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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폼페이우스의 기둥 ⓒ수해 |
기원전 48년, 고대 로마 공화정 말기의 장군이자 정치가였던 ‘폼페이우스’는 그리스 중부 파르살로스 평원에서 벌어진 한바탕 치열한 격전에서 그의 숙적인 카이사르에게 참패하자, 황급히 알렉산드리아로 도주해 온다. 그러나 당시 판단력이 심히 부족했던 이집트의 어린 왕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로마의 실력가인 카이사르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폼페이우스를 살해하여 그의 유골을 항아리에 넣어서 카이사르에게 보낸다.
폼페이우스를 생포하려고 했던 카이사르는 실망하여 폼페이우스의 유골이 든 항아리를 미련 없이 성문 밖에다 묻어버렸건만, 이상하게도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한사코 지금까지도 이 기둥 꼭대기에 폼페이우스의 유골 항아리가 보관되어 있다고 하는 근거 없는 낭설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믿어마지않는 눈치였다.
현재 폼페이우스의 기둥이 서 있는 이 자리는, 원래 2세기 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권력통치의 일환으로 창출해놓은 혼성의 신 세라피스를 모신 신전인 세라페움(Sarapeum)이 있었다. 그런데 4세기 말엽 ‘헬레니즘의 다원주의적 가치관’과 ‘헤브라이즘의 절대주의적 가치관’ 사이에서 발생한 격심한 충돌로 인해 400개의 화강암 기둥이 서 있던 장대한 신전 건물은 모조리 파괴되어 버린 채, 지금은 단 한 개의 기둥만 남아 지난날의 영화를 묵시적으로 증언해 주고 있다.
폼페이우스의 기둥으로부터 멀찌감치 물러나서, 출입구 왼쪽 능선을 따라 비스듬히 조성해놓은 100개의 계단을 따라 걸으며 드넓은 유적지를 전체적으로 한 바퀴 둘러보노라니, 유적지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그레코-로만(Greco-Roman) 시대의 정교한 조각품들이 무수히 진열되어 있었다.
세심한 안목으로 질서정연하게 배열해 놓은 유물과 유물 사이를 지나, 한창 발굴 중인 고대의 수로(水路)를 따라 계속 걸어가 보니, 뜻밖에도 폼페이우스의 기둥이 서 있는 비탈진 언덕 아래편에 ‘나일로 미터(Nilometer, 나일강의 수위 측정표)’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고대에 알렉산드리아 시내를 강타한 몇 차례의 원인 모를 지진으로 인해 지형이 완전히 변해버렸지만, 지진이 발생하기 전에는 나일강의 범람을 이용하여 아스완의 채석장에서 실어온 붉은 화강암 기둥이 즐비하게 도열해 있는 이 세라피스 신전은, 항해에 나침반 역할을 톡톡히 해 주었다고 하는 기록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났다.
군데군데 초록빛 물이끼가 말라붙어있는 나일로 미터 표지판 주위에는, 지하수로처럼 보이는 여러 개의 동굴이 파져 있었다. 동굴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안내문을 대충 읽어보니, 이곳은 고대에 알렉산드리아의 유다인들이 박해를 피해 몰래 숨어들어 성서를 읽고 예배를 보던 장소였다. 그래서인지 그 옛날 성서를 감춰두었던 어두컴컴한 진흙동굴 곳곳에서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번역한, 잉크 냄새가 채 마르지 않은 헬라어 성서를 펼쳐들고, 은밀히 예배를 보던 유다인들의 기도소리가 낭랑히 들려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 카이트베이 요새 ⓒ수해 |
폼페이우스의 기둥을 돌아 나오자 주변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노천카페에서 간단한 요기를 하고나서, 콤 엘 데카(Kom El Dekka) 지역에 있는 ‘로마 원형극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집트 유일의 로마 시대 원형극장이 남아있는 ‘데카의 언덕’ 주변에는, 로마식 저택과 목욕탕과 강당을 비롯한 각종 건축물의 발굴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총 13개의 계단에 800명의 인원을 동시 수용할 수 있는 야외극장 안에는 지금도 로마 시대의 모자이크 문양이 바닥에 선명하게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공연자들이 틈틈이 휴식을 취하던 대기실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본 로마 원형극장 가운데 규모는 가장 작지만, 타원형의 극장 맞은편에 조성해 놓은 소박한 규모의 정원을 따라서 두 줄로 나란히 전시해 놓은 그레코-로만 시대의 다양한 유물들을 통해, 고대 로마 시대에 이곳이 알렉산드리아 시민들로부터 얼마나 각광받는 문화공간이었는지를 한눈에 짐작할 수 있었다.
로마 원형극장의 돌계단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고 나서, 고대에 알렉산더 대왕의 석관이 안치되었던 장소로 알려진 나비 다니엘 모스크(Nabii Daniel Mosque)와 로마 시대 지하묘지인 카타콤베(Catacombs)를 둘러보고, 다시 트램을 타고 모로코의 나그네들과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인 카이트베이 요새(Fort of Qaitbay)를 향해 부지런히 달려갔다.
트램을 타고 가는 동안 오전에 헌책방에서 구입한 알렉산드리아 유적 안내도를 자세히 살펴보니, 반원형의 구조를 하고 있는 알렉산드리아 해변은 사드 자그루드 광장을 중심으로 서쪽에 카이트베이 요새 · 무명용사의 비 · 아부 알 압바스 알 무르시 모스크가 서 있고, 동쪽으로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 성 마르코 순교기념비 · 무스타파 케말 분묘군 · 스탠리 다리 · 몬타자 해상공원이 둥글게 늘어서 있었다.
지도 속에서 알렉산드리아 해변의 서쪽 끝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카이트베이 요새는, 1466년에 맘루크 왕조(13~16세기에 걸쳐 약 250년간 이집트 지역에 성립되었던 이슬람 왕조)의 술탄 ‘카이트 베이’가 투르크 군의 공격으로부터 해안선을 방어하기 위해 이 지점에 요새를 구축하고 내부에 모스크를 세운, 전형적인 이슬람 양식의 건축물이다. 15세기 무렵에는 알렉산드리아뿐만 아니라 지중해 연안 전역의 군사적 방어 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었던 이곳은,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손꼽히는 ‘파로스 등대’가 있었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 알렉산드리아 해변의 저녁 노을 ⓒ수해 |
세계 최초의 등대로 알려진 파로스 등대는, 기원전 3세기에 이집트를 지배한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지시에 따라 당대의 건축가 ‘소스트라투스’가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섬에 세운 등대다. 그런데 1100년과 1307년에 일어난 두 차례의 대지진으로 깡그리 무너져 내린 후, 점차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갔다. 그러다가 1994년 알렉산드리아의 바다 속에서 높이 4.55m, 무게 12t에 이르는 여신상을 비롯한 파로스 등대의 잔해 수백 점이 인양(引揚)되면서 세계적인 이목을 끌게 되었다.
트램을 타고 오다가 사드 자그루드 광장 앞에서 내려, 네 개의 반원형 천장과 첨탑이 높이 솟은 안달루시아 양식의 ‘아부 알 압바스 알 무르시 사원’과 ‘무명용사의 비’를 지나서 해변의 맨 서쪽에 위치한 카이트베이 요새로 향했다. 중세에 알렉산드리아 항구 주변에 모여 살던 어부와 선원들이 신봉하는 수호성인을 모신 아부 알 압바스 알 무르시 사원은 도시 최대의 이슬람 사원이다.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들어 낚시를 하거나 연날리기를 하고 있는 반원형의 해안선을 따라서 약속장소인 카이트베이 요새 앞까지 걸어가자, 모로코의 건축학자 부부는 지중해의 눈부신 석양을 아랑곳하지 않고,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를 펼쳐놓고 한창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1304년, 모로코 탕헤르에서 태어나 독실한 모슬렘으로 성장한 이븐 바투타는 평생 법관으로 활동하면서 세계 각지를 주유(周遊)하였다. 1325년, 21세 때 무슬림의 5대 강령 중의 한 가지 덕목인 하즈(Hajj, 이슬람교도들의 성지순례)와 동방 이슬람문명 탐구를 목적으로 떠난 그의 노정은, 30년간 유럽-아프리카-아시아 3대륙을 아우르는 대장정이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 열렬한 동경과 멈추지 않는 지적 호기심으로 장장 10만㎞에 이르는 여정을 흔쾌히 답파(踏破)하고, 1368년 64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고향인 탕헤르의 무덤에 안장될 때까지, 그가 보고 들은 모든 순례 여정은 놀랍게도 현재까지 기록으로 생생하게 남아 전해지고 있다.
오늘날 비록 원본은 소실되고 없지만, 다행히도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아랍의 대문장가 ‘이븐 주자이’가 필사, 요약한 저본만은 온전히 남아 전해지고 있는 이 책의 원제는, 아랍어로 ‘여러 지방을 여행하면서 다양하게 보고 들은 내용을 적은 진귀한 기록’을 의미하는 <리흘라(Rihla)>다.
이븐 바투타의 여정을 따라서, 모로코 탕헤르에서 출발해 이집트를 경유하여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Mecca)로 성지순례를 나선 독실한 이슬람교도인 모로코의 건축학자 부부는, 지진과 함께 전설 속으로 사라져버린 고대의 파로스 등대를 현대적인 조형감각으로 새롭게 복원해 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 몬타자 해상공원의 등대 ⓒ수해 |
카이트베이 요새를 돌아 나와, 내일이면 시와 오아시스로 돌아가야만 하는 카미스에게 ‘등대’를 보여주기 위해 ‘성 마르코 순교기념비’와 ‘스탠리 다리’를 지나 몬타자(Montazah) 해상공원으로 향하는 길목. 캠핑카에 올라 한동안 해변도로를 따라 달리다보니, 어느덧 몬타자 궁전 맞은편에 자리한 알렉산드리아 등대에 불이 켜지고 있었다. 그러자 우리는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드넓은 몬타자 궁전의 정원을 가로질러, 땅거미가 어둑어둑 내리기 시작하는 해변을 향해 걸어 나갔다.
어둠 속에서, 몬타자 궁전의 아름다운 정원과 해상공원의 바위섬을 이어주는 아치형 다리 끝에 서 있는 작은 등대 위에서 오렌지색 불빛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이 바다는, 고대에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한 클레오파트라 여왕과 그의 연인 안토니우스가 추격해오는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를 피해 황급히 숨어들었던 항구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각자 저마다의 사념에 젖어 어둠에 젖어가는 잉크빛 수평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앉았노라니, 어디선가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부르던 비탄의 아리아가 절창(絶唱)이 되어, 밤바다의 적막을 가르며 하염없이 귓가에 고동쳐 오는 것만 같았다.
수해
기행문학가. 운문사 강원을 졸업하고, 오랫동안 세계 여러 나라의 명상사원과 문화유적지를 순례하다가, 동국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지은 책으로 시집<산 두고 가는 산>과 동아시아 기행 에세이 <예정된 우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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