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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상영될 때 "'굿' 바이"로 옮겨진 일본영화의 원래 제목은 '오쿠리 비토(送人)'
입니다. 금년 아카데미 영화상의 외국어 부문에서 수상하면서, 다시 잠깐 다녀가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오래 상영되고, 박수를 받은 영화는 아닙니다.
아무래도 우리의 정서에는 일본영화의 섬세함이 아직은 덜 다가오는 듯도 합니다만 ----
'오쿠리 비토(送人)'는 보내주는 사람, 즉 장례 시에 염습 등의 의식절차를 담당하는 사람이나 화장장에서 일하는 분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제목부터 이 영화는 죽음과 관련되고, 죽음과 관련된 의례와 다시 관련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의미와 관련해서 영화 속에서는 멋있는 대사, 이 영화에서 가장 시적이고 철학적인 대사가 나옵니다. 동네 목욕탕의 할머니가 죽어서, 그 친구분인 할아버지(그는 알고 보니, 바로 화장장에서 근무하는 분입니다.)가 화장장에서 할머니를 보내주는 장면입니다.
할아버지는 말합니다.
"죽음은 문이다. 죽음은 헤어짐이 아니라 다음 세상을 맞이하는 문이다.
나는 문지기로서 여기서 많은 사람들을 보내주었다네.
다녀오세요. 다시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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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아, 이제 일본사람들이 '죽음'을 말하기 시작하는구나."라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밀쳐내기만 했던 죽음,
부정탄다고 애써 외면하기만 했던 그 죽음을 이제 받아들이고,
스스럼없이 말하기 시작하는구나 하는 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보다 앞서가는 것같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말은 무슨 이야기일까요?
이 영화에는 직접적으로 스님이나 사원이 주인공은 아니지만 그 뒷배경에는 일본불교의 큰 특징의 하나인 '장례불교'라는 것이 놓여있습니다.
장례불교를 중심으로 해서 보면, 이 영화 속에는 일본불교사 전체, 즉 장례불교 이전으로부터 장례불교로 나아오는 전과정이 다 응축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같습니다.
이야기를 다시 올려서, 백제로부터 일본이 불교를 받아들인 즈음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지요.
국가적인 차원, 즉 왕실을 중심으로 해서 받아들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왕실의 안녕을 빌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안녕을 빌어주는 사제로서 '스님'이라는 존재를 받아들인 것이지요.
이런 불교를 국가불교라고 하는데, 왕실의 안녕을 빌어주는데 많은 스님이 필요한 것은 아니겠지요.
나라에서 일년에 몇 분 정도의 스님을 배출할 것인가를 정합니다.
각 종단에 지정해 주는 것이지요. 이를 '연분도자(年分度者)'라고 합니다. 대개 한 종단에 2-3명 정도 되었습니다. 이들은 나라로부터 '월급'을 받습니다. 그리고 왕실의 안녕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이 임무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들은 금기해야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기도하는데 부정타면 안 되니까요.
당연히 동물이나 사람이 죽은 시체를 보거나 만지는 것은 금기입니다.
(인도에서도 이런 사람이 불가촉천민이 되었으며, 우리의 조선시대에도 천민이 되었지요)
그보다 더 큰 부정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러한 스님을 '관승(官僧)'이라 합니다. 관리인 스님이라는 말입니다.
영화 '굿'바이'에서 주인공이 처음에 다시 취직된 곳이 어떤 일을 하는지 알게 되었을 때
구토를 하는 것이나 그 아내가 남편의 직업을 알게 되었을 때 그러한 반응이 아직도 살아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아내 미카는 말합니다.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창피하지도 않아?" 어느 덧 꽤 익숙해진 남편 고바야시는 말합니다.
"왜 창피해?" "보통 일을 하란 말이야."
"누구도 죽은 것은 보통이야. 나도 죽고 너도 죽어. 죽음이 왜 보통이 아니란 말이냐?"
그러나, 아내는 설득 당하지 않고, 화를 냅니다.
아내를 붙드는 남편의 손을 뿌리치면서 모멸차게 말합니다.
"내 몸 만지지 마. 더럽단 말이다." 그러면서 친정으로 가버립니다.
이 영화의 갈등 부분입니다.
아내 미키가 친정으로 가버린 일은 , 아직 이러한 '부정탄다'는 개념에 아직 지배되어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대 일본에서는 사람이 죽었을 때 시체 처리를 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같습니다. 강가에 버려진 시체가 많았다고 합니다. 누군가 나서서 이들 시체를 모아서 불이라도 태워야 하는데 그런 일을 하신 분이 역시 스님입니다. 그런데 이 스님은 관승이 아닙니다. 관승의 신분으로 출가했다가도 다시 관승의 신분을 버리고 다시 한번 더 '출가한 둔세승(遁世僧)'입니다.
그러한 둔세승들은 시체를 만지는 것에 대한 거리낌이 없다고 합니다.
"염불하는 사람은 부정타지 않는다." "계율 지키는 사람은 부정타지 않는다"
"참선 하는 사람은 부정타지 않는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 나름의 민중불교라 할 수 있겠지요.
일본불교를 흔히 장례불교라고 하는데, 거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지만 이렇게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긍정적으로 볼만한 측면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분이 바로 제가 번역한 책 "인물로 보는 일본불교사"의 저자
마츠오 겐지(松尾 剛次) 교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