 게, 올챙이 모두 나를 부러워하지. 웅덩이 물을 독차지해서 마음대로 노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지 몰라. 자네도 들어와 보겠나?”
동해에서 온 자라는 왼발을 미처 우물에 넣기도 전에 오른쪽 무릎이 걸려 꼼짝할 수 없게 되자 뒤로 물러나 개구리에게 동해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가 놀던 바다는 천리 거리로도 그 크기를 말할 수 없고, 천리 길이로도 그 깊이를 말할 수 없다네, 우(禹)임금 때 10년 동안에 아홉 번이나 홍수가 났지만 그 물이 불어나지 않았고, 탕(湯)임금 때는 8년 동안에 일곱 번이나 몹시 가물었지만 바닷물이 줄지 않았어. 시간이 길거나 짧다고 변하지도 않고, 비가 많거나 적다고 불어나거나 줄어드는 일도 없는 것. 이것이 동해의 큰 즐거움일세.”
<장자의 우물 안 개구리에서 발췌>
노나라 임금이 바닷새에게 폭력을 가한 것이 우물 안 개구리가 자기가 아는 전부로 상대를 대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는 소통도 관계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거북이의 말을 믿고 우물을 빠져 나와 바다로 향하면 관계는 시작되고, 그렇지 않으면 또 혼자 자신의 세계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소통(疏: 트일 소, 通: 통할 통)이란 말 그대로 막힌 것이 트여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서 벗어나 상대 쪽으로 가지 않으면 소통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나를 떠나 상대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과 소통하기 위해 인간 안으로 들어오셨고, 지금도 말씀과 성체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이시기에 자신을 완전히 버리고 우리 안으로 들어오실 줄 아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입니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저도 유학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공부가 싫기도 했지만 새롭게 언어를 배우고 알지 못하는 곳에 적응해야 하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를 떠났더니 더 풍요로운 저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면 다른 언어나 문화, 신학까지 익히고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소통하면 이렇게 상대가 내 일부분이 됩니다. 그러나 자신을 떠나기까지가 얼마나 힘든지요.
우리 자신을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아무리 하느님이 당신을 떠나 우리 몸 안으로 들어오셔도 우리가 계속 우리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온전한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고 그 분과 한 몸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직 한 분만이 흠도 티도 없이 순결한 까닭에 자신을 온전히 떠나 그 분 나라로 들어갔고 그 분의 모든 것을 배우고 익혔습니다. 또 하느님도 자신을 떠나 성모님 안으로 들어와 사람이라는 모든 것을 배우고 익혔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은 인간이 되시고, 인간은 하느님이 됩니다. 온전히 자신을 떠날 줄 아셨던 마리아 안으로 온전히 들어오신 하느님은 성모님으로부터 사람이 되는 모든 것을 받고 배우셨기에, 하느님이시면서도 마리아를 ‘어머니’라 부르십니다.
오늘 갑자기 부탁을 받아서 이미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한 부부에게 관면혼배를 해 주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7살짜리 딸이 하나 있는데 그 딸이 매일 지나다니며 보던 저희 성당에 다니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중학교 때부터 냉담하던 아버지가 냉담을 풀고 신앙이 없는 어머니는 교리 반에 들기로 하였습니다. 그 꼬마 아이는 매일 다니던 그 길옆에 있는 성당에 들어와 보고 싶었던 것이고 지난주에 부모님을 데리고 성탄 미사에 오게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 준 어린이는 이미 누구와도 소통할 준비가 되어있는 깨끗한 영혼인 것입니다. 성모님은 그런 어린이의 영혼처럼 가장 먼저 하느님나라에 들어가 하느님을 만났고 또 우리도 함께 들어가 그 친교를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동해에서 온 거북이만이 바다의 넓고 깊음을 알듯이 하늘나라에서 하느님과 소통한 성모님만이 그 넓고 깊음을 우리에게 전해 주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 넓고 깊은 사랑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당신이 가져온 사랑의 증표인 그리스도를 보며 우리도 바다로 나오라고 손짓하고 계신 것입니다.
평화를 만드는 한 해
- 김귀웅 신부-
며칠 전, 94세 되신 할머니 한 분이 서울에서 서귀포까지 찾아오셨습니다.
예전에 있던 본당 신자셨는데, 저에게 꼭 하고픈 말씀이 있다고 노구를 이끌고 오신 것입니다. 옛날 대갓집 마나님처럼 언제나 한복을 곱게 차려 입으신
단아한 모습으로 새벽미사를 빠지지 않고 참여하시며, 늘 기도 속에서
살아가시는 분입니다. 자녀들도 다 훌륭히 키워 자랑스러워하십니다.
그런데 이제 하느님 곁으로 갈 때가 다 되어 그러는지 요즘 옛날 생각으로
몹시 괴롭다고 하셨습니다. 결혼하면서부터 여러 해 동안 시어머니로부터
정말 힘겨운 시집살이를 했고, 남편은 그런 시어머니에게서 아무런 바람막이가
되어 주지 않았던 여러 사건들이 끊임없이 떠오르면서 분하고, 억울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가득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죽어서 두 분을 만나면 왜 나에게 그렇게 심하게 대했는지 따지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생각이 떨쳐지지 않아 무척이나 힘겹다고, 아무리
용서하려 해도 용서가 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60년, 70년 전의 일들이
100세가 다 되신 할머니를 괴롭힌다는 것이
참 안타까웠습니다. 새해 첫 날은 ‘평화의 날’로 지냅니다.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서 내가 만드는 모든 일들, 남들에게 만들어 주는 모든 기억들이
그에게 두고두고 행복과 감사,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찬미의 기회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나를 기억하는 모든 이가 평화로이 행복한 미소를 짓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마리아와 함께 그리고 마리아처럼
-김찬선신부-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저는 오늘 한 해를 시작하면서 교회는 왜
첫날을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지낼까 생각해봤습니다.
생각을 해보니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한 해를 시작하고,
마리아와 함께 한 해를 살라는 뜻이 담겨 있지 않나 생각되었습니다.
어머니하고 같이 산다면 나는 자식으로 사는 것이고,
자식 중에서도 어린 자식으로 사는 것이 연상됩니다.
크면서 또는 커서 한 때는 어머니가 성가시고 귀찮을 때도 있지만
인간에게 어머니는 마음으로라도 늘 함께 계셔야 할 존재입니다.
아기들이 무엇을 가지고 놀 때 보면
엄마가 없어도 되는 것처럼 자기 놀이에 열중하지만
어느 순간 엄마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장난감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울며 엄마를 찾아갑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훨씬 힘이 없지만
힘없는 엄마가 이처럼 우리의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힘입니다.
아버지는 전능의 하느님이신데 비해
어머니는 사랑의 하느님이시고,
아버지의 힘은 역경과 위험에서 우리를 구출해내는 외적인 힘인데 비해
어머니의 힘은 역경과 위험을 이겨내게 하는 내적인 힘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외적 힘이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무엇이든 하게 하는 내적 힘인 것과 같습니다.
아무튼 어머니 마리아는 우리 육신의 어머니이기도 하고
사랑의 하느님 또는 어머니 하느님이기도 한 영적인 어머니이십니다.
올 한 해 이 어머니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이 어머니와 함께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우리가 됩시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 축일을 새 해 첫날 지내는 두 번째 이유는
새 해에는 우리 모두 마리아처럼
세상에 하느님을 낳아주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라는 뜻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하늘의 주님을 세상에 낳아주신 것처럼
우리도 하늘의 주님을 세상에 낳아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잘 청취하는 겁니다.
수없이 떠도는 쓸 데 없는 다른 말들은 쫓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만 늘 그리고 잘 청취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듯
우리의 주파수를 마리아처럼 하늘에 맞추고
그런 다음에는 채널 고정을 하는 겁니다.
올 한 해 말씀 필사를 다시 한 번 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말씀의 청취로 말씀이신 하느님을 잉태하였으면 이제
마리아처럼 말씀의 묵상으로 하느님을 자라게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출산을 하려면 아기를 수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10달 동안 태 안에서 그 아기가 자라게 하듯
우리는 들은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새기는 묵상을 늘 해야 합니다.
올 한 해 말씀 묵상의 시간을 미사 전후에 가지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말씀 묵상으로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크게 자랐다면 이제
마리아처럼 하느님을 세상에 낳아줘야 합니다.
아무리 말씀을 사랑한다 해도 자기 태 안에 계속 가둬서는 안 되고
말씀 실천으로 사람들이 하느님을 만나보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一日一善하기로 우리가 결심하듯
올 한 해 매일 읽고 묵상한 말씀 중
어느 한 하나를 실천에 옮기기로 작정을 하고 매일 실천하는 것입니다.
올 한 해 이렇게 우리는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함으로
수태하고, 임신하고, 출산하는 하느님 말씀의 어머니들이 됩시다.
가장 먼저 세워야 할 계획
- 이건복 신부-
10년 전 신설본당 주임신부로 발령받아 가정방문을 할 때 한동안 냉담했던 젊은 자매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자매님은 아이를 업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세례명이 뭐냐고 물었더니, 자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직 세례 받게 할 생각이 없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고 다시 물었더니 대뜸 한다는 이야기가 “아이가 커서 자신의 종교를 스스로 선택하게 배려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잠시 저도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이가 커서 종교를 선택하도록 한다면 아이가 다른 종교를 선택해도 무방하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이 어머니의 신앙은 뭐란 말인가? 누구나 부모라면 자식이 잘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과 인생의 목표인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자녀에게 가르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에 조기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도 인생의 목표인 하느님 나라의 구원을 얻는 데 필요한 조기교육을 생각하지 못하는 부모라면 앞으로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지 걱정입니다.
새로운 한 해의 첫날, 교회는 하느님의 어머니 대축일로 지냅니다. 신앙의 모범이시며 구원의 중재자이신 어머니와 함께 한 해를, 일평생을 시작하자는 의미입니다. 성모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시키시고, 앞으로 그 아들이 걸어가야 할 구원의 길을 곰곰이 생각하시며 모든 뒷바라지를 하고자 결심하십니다. 우리도 새해 첫날 수많은 계획을 세우는데, 그중에 자녀의 구원을 위해 한 해 동안 무엇을 어떻게 도와줄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가장 먼저 세워야겠습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양승국신부-
<새해의 빛나는 이 아침에>
새해의 빛나는 아침을 다시금 맞이한 형제자매님들께 진심으로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의 과제 중에 하나가 매일 주어지는 우리의 하루가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또 다시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극진한 자비의 표시로 새해 새 아침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한해 우리 신앙의 모범이신 성모님과 함께 기도하면서, 침묵하면서, 감사하면서, 그렇게 엮어 가면 좋겠습니다.
인생의 역풍을 만나 허우적거릴 때, 문득 삶이 텅 비어 있다고 느끼는 순간, 혹시라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누군가가 계십니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훈훈해지는 사람, 떠올리기만 해도 감사한 사람, 존재 자체로 행복을 주는 사람, 오늘 같은 새해 첫날 찾아뵙지 못하는 것이 늘 송구스러운 사람, 그런 사람이 있는 분들은 삶이 훨씬 풍요롭습니다. 삶이 한결 여유롭습니다.
고맙게도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는 신자가 됨과 동시에 그런 고마운 분이 자동으로 한분 생깁니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극심한 고통 한가운데서 가장 먼저 찾게 되는 분, 우리가 그분 이름을 부를 때마다 어느새 달려와서 따뜻한 위로의 손길을 건네시는 분,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모님이십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으로 인해 산전수전을 다 겪으셨던 분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한 평생 가슴에 깊은 통증을 느끼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런 성모님이셨기에 또 다른 아들들인 가슴 아픈 우리들, 죽음과도 같은 고통에 탄식하는 우리들의 따뜻한 위로자로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아들 예수님 일생에 여백 같으셨던 분이셨습니다. 예수님 탄생 순간부터 갈바리아 산에 이르기까지 성모님은 언제나 조용히 예수님 뒤에 서 계셨습니다. 아들 예수님이 커지시도록 한없이 작아지셨던 분, 늘 예수님 그늘에 서계셨던 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한평생 쓸쓸하셨던 분이 성모님이셨습니다.
성모님에게 아들 예수님은 한평생에 걸친 '연구 대상'이었습니다.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나는 소년 예수를 바라보면서 성모님은 무척 대견스럽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했을 것입니다. 마치도 신비로운 세계, 하늘나라를 들여다보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모든 일을 마음에 조용히 간직하셨습니다. 곰곰이 되새겼습니다. 기도에 기도를 거듭하셨습니다.
성모님의 인생여정은 칠흑과도 같은 암흑을 홀로 걷는 것과도 같은 힘겨운 삶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자신의 인생 안에 펼쳐진 수많은 사건들, 아들 예수님으로 인해 겪었던 셀 수 없는 고초들을 거의 예견하지 못하셨습니다. 많은 경우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셨습니다. 어떻게 자신의 삶이 전개될지 전혀 예측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주님의 손길에 모든 것을 맡기고,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신앙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수많은 이해하지 못할 사건들 앞에서 힘들다는 소리 한번 하지 않으시고 그저 ‘지금 이 순간 하느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꾸준히 하느님의 충실한 여종으로 살아가셨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겨우 낳은 아이, 자신의 젖을 먹고 자란 아이, 애지중지 키웠던 소년 예수를 향한 인간적 사랑이 어찌 마리아에게 없었겠습니까? 그런 인간적 생각이 스며들 때마다 성모님은 다시 한 번 자신을 말끔히 비워야만 했습니다. 아쉽고도 아쉽지만 눈물을 머금고 또 다시 자신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또 다시 따뜻한 인간 세계 둥지를 떠나 거칠고도 황량한 신앙의 사막을 여행해야만 했습니다.
부족했던 우리의 지난 한해, 이제 하느님께서 모두 거두어가셨습니다. 우리는 또 다시 다시 새로운 한 해란 과분한 은총 앞에 서있습니다. 정녕 헤아릴 수 없는 축복인 새해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가장 큰 표시인 은총의 새해입니다. 성모님과 함께 다시 한 번 힘찬 항해를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여백, 성모님
-양승국신부-
요즘 존경하는 존 포웰 신부님의 「내 영혼을 울린 이야기」(가톨릭출판사)라는 책을 감명 깊게 읽고 있습니다.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기는 여러 감동적 일화들을 소개하고 있지요. 그 중 '실크 잠옷 한 벌'이라는 이야기는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좋은 삶의 지침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신학교 근처 한 교회 병원에 다재다능하고 친절한, 그래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극찬하는 수녀님 한 분이 근무하고 계셨답니다. 그런데 그 수녀님은 병원에서 활동하기 3년 전에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긴장형 분열증'으로 정신병원에 입원 중이었습니다. 의사 선생님들은 어른 수녀님께 '이 수녀님은 남은 생을 이 침대에서 보내야 할 것 같다'고 알렸습니다.
수녀님은 병상에 누운 채, 모든 희망을 잃은 듯한 멍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수녀님의 정신 이상은 한 가지 특이한 증상을 보였는데 침대보를 모두 벗겨내고 자신이 입고 있던 환자복마저도 벗어던지는 것이었습니다. 전문의에 따르면 수녀님은 자신을 사람이 아닌 사물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이 지긋한 도우미 아주머니가 밝은 분홍색 실크 잠옷 한 벌을 들고 수녀님 입원실에 들렀습니다. 그녀는 어머니가 딸을 타이르듯, 다정한 목소리로 수녀님에게 말했습니다.
"이걸 입으면 아주 예쁠 거예요."
그 수녀님은 그때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분이 두 손으로 제 뺨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준 순간, 저는 정신분열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첫발을 내디딘 것입니다. 저는 제 뺨을 어루만지던 그분 손을 꼭 잡고 얼굴을 더 가까이 밀착시켰습니다. 그 순간, 정말로 사랑이 사람을 치유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이후로 수녀님은 그 '따뜻한 체험'을 자기 인생의 화두로 삼게 됐습니다. 수녀님은 요즘 자신이 도우미 아주머니로부터 받았던 그 '따뜻한 느낌'을 또 다른 환자들에게 열심히 전하고 계신답니다.
어떻습니까? 위 글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얼굴이 없습니까?
인생의 역풍을 만나 허우적거릴 때, 문득 삶이 텅 비어 있다고 느끼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분이 누구입니까? 극심한 고통 한가운데서 가장 먼저 찾게 되는 분, 우리가 그분 이름을 부를 때마다 어느새 달려와서 따뜻한 위로의 손길을 건네시는 분, 저는 개인적으로 성모님이 생각났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으로 인해 산전수전을 다 겪으셨던 분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한 평생 가슴에 깊은 통증을 느끼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런 성모님이셨기에 또 다른 아들들인 가슴 아픈 우리들, 죽음과도 같은 고통에 탄식하는 우리들의 따뜻한 위로자로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아들 예수님 일생에 여백 같으셨던 분이셨습니다. 예수님 탄생 순간부터 갈바리아 산에 이르기까지 성모님은 언제나 조용히 예수님 뒤에 서 계셨습니다. 아들 예수님이 커지시도록 한없이 작아지셨던 분, 늘 예수님 그늘에 서계셨던 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한평생 쓸쓸하셨던 분이 성모님이셨습니다.
성모님에게 아들 예수님은 한평생에 걸친 '연구 대상'이었습니다.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나는 소년 예수를 바라보면서 성모님은 무척 대견스럽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했을 것입니다. 마치도 신비로운 세계, 하늘나라를 들여다보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모든 일을 마음에 조용히 간직하셨습니다. 곰곰이 되새겼습니다. 기도에 기도를 거듭하셨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겨우 낳은 아이, 자신의 젖을 먹고 자란 아이, 애지중지 키웠던 소년 예수를 향한 인간적 사랑이 어찌 마리아에게 없었겠습니까? 그런 인간적 생각이 스며들 때마다 성모님은 다시 한번 자신을 말끔히 비워야만 했습니다. 아쉽고도 아쉽지만 눈물을 머금고 또 다시 자신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또 다시 따뜻한 인간 세계 둥지를 떠나 거칠고도 황량한 신앙의 사막을 여행해야만 했습니다.
우리 모두 또 다시 새로운 한 해 앞에 서있습니다. 늘 걸어도 두렵고 떨리는, 때로 혹독한 세월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헤아릴 수 없는 축복인 새해, 하느님 사랑의 가장 큰 표시인 '은총의 새해'입니다. 성모님과 함께 다시 한 번 힘찬 항해를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새로운 한 해
-이중섭 신부-
한 소년이 떨리는 입술로 내 책상에 왔네. 수업이 끝났을 때.
“저에게 새 도화지를 주시겠어요? 선생님, 이것은 망쳤거든요.”
나는 그의 도화지를 받았네. 온통 때 묻고 얼룩진.
그리고 그에게 새 것을 주었네. 하나도 때 묻지 않은.
그 다음에 그의 지친 마음에 나는 웃음 지었네.
“이번에는 더 잘 해보렴. 내 아이야!”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옥좌에 갔다네. 한 해가 끝났을 때.
“저에게 새로운 한 해를 주시겠습니까? 이번 한 해는 망쳐버렸거든요.”
그분은 나의 한 해를 받으셨네. 온통 때 묻고 얼룩진.
그리고 나에게 새로운 한 해를 주셨네. 하나도 때 묻지 않은.
그런 다음 나의 지친 마음에 그분은 웃음 지었네.
“이번에는 더 잘 해보렴! 내 아이야!”
2007년이 지나가고 새해가 밝았습니다. 주님은 지난 한 해를 축복하고
또 새로운 한 해를 주십니다. 새해에는 주님과 함께하는 삶,
하느님의 말씀에 맛 들이는 삶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그래야 2008년 말에는 올해도 한 해를 망쳤구나라고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도구
-주영길 신부-
루카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와 예수님의 탄생 예고,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예수님의 탄생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는 세례자 요한의 역할, 곧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1,76-77)라는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함이리라. 시대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세례자 요한도 ‘주님의 도구’라는 것을 복음사가는 암시하고 있다.
오늘 복음은 성탄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첫 선포자와 그들의 역할을 전하고 있다. 그 영광을 차지한 이들은 누구인가? 다름 아닌 ‘목자들’이다. 앞서 복음은 ‘밤에도 양떼를 지키는’ 이들이라 묘사한다(2,8 참조). 이 대목은 목자들의 가난하고 고단한 삶을 떠올리게 한다. 하느님께서는 막중한 성탄의 선포를 보잘것없는 이들한테 맡기신 것이다. 예수님 역시 공생활에 앞서 당신의 제자로 어부들을 선택하신다.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이들, 갈릴래아 호수에 의지한 채 하늘이 주는 대로 거두는 순박한 이들을 뽑으신 것이다.
본당에서 연초가 되면 참으로 난감한 문제에 봉착한다. 임기가 끝난 단체장으로 누구를 새로이 임명할 것인가? 며칠씩 고심한 본당 신부의 부탁을 들어주기나 할까?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겠지만 점점 바쁘게 돌아가며 먹고사느라 빠듯한 이들에게 섣부른 부탁을 하는 것 같아 말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거절하면서 가장 흔히 듣는 구실은 ‘아는 게 없어서’ 또는 ‘능력이 안 돼서’이다. 이런 걸 굳이 겸손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도구’라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에게 능력이 있거나 우리 자신이 뽑아주십사 간청해서 쓰이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쓰시고자 할 때, ‘예’라고 대답할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한다. 정말 교우들에게 듣고 싶은 대답은 “여러모로 부족합니다만, 신부님께서 말씀하시니 성심껏 해보겠습니다.” 하는 말이다.
모든 것을 간직하시는 성모님
-양승국신부-
젊은 시절부터 남편과 결혼생활이 무척 '팍팍'했던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팍팍'한 정도를 넘어 할머니 젊은 시절은 온통 가시밭길이었습니다. 신혼 초부터 바깥으로만 맴돌던 남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년에 몇 번씩 얼굴을 비치더니 급기야 소식조차 알 길이 없게 됐습니다.
그리고는 끝이었습니다. 아무리 수소문해 봐도 행방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생과부가 된 부인은 일찍부터 가족 생계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자식 교육도, 늙으신 시부모님 봉양도 혼자 몫이었습니다. 다행히 선천적으로 생활력이 강했던 부인은 그 오랜 고난의 세월을 묵묵히 견뎌왔습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자식들은 잘 성장했고, 경제적 기반도 어느 정도 마련하게 됐습니다. 장성한 자식들은 나름대로 자리를 잡게 됐고, 한평생 홀로 갖은 고萱?다해온 어머니께 극진한 효심을 표했습니다. 평생 고생한 끝에 할머니는 이제야 겨우 여유있고 편안한 노년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건이 생겼습니다. 세상 떴으려니 생각했던 남편이 나타난 것입니다. 거지도 그런 상거지가 없었습니다. 젊은 시절 그 건장한 체격, 준수한 용모는 어디가고 늙고 병든 할아버지, 볼품없고 꾸부정한 할아버지가 대문 앞에 서성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들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왔느냐'며 문전박대했습니다. 그러나 착한 심성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계속 문 밖에 떨고 서있는 할아버지를 일단 안으로 모셨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천천히 할아버지는 다시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할머니였습니다. 일단 불쌍해서 받아들였지만 아직 마음으로 할아버지를 받아들이지 못해 너무 괴로웠습니다. 용서하자고 수천번 다짐해도 일단 얼굴만 보면 혈압이 오르고 심장 박동이 빨라졌습니다. '이러다 내가 죽지'하면서 마음을 바꿔먹어도 그 때뿐이었습니다.
너무 괴로웠던 할머니는 친구 할머니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습니다. 깊이 생각에 잠겨 있던 친구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렵겠지만 영감님이 집에 들어왔다고 생각하지 말고 늙고 병든 예수님, 추위에 떨고 있는 배고픈 아기 예수님이 찾아오셨다고 생각해봐요!"
그 한마디 말씀이 할머니 가슴에 전광석화같이 파고들었습니다. 그 보석같은 한 말씀에 크게 깨달음을 얻은 할머니는 그날로 '할아버지=아기 예수님' 등식을 만들어가기 위해 무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답니다.
늙고 병들어서야 찾아온 할아버지를 예수님으로 받아들이고자 각고의 노력을 다하시는 할머니 모습에서 온몸으로 주님을 받아들인 산골 소녀 마리아의 향기를 느낍니다.
오늘 우리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예수 잉태라는 청천벽력 같은 제안과 이후 계속된 가슴 철렁 내려앉는 '별의 별' 상황 앞에서 오직 "예!"라고 순명할 줄밖에 몰랐던 마리아, 지극히 단순하고 겸손했던 마리아가 하느님 어머니가 되시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마리아는 전 생애를 통해 예수님을 자신 안에 깊이 간직하셨습니다. 아기 예수 잉태 이후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던 이해하지 못할 일들, 아들 예수로 인해 속끓이던 일들, 은근히 부아가 치미는 일들 앞에서 마리아는 철저하게 간직하십니다. 침묵 가운데 지속적 묵상에 전념하십니다.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을 때부터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님 시신을 품에 안던 순간까지 성모님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 하나는 아들 예수를 바라보며 묵상하는 일이었습니다. 한평생 침묵 안에서 하느님 말씀을 경청하고 하느님 뜻을 찾아갑니다. 그 결과 성모님은 가장 탁월한 신앙인이 되셨고 마침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는 것입니다.
올 한해도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여정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입니다. 난데없는 고통과 십자가들, 이해하기 힘든 사건들, 의혹들이 우리에게 다가오겠지요. 그 순간 성모님 일생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루가 2,18).
지금은 비록 무엇이 진정한 하느님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너무 혼란스럽지만 하느님 계획과 자비를 굳게 믿으며 굳건히 우리 길을 걸어가도록 합시다.
주님께서 주신 가장 큰 은총의 선물인 이 한해, 주님이 함께 계시기에 고통 속에서도 활짝 웃는 한해, 십자가 앞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하는 은총의 한해 되시길 기원합니다.
새해에는 '기도'합시다
-배광하 신부-
새해’입니다.
묵은 해니 새해니 따지지 말게
겨울 가고 봄이 오면
해 바뀐 듯 하지만
보라고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
학명 스님의 글입니다. 먼저 새해 주님의 축복과 은총이 충만하시길 빕니다. 새해에는 정말 모든 아픔과 슬픔을 뒤로 하고 기쁘고 평화로운 일들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코헬렛의 저자도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코헬 1, 9)”고 하였지만 분명 묵은 해가 있고 새해가 있는 법입니다. 새날, 새달, 새해가 없다면 인생이 너무 무미건조해 지리라 생각합니다. 새해가 있어야 지난해의 묵은 찌꺼기인 불화, 불목, 여러 상처들을 다시금 씻어 버리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인생의 새로운 설계를 새해 참신한 기분으로 새롭게 짤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새롭게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새해에는 정말 기도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욕심과 이기심, 알량하고 쉽게 상처 받던 내 마음의 얼룩이 사라지기를, 새해 새 빛을 받으며 그 광채에 영원히 머무를 수 있도록, 주님과 멀어졌던 나의 이탈이 제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주님만이 내 생의 모두라는 사실에 더 크게 눈뜰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위를 돌아볼 수 있는 뜬 눈을 지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의 작은 도움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주님께서 보일 수 있다는 자명한 진리에 진정 눈뜰 수 있어야 합니다.
새해에는 평화가 가득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아직도 분단된 국가의, 민족의 백성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아직도 세상은 전쟁의 살육이, 그 포성이 멈추지 않았음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에 평화가 오지 않았는데 나 홀로 두 다리 뻗고 잠잘 수 있는 이기심에는 결코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음에 깨달음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새해에는 진정 새해의 밝은 태양이 떠오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빛을 우리가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을 빕니다
새해의 참된 기원과 그에 따른 실천이 있었을 때 민수기의 축복이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라 믿습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 24~26)
우리 인간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복, 그 복은 하느님께서 우리 고달픈 인생길에 참 동행자가 되어 주신다는 약속의 축복이며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빠, 아버지가 되어 주신다는 축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갈라 4, 7)
때문에 우리에게는 넘치는 희망의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 같은 축복이 우리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보이시는 복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얼굴’은 구약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로는 ‘파님’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파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마지막 걸작 품인 당신 모상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신 뒤,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 31)하신 인간이 너무나 타락하여 끝내는 벌하시려는 하느님의 탄성, 그래도 당신께서 만드신 당신의 자녀인 인간이 가여워 다시금 인간을 향하여 당신 자비와 사랑, 용서와 자애의 얼굴을 보이시는 하느님 사랑의 얼굴에서 나온 단어라고 합니다.
‘파님’의 얼굴을 인간을 향하여 보이신다는 축복인 것입니다. 때문에 죄의 유혹 속에 더는 헤어 나올 수 없던 연약한 우리 인간이 구원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실로 영광의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말 새해에는 그 같은 진실한 복이, 영원히 변하지 않을 복이 모든 이에게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평화가 모든 가정에, 나라에 가득하길 빕니다. 그 같은 복을 받은 우리는 진정 행복한 사람들 입니다. 행복은 그 행복을 진정 느끼며 사는 이에게 가치가 있습니다.
행복을 느끼는 이들은 진정 그 행복에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그 같은 감사가 있을 때 다른 이들에게도 그 복을 내릴 수 있으며, 복을 조금이라도 나누려는 노력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누었던 복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는 법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은 분명 돌고 돌아오는 은총인 것입니다. 새해에는 그 같은 축복이 넘치는 삶을 사시길 진심으로 기도 드립니다.
목자들이 예수님을 뵙다 - 신앙인의 복(福)
-김영수 신부 -
“부~자 되세요?”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무렵이 되면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복을 빌어주는 메시지들이 종종 배달됩니다. 대부분 “부~자 되세요!”라고 기원하는 메시지들을 보면서 한 해를 새로 시작하며 서로에게 감사하고 복을 빌어주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빌어주어야 할 진정한 복(福)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새해를 시작하는 첫 날 우리가 묵상하는 민수기(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백성들에게 빌어주라고 하신 복이 무엇인지를 들려줍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백성들에게 빌어주라고 하신 세 가지의 축복은 하느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빌어주어야 할 복(福)입니다.
첫째 ‘야훼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고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지켜 주신다는 영적진실을 믿는 데서 출발합니다. 어렵고 힘든 세상살이에서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하시고 지켜주신다’는 사실은 믿는 사람은 이 삶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희망을 안고 살아갈 힘과 여유를 축복으로 받게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야훼께서 웃으시며 우리를 어여삐 보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영적진실에 대한 믿음은 그분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은 헛된 것들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줍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으로 이끌어 주신다는 믿음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기쁨을 주고 자유를 줍니다.
세 번째로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그분의 사랑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누리는 가장 큰 축복은 ‘평화’입니다. 사람들은 부자가 됨으로써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자신의 욕심을 채움으로써,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많이 가짐으로써 유지되는 힘의 불균형일 뿐이며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위의 성과 같은 평화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화를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우리를 사랑한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진정한 평화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그 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교회는 새해의 첫날을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께 봉헌하며 평화의 날로 지냅니다. 목자들이 달려간 마구간의 구유에 누워계신 갓난아기는 진정한 평화를 갈망하는 세상에 참 평화를 주러 오신 분이십니다. 이 누추한 곳에 누워계신 가난한 아이의 모습 속에서 평화를 축복으로 받은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목자들은 이 초라한 마구간에서 그들이 바라던 평화를 발견했습니다. 이 아기를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양하며 돌아갔습니다.
반면에 사람들은 이 모든 사실을 듣고서도 그저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인간은 평화를 진심으로 갈망하면서도 진정한 평화를 얻지 못합니다. 그것은 자기가 애타게 바라는 평화가 무엇인지도 모르며, 또 이 평화를 얻기 위하여 사용하는 방법이 평화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호기심과 욕심으로 뒤범벅된 갈망은 인간을 거짓 평화를 찾아 헤매고 방황하게 합니다.
“마리아는 그 일들을 모두 당신 마음속에 간직하여 곰곰이 생각하였다” 고 전합니다.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구세주의 탄생을 자신의 몸으로 겪어야 했던 성모 마리아가 ‘모든 일’들 앞에서 고요히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모습은 참 평화를 바라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진정한 평화의 추구가 무엇인지를 알려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그 평화를 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신앙인은 모든 일들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찾고자 애씁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 아니냐를 찾기 전에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고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며 ‘하느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고 그 때를 알아 볼 줄 아는 신앙인의 복(福)입니다.
새로운 날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한 해를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속에는 어떤 ‘바람’과 ‘지향’이 들어 있는지를 들여다보아야겠습니다. 새해에는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처럼 모든 일들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할 줄 알고 곰곰이 생각할 줄 아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바라고 살아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도록 성령께 청하며 새해를 시작합니다.
새해 아침
-서공석 신부-
2006년 새해 아침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하느님의 축복과 행복한 한 해를 빕니다. 우리 모두의 가족들과 친지들에게도 하느님의 특별한 축복이 있으실 것을 기도드립시다. 하느님이 베푸신 또 한 해의 세월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은혜로운 한 해가 되어서 시편의 기도 “주님께서 이루신 일이기에 우리 눈에 놀랍게만 보입니다”(시편 117,23)라는 기도가 우리의 가슴에서 울려 퍼지는 한 해가 될 것을 빕니다.
오늘은 ,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고, 세계 평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말은 431년 에페소 공의회가 사용한 표현입니다. 그 시대 교회 안에는 예수가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때는 한 인간에 불과하였지만, 그분 생애의 어느 시점에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는 순수 인간에 불과 했었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해 마리아를 ‘사람의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431년의 공의회는 그들의 사상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천명하고 마리아를 ‘천주의 모친’이라 불렀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에 따르면, 만일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면,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은 참다운 하느님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참다운 하느님의 생명을 보는 것은 그리도 신앙의 근본입니다. 따라서 공의회는 예수님 안에 참으로 하느님의 생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선포하기 위해 ‘천주의 모친이신 마리아’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이 선포의 목적은 성모 마리아의 품위를 격상시키는 데에 있지 않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생명을 사신 분이라는 사실을 긍정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다”(14,9). 이 말씀을 긍정하는 ‘천주의 모친’이라는 오늘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을 보면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은 이 문제에 대해 반론을 펴는 사람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이 채택된 역사적 상황을 모르면, ‘천주의 모친 마리아’라는 말을 마리아가 하느님보다 먼저 계셨다는 뜻으로 오해할 위험도 있습니다. 이 축일은 1970년에 제정되었습니다. 성모님의 축일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확실히 본다는 그리스도 신앙의 근본을 재천명하는 축일입니다.
오늘을 세계 평화의 날로 제정한 것은 1967년의 일입니다. 그러면 그 전에는 평화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가? 과거에 평화는 통치자가 주는 것이었습니다. 통치자가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해 주면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세계 평화의 날을 제정한 것은 교회가 세계 평화는 이제 모든 사람이 함께 찾아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오늘 세계의 평화는 모든 사람이 함께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이 찾아야 하는 평화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평화입니다. 하느님이 인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우리가 성탄날 밤에 들은 루가복음서의 선포가 있었습니다. 천사들의 입을 빌려 복음서는 선포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사랑받는 사람들에게 평화”(2,14). 마태오복음서는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이 “복되어라,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니”(5,9)라고 선언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인류를 사랑하시고 온 인류가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입니다.
“땅에서는 사랑받는 사람에게 평화”라고 루가복음서는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이 사랑하시기에 그 사랑을 깨닫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곳에 평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웃을 돌보아주고 그 한계를 보면서 가엾이 여길 때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이 실천되는 곳에 평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모두가 이기적이고 자기 위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웃이 자기와 다르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복음서의 이런 말씀들은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아성을 탈피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웃은 자기 자신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에 다양함을 뿌리셨습니다. 그 다양함을 존중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다양함을 은혜로운 것으로 보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그것이 성령이 우리 안에 하시는 일입니다. 시편은 노래합니다. “주님께서 숨결을 불어넣으시면...땅의 모습은 새로워집니다”(104,30).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던 사람이 하느님의 숨결인 성령으로 땅의 모든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고 사랑하게 되어 땅의 모습이 새로워진다는 말입니다. 인류가 서로 위해 주면 평화를 누리는 땅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새해 아침에 우리는 서로 복 많이 받으라고 인사합니다. 축복받은 한 해가 되라고 비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오늘 제1독서 민수기는 모세에게 하느님이 하신 말씀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오늘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도 우리의 이웃 위에 하느님이 복을 내리시도록 기도합시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여 우리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시고, 이웃이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한 해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좋으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또 한 해의 세월을 베푸셨습니다. 은혜로운 한 해를 기쁘게 시작합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고 또 해야 하는 일에 온 정력을 쏟아서 정직하게 능률을 올리는 것도 이웃을 축복하는 일입니다.
새해를 맞이한 것은 우리 삶에서 한 해의 세월이 또 줄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종말에 그만큼 다가갔다는 말입니다. ‘사람만이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생명체들은 자기의 종말을 모르고 살다가 사라지지만, 인간만이 자기의 종말을 내다보면서 산다는 말입니다. 세월을 보면서 하느님을 생각하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이 축복하셔서 태어났고, 하느님이 축복하셔서 살아가고, 세월이 흐르면 하느님에게로 가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우리와 우리의 이웃 모두가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도록 힘쓰겠다는 마음 다짐을 하는 오늘 새해의 아침입니다.
생명을 보호하라!
-조욱현 신부 -
새해 첫 날이 밝았다. 오늘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며, 세계 평화의 날이다. 지금 시기는 성탄시기로 전례의 중심은 주님이시다. 그러나 아들을 기억할 때는 어머니도 기억하는 것이다. 왜 성모 마리아가 평화와 축복과 관계가 있느냐 하는 것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선물로서 ‘평화’가 마리아의 태중에서 봉오리를 맺고, ‘우리의 평화’이시며 하느님과 인간들 사이를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신”(에페 2,14) 그리스도께서 바로 마리아를 통해 오셨기 때문이다.
제1독서: 신명 6,22-27
24: 야훼께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며-너희를 지켜주시고; 25: 야훼께서 너희에게 당신의 얼굴을 빛내시며-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26: 야훼께서 너희에게 당신의 얼굴을 들어-너희에게 평화를, 즉 구원과 평화를 주시기를 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인류의 역사 안에 들어오시어 우리의 영신적 성장뿐만 아니라 단순한 인간적 성장까지도 이끌어 주신다. 그러므로 이 평화는 바로 구원을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 축복은 365일 계속되어야 한다.
복음: 루가 2,16-21: 여드레 째 되는 날,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일은 깊은 의미를 갖고 있다. 하느님의 1주간이 꽉 찬 것이다. 이것은 주일로부터 주일로 부활주일로 완성된 모습이다. 이 8일이 된 날 할례를 통하여 아기가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이 된 날이다. 그리고 그 이름을 예수“Jeshua'-Jah, 야훼는 구원이시다”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에 있어서 우리의 어제이며, 우리의 오늘이고, 또한 영원히 같은 분이시여라”라고 하고 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계신 분”으로 항상, 그리고 오늘 여기서 주어지는 분이다. 단 말씀을 받아들이고, 성찬을 모시고, 마음의 할례 즉 회개를 할 때, 그분은 우리를 복된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신다.
제2독서: 갈라 4,4-7: “압바, 아버지!”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히브리인과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셨다. 여인에게서 태어나게 하시고 율법에 속하게 하시고, 구 율법을 완성하게 하셨다. 율법을 완성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참된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조건은 외아들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그 성령을 주셨다. 그래서 인간은 그 성령을 통해 하느님을 “압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세례를 받은 우리들을 위한 전달자이시다. 이 하느님의 자녀의 모습은 종의 모습이 아닌, 참 자녀의 모습이다. 참 자녀는 상속자이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들의 말대로 된 것을 확인하고 믿었던 목동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돌아갔다. 이것은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말씀이 살아있을 때에 감사와 찬미가 나올 수 있으며, 그 안에 평화가 있다. 이 평화는 바로 구원이다. 평화는 마음의 질서가 잘 잡힌 조화로운 상태이다. 우리 마음에 질서가 문란하면 평화가 있을 수 없다. 목동들이 예수님을 본 순간 이 질서가 올바로 정립되어 평화 즉 구원을 맛보고 돌아간다. 하느님께 그 평화에 대한 찬미와 감사를 드리면서 돌아갔다. 마음의 질서의 조화를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주님을 만나 뵈옵기 위한 노력이다. 마치 천사의 말을 믿고 달려가는 목동들과 같이 말씀을 들은 즉시 실천하려고 하는 마음이다. 자신의 생각이나 뜻을 죽일 수 있는 그런 삶이 평화를 구원을 느낄 수 있다.
때가 찼을 때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여인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을 완성케 하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말씀의 성령을 통하여 인간을 당신의 자녀로 되게 해주셨다. “지금의 때”는 이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통해서 계속 태어나시며, 모든 인간들을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 만들어 공동 상속자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은 우리의 모습이 마리아의 모습, 즉 말씀을 잉태하여 낳아주는 마리아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이가 하느님을 “압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을 때 참 평화-구원이 있을 것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하느님의 어머니는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이 되셨다는 면에서 하느님의 어머니이다. 이제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통해, 지금 여기서 태어나실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묵상할 것이 있다. 그것은 마리아가 스스로 자유롭게 받아들여(루가 1,38 참조) 당신 자신의 신적인 모성의 신비로써 ‘구원’과 ‘평화’에 이바지하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선물이 되지 못하는 ‘모성’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와 같은 마리아에게서 이 같은 일이 나타났다면 모든 여인에게서도 마찬가지로 참된 사실이다. 모성은 결코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낙태가 허용된 나라처럼 태아를 살해하도록 합법화하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평화를 파괴하는 전쟁의 행위와 다를 것이 없다. 어머니와 자녀, 더 나아가 아직 태어나지 않아서 더욱 보호가 필요한 자녀와의 사이에 평화가 없다면 과연 어디에 평화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바오로 6세께서는 1977년 ‘세계 평화의 날’의 주제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이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생명을 보호하라. 생명은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누구에 의해서든지, 또한 전쟁, 테러, 무죄하고 아무런 힘도 없는 태아에 대한 어머니나 의사들의 폭력 등 어떠한 방법에 의해서도 침해되지 않도록 항상 보호되어야 한다. 생명을 거스르는 모든 범죄는 평화를 침해하는 행위이다. 특히 낙태로써 태어나려는 생명을 없애는 것처럼 오늘날 무섭게 또 때로는 합법적으로 국민 대중의 습성을 썩게 하는 행위는 더욱 그렇다...인간 생명은 잉태되는 순간부터 그 타고난 생을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신성한 것이다. ‘신성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곧 생명이 어떤 억압도 받지 않도록 되어있으며,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모든 존경과 배려와 정당한 희생을 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1976. 12. 8. 바오로 6세의 메시지).
오늘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은 그러기에 마리아가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당신의 신적 모성으로써 이 세상에 이루신 생명과 구원과 평화의 선물에 대해서 묵상하고 깊이 사색하도록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강생 순간부터 그분의 생명과 밀접히 결합되어 변모된 모든 생명의 품위를 깨닫도록 촉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러한 가운데 참 평화를 간직한 즉 구원의 기쁨을 가진 우리가 이 때 진정으로 남에게 복을 빌어줄 수 있으며, 그 복은 복을 빌어주는 이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되돌아오며, 서로를 하나가 되게 해주고, 그것은 성자를 통하여 아버지께 올려지는 것으로 이것이 참된 감사의 생활이며, 이 생활을 통해 우리는 평화를, 기쁨을, 구원을 항상 맛보며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먼저 평화를 맛보고, 그 평화를 빌어줄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이 시간에 기도하자. 오늘은 새해 첫 날이기에 큰 희망과 부푼 꿈을 가질 수 있는 그러한 날이다. 첫 날이기에 의미를 지니는 날이며, 이 날 이 한해를 하느님께 바치자. 첫 날이므로 성경의 말씀대로 하느님께 바치고 한 해를 하느님 앞에 보다 성실하게 살도록 다짐하자. 이러한 지향이 중요하다. 비록 오늘 짧은 시간이지만 기도와 미사를 통하여 1년의 계획을 압축하여 설계하며 하느님께 온전히 바쳐야 하겠다. 그래서 복음에 나타난 목자들과 같이 우리도 언제나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며 영광을 드리는 삶을 갖도록 하자. 아멘!
하느님의 어머니
-구요비 욥 신부-
전례력으로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경축하는 성탄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내 안에서 탄생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탄생이 나에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은 내 안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데 있다고 하겠습니다(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오늘 교회가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칭송하고 공경하는 신앙교의는 에크하르트가 말한 질문에 빛이 됩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표현은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4,43)라고 한 인사말에서 유래합니다.
성경에서 ‘주님’은 하느님께 드리는 칭호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는 마리아께서 여신(女神)이라든가, 신성(神性)을 지녔다던가, 그리스도의 신성이 마리아에게서 유래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의 위격 안에 하느님의 신성과 인간의 본성을 온전히 간직하고 계시기에 마리아가 낳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온전한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온전한 인간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이시며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한 분의 어머니를 모시고 계시기에 우리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실 이 신앙고백은 우리 인간의 근원적인 갈망과 동경인 ‘하느님 됨’(神化)을 채워 주고 있습니다.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는 우리 민족설화 중에서 사랑을 많이 받는 이야기 중에 하나입니다. 이 이야기는 신분을 뛰어 넘는 애틋한 사랑이야기이지만, 인간은 다 평등하며 또한 고귀한 존재라는 사상이 깔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의 차원은 이보다 더 깊고 넓고 높습니다. 우리는 신앙으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고백함으로써(갈라 4,6 참조) 우리 안에서 이미 그리스도의 생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삶의 목표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데”(갈라 2,20) 있다고 합니다. 이런 면에서 마리아는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여서(루카 1,38 참조) 예수님을 잉태하고, 실제로 하느님의 아들을 낳고 키우셨기에 ‘하느님의 어머니’이십니다.
고(故) 바오로 6세 교황은 철학자 ‘장 기통’과 아름다움을 주제로 나눈 대화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요한 1,14)를 “사람이 말씀이 되셨다”로 바꾼다면, “이것이 바로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가장 심오한 정의가 아닐까요?”하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성모 마리아처럼 주님의 말씀을 늘 깨어 듣고 묵상하며 마음 속에 간직하며 살 때(루카 2,19참조), 주님은 늘 우리 안에서 새롭게 탄생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더 아름다운 인간으로 변모되어 갈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복을 받는 방법
-이기양 신부-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새해가 되면 만나는 사람들마다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을 주고받습니다. 너도 나도 복을 빌어주는 이 아름다운 새해 아침에 문득 생각해봅니다. 사람들 중에 가장 많은 복을 받은 사람은 누구일까.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2.45)
그렇습니다. 성모 마리아이시지요. 성모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나자렛이라는 작은 동네에 살고 있던 한 소녀,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는 엄청난 은총을 받고 이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공경과 사랑을 받아오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어떻게 가장 복된 여인이 될 수 있었을까요? 운이 좋아서 하느님의 은총이 자기도 모르게 넝쿨째 굴러 들어온 것일까요? 아니지요. 그 복은 언제나 하느님 뜻에 따라 살려고 노력했고 하느님 말씀을 소중하게 간직하며 살았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복이었습니다.
새해 첫날이며,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인 오늘, 저는 여러분들께 하느님 안에서, 또 세상을 살면서 복을 받을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을 한 가지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갈릴래아 호수'처럼 사십시오. 예수님이 태어나신 이스라엘은 우리나라의 경상도 크기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나라입니다. 이 나라에 '갈릴래아 호수'가 있고 또 바다도 하나가 있는데 그 이름이 '사해'(死海)입니다. 곧 죽음의 바다(The Dead Sea)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에는 갈릴래아 호수가 있고 사해가 있으며 그 둘을 연결해 주는 요르단 강이 있습니다.
그런데 갈릴래아 호수와 사해는 극과 극을 이룹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물이 맑고, 고기도 많으며, 강가엔 나무가 자라고, 새들이 노래하는 아주 아름다운 곳입니다. 이스라엘의 젖줄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풍요로운 생명이 넘실거리는 호수이지요.
이에 비해서 사해는 죽음의 바다입니다. 더러운 사해는 그 물에 어찌나 염분이 많은지 사람이 들어가면 둥둥 뜰 정도입니다. 해서 이곳에는 고기도 살 수 없고 먹이가 없으니 당연히 새들도 깃들이지 않으며 사람 또한 찾지 않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떻게 그 작은 나라에 생명이 넘쳐나며 누구나 좋아하는 풍요로운 호수가 있는가 하면, 아무도 살지 않고 찾지 않는 죽음의 바다가 있을까요? 이토록 극단적인 호수와 바다가 함께 공존하는 이유는 분명히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상류로부터 흘러 내려온 물을 다시 요르단 강을 통하여 내보내기에 항상 물이 새롭고 깨끗하여 생명이 넘쳐납니다. 반면에 사해는 갈릴래아 호수보다도 낮은 까닭에 물이 흘러 들어와도 계속해서 가두기만 할 뿐 밖으로 내보낼 줄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자연 죽은 물이 될 수밖에 없지요. 받은 만큼 나누는 곳에는 생명이 꽃 피고, 움켜쥔 채로 나누지 않은 곳에는 죽음만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찾아가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포근하고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그 사람에게 가면 왠지 다시 힘을 얻을 것만 같고 찾아가 아무 말 안 해도 푹 쉬고 온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가만 들여다보면 그런 사람들은 자기의 것을 못 챙길 정도로 나누는 것이 몸에 배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늘 솟아나는 생명의 힘이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도 찾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쓸쓸한 마당에서 친구들을 기다리지만 사람들은 그를 고약하게 여길 뿐 가까이 하려하지 않습니다. 그가 움켜쥐기만 할 뿐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움켜쥐면 풍요롭게 될 것 같지만 결과는 죽음뿐입니다. 결국 생명과 죽음, 축복과 박복은 내 것을 얼마나 나누면서 사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하느님과 인간을 위하여 일생을 봉헌하시고 내어 주는 삶을 통하여 가장 복된 여인이 되었듯이 나눔의 삶을 통한 축복의 한 해를 맞으시길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천주교는 마리아를 믿는 교인가?
-유영봉 몬시뇰 -
초 점: 마리아의 지위는 예수님의 지위에서 나온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리던 메시아 그리스도임을,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깨달은 교회는 서슴없이 예수를 낳고 기르신 마리아를 '천주의 모친'이라고 불렀다. 구원 역사 안에서 마리아의 특별한 위치와 기여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1. 천주교는 마리아를 믿는 교인가?
우리 주변의 프로테스탄 신자들이 가끔 천주교를 비난할 때, "천주교는 예수님을 믿는 교가 아니라 마리아를 믿는 교회이다."고 말한다. 왜 그런 말을 하는가? 성당 마당에 들어서면 어느 성당이나 성모마리아 상(像)이 모셔져 있고, 한해를 시작하는 1월 1일을 마리아의 축일로 지낼 뿐만 아니라, 그 축일의 이름도 '천주의 모친 마리아 대 축일'이다. 한 인간을 '하느님의 모친'이라니 얼마나 엄청난 호칭인가? 더구나 한국 교회는 이 축일을 주일이 아니라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의무축일'로 지낸다. 그리고 계절의 여왕인 5월을 성모님께 봉헌하고 성모성월로 지낸다. 어디 그 뿐인가? 다른 기도는 몰라도 성모송을 계속 바치는 '묵주의 기도'를 모르는 신자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이렇게 성모님께 대한 교회의 애정과 정성이 남다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가 성모님께 바치는 이러한 공경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성탄의 기쁨을 경축하는 8일 동안의 축제가 오늘로 마감된다. 어떤 분의 탄생을 축하한다면 그분의 어머님을 그 축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은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 아침을 여는 1월 1일이다. "시작이 반이다."는 말이 있듯이 참으로 한해에 있어 중요한 날이다. 그런데 교회는 이 날을 성모님께 바치고 있는 것이다. 무슨 이유인가?
구약은 신약에로 인도하는 빛이며, 구약의 모든 계시와 예언이 신약에서 완성된다. 구약은 구세주의 오심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시기였다. 말하자면 구약은 메시아의 오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예수의 탄생은 신.구약을 가르는 분기점이 아닌가? 마리아는 그 극적인 사건, 즉 메시아의 탄생 사건의 핵심에 자리하고 계신 분이시다. 마리아를 통해서 신약의 새 빛이 비춰오기 시작했기에 새해 첫날에 마리아의 축일을 지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2. 마리아는 언제부터 '천주의 모친'으로 불리었는가?
한 여인을 '하느님의 어머니' 즉 '천주의 모친'으로 부르는 것은 합당한가? 교회는 왜 이 엄청난 호칭을 마리아에게 드렸는가?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하며 경탄하였다.
교회가 마리아에게 '천주의 모친'이란 이름을 드린 것은, 서기 431년 에페소 공의회 때의 일이다. 아주 오래된 일이다. 교회사를 보면, "예수는 뛰어난 인간일 뿐이지 결코 신(神)이 아니다."하며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부인한 '아리우스 파'의 주장이 있었다. 서기 325년 니케나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의 주장을 이단(異端)이라고 단죄하였다. 그 후 서기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 두 위격이 있다고 주장한 '네스또리우스'의 주장을 또한 이단으로 단죄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한 위격(位格)안에 있음을 확인하였으며, 예수님이 바로 제2위 성자임을 확고히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그 예수가 바로 하느님 제 2위 성자이시기에 당연히 마리아를 '천주의 모친'으로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역적(逆賊)을 낳은 여자는 역적의 모친이 되고, 성군(聖君)을 낳은 여자는 성군의 모후(母后)가 되는 것이 아닌가?
마리아의 위상(位相)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위상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신학이나 신심의 발전을 보더라도 마리아론(論)은 항상 그리스도론(論)에서 나오게 되어 있다. 마리아께 대한 공경과 신심은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마리아가 예수를 낳고 기르신 분이 아니라면 교회가 마리아를 공경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깨닫고 믿었기에, 일찍부터 마리아에게 '천주의 모친'이라는 엄청난 '호칭'을 드렸던 거이다.
3. 마리아는 그저 운 좋은 여자인가?
마리아는 '운 좋게' 구세주의 어머니로 선택되어, 뭇 사람들의 공경과 사랑을 받게된 스타인가? 결코 그렇지가 않다. 마리아는 예수를 잉태한 그 순간부터 그의 생애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자신의 소명을 깨닫고 그 길을 가는 예수는 이해하기 힘든 아들이었다. 자신의 인생에 불어닥친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손길은 갖가지 시련을 안겨주었다. 불가사의한 출산, 피난, 아들의 엉뚱한 언행, 아들의 가출, 방랑 설교가가 된 아들, 사형수 어머니 등등 시련의 연속이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나를 어디로 내몰고 계시는가?" 마리아는 이런 의문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했다. 그러나 한번도 하느님의 원망하기보다는 줄곧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fiat)"를 반복하는 삶이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때로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때가 많다.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이 오는지?" 이해하기 힘들 때 우리도 성모님처럼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하며 그분께 온전히 우리를 내맡길 수 있어야 하겠다. 오늘 본기도의 말씀대로 "성모 마리아를 통하여 생명의 근원이신 당신 성자를 맞아들이게 되었사오니, 우리로 하여금 성모 마리아는 또한 우리의 전구임을 깨닫게 하소서." 하며 정성되이 기도하자.
-김정훈신부-
오늘 우리는 베들레헴의 어느 마구간에 태어나신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듣는다. 이 이야기는 복된 삶이 무엇인지, 참된 신앙이란 어떤 것인지를 천주(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성모 마리아의 모범을 통해 가르쳐 준다.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루카 2,16)
만왕의 왕이시며 세상의 구세주이신 분의 탄생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소박하고 조용한 분위기이다. 천사들의 경배나 천상 군대의 찬미소리는 물론 값진 예물을 들고 찾아온 동방박사들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곳은 왕도(王都)가 아닌 시골이며, 왕궁이 아닌 마구간이다. 또한 세상의 빛이신 분께서 모든 것이 고요하게 잠든 한밤중에 태어나셨다는 사실도 천상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찬란한 광채와 함께 오실 것이라고 기대했던 모습과 매우 다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보잘것없는 이들(작은 이들)을 구원하러 오신 분(루카 17,2 참조)이시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당신의 탄생지로 누추한 시골 마구간을 택하신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엘리야 예언자가 하느님을 체험한 사건을 떠올릴 수 있다. 이세벨에게 쫓겨다니며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엘리야에게 새로운 힘과 사명을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발현하셨을 때의 일이다. 엘리야가 체험한 하느님은 강한 바람, 지진, 불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하고 여린 소리로 당신을 드러내셨다.(1열왕 19,11-12)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서는 요란하고 현란한 방식이 아니라 조용하고 차분한 방식으로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고 구원을 이루시는 분임을 알 수 있다. 한밤중 시골 마구간을 배경으로 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서도 동일한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곧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도 같은 방식으로 이 세상 역사에 개입하시어 보잘것없는 이들을 구원하시는 분이다.
천사가 일러준 대로 목자들은 베들레헴으로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낸다. 이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릴 때면 언제나 중앙에는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님을, 그 양편에는 요셉과 마리아를, 나머지 둘레에는 목동들을, 마지막으로 가장자리에는 가축들을 배치한 그림이 그려진다. 그렇게 모든 눈이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해 있는 장면이 펼쳐진다. 이러한 분위기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삶만이 참된 기쁨과 행복을 얻는 길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목자들은 들에서 천사들을 만난 일과 천사들이 들려준 말을 마리아와 요셉에게 전한다.(루카 2,17) 여기서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탄생 소식이 벌써 널리 퍼진 것으로 전제하고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고 전한다.(루카 2,18)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은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놀라움이 신앙으로 발전했다는 말이 이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 또는 “거참, 신기하네!” 하고 말할 정도의 일로 여겨진 듯하다. 우리도 가끔 매스컴을 통해 놀라운 일들을 대한다. 그런데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때만 신기해할 뿐이지 시간이 조금 흐르면 어느새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도 그랬던 것 같다. 태어나신 분이 누구신지, 그 탄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고 찾는 것이 아니라 천사들이 나타났고 천상 군대가 하느님께 찬미가를 불렀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을 전하기 위해 잠시 나타났다 사라진 존재들에게 마음을 빼앗겨 자신들과 함께하기 위해 오신 구세주께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마리아는 이러한 사람들과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마리아는 놀라움 뒤에 숨겨진 하느님의 뜻과 섭리를 이해하는 데 몰입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의 신비는 이성을 뛰어넘는 것이기에 그것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하느님께서 직?밝혀주기를 기다린 것이다. 마리아의 태도는 소박하고 고요하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탄생 사건과 공통점이 있다. 하느님의 신비를 단숨에 알아듣겠다고 야단법석을 떨지 않는다. 이성을 뛰어넘는 것이라면 깨닫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수동적 자세를 취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능동적으로 모든 것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고 하느님의 도움 안에서 그분의 신비한 뜻을 깨달으려 최선을 다한다.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는 동시에 그 부족함을 채워주실 수 있는 하느님께 자신을 낮추면서 그분 지혜의 비추심을 갈망하는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마리아의 소박하고 고요한 신앙이다.
마리아의 신앙은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뢰와 기다림을 토대로 한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 해도 그 안에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이 분명하면 마리아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모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고요하게 기다린다. 분명 마리아는 이러한 소박하고 고요한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느꼈을 것이다. 또한 세상의 눈에는 미친 아들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먼저 보낸 불쌍한 인생 여정을 걸었지만 하느님의 눈에는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평화를 누린 행복한 여인이었음이 틀림없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되새기는’ 마리아의 신앙을 거울삼아 우리 신앙을 비춰보고 바로 세워야 한다.
“주님, 물을 떠나 살 수 없는 물고기처럼 저도 당신을 떠나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때로 그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세속적 사랑과 행복을 찾아 당신을 떠나 헤매기도 합니다. 이처럼 나약하고 부족한 저희에게 당신과 함께하는 삶만이 참된 행복이며 영원한 생명임을 깨닫게 하시고, 저희를 당신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세상 유혹(돈, 쾌락, 지위, 과도한 취미생활 등)을 떨쳐버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그리고 저희 삶을 자주 깊이 성찰하면서 당신의 뜻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는 참된 신앙인이 되게 하소서.”
묵상과 기도
▷예수님을 마음 한가운데 모시고 참된 행복을 누리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마리아의 신앙에서 느낀 점은 무엇인가? 마리아의 신앙과 나의 신앙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느님의 어머니, 우리들의 어머니
-정동수 신부 -
훈련소에 들어가서 낯선 군복을 받고, 입고 있던 옷을 싸서 집으로 보냈습니다. 보충대를 떠나 교육대에 가서는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며 정신적인 충격 속에 한참 머물러 있었습니다. ‘감성적이어서는 안되겠다’ 생각했습니다. 조교들도 “너희가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마라. 개나 소 같은 짐승이라고 생각해야 훈련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말했습니다. 힘든 시절을 버텨내기 위해서 저는 스스로의 마음을 메마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에는 편지 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어머니께 편지를 쓰려 했는데, ‘어머니’라는 글자만 쓰려 해도 눈물이 났습니다. ‘내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되는데...’ 생각했지만, 편지지는 하염없이 젖어만 갔습니다. 다음날 다시 써보려고 했는데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놈의 눈물이 마르면 편지를 쓰리라” 생각하고 매일 편지지를 꺼내 어머니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늘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눈물 말리기 작전을 포기하고 눈물 젖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훈련 초기에는 힘들어서 인간미를 포기하려 했었는데, 어머니로 인해서 사람다운 따스함을 지켜 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어머니는 떠올림만으로도 마음이 따스해집니다. 어머니는 나를 메마른 인간에서 따뜻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어머니는 화려함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작음, 겸손함, 따스함, 포근함, 침묵으로 항상 나를 새롭게 태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모 마리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며, 새해 첫날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냅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특별히 공경하는 이유는 새롭게 태어나게 해주는 그분의 덕을 닮아가기 위해서입니다. 힘들어하는 이웃을 나의 따뜻함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새로운 탄생을 위해 안아 주어야 합니다.
말씀의 어머니
-이종민 신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천주의 성모”, 즉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불립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이요 참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사람은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면서 공경합니다.
사람들은 자주 이런 의문을 품기도 합니다. 수많은 여인 중에 왜 하필이면, 나자렛의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었을까? 여기에 대해 성경에서 한 가지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 앞에 한 천사가 나타나 “기뻐하여라”라고 인사 하였을 때, 마리아의 반응은 몹시 놀라면서도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또 오늘 복음에서도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고 합니다. 또 성전에서 아직 어린 예수님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을 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라는 대답을 듣고, 아들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였지만,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라고 합니다. 마리아는 아마도 말씀을 받아들이고 “곰곰이 생각하는 습관”이 있었으며 이것이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선택된 이유일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하는 습관은 사람을 영적으로 민감하게 만듭니다. 마리아가 영적으로 무딘 사람이었다면, 당황스러워하고 거부하고 하느님의 말씀이 들려와도 그냥 흘려버렸을 것입니다. 또 교만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하느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들려 왔음을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곰곰이 생각하는 습관으로 인해 영적으로 예민해 질 수 있었고, 차분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영적 예민함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이 들려 왔을 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당황스러워하거나 거부하지 않았고, 겸손하게 마음속에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2007년의 마지막 날, 어제 복음에서 요한 복음사가는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하느님의 아들”, 곧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에 반해 성모님은 말씀을 받아들이고 품어 안음으로써 구세주를 세상에 보여 주셨고, “그리스도의 어머니”, “천주의 모친”이 되셨습니다.
성모님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 자신의 아들이 하는 일을 그 때에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으나 우선 받아들이고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그것이 이해될 때까지 말씀은 어느 기간 동안 성모님의 마음속에 간직되고 있었습니다. 결국 성모님은 항상 “말씀을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이 사건은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을 마음속에 품은 작은 순종과 노력으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말씀을 마음 안에 품는 일은 지금도 계속 되어야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말씀은 계속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성서를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주위 형제들과 이웃들을 통해서 들려옵니다. 때때로 우리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셨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을 기억해 봅시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간직하고 있다면, 시간이 흘러 때가 찼을 때 그런 의문은 사라집니다. 하느님의 뜻은 더 이상 감추어진 것이 아니라 세상에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가 아이를 가져 구세주를 세상에 보여 주듯,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느님의 말씀은 세상에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들려오는 말씀을 놓쳐버리지 않고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면, 우리는 성모님처럼 예수님을 세상에 드러내 보일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세상에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얻게된 우리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요 상속자가 되는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2008년 새해에는 무엇보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복을 누리고, 또다른 성모님으로서 이웃에게 복을 나누어주는 한해 되시기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