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자로 평생을 살아오시면서 수필을 쓰시고 소설에까지 의욕을 보이셨던 견일영(甄一英1935.3.23.~2019.1.13.) 선생님이 가셨다. 마지막으로 대한 선생님의 수필은 『영남수필』 50호에 실린 「묵언(黙言)」이다. “묵언의 힘, 묵언의 방어적 지혜를 생각해 보면서 절대자의 초능력의 비밀이 아주 간편하다는 데 놀라게 된다.”던 선생님, 초능력을 가진 ‘신은 절대로 말하지 않는’ 그 묵언의 지혜를 찾아 영원한 묵언의 세계로 선생님은 가셨다.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70년대 말, 그 무렵 선생님은 도교육청의 국어과 장학사로 계셨고, 나는 초임 국어교사로 대구에서 대여섯 시간은 달려야 하는 어느 산골 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 학교에 선생님이 장학지도를 나오신 것이다. 길이 워낙 먼 탓에 1박2일에 걸쳐 장학지도를 수행하고 가셨다. 지도의 결과로 우수교사 한두 명을 발굴해 가게 되어 있는데, 선생님이 가시고 난 뒤 교감선생님은 내 이름을 적어 갔다고 귀띔해 주었다. 이듬해 근무 만기가 되어 경주로 내신을 내었더니, 그 지역 명문 여고로 발령이 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선생님이 그 학교로 발령 나게 했다는 것이었다. 좋은 학교로 보내 주신 데 감사하며 열심히 근무하고 있는데, 이태가 지난 초봄에 갑자기 구미의 어느 고등학교로 발령이 났다. 내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가서 보니 선생님이 그 학교 교감으로 부임해 오셨다. 당시 교육부 영재교육 연구학교로 지정되어 있는 그 학교의 연구학교 운영 책임을 지고 오시면서 나를 그 학교로 함께 발령 나게 했다고 하셨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했다. 나를 부른 교감선생님의 뜻을 따라 골똘히 연구해 가면서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해내려고 애썼다. 그 학교 근무 중에 선생님이 경북중등문예교육연구회 회장으로 추대되시면서 나에게 총무 일을 맡기셨다. 국어과 교사들은 같은 전공인 교감선생님을 모시고 가끔씩 모임도 가지면서 경승을 찾아 여행길을 나서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긍지도 가지고 보람도 느끼면서 즐겁게 근무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다시 이태가 지나 연구학교 임무가 끝나자 원거리 통근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에게 선생님은 출퇴근이 편리한 곳으로 옮길 뜻이 있으면 그리하라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당신께서도 자리를 곧 옮길 것을 짐작하고 나의 편리를 미리 챙겨주시려 했던 것 같았다. 고마운 선생님과 동료들을 두고 떠나기가 미안하고 아쉬웠지만, 나의 편리를 따라 출퇴근이 쉬운 대구 인근의 어느 여고로 옮겼다. 그 학교에 근무하면서도 선생님이며 동료들과의 정리를 잊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전임교의 친한 동료에게 전화하여 ‘선생님을 모시고 지난날처럼 다시 모여보자.’고 했더니, 며칠 후에 선생님도 좋아하시더라고 하며 그렇게 하자는 연락이 왔다. 그 후 우리는 선생님을 회장으로 모시고 한 해에 네 차례 정도 만나 모임을 함께하며 한마음이 되어 정을 이어갔다. 모임 이름도 <한마음회>라 했다. 선생님은 곧 대구시교육청으로 자리를 옮기시고, 다른 사람들도 자리를 뿔뿔이 옮겨 갔지만 우리의 만남은 변함이 없었다. 철 맞추어 경관 좋은 곳을 찾기도 하고 옮겨 간 근무처를 찾아다니기도 하며 울릉도에까지 즐거운 여행을 함께했다. 그 세월이 벌써 삼심여 년이 흘렀다. 그 사이에 한 분은 세상을 떠나시기도 하고, 선생님은 대구 시내의 한 지역 교육을 책임지시기도 하다가, 특수학교를 자원하여 맡으시기도 하고, 마지막엔 대구의 으뜸 명문 고교 교장으로 퇴임(1999)하셨다. 그 삼십여 년 전 어느 날, 내가 평소 글쓰기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걸 아신 선생님께서 수필을 한 편 써서 보여 달라 했다. 며칠을 두고 한 편을 써서 드렸더니 ‘열심히 공부하라’는 말씀만 하셨다. 그 후로 글쓰기 공부에 대한 관심을 별로 가지지 못한 채 몇 곳 학교를 옮겨 다니다가 우연히 신문의 칼럼을 써야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때 비로소 글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다지던 중에 1997년 조그만 문학상을 하나 받으면서 수필에 마음과 뜻을 모으게 되었다. 내 태어난 선산의 문학 단체인<선주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글의 이력을 쌓아갔다. 나는 새 천년이 시작하는 2000년에 승진과 동시에 울릉도로 발령 받게 된다. 나에게 울릉도는 사람도 자연도 모든 것이 신비로 다가왔다. 그 감동을 다 표현해 낼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무엇에 홀린 듯이 미치도록 글을 썼다. 그 사실을 안 <선주문학회>에서 내 글의 특집을 마련해 주었다. 나의 수필 세계를 조명하는 글을 수필가로 활동 중이시던 선생님이 써주셨다.그때 선생님은 나의 글을 두고 “그는 조그만 섬과 바다를 그의 인생 항로로 보고 앞으로 헤엄쳐 가야할 험난한 여정으로 생각하고 있다. 더 나아가 삶의 의미로 ‘바다 건너기’를 정의했으니 얼마나 넓고 큰 예술혼이며, 창조적 마음가짐인가.”라고 평해 주셨다. 이듬해 가을 울릉도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육지로 나와 그 섬에서 쓴 글을 묶어 한 권의 책으로 내었다. <선주문학회>에서 조촐한 출판기념회를 마련해 줄 때, 책의 출간을 누구보다 기뻐하시던 선생님은 “작자는 울릉도 섬에서 그 섬을 고도만으로 보지 않고 아름다운 혼으로 그 고도를 다시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아름다운 혼은 신의 손이 되어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하게 하고 있는 것 같다.”라며 격려해 주셨다. 그 말씀을 들으며 나는 글 쓰는 일에 더욱 진지하게 매진해야겠다는 마음을 다졌다. 그 일들을 계기로 선생님을 <선주문학회>에 모셨다. 선생님도 구미에서 태어나 선산에서 성장하시고 선산 죽장리에 선영을 모시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미시민헌장’을 기초한 인연을 가지고 계셨다. 교직과 문학회 모임을 함께해 나가며 정을 다져오는 사이에 선생님이 학교를 퇴임한 지 강산이 변하는 세월이 흐를 무렵, 나도 퇴임을 앞두고 구미의 어느 고등학교에 마지막 자리를 잡았다. 그 연유로 잠시 <선주문학회>의 운영 책임을 맡게 된다. 그때 선생님은 이미 『보랏빛 수국이 피던 날』(1997), 『아름다운 영혼』(2006)이라는 두 권의 수필집도 내시고 <영남수필문학회> 회장도 역임하시며 수필의 일가를 이루고 계셨다. 『선주문학』 29집을 발간하면서 선생님의 수필세계를 조명하는 특집을 마련해 드렸다. 거기에 고향을 그리는 「감천강」 외 몇 편을 발표하셨는데 한 후배 수필가는 선생님의 수필 세계를 논하면서 “견일영 같은 수필가를 회원으로 가진 선주문학회가 행운이고, 나 역시 회원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행복하다. 더구나 수필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훌륭한 선배를 가졌음을 다행 중의 다행으로 생각한다.”며 선생님의 문학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선생님과의 만남은 언제나 여전했다. 예전처럼 배낭을 메고 멀리 다닐 처지는 되지 못해도 따뜻한 만남은 계속되었고, 선생님은 만남을 거르는 일이 거의 없으셨다. 만나면 여러 가지 화제로 담소를 나누는데, 세상의 어떤 궂은일이라도 선생님의 말씀을 거쳐 나오면 유머가 되고 웃음이 될 정도로 재담에 능하셨다. 노래도 아주 좋아하셔서 분위기에 맞춘 개사로 흥을 한층 돋우시곤 했다. 선생님은 또 베풀기를 좋아하셔서 시시로 따뜻하고 아늑한 자리를 만들어 주시곤 했다. 그렇게 흐르는 세월과 함께 선생님은 대구문학상, 매일신문시니어문학상, 원종린수필문학상 등을 수상하셨다.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512)의 의로운 삶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그 생애를 소설로 구성한『탁영금(濯纓琴)』(2012)이라는 장편소설집을 펴내기도 하시고, 뒤이어 수필집 『산수화 뒤에서』(2013), 『거문고 여섯 줄의 조화』(2017)을 내시며 왕성한 창작욕과 함께 선생님의 문학 세계를 더욱 깊고 높게 하셨다. 그런 문학 활동뿐 아니라 교육자로서 교단을 물러나신 후에도 여러 사회교육기관에서 활발한 교육 활동을 해오셨다. 그런 선생님도 흐르는 세월과 함께 오는 발병은 어찌할 수 없어 십 수 년부터 병마와 더불어 지내시게 되었다. 스스로 ‘기간제 생명’이라 하시면서도 “산다는 것보다 더 위대한 철학이 어디 있겠는가.”(수필집 『산수화 뒤에서』)라고 하시며 특유의 재담을 잃지 않고 늘 밝은 표정으로 지내셨다. 그 유머 앞에서는 병마도 걸음을 재촉할 수가 없었던 것 같다.다른 이 같으면 벌써 세상을 바꾸었을지도 모를 가볍지 않은 병마와도 친하게 지내시는 듯, 떠나시기 한 달 전까지도 정정한 모습으로 우리 모임을 이끄셨다. 선생님이 우리 모임이며 나를 각별히 아껴주시는 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선생님이 활동하시던 대구문인협회의 한 회원으로부터 “선생님이 작고하셨다면서요?”하고 나에게 묻는 전화가 왔다. 거기에 먼저 부음이 전해진 모양이었다. “뭐라고요?!” 내 귀가 믿기지 않으면서도 눈앞이 캄캄해지는 듯했다. 삶과 죽음의 차이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한 달 전의 정정한 모습과 함께 인자하신 모습이 더욱 선연하게 새겨졌다. 모임의 총무에게 참담한 비보를 전하니 그도 깜짝 놀랐다. 두어 시간 길을 달려 회원들을 만났다. 날이 저물 무렵 장례예식장에 닿았을 때 조문실 문 옆에 “고인의 뜻에 따라 절은 삼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는 안내문이 걸려 있었다. 베풀기를 좋아하셨던 선생님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조문객을 배려하는 겸양의 마음을 놓지 않으셔서일까. 죽음도 삶과 다르지 않다는 사생관을 보여주려 하심일까. 그저 목례로써만 애틋한 마음을 드릴 수밖에 없었지만 하얀 국화꽃 위에 좌정하고 계신 모습은 여느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유족들은 선생님께서 일주일 전 감기가 심한 듯해서 병원을 찾았는데 그게 폐렴이 되어 영면에 드시게 되었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래도 눈을 감으실 때는 모든 걸 넘어서신 듯 편안한 표정이셨다고 했다. 선생님은 수필 「묵언(黙言)」의 마무리에 “천명(天命)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고, 예(禮)를 알지 못하면 세상에 나설 수 없고, 말을 모르면 남을 알 수 없다.”라는 논어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하시며 “더 욕심을 내면 그가 묵언하고 있을 때 그를 더 바로 볼 수 있는 안목과 예지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그러고 보면 선생님은 군자의 삼덕목이라 할 수 있는 명(命), 예(禮), 언(言)을 궁행하시며 조용히 묵언행(黙言行)에 드신 것 같다. 이제 모두 선생님의 뒤를 따를 날이 그리 멀지 않다. 내 젊을 적 근무처를 옮기고 난 후에 다시 마음을 모아 새롭게 만났듯이, 또 그 어느 날 모두 새로이 만나 선생님을 영원한 회장님으로 모시고 경승을 찾아 여행도 다니고, 즐거운 이야기로 담소 화락을 함께할 날을 그려 본다. 선생님의 그 웃음, 그 정 다시 꽃피울 날을 고대해 본다. 다시 뵐 그날까지 부디 편히 쉬소서. 그리운 견일영 선생님-.♣ (2019.1.17) |
첫댓글 견일영 수필가님은 제가 참 좋아하고 존경하는 선생님이셨습니다.
긴 투병 끝에 이렇게 유명을 달리하시다니, 참으로 슬픔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삼가 선생님의 명복을 비오며,
이렇게 가슴을 울리는 좋은 글로 선생님과 견일영 선생님과의 깊은
인연을 알게되어 이 또한 감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늘 좋은 글로 감동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건필, 건안하시길 빕니다.
견일영 선생님 생각만 하면 가슴이 먹먹합니다.
이런 분과 좀더 오랜 시간을 함께 할 수 없는지...
명복을 빌 뿐입니다.
다시 뵐 때까지 편히 계시기를 빌면서-.
사진을 좀 자세히 보고싶은데, 좀 답답하고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