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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와 나의 공통점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다. 취미도 달랐고, 특기도 달랐으며 심지어 보는 드라마마저 달랐다.
팝송을 좋아하는 그와는 달리 나는 가요를 좋아하고 만화책을 좋아하는 나와는 달리 그는 철학서적과 소설을 좋아했다. 내가 드라마나 쇼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반면 그는 뉴스나 사극을 좋아했는데, 언제나 리모컨은 그의 차지였다. 어떻게 공통점이 단 하나도 없을 수 있냐 이거다.
그는 혼자 있는 시간을 즐겼다. 그가 집에 있는 시간은 드물었지만 한 번씩 집에 있어도 책을 읽거나 클래식을 듣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러다가 정말 심심하면 내게 말을 걸었다.
“미령인지, 유령인지 하는 그 여자는 어떻게 됐어요? 형한테서 떨어졌어요?”
그는 말도 마라며 자기 평생에 그렇게 질긴 여자는 처음이라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여우같은 계집애. 거머리처럼 착 달라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하는데 아주 사람 환장하게 만든다니까.”
“복 받은 거죠. 역시 사람은 얼굴이 잘나고 봐야 한다니까.”
그의 집에서 얹혀산 지 두 달이 흘렀다. 그와 내가 특별한 친분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런 대로 싸움 없이 지내는 편이었다. 그가 싸움을 걸어와도 내가 알아서 잘 피해온 탓이었지만 말이다. 그가 말하길 자기는 특정한 파트너를 두지 않는다고 하기는 하더라만, 난 그 꼴을 안 봐서 모르겠다. 어쨌거나 나는 결코 흉내도 못 낼 바람둥이가 아닐까 라는 추측도 해봤다.
'저 성질에?'
“그건 그래. 네 얼굴이 그걸 증명하잖아.”
이 사람이 또 시비네.
내가 그의 집에 얹혀살면서 배우고 익힌 거라곤 비위 맞추는 일과 표정관리 하나뿐일 것이다.
“형, 아르바이트 자리 하나 없을까요?”
“넌 입만 열면 아르바이트 타령이야. 그렇게 돈이 궁하냐? 이래서 사람은 능력이 있어야 한다니까.”
“아는데 있으면 소개 좀 시켜줘요.”
그가 얼마 전부터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 시력도 좋은 사람이 왜 안경을 쓰냐고 물었더니 지적인 이미지를 보이기 위해서라나 어쩐다나.
멋 부리는걸 좋아하는 남자라고 말하면 되겠다.
“누드모델 해봐. 그것도 괜찮다니까. 네놈 얼굴 그리는 것도 아니고 몸만 그린다는데 뭐 어때. 여자한테 보이는 것도 아니고. 하기사, 넌 워낙에 변태라서 남자한테 몸 보이는 것도 난처하긴 하겠다.”
나는 대체 그에게 뭘 기대했던 걸까. 나는 됐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는 갑자기 손바닥을 치면서 환희의 미소를 지었다.
“오십만 원 짜리 아르바이트 어때?”
“이번에도 누드라면 그냥 사양할래요.”
그가 여전히 환희의 미소를 짓고서는 내가 구세주인 마냥 내 두 손을 꽉 끌어 잡고는 조각 같은 입술을 열었다. 불안함이 내 몸을 덮쳐왔다. 내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의 미소와 행동이다.
“너 딱 하루만 내 애인해라. 그럼 오십만 원 줄 테니까 말이야. 어때? 조건 좋지?”
그의 이마에 손을 얹고 물었다.
“형 약 먹었어요? 이마에 열은 없는데.”
그는 이마에 올리고 있던 내 손을 거세게 뿌리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특유의 억지가 시작된 것이다.
“착각하지 마. 그냥 사귀는 척만 하면 되는 거니까.”
“또 왜요? 또 그 불여우 떼어놓기 작전이라도 돼요?”
“그래.”
“또 여장을 하라고요?”
그가 고개를 저으면서 아니라고 말했다. 내 눈에 비친 그는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걸로 보였다.
“아니. 그 여자한테 남자 애인이 있다고 뻥쳤거든.”
기가 막혔다.
“그렇게 그 여자가 싫어요?”
그가 단호하게 말한다. 평소에 잘 피우지 않던 담배까지 입에 물었다.
“어. 싫어. 아주 싫다 못해 징하다. 넌 그냥 옆에 앉아있기만 하면 돼. 보수도 그 정도면 좋잖아. 먹여주고 재워주는데 그 정도 보답도 안할래?”
“말은 쉽죠. 그러다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어떡해요.”
“굳이 네가 아니라도 이런 부탁 들어줄 사람 많다. 네가 돈이 필요하다고 해서 말한 건데 관두던가.”
“잠시 만요!”
그냥 그와 사랑하는 사이라고 허무맹랑한 거짓말만 하면 된다. 실제로 사귀는 것도 아니고 척인데 뭐 어때. 돈 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사람을 불행하게도 행복하게도 만들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녀를 만난 건 일주일 후였다. 그가 말도 없이 그녀를 집으로 데려온 것이다. 나는 당황해 했지만 그가 던지는 눈빛이 하도 겁이 나서 재빨리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나를 소개시켰다. 그때 나는 청바지와 다 떨어진 흰 면 티를 입고 있었다.
“자, 이제 눈도장 했으니까 됐냐?”
하지만 그녀에게 그는 안중에도 없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그녀가 내게 명함을 내밀며 악수를 청해왔다. 우리 셋은 전혀 정답지 않게 소파에 앉아 커피를 들었다.
“이름이 뭐죠?”
“박성현입니다.”
“학생 나이는?”
“스물입니다.”
“꽤 어리네.”
그녀는 이미 내게 말을 놓고 있었다.
그녀는 몹시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나는 몹시 떨떠름했으며 이일을 일으킨 장본인인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그녀는 끊임없는 질문을 퍼부었다.
“언제부터 이집에서 산거야.”
“두 달 남짓 됐는데요.”
말 한번 곱게 하시네.
자기가 마치 형사라도 된 마냥 심문을 하는 태도가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어떤 대학을 다니냐, 고향은 어디냐, 언제부터 사귀게 됐냐. 등등 그녀의 질문에 대꾸할 가치는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꽤 열심히 대답을 해주었다. 드디어 구경만 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확인했으니까 이제 그만 돌아가 봐.”
그의 차가운 목소리에 그녀가 신경질 적으로 되받아쳤다.
“둘이서 짜고 날 골탕 먹이는 건지 어떻게 알아?”
“제발 닥치고 좀 꺼져. 언제까지 엉겨 붙어서 사람 짜증나게 할 거야? 앞으로 연락도 하지 말고 길에서 마주쳐도 아는 척 하지 마. 너란 여자 정말이지 최악이니까.”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서 나는 내 방으로 피신을 했는데 싸우는 소리가 그쳤을 때는 그도 그녀도 온데간데없었다.
겨우 이런 일로 돈을 받는 건 역시 마음에 걸렸다. 그의 부탁이긴 했어도 어쨌거나 아무런 원한도 없는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의 말대로 먹여주고 재워준데 대한 보답일 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물론 돈은 받지 않았다. 다음날 그가 잠에 취해 나를 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
“너 이름이 꽤 촌스럽더라.”
8.
나는 그동안 그와 친해졌다는 어마어마한 착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내게 일도 시키지 않고, 구박을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심술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한번은 새벽 두시에 자고 있는 사람을 깨워서 갑자기 밥을 차리라는 거였다. 하도 그런 그가 얄미워서 아주 가끔은 국에 이물질을 넣고는 했다. 침이라던가, 내 눈곱이라던가 말이다.
“맛있죠?”
내가 씨익하고 웃어보이자 그는 수상하다며 되물었다.
“너 무슨 짓 했지?”
“에이 무슨 그런 섭섭하신 소리를. 사랑을 듬뿍 담았다고요 내 한없는 사랑 말이에요.”
내가 생각해도 닭살 돋는 멘트다. 그는 의심의 눈빛을 가득 담은 채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솔직히 말해. 사랑이 아니라 저주지? 너 여기에 뭐 넣었지?”
이 사람이 어떻게 알았을까. 하지만 나는 전혀 아니라며 그의 숟가락에 밥을 얹고 입을 벌리라고 말했다.
“아~ 해요. 아!”
“이게 미쳤나. 네가 한번 먹어봐. 네가 먹고 나서 그담에 먹을란다.”
당연히 먹는 게 꺼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이 저주의 음식을 먹일 수만 있다면 이 몸뚱아리 하나 희생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지.
“봐요! 먹었죠! 아무것도 안 넣었다는데 진짜 왜 그래요 사람 무안하게.”
그가 토악질 하는 흉내를 내면서 밥그릇을 자기와 훨씬 떨어진 곳으로 밀쳤다.
아무래도 눈치를 챈 거 같았다.
“웩, 얼굴은 왜 내미는 거야, 입맛만 버렸잖아.”
그는 그날 밥은커녕 물도 먹지 않았다.
어느 날은 너무 지루해서 그와 함께 책방에 갔었는데, 만화책을 잔뜩 빌리는 나와는 너무 상반되게 그는 소설책만 잔뜩 빌리는 거였다.
내가 빌린 만화책 : <쿠니미츠의 정치>, <에스페란사>, <미스테리 극장 에지> 등.
그가 빌린 소설책 : <뇌>,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아버지들의 아버지>, <개미> 등.
그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들도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었다. 책을 빌리는데 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바로 그 다음에 일어난 거였다.
그의 집으로 가려면 도로를 건너야 했는데, 차 한 대가 신호를 어기고 파란 불인데도, 횡단보도 선을 침입한 것이다. 마침 그가 걸어오던 중이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는데 내 뒤에서 걸어오던 그가 차 옆에 딱 멈춰서더니 타이어 바퀴를 발로 퍽 차는 거였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왔다. 저 사람이 왜 저러나 하고 쳐다보고 있는데 그때 차 주인이 나와서는 그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는 거였다.
“당신 미쳤어! 남의 차는 왜 차는 거야.”
그때 그 차 주인에게 어서 도망가라는 말을 속으로 아끼지 않았다. 그 차 주인은 20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어쨌거나 그는 세 가지의 대 실수를 저질렀다. 하나는, 그의 기분이 아니꼬운 상태에서 그의 길을 자신의 차로 가로막은 거였고, 또 하나는 곱게 갈 것이지 뛰쳐나와 그에게 반말을 해댄 것이고, 마지막 하나는 손가락으로 삿대질을 하며 그에게 눈을 부라렸다는 거였다. 피 터지는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그를 말려야겠다며 그에게 걸어가고 있을 때 그가 타이어 바퀴를 한 번 더 뻥 하고 차고는 그 남자의 멱살을 붙잡았다.
“네 눈은 단춧구멍으로 달고 다니는 거야, 선 튀어 나온 거 안보여? 그리고 이 새끼가 누구 허락받고 반말이야 반말이. 너 이 새끼 내가 다쳤으면 어쩔 뻔했어? 너 그렇게 돈이 넘치는 새끼야?”
무슨 일인가, 하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구경을 하러 왔다.
나는 그 장소에 있는 게 퍽이나 쪽팔려서 그를 남겨둔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뒷감당이야 어떻던, 쪽팔리는 건 쪽팔리는 거다. 그날, 그에게 한 대라도 적게 맞기 위해서 온갖 감언이설의 말을 늘어놓으며 꼬리를 살랑 흔들었던 것도 기억난다.
“서진형님. 우리 팔씨름해요.”
내가 단단한 그의 팔뚝을 만지작거리자 그가 벌레 보듯 나를 쳐다봤다.
“이게 미쳤나. 난 계집애든 사내자식이든 예쁜 척 하는 건 다 재수 없어.”
좋아서 자기한테 예쁜 척 하나. 그 성질 머리 더러워서 그러는 거지.
어쨌든 우리는 팔씨름을 했다. 항상 3초였던 내가 일부러 1초 만에 져 준거다. 그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풀기위한 방법 중 하나였다.
“역시 형은 대단해요. 오늘은 1초 만에 졌네. 힘이 천하장사라니까. 부러워요 서진형님.”
나는 그렇게 하면 그가 조금이라도 기분을 풀고 살인미소라도 한번 씨익 지을 줄 알았다. 여기서 살인미소란, 아름다운 미소가 아니라, 말 그대로 사람을 죽인다는 식의 아주 징그러운 미소였다. 하지만 오히려 역효과만 남기게 된 꼴이었다.
“너 같은 거 3초 만에 이기든, 1초 만에 이기든 다를 게 있다고 생각해? 너 같은 거랑 팔씨름 한다는 것 자체가 나한텐 치욕적이야. 이게 정말 죽을라고 환장했나.”
그 이후로, 내가 먼저 그에게 팔씨름을 하자는 말은 한 적이 없다.
더 기분이 나빠진 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난 또 무언가를 찾아내었다.
“서진형님. 우리 찜질방 갈래요?”
그가 이번엔 죽일듯한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등골이 오싹했다.
“사람들 많은데서 개망신 주려고 이게 작정했나. 너 같은 변태랑 찜질방 갔다가 나도 같이 변태로 찍힐 일 있냐. 너 입 닥치고 가만히 있어. 한번만 더 주둥이 놀렸다간 나한테 죽어.”
“네.”
오늘의 일로 얻은 게 하나있다. 앞으로 그에게 목욕탕이던, 사우나든, 온천이던, 찜질방이던, 옷 벗는 일과 관련된 곳에 함께 가자는 말은 다시는 하지 말자. 그게 굵고 길게 사는 방법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9.
나는 가끔 친구들에게 그의 얘기를 들려주고는 했다.
물론 그를 칭찬하는 말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가 얼마나 악질적이고, 사나이의 가슴에 몫을 박아대는 말만 하는지를 친구 놈들에게 들려줄 뿐이었다. 그는 항상 자신을 유식한 사람에 비유하면서 얘기를 늘어놓았고, 꼭 나는 무식한 사람에 비유하면서 자기가 마치 소설가 마냥, 얘깃거리를 늘어놓았다. 아주 가끔은 변태에 비유되기도 했다. 대학생이 되어서 처음으로 여름방학을 맞았다. 나는 대학생만 되면 뭐든지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줄만 알았다. 어른이 된다는 건 피곤한 일임에 틀림없다. 내가 스무 살이 되어서 할 수 있는 거라곤 밤 10시가 넘어서도 오락실과, 피시방에 드나들 수 있는 것과 어떠한 제약 없이도 술을 맘대로 퍼마실 수 있는 정도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거기까지였다.
내가 그의 본가에 초대받은 건 7월 달이 넘어갈 무렵이었다. 내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이자, 그의 아버지의 생신파티에 영광스럽게도 나까지 초대받은 것이다. 잘 알지는 못했지만, 그의 집은 대대로 내려오는 의사집안이라고 언젠가 아버지께 들은 적이 있다. 나는 그의 아버지를 어려서부터 아저씨라고 불러왔는데,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항상 내게 장난감을 선물해주셨던 아주 인자한 분이란 건 기억난다. 그런 그분에게 이렇게 막돼먹은 아들이 있다는 건 역시 반신반의였다. 그는 선물 같은걸 사갈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맨손으로 갈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건 내게도 그리고 아저씨에게도 부담이 없는 비누 세트였다.
“내용물이 뭐 길래 그렇게 꽁꽁 싸매냐, 싸매길.”
나는 그에게 놀림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수없이 포장지 까서 사와서, 포장까지 했다. 테이프로 단단히 붙여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의 스포츠카를 얻어 타고 그의 본가에 도착하긴 했는데 속이 뒤집히는 걸 넘어서 몸이 거꾸로 매달려있는 것만 같은 괴로움에 눈물이 날 정도였다. 흔들리는 머리를 쥐어 싸고,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고 있을 때 그가 옆집의 옆집의 앞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집 앞에서 뭔 짓이야 더럽게. 더러운 놈이 더러운 꼴만 보이고 아주 더러워 죽겠다. 토하려면 저기 저 집 앞에서 토해.”
혹시나 내가 토할까봐 입을 막고 있던 그를 향해 내가 울분을 토한다.
「이런 시팔! 네가 운전만 잘했어봐. 내가 이 꼴이 되나. 사회적인 신분도 있는 놈이 운전도 지 성질만큼 더럽게 해. 」
라고 말한다면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1. 비오는 날 먼지 나게 맞는다.
2. 가뭄에 땀나게 맞는다.
3. 장마에 피터지게 맞는다.
4. 마구잡이로 맞는다.
그렇게 쌓이고 쌓인 한이 많은데도 아직까지 내 꿈에서 그를 본적은 없다. 그가 내 꿈에 나타난다면 원 없이 패고 말거라고 다짐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집에 발을 들여다 놓는데 긴장감이 돌아서 죽을 지경이었다. 곱게 차려입은 미인 아줌마가 큰 아들을 한번 꼭 끌어안고 난 후 내게 잘 왔다며 좋아하는데 영락없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었다. 얼마나 얼굴을 안 비추었으면 이러실까.
같은 사람임에는 틀림없건만 사는 배경이 다르다는 건 정말이지 불공평한 일이다.
아줌마의 안내를 받으며 부엌에 도착했을 때 내 입은 딱 벌어진 채로 동물의 왕국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하마의 입 크기가 되어 있었다.
보지도, 들어보지도 못한 음식들이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며 내 후각을 자극해왔기 때문이다.
“이게 얼마만이야. 못 본 사이에 정말 많이 컸구나.”
음식을 향해있던 내 눈이 그제야 아저씨와, 그의 동생으로 보이는 사내아이에게 향했다. 아이라고 해도 놈은 열여덟이었다. 그러니까 그와 그 동생의 나이차는 10살이 된다.
반갑게 맞아주는 아저씨의 모습에 작은 감동을 받았다. 내가 준비해온 약소한 선물도 잊지 않고 전했다. 다행히 그 자리에서 뜯어보지는 않았다.
“생신 축하 드려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아저씨는 뭐가 그리도 기쁜 말이라고 호쾌하게 웃으시는 거였다.
“고맙구나. 아버지는 잘 계시지?”
“아주 건강하세요.”
나는 오랜만에 만나 뵌 아저씨 보다 그의 동생이라는 녀석에게 더 시선이 갔다.
형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목구비 하나는 또렷한 게 잘생긴 놈이었다. 나는 체질적으로 나보다 더 잘난 놈과 함께 있는 걸 싫어한다. 그와 한집에서 참고 사는 것도 성격 하나만큼은 그에게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놈의 자식이 양쪽 귀에 구멍을 내고 귀걸이니, 반지니, 목걸이, 팔찌, 온갖 액세서리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데 역겨울걸 떠나서 아니꼬운 정도였다. 이놈이 방학을 해서 머리를 시퍼렇게 물들인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시퍼런 건지는 내 알바 아니지만 동생 아니랄까봐 성질머리 하나는 확실하게 지 형을 빼닮은 거 같았다. 사람의 겉모습만으로 뭐든걸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명언이 있지만, 겉모습만으로 내면의 모습까지 볼 수 있는 사람도 있다.
한국인들의 공통점. 먹는 것 앞에서는 절대로 건드려서도,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아서도 안 된다. 그의 가족들은 말 한마디 없이 저녁을 들었다. 나는 침묵을 싫어하지만 밥 앞에서만큼은 용서 할 수 있다. 밥을 먹은 뒤 과일을 후식으로 먹었다.
“서진이 너는 사귀는 아가씨가 없어서 결혼을 안 한거냐, 그 나이 먹도록 결혼도 안하고 큰일이다, 큰일이야.”
그건 못하는 거죠. 안하는 게 아니라.
그는 굉장히 거만한 자세로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는데 아저씨의 말은 한귀로 흘려듣고 한귀로 흘려보내는 눈치였다.
“쓸데없는 걱정 좀 하지마세요. 제 나이가 몇이라고 벌써 결혼타령이에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마세요.”
“이놈 이거 말버릇 하고는!”
하지만 아저씨는 호되게 야단치지 않고 그냥 그러려니 넘겼다. 만약 내 자식 놈이었으면 빨랫줄에 매달아 놓고 쥐어 팼으리라. 그걸 상상하고 있을 때 아저씨가 갑자기 배를 잡고 웃으셨다.
“네 아버지랑 이 아저씨가 한 약속이 있었는데 말이다. 자식 놈들 태어나면 무조건 결혼시키자는 거였단다. 서진이가 태어나고, 한참 뒤에 네가 태어났는데 고추 달린 사내자식이지 뭐냐.”
그가 먹고 있던 오렌지를 토했다. 나도 사례가 들려서 한동안 켁켁 거렸다.
오, 주여! 저를 고추 달린 사내자식으로 세상에 나아가게 해주셔서 감사 또 감사 하나이다.
저 사람은 독신으로 늙어 죽는 게 우리나라의 모든 여성들을 위한 것이고 또 나라를 위한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가 항상 내게 말해왔던 독신주의를 간곡히 지켜주기를 바란다.
“그런 얘기 하지마세요. 끔찍하니까.”
그가 입에서 막 뱉은 오렌지를 휴지로 싸서 버렸는데 그가 잠시 고개를 돌리는 동안, 나는 그도, 그리고 아저씨도 모르게 살짝 뻐큐를 연방 날렸다. 댁만 끔찍한 건 아니네요.
“진원이는 요즘 어때요?”
진원이는 그의 동생 이름이었다. 아 참고로 그의 성은 이씨였는데 그때 내가 한참 즐겨보던 다모의 이서진 형님과 이름이 같아서 며칠 동안 기분나빠하며 드라마를 시청을 했던 기억이 난다.
“달라질게 새삼 어디 있다고. 지 형을 쏙 빼닮아서 아주 사고만 치는구나. 너 정도는 아니다만은.”
혀를 끌끌 차며 한탄하시는 아저씨의 말에 동감하며 나도 작은 한숨을 내셨다.
과일을 다 먹자, 차가운 식혜를 그의 어머니가 들고 오시면서 내게 물었다.
“성현이 학생. 바쁘지 않으면 우리 진원이 공부 좀 가르쳐주면 안 될까요?”
과외 좀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집에서 그를 마주 보는 것도 악몽 같은데 이제는 그 동생 면상까지 봐달라고? 절대 사양이다. 하지만 저녁까지 얻어먹고 거절하기는 너무 죄송스러워서 생각해낸 게 내 친구들 중에 가장 성질 더럽기로 소문난 놈을 내 대타로 소개시켜 주는 거였다.
“어머! 서울대학교 의대생이라니. 고마워요.”
아줌마가 뛸 듯이 좋아하며 내 손을 꼬옥 잡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가 의심스러운 눈길로 말했다.
“네 친구 중에 서울대학교 의대생 있다는 거 거짓말이지?”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너를 보면 알지. 너도 참 고약하더라.”
살다 살다, 그한테 그런 치욕적인 말까지 들을 줄이야. 나는 기겁을 하며 그에게 물어댔다.
언성까지 살짝 높이며 말이다.
“왜요!”
하지만 그는 내 쪽은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 늘상 있는 일이기 때문에 새삼 기분 나쁠 것 까지는 없었다.
“내 동생이 싹수 노란 거 알고, 일부러 친구한테 떠맡긴 거 아냐. 넌 감당이 안 되니까.”
그제야 나는 웃을 수 있었다.
“내 친구 걱정하지 말고 형 동생 걱정이나 해요. 내 고향 부산에서 그놈 성질 머리 모르는 놈이 없었으니까. 그 유명한 자해 공갈단 중에서도 성질머리 고약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놈이 그놈이에요.”
어지간해선 탐구심을 잘 발동시키지 않는 그가 호기심으로 꽉 찬 얼굴로 물어왔다. 그의 물음에 친절히 대답해주기로 했다. 나도 이 상황을 꽤나 즐기고 있었다.
“자해공갈단? 그게 뭔데?”
“두고 보면 알아요."
첫댓글 기대기대 !!!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흥미진진~~
아...다음 내용 너무 기대되는데 너무 오래 글 올리지 않으셔서..혹여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힘내셔서 꼭 다음 글 올려주세요..이제 곧 봄도 오잖나요?...
글 되게 재미있게 쓰신당~~^^둘의 러브라인은 언제??ㅋㅋ
자해공갈단의 러브스토리가 곧 있을것 같네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