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www.fmkorea.com/2944066603
이한응
서양문물을 학습한 이한응은
1901년 3등 참찬관으로 영국 공관에 부임했다
그후 1904년 초 30살 나이에 그는
서리공사를 맡아 ‘1인 공관’을 책임졌다
대한제국에 국제적 위기가 오자
이한응은 영국을 상대로 외교를 펼친다.
그는 세계 정세를 영국·프랑스·일본·러시아를
네 꼭짓점으로 하는 사각형 구도로 묘사했다.
그런 뒤 “영·프가 힘을 합쳐러·일을
상호 견제하는 안정된 3각 구도를 만들어야 전쟁을 막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동아시아의 정치적 열쇠를 쥐고 있는
한국의 독립과 주권 보장은 필수”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영국 외무성
“영국의 동아시아 정책은 영일동맹에 기초한다”고 거부했다.
이한응이 계속 면담을 신청하자,
서면으로 접수하라는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1904년 말 일본이
대한제국의 해외공관 인원을 줄이려 하자
이한응은 영국 외무성에
“‘한국이 런던에 전권공사를 파견해주길 바란다’는 전문을
고종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캠벨은
“이 작은 음모는 한국 대표부를 강화하려는 기도” 라며 무시했다.
이한응은 1905년 2월 8일 영국 외교부를 방문하여 동아시아국 고위관리(Senior Clerk) 랭리(Walter Langley)에게 한국독립보장 문제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그리고 본국과의 연락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중국 치푸 주재 영국총영사관을 통해 고종황제와의 연락을 하게 해달라고 하였지만, 이 또한 거절당하였다.
하지만 이한응 대리공사는 영국 외무부를 상대로 계속해서 한국의 독립 보존을 요청하였다. 이한응은 1905년 3월 3일자로 영국 외무대신에게 대한제국 정부를 위해 거중조정(good office)을 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같이 이한응 대리공사가 영국 외교당국에 대한 끈질긴 활동은 영국 외교관들을 매우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1905년 3월 영국의 한 관리가 이한응의 대영외교에 무심코 한 구절 적어놓은 것이 있는데, 여기에는 한국의 공사대리를 귀찮게 여기는 태도가 드러난다.
“그[이한응]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고, 보아하니 그의 정부도 그에게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새다.”
이후에도 이한응은 러시아가 일본의 한반도 점령을 용인할 것을 우려해 영국에 이를 막아달라는 각서를 전달했다. 하지만 영국 외무성은 “당사국 간 교섭”이라며 거절했다.
이한응은 5월 11일 외무상 면담을 요청했지만 답변이 없었다
이날은 일본정부는 영일동맹의 기간과 범위를 확장하는 논의의 초안이 교환된 날이었다.
이한응 열사의 유서
대한제국의 외교관으로서 국권이 상실되어 가는 것을 막지 못한다는 한계를 절감하고 비통한 심정에서 이한응 공사는
“오호라 국가는 주권이 없고 인종은 평등을 상실하여 각종 교섭에 치욕이 그지없으니 이 어찌 피끓는 자가 참을 수 있는 일인가. 장차 종묘 사직은 망하고 민족은 노예가 될 것이다. 구차하게 살아남아 치욕을 더하는 것보다 차라리 한순간에 모든것을 잊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라는 유서를 남긴 채 1905년 5월 12일 런던에 있는 주영공사관에서 자결 순국을 하였다.
그가 순국한 장소는 주영 한국대사관의 자신의 침실이며, 시신은 창문 끈을 문 뒤의 핀에 걸어 목을 맨 채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고종의 명으로 주영 명예총영사 모건의 도움을 받아 국내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유해를 국내에 보낸 이후 모건이 보낸 1905년 5월24일자 편지에는
“불쌍한 친구. 그는 극동에서 진행의 결과에 대해 매우 상심하고 있었고, 그의 외교관 생활이 끝날 것이라고 두려워하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라고 마지막에 적고 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해 그의 추도회에는 수백명이 모였다고 한다
참고https://mnews.joins.com/article/18432497#home
http://e-gonghun.mpva.go.kr/user/IndepCrusaderDetail.do?goTocode=20003&mngNo=8936
댓펌
영프가 힘을 합쳐 러일을 견제.. 정세를 완전히 잘못 보고 있었네 ㅠㅜ 일본이랑 중국은 서양이랑 부분적 교역으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고 하던데. 근대 한반도의 수난은 지정학적 재앙이 아니었나 싶다.
저분이 정세를 모르지는 않았겠지
서양문물 학습했고 영국에 거주하는 사람인데
다만 할 수 있는 일이 매우 제한되어 있으니
영국과 일본간의 관계를 갈라놓으려 노력한건데,
당시 영국 입장에선
러시아 견제용으로 일본만큼 좋은 파트너가 없으니
저게 씨알도 안 먹혔다는게 슬픈거
지정학적으로 우리이제 좆됐넹 걍 놀아야지 할순없으니 0.4% 확률이라도 최선을 다해 박는게 애국자와 충신의 마음이지
첫댓글 마음이 씁쓸하다... 죽고싶을 정도였다는 게...
마지막 문단이 맞다 현실이 아무리 비관적이고 지옥같아도 가만히 있는 것 보다야 백배 천배 낫지
해외에서 애쓰신 분이 너무 안알려져있어서 슬프다...
눈물나,,, 얼마나 착잡하셨을까...
하 저 마음이 이해돼서 씁쓸하다....
희박한 확률이란 걸 알면서도, 무시를 예상하면서도 어떻게든 해보려는 마음. 애써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