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선택제란 자신이 원하는 학교를 선택할 수 있게 하는 제도이고 반대로 자신이 원하는 학교를 선택할 수 없게 하는 제도는 강제배정제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 강제배정제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책하에서만 가능한 교육이수기회제공 방식이며 평준화정책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우리나라는 진학방식으로 고교선택제와 강제배정제를 함께 사용하고 있는데 그 기준은 대체적으로 말해 도시의 규모다. 즉 대도시는 평준화지역이라고 해서 강제배정제를 시행하고 있고 중소도시는 비평준화지역이라고 해서 고교선택제를 적용하고 있다. 최근에 문제가 되고 있는 평준화해제논의는 대도시에서 고교진학희망자에게 원하는 학교를 선택하게 하자는 것으로 1974년부터 실시하던 고교평준화정책을 폐기하자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평준화정책은 두 단계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1968년도의 중학교 무시험제로 알려진 것이 첫번째 것이었고 두 번째로 시행한 것이 1974년의 고교평준화제도이다. 당시에는 평준화정책을 모든 중고교에 적용하고 또 무상교육을 최단 시간내에 전국적으로 실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천명했었지만 사립중고교와 농촌지역의 반발로 시행 첫해부터 파행되기 시작했고 그 이후 동 제도의 도입 당시에 국민앞에 선언했던 약속의 이행을 누구도 요구하지도 않은 채 오늘에 이르렀다.
그 결과 중등교육의 무상화를 위한 노력도 턱없이 부족해 아직까지도 언제 그것이 실현될지 요원하고, 평준화도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를 함께 하면서 아까운 35년을 보낸 셈이다. 그리고 마침내 평준화정책의 폐기 주장이 수월성과 경쟁논리 그리고 교육의 시장화와 학원화를 배경으로 거세게 일고 있는 중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평준화정책의 유지나 확대 혹은 폐기나 수정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정책을 도입하던 당시의 의도나 배경 그리고 과정을 모두 살펴보아야 하는데 자칫 자기주장의 합리화만 강변하는 그런 의미없는 자리가 되기 쉬우므로 그렇게 하기도 어렵다.
필자는 두 번에 걸쳐 평준화정책을 도입하던 당시의 대국민 약속이 처음부터 차질을 빚은 것을 무척 아쉬워하는 편이다. 만일에 대도시와 중소도시와 농어촌을 막론하고 평준화를 실시하겠다고 하던 약속을 지키고 무상교육도 중학교는 물론 고등학교까지 국가의 경제적 성공에 맞추어 최단시일내에 실시했었다고 한다면 오늘날 우리 교육의 모습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본다.
적어도 중등학교의 모습이 평준화지역과 비평준화지역, 일반고와 특목고. 인문계와 실업계 등으로 갈가리 찢기지는 않았을 것이고 국가가 중등교육을 대통합시켜 이 나라의 이세로 태어난 이상 그들 모두에게 최선을 다해 동일한 조건을 제공했을 것이라고 보는 바이다.
오늘날 미국의 교육제도를 보면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나누지도 않고 인문계와 실업계로 나누지도 않는다. 즉 미국의 중등교육제도는 대통합주의이고 미국의 이세들도 국가로부터 아무런 차별도 받지 않는 채로 공부하고 있으며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는 말이다.
미국은 95%나 되는 한가지 종류의 공립중등학교와 약5% 정도의 예외적인 사립학교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미국의 학부모나 자녀들은 학교선택제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다. 물론 사립학교로 진학하고자 할 때는 학교를 선택해야 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만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고 우리처럼 학교선택제가 사회적으로 문제되는 경우도 없다.
우리나라는 사립의 비율이 거의 반수 가까이 되어 학교선택문제가 중요하지 않을 수 없지만 국가전체로 볼 때 국가가 중등교육을 일관되게 시행하기 어렵게 하고 또 불필요한 인력과 자원을 소모하게 해 국력의 낭비가 심한 편이다. 차제에 이를 해소하는 방안을 찾았으면 하며 필자의 소망을 말한다면 중등교육의 국사립일원화 즉 국공립화의 길을 모색했으면 하는 바이다(참고로 필자는 고등교육에 대해 국사립일원화 그 중에서도 사립일원화를 주장하는 자임을 밝힌다).
중등학교의 다양화란 말은 선택의 여지가 많아져 매우 자유롭고 분방한 것처럼 보이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민주화와는 거리가 멀고 전체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당시에 다양한 사회적 신분을 반영해 학교의 다원화가 이루어졌었다. 다시 말해 학교를 신분을 부여하는 기구로 활용해 사회에서 할 일을 학교에 맡겨버렸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학교를 얼마만큼 다녔는가는 신분의 표지로 활용되었다.
또 중등교육을 자아를 성취하고 민주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기초소양을 습득시키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국가와 사회가 요구하는 기능을 습득시켜 그 수요를 충당시키는 장치로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합주의에 반하는 학교 자체의 다양화는 전체주의시대에 국가의 의지를 강하게 주입시키는 과정에서 생겨난 역사적 유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을 무시하고 학교의 다양화가 선택의 다양화와 동일시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필자는 우리의 중등교육이 대통합주의로 하나의 형태의 학교를 이세들에게 제공하고 그 안에 다양하게 교육과정을 개설했으면 한다. 학교의 다양화와 교육과정의 다양화 중 어느 것이 민주주의 시대의 교육논리에 맞는지를 검토했으면 한다는 말이다.
끝으로 용어의 문제 한가지를 짚어볼까 한다. 평준화란 무슨 말인가. 학생 일인당 국가가 투입하는 교육비가 같거나 비슷하면 평준화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국가가 교육비를 부담하는 경우에 피교육자에게 투입되는 예산규모가 같을 때 이를 ‘평준화’란 용어말고 달리 적당한 말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가 평준화를 해체하자고 하면 국가가 투입하는 일인당 교육비의 균등을 없애자는 것처럼 들린다. 필자의 오해인가.
만일에 국가의 1인당 교육예산은 같게 하고 교육과정을 지금처럼 획일화하지 않게 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평준화해체 주장의 요체라면 ‘교육과정의 다양화’라고 표현하면 된다고 본다. 그게 아니고 진실로 학교의 다양화를 바란다면 평준화해체라고 해서는 안되고 달리 적당한 용어를 창출해내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일인당 투입하는 교육예산은 어느 경우에도 균등해야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