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www.fmkorea.com/6813993146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릉들은
늘 도굴꾼들의 표적이 되어왔다.
(텅 비어있는 쿠푸왕의 피라미드 왕의 방)
이러한 이유로
도굴되지 않은 왕릉의 가치는 엄청나게 높으며
이러한 왕릉을 발굴한 역사로
외국은 투탕카멘의 무덤,
한국에서는 무령왕릉이 사람들의 뇌리에 기억되어 있다.
하지만, 엄연한 왕릉임에도 현대까지 도굴되지 않은
왕릉들이 여전히 한국에 많이 남아있는데
(심지어 발굴조차 되지 않음)
(가야 대형 무덤에 80년대 도굴꾼이 두고 간 고무다라)
짜잔~ 그것은 바로 조선시대의 왕릉들이다.
조선왕릉은 초기에는 석실 안에 시신을 안치했는데
이 과정에 쓸데없이 백성 고생시킨다 하여
세조의 유언 이후로는 회곽묘 방식으로 바뀐다
회곽묘는 대략 이런식으로 제작되는데
이렇게 한 이유는 나무관에만 시신을 넣어 안치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나무가 썩어 관이 흙무게에 부서지고
나무 뿌리가 관을 뚫고 들어오는 것을
우리 조상님들께서 극도로 싫어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회곽묘에는
조상들도 예상치 못한 화학반응이 동반되었는데
뿌리 들어오지 말라고 관 주위에 발라둔 석회가
주위의 수분을 흡수하면서 굳어가는데
열을 방출했던 것이다.
(121 도씨에서 멸균을 하는 고압증기멸균)
회곽묘는 굳어가는 몇일간
최고 200도의 고온을 내뿜었고, 내부의 공기는 팽창되어
현대 수술실에서 널리쓰는 고압증기멸균 방식으로
시신을 멸균처리하고 말았던 것이다
(콘크리트가 되어버린 조선시대 회곽묘들)
덕분에 관 내부는 모든 미생물이 사멸하고
수분까지 쫙쫙 빨아들여주면서
자연스럽게 시신을 미라로 만들어주었다
(힘들게 미라 만든 이집트인들 의문의 1패)
이걸 모르고 대원군 아버지묘를 도굴시도한
오페르트는 "대체 뭐가 들었길래
관이 강철로 덮여 있었다 시발!!"
이라고 표현하였으며,
현재 사진으로 남아있는 회곽묘들은
대부분 지역 사대부들의 무덤으로
실제 왕릉들은 저것보다 더 두껍게 석회를 발랐다고 하니
(기록상 석회 두께가 1m 이상)
감시를 피해 땅을 판다 한들
관 내부의 부장품은 쉽게 털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임진왜란때 한양을 점령한 왜군이 선정릉을 도굴한것이
조선왕릉의 유일한 도굴사례이며
이때 석회 부수느라 개고생을 한건지
개고생을 해도 딱히 건질게 없었던 건지
왜놈들도 더이상의 도굴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발굴되지 않은 이유에는 또 하나가 있는데
기록덕후인 조선답게
무덤에 뭐가 들어가는지, 무덤 석회 두께는 어떤지
이미 자세하게 기록을 남겼기 때문에
굳이 파보지 않아도 뭐가 있는지 다 알 수 있기 때문
게다가 검소함을 강조한 탓에
비싼 부장품은 애초에 들어가질 않음.
미히히히히라 사진을 주의하세요
(조선 사대부들의 회곽묘에서 나오는 미라 연구)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왕릉을 발굴해 본다면
미라가 된 조선 왕 이목구비를 실제로 볼 확률이 크고
치아 상태를 통해 건강상태를 알 수 있고
알려지지 않은 정확한 사인을 파악한다거나
영양상태는 어떠했는지,
재수가 좋다면 미발견 서적이 나올 수도 있고
당시의 복식 고증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조상들은 시신 썩는걸 보이는게 싫다고 시신에 옷을 여러겹 입혔다)
그러나 조선 왕릉은 전주이씨 종약원이 관리하며
이 기관에서 왕릉 발굴을 절대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까지 조선왕릉에 대한 발굴은 이뤄진 적이 없다.
따라서 회곽묘에 대한 연구는
우연히 개발과정에서 발견되는 무연고묘나
오래된 양반집안 묘를 이장할때
따라가서 확인하는 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조선시대 회곽묘에서 나온 러브레터)
첫댓글 재밌닼ㅋㅋ
와 아기 낳다가 죽은 미라 사진... 얼마나 힘드셨을지 상상도 안가 ㅜㅜ
재밌다 근데 아기낳다죽다니 ㅜㅜ
흥미롭..존잼..
와 쥰나 흥미돋ㅋㅋㅋㅋ 미라가 되셨구나
글 진짜 재밌다ㅋㅋㅋㅋ
와존잼ㅋㅋㅋ
아 저 외국명품바늘 사서 보낸 편지가 회곽묘에서 나온거였구나 ㅋㅋㅋㅋ
재밌다ㅋㅋㅋㅋ이런글 너무 유익하고 좋아
아무래도 쫌 그렇긴 하지... 나같아도 우리 조상님 묘 파보겠다 하면 찝찝할듯..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박 신기해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