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은 변안렬(大隱 邊安烈)묘·신도비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16호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용정리 산 704-1
이곳은 고려 말의 무신이며, 원주변씨의 시조인 변안렬[邊安烈, 충숙왕 복위 3년(1334)~공양왕 2년(1390)]의 묘이다. 변안렬의 자는 충가(忠可), 호는 대은(大隱), 본관은 황주(黃州)였으나 공민왕 때 원주(原州)로 바꾸었다. 조부는 심양후(瀋陽侯) 변순(邊順), 아버지는 증판삼사사 변양(邊諒), 공순군(恭順君) 방번(芳蕃)은 공의 사위이다.
중국 심양에서 태어나 충정왕 3년(1351) 원의 무과에 장원급제를 하고 형부상서에 올랐다. 공민왕 1년(1352) 노국대장공주를 따라 고려로 들어왔는데 공민왕이 추밀원사 원의의 딸과 혼인케 하였고, 본관을 원주로 하사받아 원주변씨의 시조가 되었다. 공민왕 10년(1361) 안우(安祐)를 따라 홍건적을 물리쳐 이등공신이 되었으며, 이듬해에 개성을 지켜 일등공신이 되었다. 예의판서, 지문하부사, 문하평리를 역임하였고,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운봉과 황산에서 왜적을 대파하고 정방제조가 되었다. 원천부원군에 봉해지고 판삼사사, 영삼사사가 되었다. 그러나 공양왕 1년(1389) 이색(李穡)과 함께 이성계 제거하고 우왕을 복위시키려 하였다는 죄목으로 한양으로 유배되었다가 처형되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용정리 지묘산 기슭은 원주변씨의 성역으로 고려 충신 원천부원군 대은 시조 변안렬 양위분 묘소, 묘표비각, 신도비, 박정희(朴正熙)대통령 고유기념비, 추원재 등 원주변씨 선조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대은 변안렬 묘는 진한부인 원주원씨와 쌍분으로 서향하고 있으며, 호석, 묘비, 상석, 향로석, 묘갈, 장명등, 양석, 망주석,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는데 옛 것은 묘갈(原川府院君邊公之墓)과 망주석만 남아 있는데 마모가 심하다.
묘역아래에 있는 묘표는 선조 4년(1571)에 세운 것으로 “原川府院君邊公墓表(원천부원군변공묘표)”이라 전서체로 쓰여져 있는데 비문은 6대 외손 황해도관찰사 박승임(朴承任)이 짓고, 7대 외손 여성군 송인(宋寅, 영의정 송질의 손자)이 썼다. 특히 묘표의 이수에는 전통적 믿음과 관련되는 운문일원도가 새겨져 있는데 앞면에는 달 속에 토끼가 방아를 찧는 모습을, 뒷면의 태양 안에는 삼족오가 새겨져 있다.
<변안렬(邊安烈) 묘표>
고려국 추충량절선위익찬보보조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영삼사사 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 변공묘표
외6대손 조선국 통정대부 수황해도관찰사 박승임(朴承任)은 짓고
외7대손 봉헌대부 여성군 송인(宋寅)은 글을 씀.
동방의 변씨(邊氏)는 모두 그 근본을 원주(原州)로 하고 있으니 원주에 변씨가 있게 된 것은 영삼사공(領三司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공(公)은 본래 중국 북방사람으로 요동(遼東)의 심양(瀋陽)에서 출생하시었는데 태어날 때부터 무인의 재능과 굳센 기상이 있었다. 오랑캐의 원나라가 운이 다하고 덕이 쇠하여 도적의 무리들이 사방에서 일어나자 공은 이곳을 떠나고자 계획하였다.
지정(至正) 신묘년(1351년)에 공민왕(恭愍王)을 따라서 동으로 오니 왕께서 인척인 판추밀(判樞密) 원의(元顗)의 딸을 부인으로 삼게 하였다. 원의(元顗)의 본관이 원주였으므로 공에게도 역시 원주로서 관향을 삼도록 하명하시었다. 때에 동국(고려)도 역시 편안하지 못하고 외적의 침입을 받았으니 홍건적은 북에서 설치고 남쪽에서도 날뛰는지라 이로서 왕은 피난을 하게 되고 백성들은 짓밟혀 어육이 되었다. 이에 공은 적들을 소탕하여 나리를 평정하고자 혹은 왕의 좌우에서 돕기도 하고 혹은 적을 토멸하는 일을 전담하기도 하면서 이 일에 관여하지 않은 바가 없었으니 공적이 훌륭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적들을 물리치지 못한 적이 없었다. 이로서 공신호를 하사 받았으며 또 나라에서 은혜와 영광을 베풀어 살아 있는 사람과 돌아간 사람에게 미친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인월(引月)과 정봉(鼎峯)(전라도 운봉지역) 전투에서의 대승은 비록 이성계의 도움을 받기는 하였으나 많은 사람들의 힘을 빌린 것 같지는 않다. 이것은 왕께서 승전의 노고에 대한 포상을 할 때 유독 공(公)과 도원수(都元帥 : 이성계)에게만 금 50량을 하사하시고 다른 장수들에게는 아무런 상이 없었음이 이를 말해준다. 이로서 볼 때 이 전투에서 공의 전략과 공로가 가장 컸음을 알 수 있겠다. 신공연서(神功聯書 : 돌아가신 분의 공적을 기록함)에서 어찌 붓을 든 자가 공만을 소중히 여겨 기록했겠는가? 공(公)의 평생의 발자취는 크게 빛나지 않음이 없어 마침내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삼사(領三司)에 임명되었으니 그 공훈과 작위가 서로 걸맞으며 조정에서의 신망도 매우 높았다. 유독 그 말년에 김저(金佇)의 모함으로 갑자기 화를 입게 되었는데 왕은 용서하라는 특명을 여러차례 내렸으나 마침내 언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그 실상을 조사하지 않고 덮어서 극형에 당하였으니 실로 공양왕(恭讓王) 2년의 일이다. 혁명의 시기에 여러 변란의 어려움은 비록 후세에 알 수도 없는 것이고 또 감히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니 자손된 자들이 남아있는 한이 없을 수 없다.
전기(傳記)를 쓰는 자가 이를 서술함에 이르러 임과 염(林堅味와 廉興邦)의 다음에 공이 죄를 입게 된 연유를 기록함에 있어서 김저(金佇)를 문초하니 그가 불복하는지라 이에 칼로서 찢고 불로 지지니 마침내 물어보는대로 순순히 자백하여 그가 무고로 옥사를 이루었다고 하였으니. 이 몇 마디 말이 어찌 올바른 역사의 조그마한 진실을 밝히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왕씨가 이미 죽은 자의 공을 기록하여 책으로 전하였고 본조에서는 공의 관직을 회복시키고 몰수한 재산을 돌려 주었으니 공의 영혼은 이로서 역시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공을 모신 묘소는 양주(楊州) 주엽산(注葉山)에 있었는데 성화(成化) 초기에 능침에 가깝다고 하여 풍양(豊壤)의 오리동(梧利洞)으로 이장하였던 바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관리가 소홀하여 마침내 묘소를 알 길이 없게 되었다. 문중에서는 이것이 한이 되어 있었는데 후손중 순(循)이란 사암이 있어 홀로 이를 개탄하여 공(公)의 묘소를 찾아 날랜 토끼와 같이 심산유곡을 샅샅이 헤메이다가 마침내 한 오래된 묘가 언덕위에 있는 것을 찾아냈다. 이것은 다른 무덤에 비하여 특히 돋보였고 또 그 주위는 병사공(兵使公) 정의 무덤 동쪽이었다. 병사공은 역시 공의 후손이다. 마침내 이것이 공의 묘소가 틀림없다고 생각되었으나 묘표와 묘갈이 없어 상고하기가 어려웠는데 마침 그 곁에 살고 있는 노인을 불러 물어본 즉 과연 공의 묘임에 틀림없었다. 나무가 우거지고 티끌과 이끼가 끼여 황폐할 대로 황폐하였으나 잃어버린 묘소를 찾고보니 기쁜 가운데도 슬픔이 겹쳐 엎드려 절하고는 돌아왔다. 즉시 안팎의 문중에 이를 알리고 또 비석에 글을 새겨 이를 길이 전하고 다시는 묘소를 잃어버려 황폐한 일이 없도록 하자고 하니 듣는 자 모두 전에 묘소 잃어버림을 슬퍼하고 이제 다시 찾아 경사를 후손에게 영원히 전하여 무궁하게 할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이에 가산의 많고 적고에 따라 집집마다 돈을 내니 이 자금을 거둔 자가 순(循)이다. 이를 성실히 관리하여 성사시키고 길일(吉日)을 택하여 봉분을 고치고 석물을 세웠다.
공(公)의 휘(諱)는 안열(安烈)이니 중대광문하찬성사판예의사사(重大匡門下贊成事判禮儀司事)에 추봉된 순(順)의 손자이며 성근익조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문하판삼사(誠勤翊祚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判三司事) 양(諒)의 아들이다. 부인은 원씨(元)로서 조부는 첨의참성사(僉議贊成事) 충(忠)이며, 부친은 곧 판추밀공(判樞蜜公)이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1남은 현(顯)으로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였고, 2남은 이(頤)인데 벼슬이 좌군총제(左軍摠制)였으며 3남은 예(預)로써 벼슬이 판훈련원사(判訓鍊院事)를 지냈다. 딸은 하나인데 공순군(恭順君) 방번(芳蕃)이 그 사위이다. 자손은 대대로 이어져 내려와 번성하였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조정에 벼슬하고 있는 자가 많으니 모두 공의 후손들이다. 공의 아버지 이상은 대대로 원나라 조정에서 천호의 벼슬을 하였다. 변씨는 대대로 경사를 쌓아 그 연원이 깊었으나 공에 이르러서 처음으로 동방 변씨의 첫 번째 시조가 되었다. 그후 대를 이어 영원토록 자손이 번성하고 또 이름을 크게 떨친 것은 모두 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아! 순(循)과 같이 효를 돈독히 하는 마음을 가진 자가 대대로 한명씩만 있게 된다면 비록 이 비가 아니라도 공의 묘는 후일에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이로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 흘러가면 사람들은 잊고 소홀히 하기 쉬운 법이고 성인도 추모함으로서만 아름답게 된다 하였으니 무릇 공의 자손된 자 공께서 가문을 열고 후손을 번영하게 해주신 그 은혜를 감히 생각하지 않을 수 있으랴! 자기 스스로 힘써 베풀어 이 비를 잊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로다. 연보(年譜)는 역사책에 적혀있고 집안 내력은 족보에 기록되어 있으니 여기서는 자세한 내용을 생략하고 단지 그 개요만 기록하는 바이다.
황명(皇明) 융경(隆慶) 5년(1571년) 신미 7월 일.
<불굴가(不屈歌)>
김천택의 『청구영언』에 전해오는 「불굴가(不屈歌)」는 변안렬의 시가로 밝혀졌는데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에 대한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에 뒤이어 읊은 것으로 변안렬의 고려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엿볼 수 있다.
『가슴팍 구멍 뚫어 동아줄 길게 꿰어
앞뒤로 끌고 당겨 갈겨지고 쏠릴망정
임 향한 그 굳은 뜻을 내 뉘라고 굽히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