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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낙동강 전선의 전황
50년 8월 북한군은 대구점령을 목표로 상주-다부동-대구 축선에 3개 사단(제13,15,3 사단)을 토입했고, 국군 1사단과 8월 4일부터 8월 30일까지 27일간의 다부동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여기서 북한군은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합니다. 9월에는 북한군이 현풍에서 왜관에 이르는 낙동강 좌안을 견제 공격하면서 북쪽에서 공격하여 대구,영천 방면에서 국군을 포위섬멸하려고 기도합니다. 이 당시 북한군의 초기공세는 상당한 기습효과를 달성하여 모든 전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의 방어선이 돌파되고, 대구와 경주가 위협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되자 전세는 낙동강 방어선의 전면적 붕괴로 이어지는 위급한 상황이 됩니다. 이 상황은 9월 2일부터 9월 12일까지 국군 8사단이 주축이 된 영천 전투에서 북한군 15사단을 전멸시킴으로써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직전의 낙동강 전선은 북한군 10만명, 국군과 유엔군 18만명으로 아군의 병력이 우세하지만 북한군이 공세의 주도권을 아직 놓지 않은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인천과 군산
맥아더 원수는 한국전선을 최초로 시찰한 6월 29일에 인천상륙전을 구상했다고 전해집니다. 태평양 전쟁중 여러 상륙작전을 지휘했던 맥아더는 북한군의 진격을 차단하고 섬멸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적 배후에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태평양 전쟁 중 바탄 전역 후 거의 수륙 양면작전이었으며 호주에서부터 루손섬에 이르기까지 일본군이 점령했던 섬을 차례로 석권했던 맥아더로서는 해상작전으로 적의 후방에 우회하여 후방의 보급선을 공격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중공군의 산악기동전이 한반도의 70%가 산지이고 산맥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이용한 기동전이라면 맥아더의 상륙 전술은 한반도의 3면이 바다라는 것과 미군의 우세한 해,공군력을 이용한 기동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 합참과 해군 및 해병대에서는 인천을 상륙지점으로 하는 것에 반대하고 군산에 상륙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인천을 상륙지점으로 하는 것에 반대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인천 앞바다는 간만의 차가 매우 심하기 때문에 상륙작전을 할 수 있는 말이 제한될 수 밖에 없다. 맥아더가 계획하는 9월의 경우 15일부터 3일간이 가능하고 이때를 놓치면 다음 한달을 기다려야 한다. 또한 상륙 가능 날짜에도 밀물이 꽉 들어차는 아침과 저녁 두차례 각각 3시간 정도의 제한된 시간 내에 행동을 완료해야 한다.
(2) 인천항은 대규모 상륙함대가 자리잡기에 협소할 뿐만 아니라 항구에 이르는 해상 접근로가 제한되어 있다. 상륙작전은 인천항에 앞서 먼저 월미도를 장악해야 하므로 아침에 월미도, 저녁에 인천을 점령하는 2단계를 거쳐야 한다.
(3) 높은 절벽의 상륙해안을 기어오르기가 어렵고, 그것을 극복한 다음에는 곧 시가지에서 적과 교전해야 한다.
미 합참은 육군 및 해군 참모총장을 파견하면서까지 맥아더에게 인천이 아닌 다른 상륙지, 그중에서도 군산을 선정하는 방안을 검토하도록 요구했습니다.
3. 적 보급로와 후퇴로의 차단
미 합참의 이와 같은 요구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인천을 상륙지점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50년 8월 23일 일본 도쿄 다이이치 빌딩에서 맥아더 원수와 미 육군 참모총장 콜린스 대장, 해군 참모총장 셔먼 제독 및 극동사령부의 주요 지휘관, 참모들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여기서 셔먼 제독은 '모든 가능한 지리적 그리고 해군의 장애를 열거하라면, 인천은 그 모든 장애를 갖추고 있다.'고 했고 콜린스 장군은 대체로 군산 안을 지지했습니다. 이때 맥아더는 다음과 같이 인천상륙작전의 필요성을 설명합니다.
'북한의 대병력은 낙동강 방어선에 집중되어 있다. 적은 인천 방어에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하고 실패할 것으로 나는 확신한다. 인천상륙에 대한 실행 불가능에 대하여 제기된 주장들은 나에게 기습의 요소를 더욱 확신케 해준다. 누구도 그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공격을 실행하리라고 적의 지휘관은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기습은 전쟁에서 성공의 가장 결정적 요소이다.
해군측이 반대한 조류,수로,지형, 그리고 물리적 장애는 실질적이고 적절한 것이지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해군에 대한 나의 신뢰는 완전하다.
군산상륙에 대한 제안은 인천에 비해 위협은 적지만 비효과적이고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포위할 수 없는 적군을 포위하고자 하고, 적의 보급선과 분배 센터를 파괴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인천과 서울을 탈환하면 적의 보급선을 차단할 수 있고, 한반도 전체의 확보가 가능하다. 적의 약점은 보급에 있다. 적은 남쪽으로 남하할수록 수송선은 길어져 그만큼 보급을 교란당할 위험성이 많아진다. 적의 주요보급선은 어떤 것이든지 서울에서 전선방면으로 연장되어 있다. 따라서 서울을 억눌러 놓으면 적의 보급망 활동은 꼼짝 못하게 완전히 마비시켜 놓을 수 있다.
만일 나의 판단이 그릇된 것이고 걷잡을 수 없는 적의 방어선에 부딪치게 된다든지 하면 나도 그때는 현장에 있을 테니까 치명적인 반격을 받기 전에 부대를 즉각 철수시킬 것이다. 그러한 경우 우리들의 손해는 단지 나의 직책상의 오점이 될 뿐이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며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그리하여 10만명의 생명을 구할 것이다.'
미 합참은 이후 맥아더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보를 보냅니다.
'한국의 최근의 전황에 관해 우리들은 적지않은 불안을 느끼고 있다. 제8군으로 돌릴 예비병력을 전부 써버리는 결과가 될 것인데 계획의 작전을 예정 기일에 개시함이 타당한가? 그렇지 않은가? 또는 어느 정도의 성공의 희망이 있는가에 관해 귀관의 판단을 통지해 주기 바란다.'
맥아더는 다음과 같이 회신합니다.
'나는 작전의 성공에 대해선 낙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작전은 적으로부터 주도권을 빼앗아 결정적인 타격을 주는 기회로 이끄는 유일한 길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적은 병력과 물자 두 면에서 우리보다 큰 보급능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우리들은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전쟁을 계속하여 전력이 점점 소모되고 또한 뚜렷한 전과가 오르지 않는다는 상태에 빠질 것이다.
이 계획으로 공격을 가하면 적은 현재의 전역에서 전력을 증강할 수 없게 된다. 부산 방위선 내부의 정세는 위험하지 않다. 앞으로 전선을 축소할 필요성이 나타날지 모르지만 그러한 사태에 대비하여 이미 새로운 방위선을 고르고 있다. 그러나 아군이 부산 주변에서 쫓겨나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다시 거듭 말해 둔다. 나는 물론 나의 여러 지휘관 및 참모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포위작전에 비상한 열의를 가지고 있으며 그 성공을 확신하고 있다.'
9월 8일 미 합참은 트루만 대통령에게 인천상륙작전을 승인한다는 입장을 밝힙니다.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한 이유중 하나는 서울이 정치적 상징적으로 매우 중요할 뿐만 아니라 남한 지역에서 유일한 복선철도가 이곳을 통과하며, 낙동강 방어선 주위의 북한군에게 보급을 하기에 충분한 도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만약 유엔군이 서울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할 수 있었습니다. 서울 동쪽에 있는 몇개의 비포장 도로는 북한군의 보급로로서는 부적당했습니다. 어떤 군대도 식량과 연료, 탄약이 없이는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서울이 유엔군의 손에 들어가면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이 붕괴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맥아더는 평소 보급의 문제를 매우 중시했는데 '전과의 10중 8,9가 주 보급로의 차단으로 인해서 발생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외에도 매우 중요한 것은 심리적인 문제입니다. 후퇴로가 차단되면 군인들은 개인적으로 어떻게 하면 자신들이 빠진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군대가 급속하게 붕괴되게 됩니다. 이러한 심리상태에 있는 군대는 곧 안전을 찾아 헤메는 오합지졸로 변하게 되고 자신들의 무기와 장비를 내팽개치고 몸만이라도 빠져 나가려는 행태를 보이게 됩니다. 이는 북한군 뿐 아니라 이후 중공군에게 포위되었던 국군에게도 나타났던 문제였습니다.
군산의 경우는 북한군의 보급로를 절단할 수 없으며, 반면에 북한군은 신속히 낙동강 전선에서 병력을 이동시켜 남한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전선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떠한 미군 병력도 방어진지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 되고 북한군을 그들의 예비대 및 보급품과 배후에서 접하도록 후퇴시킬 뿐으로, 그들의 생명줄을 완전히 절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맥아더의 주된 반대 이유였습니다.
4. 인천상륙작전을 전개하지 않았을 경우 발생하는 문제
만약 인천상륙작전을 전개하지 않고 낙동강 전선에서 북진을 시도했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먼저 서울을 거쳐 북한군의 예비대와 보급물자가 공급되었을 것입니다. 북한군은 북한 지역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점령하고 있는 남한 지역의 청장년 남성들을 강제 징집하여 전선에 내보내고 있었고 당시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 1/3 이상이 남한에서 징집된 인원이었습니다. 배후에 대한 공격없이 낙동강 전선에서 북진을 할 경우 북한군은 계속해서 신규 병력을 투입했을 것입니다. 또한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무기와 탄약을 공급받고 있었고 이러한 보급물자는 서울을 거쳐 남쪽의 북한군에게 지속적으로 공급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될시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여 북진한다 해도 큰 피해를 입게 되고 남한 지역을 수복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을 소모하게 됩니다.
또한 북한군은 배후의 후퇴로가 보전되기 때문에 전황이 불리하면 언제든지 무기와 장비를 가지고 대다수의 정예 병력을 북한 지역으로 후퇴시킬 수 있습니다. 즉 북한군의 포위섬멸은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될시 북한지역을 수복하기 위해서는 역시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합니다.
인천상륙작전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실행되었습니다.
5. 북한이 인천상륙작전을 미리 알았는지 여부
당시 일본에는 많은 공산주의자가 있었고 이들을 통해 미군의 동태가 북한에 알려지고 있었습니다. 북한측은 유엔군이 상륙작전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는 첩보를 가지고 있었으나 인천과 군산 중 어느 쪽인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미군 내에서도 상륙지점 결정이 막판까지 확정되지 않았고, 인천이 상륙지점이라는 첩보가 입수되어도 그것이 미군에서 흘린 역정보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김일성은 이미 낙동강 전선에 대부분의 병력을 투입하고 있었고 불확실한 상륙작전 대비를 위해 병력을 인천으로 이동시키느니 낙동강에서 총공세를 펼쳐 유엔군 상륙 이전에 부산을 점령하고자 했습니다. 결국 인천상륙작전 당시 인천에는 6천 5백명의 북한군만 남겨놓은 상태였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은 북한군의 주력을 피해 최소 저항선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져 큰 성과를 얻은 작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 인천 상륙작전 진행 경과
이 작전의 주역인 미 제10군단은 제7보병사단을 주축으로 편성되었고, 국군 제17연대와 해병 4개 대대도 참가했으며 총 병력이 7만여명에 달했습니다. 이 상륙작전의 일련의 목표는 월미도와 인천을 점령하고, 다음에 김포 비행장을 장악하며, 서울을 탈환하는 것으로 미 제1해병사단이 주공으로 이 목표를 달성하는 임무가 부여되었습니다. 한편 미 제7사단은 우측방을 경계하면서 수원방향으로 우회, 남진을 계속하여 낙동강 전선으로부터 총반격을 개시하여 북으로 진격하는 미 제8군 예하 부대와 연결한 후, 북한군을 협공할 계획었습니다.
50년 9월 15일 05시부터 인천에 대한 작전이 개시되었는데, 8대의 미 해병대 함재기가 월미도와 인천의 군사목표물에 대해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공중폭격과 함포사격은 월미도의 북한군 진지를 분쇄하였고, 그후 상륙함정들이 발진했습니다. 상륙정은 공격 개시선으로 향하였고, 상륙부대는 공격 개시선을 돌파중이라는 확성기 소리가 들려오자 맥아더 원수는 메킨리 호의 함교에 나타낫는데, 06:25시였습니다. 맥아더는 그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오전 8시 전령이 함교에 올라와서 나에게 종이 쪽지를 주었다. 거기에는 제1진의 해병대는 한 사람의 희생도 없이 상륙하여 해안에다 거점을 확보했다고 적혀 있었다. 나는 도일 제독을 돌아보며, "다음의 메시지를 전 함대에 보내 주시오-오늘 이 아침 해군 해병대는 전례없는 영광으로 빛나고 있다-자 밑으로 내려가서 아침식사나 듭시다.'
작전이 시작된 다음날인 9월 16일 새벽에 인천은 해병대에 의해 완전히 점령되었습니다. 서울을 탈환하는데는 다소 시간이 걸렸는데 맥아더 원수는 '서울을 탈환하는데는 5일이면 충분할 것이다'라고 예상하자 미 제10군단장인 알몬드 장군은 '그렇게 빨리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2주일이면 가능하다'고 예상했습니다. 전황은 알몬드 장군의 예상대로 전개되었습니다.
알몬드 장군은 9월 18일, 미 제1해병사단에게 서울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미 제5해병연대는 9월 20일 새벽 능곡쪽으로 한강을 도하하는데 성공하여 수색 방면으로 진격한 끝에 9월 24일에는 연희고지까지 진출했습니다. 그 뒤를 이어 능곡에서 한강을 도하한 미 제7해병연대(국군 해병 1개대대 배속)는 서울 북쪽의 북악산 방면으로 우회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한편 9월 25일, 남쪽의 국군 제17연대와 미 제32연대는 서빙고 방면으로 도하하여 미 제32연대는 남산으로, 제17연대는 26일 오후까지 서울 동족의 348 및 292 고지를 탈취한 후 망우리 일대를 점령하여 적의 탈주로를 차단했습니다.
북한군의 주력부대는 의정부 방면으로 퇴각하였고, 일부 후위부대가 서울 시내에 잔류하여 저항을 계속했습니다.
9월 27일 06시경, 국군 해병대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한 후에는 최후의 소탕전이 벌어졌고, 9월 29일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원수가 임석한 가운데 서울을 한국정부의 관할에 넘기는 의식이 거행되었습니다.
7. 인천상륙작전의 결과
북한군 지도부는 낙동강 전선에 있는 북한군에게 유엔군이 후방에 상륙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은 9월 16일 방어선을 돌파해 북쪽으로 진출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미8군을 저지하고 있었으나 인천 상륙 소식이 알려지면서 사기가 급속도로 떨어지고 도주병이 나오더니 전선이 급격히 붕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국군과 유엔군은 9월 23일 낙동강 전선을 돌파해 북진하기 시작했고 살아남은 북한군 일부는 빨치산으로, 나머지 잔존 병력은 태백산맥을 거쳐 북한으로 패주하였는데 대부분의 무기와 장비를 남겨놓은 상태로 도주하였습니다. 인천상륙작전 후 북한으로 도주한 병력은 3만명 정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남침 당시 북한군 병력이 13만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80% 가까이가 괴멸된 것입니다. 남한지역에 남아있던 빨치산들은 이후 국군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의해 각개격파됩니다.
일각에서는 서울 탈환에 2주 가까이 걸렸다는 이유로 인천상륙작전을 평가절하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시가전은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알몬드 장군이 서울 탈환에 2주가 걸린다고 한 이유중의 하나도 시가전의 어려움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울에 있는 북한군 병력 2만명중 대다수가 남한에서 징집된 학생 및 노무자였다는 점을 감안해도 북한군의 방어선을 신속하게 돌파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맥아더는 생각보다 진격이 늦어지자 초조한 나머지 미 합참에서 생각했던 군산 상륙을 검토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서울이 탈환될 즈음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이 심리적 동요로 붕괴하고 대부분의 무기와 장비를 상실한 상태로 일부 병력만 도주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작전은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북한으로 패주한 북한군은 정예 병력과 장비를 상실한 잔적 수준에 불과했으며 중공군이 개입하지 않는 한 북한군이 전멸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스탈린은 10월 13일 김일성에게 보낸 전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의 저항은 전망이 없다고 생각한다. 중국 동지들은 군사 개입을 거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귀하는 소련이나 중국으로의 탈출을 준비해야 한다. 부대 및 병기들을 대피시킬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상세한 대책을 마련하되 신중을 기해야 한다. 적과의 싸움에 필요한 잠재력을 보존해야 할 것이다.'
이 당시 중공은 소련에게, 준비가 부족하여 참전이 어렵다는 입장을 전달한 상태였습니다(물론 며칠만에 입장을 바꿔 참전을 결정합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북한을 탈출하여 소련이나 중공에서 망명정권을 세우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대부분의 북한 정예병력이 섬멸된 상황에서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붕괴 직전의 북한 정권을 구하고 북진통일을 좌절시킨 것은 바로 중공군의 개입이었습니다.
참조 문헌 : 한국전쟁(책과함께), 6.25전쟁사(서라벌군사연구소),
전쟁사101장면(가람기획), 위대한 장군들은 어떻게 승리하였는가(홍익출판사) 등
그전에 어느분이 말한 것에 대한 자료를 지금에야 올립니다. (뒷북?ㅡㅡ;)
첫댓글 디펜스코리아에서 올라온 글을 퍼오셨나보군요. 좋은 글입니다만, 서울탈환이 늦어진 것이 시가전의 어려움 때문은 아닙니다. 서울 돌입은 25일에야 이루어졌고, 정작 시가전이랄 수 있는 전투는 이틀밤도 안 넘겨서 끝난 셈이니까요.
오,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중공군의 펑 더하이는 군신이겠네요...사실 인천상륙작전 준비할때 뭔가 낌새를 챈 인민군(아마 원산으로 상륙하는줄 알았을 겁니다)이 낙동강을 엄청나게 공격해되자 상륙부대가 3번이나 다시 전선에 투입되는 상황이 벌어졌죠 당시 인천에 상륙했을때 북한군 병력은 진짜 소수였습니다
게다가 남포항 상륙작전은...아주 육군이 기다리고 있었죠 기뢰제거 할때까지...
미군은 언제나 철저하게 기도비닉을 합니다. 그러다가 공격이 시작되면 엄청난 물량을 쏟아놓고 보죠. 인민군이 다수던 소수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확실하게 적을 제압하느냐로 봅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스타가 아니니까요. 너무나 급조된 상륙이 어떤 결과인지는 안지오를 보면 나옵니다.
그리고 인민군이 낌새를 눈치챈것이 아니라 물자가 동이 나가서 더 공격을 재촉한 것입니다. 그해 8월... 일부 전선은 조금만 돌파하면 밀릴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후에는 완전히 전력을 소진하고 맙니다.
북한군 노획문서를 보니까 이미 북한군도 아주 정확하게 인천상륙을 예상했고 전력예비대도 보냈군요 문제는 역시 압도적인 전력차로 결국 상륙은 막아내지 못했지만 경-인천 사이의 짧은 거리를 13일정도 막는 전과를 올렸군요
참고로 이때 이쪽 방면의 예비전력을 지휘한 사람이 민족 보위상 최용건이었습니다. 아무리 개전 반대 의혹이 있어도 이 정도 신임하는 사람을 실병력을 주어서 지휘권을 맡긴 걸 보면 혹부리 아저씨도 어느 정도 인천 지구의 중요성을 인식했다고 보면 됩니다.
근데 한국전쟁때 맥아더가 하는 삽질을 보면 장난아니죠 심지어 미국에서 맥아더 씹는 다큐멘터리도 만들어졌는데 저도 당시 의외였죠 저도 최소한 맥아더=명장 이었으니까
게다가 아이젠하워가 제일 혐오한 인간중 하나가 맥아더군요...심지어 1차대전당시 적군 포로에게 자신을 업게 하고서 말채찍으로 때리면서 아군진지로 와서 군사들의 사기를 올려주는 센스도 범했다나요?
상륙전이란 전투형태는 사실 아주 간단한 룰입니다 공군과 해군의 압도적 지원과 초기에 상륙하는 부대의 피로 얼마나 버티느냐. 다시 말해 후속제파가 적의 기동예비보다 얼마나 빨리 도착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죠 즉 기습의 효과는 있을 지언정 그 다음은 특별히 유능한 게 아니죠
예를 들어 2차대전당시에 성공한 미군의 상륙작전은 이러한 방어측이 손을 댈 수 있는 조건들이 적용되지 않았던 특수한 지형 즉 섬에 대한 상륙이며 이 제반조건을 달성한 것은 상륙군이 아닌 해군과 해군항공대의 유능함으로 보는 쪽이 더 객관적인 시각이 되는 겁니다 상륙군이 유능했는가는 그 다음의 문제죠
물론 인천상륙작전은 상륙 선발대가 10시간동안 버텨야 한다는 무리수를 뒀고, 상륙작전 자체는 성공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다음의 과정, 전력의 전개 및 투사과정에선 사실상 실패했다고 보는 게 더 일반적(게다가 이거리는 30km인데 이거리를 13일이나 못가??뭐 북한의 엄청난 부대가 있으면 이해가 가지만)입니다
다시 말해서 북한군의 예비전력이 사실상 부재했고 전개 능력이 개판이었기 때문 즉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의 섬과 같은 조건이었기 때문에 성공했다는 이야기지 그것이 맥아더의 유능함때문은 아니란 거죠 실제로 정상적 상륙작전에 가까운
디에프, 토치, 살레르노, 안지오가 과연 성공이었나 실패였나를 평가해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게다가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 공세는 상당히 성공적이어서 무려 3번이나 상륙부대를 바꾸는 군요 당연히 이 부대는 급박한 전선으로 보내졌습니다
만일 맥아더가 유능하다면 이러한 일이 애초에 벌어지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충분히 그에 대한 예비대를 확보했어야 합니다만 그게 아니었기 때문에 공세예비부대를 처박아야 했던 것 뿐입니다 만일 그래도 맥아더가 유능하다고 보면 그 작전안을 뒤흔든 북한군도 충분히 혹은 더욱 유능하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위에 것은 제가 전에 화이트데스에서 맥아더와 관련된 말이 있을때 우마왕님과 이준님의 글을 보고서 안 것입니다 심지어 윤민혁님 마저도 맥아더가 유능하다는데는 동의하지 않는군요 그래서인지 최근의 맥아더 전기를 보는 것을 권하시는 군요 이상한 극보수에서 연구한 자료보다는...
Daum Bark 님. 안지오랑 비교하면 안됩니다. 안지오의 독일군과 인천의 북한군이 상황이 같았습니까? 안지오에서 독일군은 여기저기서 전력을 더 빼올 수 있었습니다. 당일에만도 제4공수사단과 헤르만괴링 기갑사단을 방어에 동원할 수 있었고, 이후엔 남부유럽에서 빼올 수 있는 거의 모든 병력이 투입됩니다.
급조된 것으로 따지면 인천상륙도 마찬가지죠. 화력이나 병력 면에서도 훨씬 뒤떨어지고, 예비대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던 상황에서 인천상륙이 실패하면 오히려 이상했을 겁니다. 인천이란 지점만 빼면 그 이후 전개 과정에서 뭔가 특출날게 있었을까요?
다만 전상용 님. 인천상륙을 북한군이 정확히 예측했다는 데에는 동의하기 어렵네요. 물론 상륙작전이 벌어지기 전에 인천에 대한 방어책이 어느정도 세워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정도의 대책은 원산이나 남포 쪽에서도 행해졌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18사단도 결국엔 낙동강으로 향했죠.
위의 글처럼 당시 인천에 남겨진 전력은 거의 한줌에 불과했고, 결국엔 인천상륙에 대한 대비는 없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단 이야기가 됩니다. 하기야, 당시 김일성 입장에선 인천에 얼기설기 방어선을 엮어놓느니 낙동강에 올인하는게 낫다고 판단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맥아더가 유능하다 무능하다의 문제보다는 인천상륙이 얼마나 유효하였는가가 더 중요한 것이지요. 더구나 낙동강전선 자체가 아주 협소해서 16개국군은 부산에 도착 즉시 바로 투입되는 실정이었습니다. 또한 이미 병력자체의 운용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맥아더는 형식상으로나 편제상으로 전미군을 지휘하는 장군이 아니
었으니 일본주둔 미군을 위주로 전략을 짤수 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전상용씨가 보기에 만약 인천상륙작전이 삽질이었다면 뭐가 합리적이었을까요? 아이젠하워가 맥아더를 싫어한 것은 대권에 도전할 것을 우려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특히 북한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비하면 인천을 수비하던 병력은 아주 미미했
습니다. 대비책을 세웠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규모였지요. 또한 빨리 진군하지 않은 것은 인천항을 개항시키지 못한 것. 한강도하장비의 부족, 보급물자 집적의 한계등등 이면적임 문제가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급조했지만 성공하였으므로 높이 평가하는 작전입니다. 저는 그렇게 평가합니다.
저도 인천상륙작전은 어느정도 유효했다고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위에서 분명히 예비대도 얼마 없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예비대는 이미 일본에 있었지요.. 다만 시기적으로 투입을 미뤄오다가 인천상륙작전당시 같이 인천에 상륙을 합니다. 낙동강 전선에서 이미 8월말이 되면 인민군의 공격은 단말마의 돌격정도로 현저히 줄어듭니다. 보급이 두절되고 화력의 열세에 놓이게 되지요.
저 그 미군 예비대가 아니라 북한군 예비대 말입니다 상륙을 저지하려는...북한군 노획문서에 보면 이미 파악된 것 같군요 근데 그 곳에서 그 많은 군대를 가지고 무려 13일동안??당시 북한군은 알면서도 얼마안되는 부대로 막아야되는 최악의 상황임에도 13일동안 왜 그 가까운 거리에서 위에도 말했듯이
상륙부대의 진정한 능력은 상륙당시가 아닙니다 제반 조건을 만들어준 해군과 공군의 능력이고 인천 상륙작전은 특히 더 그렇습니다 말그대로 북한군이 거의 없었고 어차피 알아도 투입도 불가능했지만...근데 그 사정을 모르는 건지 그 이상의 상륙부대가 달성한 것은??아무리봐도 낙동강에서 있던 인민군은 거의 전멸
그리고 나머지 다른 곳에 주둔하는 북한군은 과연 상륙을 통한 제 2전선 형성을 통해서 유엔군이 얻은 것은??이것으로 보았을때 인천상륙은 실패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말하면 그다지 얻은 것도 없습니다 뭐 만약 북한군의 보급을 끊은 것도 아니고(어차피 보급도 안되지만)후퇴하는 북한군 주력을 막은 것도 아니고
인천상륙작전을 안했더라도 이겼겠지요. 문제는 그 효과입니다. 후방이 차단되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패닉상태에 빠지기 충분한겁니다. 더구나 당시 철로가 남한은 서울기점으로 되어있었으므로 이를 장악한다면 전선의 북괴군은 붕괴하게 되어있는 것이었습니다. 진격이 빠르지 않았다?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어차피 인천상륙을 했다는 것 만으로도 심리적은 충격은 대단한 겁니다. 진격이 빠르지 않아서 주력을 포위섬멸하지 못한것이 아니죠. 대개의 인민군 주력은 붕괴되거나 지리산, 태백산으로 숨어들어갑니다. 인천상륙으로 서울을 점령하고는 사실 전투의 양상은 중공군 참전때까지 거의 토벌전처럼 되어 갑니다. 그러다가
중공군의 기습으로 혼란을 겪게 되고...이거는 다 알거고.. 만약에 낙동강에서 진격했다면? 이기기야 했겠지만, 희생도 많이 컸을 겁니다. 전상용씨가 묘사한 것처럼 불필요한 작전은 아니었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