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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모아놓고 쏘았다
미국 민간인 보고서 요약연재-다이앤 & 마이클 존스의
‘한국군이라 불린 동맹군2’
(사진/'베트남전 양민학살 진상규명 대책위원회'가 발족했다, 열린문화운동시민연합, 나와 우리,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작가회의, 나눔의 집 등 10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대책위는 지난 1월28일 저녁 7시 서울 혜화동 국제민주연대 사무실에서 발족식을 열어 앞으로 진상규명운동에 구체적인 힘을 모아나가기로 했다)
쿠앙응아이성 선틴현
… 선록사 푹빈촌에서 온 바하이라는 늙은 여인이 한국군들이 왔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말해줬다.
“그들이 처음 푹빈에 온 것은 1966년 11월9일 아침 7시께였다.…. 11월11일 아침 한국군들은 집집마다 다니며 사람들을 불러냈고, 외국말로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었다. 통역관은 없었다. 남자들은 이미 누이쫀에 있는 피신처로 달아나고 없었기 때문에 여자들과 아이들, 노인들만 남아 있었다. 군인들이 우리집에 와서 내게 뭐라고 말했지만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VC’(베트콩)라는 말뿐이었다. 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더니 그들은 나를 놔주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VC’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고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한국군들이 사람들에게 그 말을 하면 그들은 그저 너무나 놀라서 이렇게만 했다.” 바하이는 두손을 앞으로 모아 손뼉을 치면서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렇게 한 사람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자신들의 집 앞에서 총에 맞아죽거나 안으로 들어가도록 명령을 받고 수류탄에 맞아 죽었다. 집은 모두 불태워졌다. 내 생각에 한국군들은 사람들이 공손하게 절하는 것을 자신들이 베트콩이거나 베트콩 동조자라고 인정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을 죽인 거다.….”
(사진/'화해와 평화를 위한 베트남 진료사업' 발대식이 지난 1월29일 저녁 7시 서울 서초동 건치 사무실에서 열렸다. 지난해 10월 현장답사반을 파견한 바 있는 건치(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는 진료장비 준비 등을 모두 마친 뒤 오는 3월 초순께 진료단을 베트남 현지로 보낼 예정이다)
쿠앙응아이성, 빈선현, 빈키사
… 우리는 이 조사과정에서 알게 된 것 가운데 가장 대규모의 양민학살이 단 하루 만에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쿠앙응아이성 병원에 있었던 안사우(35)가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1966년 12월6일 이른 아침이었다. 빈리엔촌과 고롱 초소에 있던 한국군들이 빈키의 롱빈촌으로 내려왔다. 새벽 4시쯤이었고, 사람들이 아직 아침식사를 하기 전이었다. 군인들이 30명의 사람들을 모았다. 여자들과 아이들, 노인들이었다. 나와 젊은 사람들은 그 지역에 군인들이 있으면 언제나 그랬듯이 집을 떠나 피해 있었다. 군인들은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찾아내 모두 불 속으로 내던졌다. 그러고 나서 군인들은 30명의 사람들을 모두 언덕 꼭대기로 끌고가서 폭탄구덩이 끝에 서게 하였다. 그리고 군인들은 멀찍이 떨어져 대형 기관총과 박격포를 설치했다. 주민들을 향해 총을 쏘자 어떤 시신은 구덩이 아래로 떨어졌고 다른 시신들은 나중에 밀어 떨어뜨렸다.….”
12월6일 아침 몇 그룹의 한국 군인들이 쩌우레언덕에 있는 초소에서부터 락선촌(또한 푹선으로도 알려져 있다)으로 걸어왔다. 오전 10시께 군인들은 주민들을 한 군데로 모으기 시작했다. 피난민 중 한 사람인 안베이(30)는 숲덤불 사이에 숨어서 한국군들이 락선촌 안의 일부인 커우마을의 주민 대부분을 한자리에 모으는 것을 지켜보았다.….
“군인들이 주민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은 다음 아이들에게는 캔디를 나눠주고 어른들에게는 담배를 돌렸다. 난 군인들이 여자들만을 따로 모아 한쪽으로 데리고 가는 것을 보았다. 여자들이 자기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리는 순간 두손을 치면서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군인들은 그냥 쏴버렸다. 그리고 군인들은 총구를 나머지 모인 사람들, 대부분 아이들이나 노인들이 있는 쪽으로 돌리더니 역시 모두 쏘아 죽였다.… 그리고 나서 군인들은 주검들을 모두 날려버리려고 시체더미 중간에 지뢰를 설치했다. 그들은 지뢰를 연달아 설치했다. 그러나 결국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많은 주검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안베이는 빈키에서 그날 죽은 사람들의 숫자가 대략 1천명은 넘을 것으로 추정했다.….
쿠앙남성 디엔반현
…. 1968년 2월12일 구정 휴일이 있은 지 2주 뒤 한국해병대는 디엔반현, 탄퐁사, 퐁니촌에서 많은 양민들을 학살했다. 다른 학살사건과 달리 이 사건은 적어도 쿠앙남에서는 매우 널리 알려졌다. 서구언론에서도 이 사건을 언급할 정도였다. 1972년 2월13일 <뉴욕타임스> 기사는 미 국방성과 해병대 관리가 이 사건의 발생을 인지하고 있었고, 그에 대해 한국군 사령관에게 언급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일단의 한국군이 1번 도로에서 매일 있는 도로 정지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퐁니에서 불과 얼마 안 된 거리에서 정찰부대가 대인지뢰에 걸렸다. 부락민들은 지뢰가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런 총성도 없었고 그 지역에서 교전이 이루어지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했다. 그 폭발이 있은 뒤 얼마 안 돼 군인들이 도로변 바로 옆에 있는 퐁니촌으로 들어왔다. 군인들은 주민들을 불러모으고 인접한 들로 데려가 총살했다. 군인들은 집 안에 있었던 사람들도 쏴 죽였다. 그리고 마을 전체에 불을 질렀다.….”
쿠앙남성 유이쑤옌현 쑤옌쩌우사
… 우리가 쑤엔쩌우에 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작은 절에서 이틀간에 걸쳐 죽은 이들의 원혼을 달래는 식을 올리고 있었다. 수백개의 종이끈들이 제단 둘레에 있는 여러 개의 탁자 위에 걸쳐져 있었다. 종이마다 한 사람의 이름과 죽은 날짜가 쓰여 있었다. 승려 가운데 한 사람이 우리를 안으로 들어오게 하더니 “미국군과 한국군에 의해 죽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했다.….
한 남자가 감정이 복받친 채 1969년 3월15일에 대해 얘기했다. 그날 그는 가족들과 함께 집에 있었는데 한국군이 가까이 오고 있었다. 그와 그의 아이들은 얼른 숨고 그의 아내는 집을 지키기 위해 뒤에 남아 있었다고 했다. 군인들이 떠나간 뒤 그와 아이들이 돌아왔을 때 아내는 눈이 가려진 채 강간당한 뒤 벙커 안으로 던져져 수류탄에 맞아 숨져 있었다.…. 이런 사건들은 한국군들이 쑤옌쩌우에서 주둔한 처음 1년 반 동안 흔히 있는 일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됐다. 그러나 1969년부터는 그들이 캠프 안에 주둔해 작전횟수가 적어지면서 점차 이런 사건은 줄어들었다. 사실 쿠앙남성의 책임자인 레 트리틴 대령이 1970년 초에 <AP 통신> 기자인 마이클 푸첼에게 말하기를 “한국군들이 너무 자주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에 상당부분의 부대가 전투 임무에서 물러났으며 이 때문에 한국군들이 비전투 베트남인들과 부딪치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쑤옌쯩사
1968년 6중대의 청룡부대원들은 구정 공세 동안 키에우선촌에서 북서쪽으로 수킬로미터 떨어진 쑤옌쯩사에 있는 홍방언덕 초소에서 작전중이었다. 한국군들이 그곳에 주둔하는 동안 산발적인 여러 사건으로 약 300명의 주민들을 죽였다고 마을사람들이 말했다. 쑤옌쯩에서 인터뷰를 하는 동안 우리는 한 노인에게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이 무엇이었냐고 물었다. 그들은 “첫째, 미군 폭탄과 포탄- 이것으로 400명의 주민이 죽었다- 그리고 둘째가 한국군”이라고 했다. “민족해방전선은 두려워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아니오.” 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이 동옌촌과 가까이 있는 찜선촌에서 다른 날에 있었던 여러 개의 산발적인 사건들을 얘기해 주었다. 찜선에서는 청룡부대원들이 주민들의 목을 잘라 머리를 장대에 꽂아 땅에 박아두었다고 한다. 우리가 나중에 이 일에 대해 쿠앙남에서 온 다른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그는 “아, 그건 아주 흔한 일이었지요. 그건 한국군들의 장기였지요”라고 대답했다.
쑤옌푹사
1972년 6월 쑤옌푹의 ‘귀향마을’ 캠프가 조성됐다.…. 우리가 그 캠프에 도착하자마자 사이공 정부 소속의 캠프 부소장이 우리를 만나러 왔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그곳에 있는 동안 자기 혼자서만 얘기를 했다. 처음으로 그가 한 말은 실제 한국군들은 양민들을 그렇게 해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발언은 옆에 참석한 몇몇 어른들로부터 야유와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주위로부터 상당한 제지와 첨가와 잦은 교정을 받아가며 마침내 청룡부대가 처음으로 그들의 주둔지인 캄하이에서 강을 건너 북쪽에 있는 쑤옌푹으로 온 것에 대해 우리에게 얘기해주었다.….
쑤옌푹에서 있었던 단일 학살로 가장 참혹했던 것은 1968년 후반에 톤남(5촌)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도 다시 부소장이 혼자서 말을 도맡아 하기 시작했다. 참석한 사람 중 아무도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지 못했다. 당시 북쪽의 4개 촌은 거의 소개된 상태였지만 5촌에는 아직도 500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청룡부대가 무장 차량을 끌고 진군하는 것을 보고 마을을 벗어나 인접한 언덕의 숲에 몸을 감추었다. 그러나 51명의 주민들은 고령과 불편한 몸 때문에 달아나지 못했다. 임신한 몇명의 부인네들도 그 가운데 있었다. 남은 사람들은 숨으려고 하지 않고 서로 의지가 되고자 함께 모여 집 앞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군인들이 자신들을 적군으로 잘못 보거나 위협적인 존재로 오해하지는 않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군인들은 오는 즉시 모인 사람들을 향해 기관총을 뿜어 모두를 죽였다. 3, 4일 뒤 군인들의 작전이 끝났을 때 다른 마을 주민들이 돌아와 주검들을 발견하고 매장했다.….
캠프의 부소장은 쑤옌푹의 원래 주민 1만5천명 가운데 4천명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추산했다. 2천명은 폭격으로 죽었고 나머지 2천명은 마을로 들어온 군인들에 의해서였다고 했다. 우리가 그게 어느 군대냐고 묻자 그는 미군과 한국군이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베트콩들은 주민들을 죽이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물론 베트콩들도 사람을 죽였지요. 정부를 위해 일하는 사람만 죽였어요”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다시 “베트콩들이 한국군과 교전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아니다. 그들은 결코 한국군들을 향해 총을 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국군들이 양민들에게 보복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군들은 싸움을 할 줄 모르는 군대였다. 그들은 한번도 제대로 베트콩들과 싸우러 나가지도 않았다. 그저 농민들이나 가축들을 ‘베트콩’이라고 하면서 죽였을 뿐이다.” ….
첫댓글 아직 진상이 규명되지 않았기때문에 과장된 부분이 간혹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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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전은 언제 민간인이 적이 되어서 나를 죽일지 모른다는 군인들의 불안감이 이런 일을 일어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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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단체 차원에서 사과한적은있어요.
민간단체상의 사과를 했으며 김대중전대통령이 개인적 사과연설을 햇다고 조용히 묻어져서는 안될 문제입니다. 그럼 일본의 주장인 노무라 담화,총리가 바뀔떄마다 하는 사과연설, 천황의 개인적 유감표명, 일본 시민단체의 사과를 했으며 한일협정,센프란시스코 강화협정으로 한일간 역사상의 모든 문제는 마무리지어졌다는 논리랑 다를게 없는데요 ^^ 반드시 교과서에서 가르치며 반성하고 베트남에게는 보상을 해야된다고 봅니다.이문제는 우리나라와 국군의 역사상의 오점중하나입니다 더이상 어물쩍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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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정의에 따라 다르겠죠. 한국의 '자칭' 우파들은 베트남전을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선의의 전쟁으로 평가합니다.
전쟁시에는 저런 일이 없으면 오히려 그게 비상식적인 일입니다. -_- 그렇다고해서 지금에와서 잘했다라고 말할 수 없고...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죠. 다만, 지금은 전쟁이 끝나고 수십년이 흘렀으니 저런 문제에 대해서 분명히 보상을 해야 하겠죠.
베트남이 쿨하게 나와줘서... 별 걱정 안해도 될듯. 사실 파견국한테까지 책임을 묻는다는게 좀..
요히님 말씀은 좀그런듯, 쿨하게 나와주니깐 우리가 굳이 그문제를 집고 넘어 갈 필요가 없다는건 좀 .... 게다가 파견국 군대가 저지른 죄악은 파견국한테 묻지 그럼 전쟁당사자인 미국한테 묻나요?
게다가 베트남전에서 벌어진 아무리 불가피하다지만 벌어진 일부 학살행위는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국군에게도 분명 오점입니다. 우리나라 입장에서만 베트남전을 바라보며 자랑스러운 파병이라 생각하거나 그냥 조용히 묻어가는 행위는 일본에게 끈임없이 배상과 사과를 요구하는 우리나라에게는 분명 모순된 행동입니다. 우리스스로가 깨끗하지 못한데, 어떻게 일본만 비판하죠?
국익을 위해서라면 사과하는게 훨씬 낫습니다. 물론 배상금 이나 그런걸 물어주면 당장은 손해라고 느껴질수 있지만 우리가 먼저 아시아에서 벌어진 과거사에 대한 청산 작업을해서 모범사례를 만들고 좀더 당당히 일본과 교섭할수 있고 베트남과 각국에 좋은이미지를 주어서 경제적 외교적 시너지 효과도 충분히 있을껍니다. 그리고 사과와 배상을 한국기업진출과 결부시키는건 흥정이지 사과와 반성이 아니죠
베트남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답니다. "우리의 상처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우리는 일단 그 상처를 덮어서라도 빨리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 라고요. 그러면 우리는? 그 상처를 치료할 약을 주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덧나게는 하지 말아야죠. 모 단체들에서 베트남전을 "민주주의 수호전쟁"이라 부르며 "학살은 없었다. 우리는 베트콩을 죽였을 뿐이다." 라고 한다면 그건 아물어가려는 상처를 송곳으로 쑤셔대서 덧나게 하는 짓이라고 봅니다.
당시상황상 아무리 불가피하게 벌어진 학살이라도 지금도 베트남과 전쟁상태가 아니고 전쟁이 끝난지 수십년이 지낫으니 이제는 사과할것은 사과해야된다고 봅니다. 베트남전쟁은 물론 한국의 경제를 발전시켰고 우리도많은 희생을 했지만, 반대로 우리와 미국은 베트남에게 막대한 피해를 끼쳣으니깐요. 일부는 국군이 베트남에서 봉사활동등 여러가지 선한 행동을 했으니 학살은 없고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군대라는데 그럼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했을때 모든 일본인들이 항상 잔악행위를 한것도 아니고 선한 일본인도 있으며 우리는 한국에 인프라를구축했으니 우리의 한국지배는 선의의행위엿다고 주장하는거랑 다를바가 없다고 봅
젠장. 고자이를 고자로 봤어..
ㅋㅋㅋ 저도 첨에 그랬다능ㅋㅋㅋ 고자마을(응?)
ㄲㄲㄲㄲ
사실유무를 떠나 본문이 상당히 과장, 편협합니다. 베트콩은 한국군에게 총을 쏘지도 않았고 총을 쏘면 양민에게 보복한다운운은 무슨 근거에서 멋대로 말하는건지? 윗분들의 의견도 상당히 잘못 알고 계시며 막연하게 생각하시는 듯 합니다. 우선 DJ가 베트남방문시 과거사에 대해 이미 언급하였으며, 베트남정부에서는 서로간의 불행한 과거사였다며 대답하여 마무리지었습니다.
그리고 한국군은 월맹을 상대로 선전포고하고 전쟁하러 간 것이 아니라, 월남정부의 공식 요청으로 평화유지군으로서 간 것입니다. 이것은 명백히 다른 것입니다. 양민 학살? 남베트남은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는 국가였지만, 분명한 주권국가이며 한국군이 상전인양 설치고 돌아다닐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양민 학살은 고사하고 오인사격으로 소 한마리라도 죽으면 시위대가 한국군 부대 입구에서 데모를 하고 한국군은 피해보상을 해줘야 했습니다. 본문에는 무슨 인종청소라도 한 것처럼 묘사를 했는데 실로 어이가 없습니다.
전쟁스트레스나 오인으로 인하여 일부 병사들이 민간인을 사살했다면 이는 어디까지나 사고이며, 해당 군인과 그 지휘계통상의 상관들이 책임져야할 부분입니다. 물론 도의적 차원에서 한국정부가 사과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을 침소봉대하여 아예 한국군이 마치 월남인들에게 인종청소라도 한 양 말하는 것은 국익을 떠나 국가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헛소리입니다. 목을 잘라서 장대에 꼿았다는 증거가 도대체 어디에 있으며(월남의 상황은 언론에게 철저히 공개되어 있었습니다. 저런 일이 비일비재했다면 당장 기사거리가 되었겠죠.) 저딴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작자들의 의도가 실로 궁금합니다.
주로 딴겨레신문에서 줄기차게 짖어대는 지겨운 레파토리랑 비슷한거로군요...근거가 너무부족하기에 딴겨레 기자들이 대강 문질러 씌우기로 ~였다카더라로...남베트남 대부분 지역에 가서 자유월남정부정권아래서 생활한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오히려 한국군에 대한 좋은감정들을 가진경우가 대다수입니다. 저희학교에 교환학생으로 온 친구는 베트남/프랑스 이중국적자인데 부모님이 자유월남인이었으며 사이공 최후의 날 이래로 공산정권아래 5년을 월남에서 살다 프랑스로 이민을 갔었죠...그분들한테 물어봤지만 한국군에 대한 평가는 아주 높은편입니다.
일례로 베트콩이나 월맹군이 한국군을 무서워한 이유가 베트콩이 포로로 잡은 한국해병을 무더운 정글에 꼬치로 매달아 말려죽인후 한국해병대에서 보복차원으로 베트콩을 포로로 잡으면 차마 언급하기 어려운 아스트랄한 대우를 해줬다고 하더군요 그이후로 베트콩은 한국해병이라면 ㅎㄷㄷ치를 떤다더군요(물론 이것도 확실한 소스가 있는건 아니고 항상 재밌는 3류 소설을 써주시는 딴겨레 기자님들과 비슷한 수준의 민담수준입니다만...)
깜빡이님 말씀대로 "목을 잘라 장대에 달았다더라~~~"이런주장을 하는사람들이 시가전중 현지 소녀를 구출하는 한국해병을 보고 "월남소녀를 유괴하고 있는 한국군" 의료봉사를 하는 한국 군의관들을 "현지인을 상태로 생체실험을 하고 있는 한국군" 월남인들의 추수를 돕고있는 한국군을 보고 "월남인들의 식량을 약탈하고 있는 한국군"이런 희안한 해석을 할 사람들이죠
참말 웃긴게 한국군은 싸움을 할줄 모르는 군대고 소나 돼지를 베트콩이라고 하면서 쏴죽였다던데 정부의 공식적인 발표인 5천여명의 한국군 사상자는 소나 돼지한테 받히고 개한테 물려서 발생했단 말인지...자기들이 한국군에 총을 쏘면 양민들이 피해입을 것을 아는 베트콩이 왜 한국군보다 양민학살을 심하게 했던 미군에게는 밥먹는것보다도 자주 총을 쏘고 자기들이 무기를 놓으면 월남에 있는 모든사람들이 전쟁의 고통에서 해방되는데 한사코 전쟁을 계속했을까요? 전쟁이라는 건 정말 아이러니란 말입니다ㅋ
북베트남은 뭔가효? 그리고 남베트남 정부의 안습한 통치력 때문에 베트콩(이라 부르지만 사실 '빨갱이'보다 민족주의자가 더 많았다고 하더군요)이 손 놓고 시민들 사이로 사라졌다고 해도 여기저기서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또 반기를 들고 일어날 지도 모르는데효?
만일 월남전의 승자가 현 베트남정부가 아닌 자유월남정부였다면 월남전 참전용사들은 학살자가 아닌 수호자요, 피흘려 그들의 자유를 수호해준 혈맹이라 불리고있겠죠.
문제는 그럴 확률이 0에 한없이 수렴한다는 거죠.
글쎼요 깜빡이님와 steelheart님의 논리는 제가 듣기에는 월남전 동안 양민 학살이 없다는 거 같습니다. 그리고 예를 들어봐도 한국전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요청으로 참전한 미국군이 양민학살을 저질러도 이건 사고이고 학살이라 규정하는건 미합중국의 위신을 떨어트리는 헛소리인가요? 교전중 얼마든지 발생할수있는 일지만 사고로 보기보단 범죄로 봐야한다고 봅니다. 사고일테니 사과 할필요 없다는 논리는 좀 그렇습니다. 그리고 steelheart님 저희 할머니도 한국전쟁 세대이신데 미국군에 대한 인상은 대단히 좋답니다. 그렇니까 미군은 우리나라에서 범죄같은걸 범하지 않은 자유의천사인가요?
님은 곡해를 하시는군요. 본문의 내용이 마치 한국군이 점령군 행세를 하면서 인종청소를 한 것처럼 왜곡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는 겁니다. 님은 본문에 나온대로 한국군이 무고한 사람 목 짤라서 장대에 매달았다는 근거가 있다고 주장하시는 건가요? 님의 논리는 조승희가 미국서 사고쳤다고 한국인 전부가 조승희같은 인간들이며 한국인이 미국에 가는 것도 사고치려고 가는 거다라고 확대해석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과할 필요가 있다, 없다는 함부로 단정할 것이 아니며, 사과를 하더라도 국가의 위신과 상대국의 입장, 참전장병들의 명예를 고려하여 신중하게 해야 하는 것이지, 본문처럼 아무런 증거도 없이 카더라 통신으로 한국군은 모두 죄인이며 무고한 사람이나 함부로 죽인 살인마식으로 묘사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것을 지적하는 것인데 무조건 책임없다, 거짓말이다따위로 치부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군요. 국가간의 외교는 매우 복잡한 것이며 상호의 입장과 관례에 의해 신중하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지, 감정이나 카더라통신따위로 경솔하게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난독증이 있으신건지 ㅡㅡ 제가 어디에다가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써놨습니까? 그리고 어디다가 양민학살이 없었다는 글을 써놨습니까? 월남전 참전자체를 쓰레기수준으로 매도하고 한국군이 무슨 발칸반도의 인종청소부인양 기술하고 박정희 대통령이나 채명신장군은 밀로셰비치나 다름없는인간 취급을 하는걸 바로잡자는 취지로 쓴글인데 정상적인 문자 해독능력을 가진사람이라면 어찌 그렇게 해석하실수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례로 제가 고등학교시절 근현대사를 배운 선생님이 골수전교조 간부에 노사모에 뭐시기에 하여간 입에 담기도 짜증나는 분이었습니다만 그분이 항상 월남전 얘기를 할때 그런 레퍼토리였거든요 한국군이 월남여자들 건드려서 낳은 혼혈아가 수십만이나 된다...연인원으로 쳐도 참전인원이 18만명수준인 한국군의 혼혈아가 백만에 육박한다라...이건뭐 일인당 몇명을 낳아야하는거죠? 그분이 항상 월남전 건드릴때 침략자 한국군이 어떻고 저떻고 일본군 저리가라할정도의 무수한 양민학살에 약탈,강간,방화에...뭐 저는 그수업듣기가 싫어서 매일 잠만 잤는데 잠결에 들리는 소리에 월남전얘기가 아니라 중일전쟁얘기인줄알았지 뭡니까ㄲㄲ
그리고 플래툰에 나온 반즈같은 미군이 한국전에서도 분명 존재했으리라 생각하고 그런인간들을 빼면 대다수의 미군장병들은 생판들어보지도 못한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기위해 미합중국 정부의 이해타산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머나먼 타지에서 피흘려가며 싸워준 동지입니다. 헌데 그사람들이 자유의 천사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현대 한국인에게 자유의 수호자입니까? 멍청하게 시간을 끌어서 우리를 해방시켜주지 못한 어버이수령님과 공화국의 수호자 인민군입니까? 그도 아니면 북조선을 도와준 형제국 중화인민공화국입니까?
SteelHeart 님 깜빡이님 죄송합니다. 제가 다시 읽어보니 제가 내용을 오해했군요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채명신 장군이야 할 말 없지만 팕정이는 밀로세비치보단 자기 부하들한테 총 맞아 뒈진 차우체스쿠가 더 어울리지요.
포탄아래서/그렇게 말씀하시니 되려 죄송하네요. 제 의견은 우리측에 잘못있다, 없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민감한 부분을 확실하게 검증되지도 않은 "카더라"통신만 믿고 함부로 단정해서 국가의 위신과 참전용사들의 명예를 훼손해서는 안된다라는 것입니다. 또한, 사과는 우리가 하고싶다고 하는 것도 아니며, 국가간의 관례와 서로의 입장을 잘 고려하여 신중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월남전참전과 일본의 식민지배는 그 의미가 전적으로 다르며 동일선상에 놓는 오류를 범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자칭 민주화투사로 진정 민주화를 위해 죽어간이들의 등골빼먹으면서도 누릴거 다누리시는 슨상님과 김땡삼 대통령께선 성군중의 성군 강희대제쯤 되겠군요ㅋㅋ
여기서 그 둘이 왜 나오는지 알 수가 없군요.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대통령들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어서 말이죠.
베트남에서 양민학살을 했건 안했건 파병부터가 칭찬받을일은 아니죠.
한국군의 베트남파병이 잘못이라면 한국전쟁에 참전한 16개국도 비판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군의 파병은 결코 월맹에 대한 침략이 아닙니다. 당당히 평화유지군으로 남베트남의 치안유지를 위해 파병했습니다. 비판하려면 뒷꽁무니로 슬그머니 끼어든 중국과 북한, 소련에게 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