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연산군과 함께 조선의 폭군으로 알려져 있는 광해군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상 반정으로 폐위된 왕은 딱 두명입니다. 연산군과 광해군이죠.
연산군은 워낙 망나니였기 때문에 그렇다 치더라도 광해군에 대해서는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그럴까요?
오늘은 광해군의 업적과 그가 폭군이라고 불리는 이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폐모살제(廢母殺弟), 광해군이 폭군이라 불리는 이유
광해군은 세자만 16년을 지냈습니다. 아버지인 선조가 자신을 그렇게 사랑해주거나 아껴주지도 않았고, 심지어 어린 계모에게서는 적장자인 영창대군까지 태어났습니다. 명나라의 책봉도 받지 못한 세자 광해군의 입지는 아주 좁았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통해 백성을 구제하는 데 힘썼고, 선조가 갑작스럽게 병사하면서 왕위에 오를수 있었죠. 왕위에 오른 후에 동생에 대한 질투와 미움이 극도로 표출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즉위한 지 5년 후에 역모사건을 이유로 동생 영창대군을 처리한 사건입니다. 자신은 나라를 지키려고 동분서주했지만 서자출신을 바꾸지는 못했는데 동생인 영창대군은 적자라는 이유만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죠. 강화도에 유배된 영창대군은 고작 9살이었고,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됩니다. 방안을 뜨겁게 데워서 쪄 죽이는 방법이었는데, 방문을 잠그고 아궁이에 불을 지폈는데 어린 영창대군은 방바닥에 앉지 못하고 까치발로 서서 창살을 부여잡고 울었다고 합니다. 야사에 따르면 기력이 다해서 영창대군이 쓰러져 죽었을 때 달궈진 바닥에 옆구리의 뼈까지 다 탔을 정도라고 하죠.
선조의 새 부인이자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왕후도 결국 폐위당해 유폐됩니다.
이 사건이 바로 폐모살제, 광해군이 폭군으로 불리게 된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또한 광해군은 조선과 오랜 협력 관계를 유지하던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배신하고 후금 (청나라)와 손을 잡게 되는데, 훗날 이 때문에 폐위됩니다.
광해군의 업적, 백성을 사랑한 왕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정하고 신하들과 함께 피난을 떠납니다. 선조는 피난을 떠나면서 조정을 둘로 나눠, 일부는 선조를 따라 의주로 떠나도록 했고, 일부는 광해군을 따라 함경도, 강원도 등으로 가서 왜군을 막도록 했습니다. 이 때 광해군은 여러 지역을 찾아다니면서 군대와 식량을 모아 왜군을 막는 데 큰 공을 세웠고,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세자 시절 뿐 아니라 즉위 이후에도 광해군은 전후 뒷수습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먼저 양전 사업 (토지의 넓이를 측량하는 사업)을 실시하여 토지 대장과 호적을 새로 만들어서 세금을 걷을수 있도록 했습니다. 전쟁을 겪고 나서 남은 인구가 몇명인지, 어떤 기준으로 세금을 걷을 것인지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였죠. 그 후 실시한 것이 바로 대동법입니다. 백성의 의무 가운데 하나인 공납은 원래 지역의 특산물을 진상하는 것이었는데, 그 지역에 나지도 않는 물품이 멋대로 할당되기 일쑤였습니다. 때문에 백성들은 이를 사서 바쳐야 했는데 가난한 백성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었습니다. 이에 모든 공납을 쌀로 처리하는 대동법을 최초로 실시한 인물이 광해군이었습니다.
선조 때 시작한 창덕궁 복원공사도 마무리하고, 용비어천가를 인쇄, 보급하고, 탕평 인사와 문묘 종사를 실시하고, 고려사, 국조보감, 동의보감 등의 책들을 복원, 간행하기도 했습니다.
가장 유명한 업적은 바로 중립외교입니다. 광해군은 왕족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전쟁을 온몸으로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대외정책 제 1순위가 전쟁발생 방지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겠죠?
당시 명나라는 조선 파병으로 재정이 고갈되어 약해지고 여진족은 급격히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여진족은 후금 (청나라)을 세우고 명나라에 선전포고를 했는데, 명나라는 조선에 후금을 막을 지원병을 보내달라고 요청합니다.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도와주긴 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요구였지만, 조선은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상태었습니다. 광해군은 일단 파병을 미룰 수 있을 만큼 미루고 군인을 모읍니다. 그 후 중국어 재능이 있었던 강홍립을 지원군의 대장으로 앉히고 최대한 병사를 살릴 수 있도록 명령했습니다. 전투에서 명나라가 절대적으로 열세인 가운데 조선도 후금군에 둘러싸이게 되자 강홍립이 후금에 호소하여 명나라에 재촉당해 어쩔 수 없이 오긴 했지만 싸울 마음이 없다는 의사표시를 했습니다. 조선을 적으로 둘 이유가 없었던 후금은 강홍립과 병사들은 죽이지 않고 포로로 삼게 됩니다.
인조반정과 친명배금 정책
광해군의 외교정책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은 명나라를 중시하고 청나라를 멸시하는 친명배금 정책을 내세우면서 광해군을 폐위시킵니다. 바로 인조반정입니다. 이후 광해군은 왕위를 빼앗기고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물론 사대의 의를 저버리고, 패륜까지 저지른 광해군을 폭군으로 보는 시선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입장에서 기록되는 법입니다.
오늘날 광해군이 백성의 입장에서 그들을 사랑한 왕으로 재평가 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업적과 광해군이라는 사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흥미로운 역사이야기! 오늘의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