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의 정신분석적 시학으로 읽는 悳泉의 디카시(1)
뼈에 새겨진 울음, 하늘의 깊이를 재는 무의식
- 悳泉 의 「 입적」을 중심으로
평생 바다 깊이 움켜쥐느라
붉은 울음 박힌 뼈 마디마디
번뇌 풀어 놓고, 이제야
만행(卍行) 끝낸 노스님들
하늘 깊이를 재고 있다
- 悳泉, 「 입적」 전문
1. 들어가면서
이 작품은 평생 바다의 깊이를 재던 노동의 육체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하늘의 깊이를 재는 존재로 전환되는 역설을 보여준다. 특히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정신분석 이론에 비추어 읽으면, 이 작품은 단순히 노스님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서정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언어로 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육체에 흔적으로 남고, 그 흔적이 죽음이라는 결핍을 통과하여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점에서 「닻스님의 입적」 은 라캉의 상징계·실재계·결핍·기표의 연쇄라는 개념으로 접근할 만한 작품이다.
2. 작품의 구조와 시적 전환
이 작품 구상에 있어서의 골격은 '두 가지 깊이'의 대립이다. 라캉릐 시철학적 인식으로 본다면 곧 언의 한계에 오는 '결핍과 욕망'의 시적 긴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바다의 깊이와 하늘의 깊이의 대립적 이미지 도입은 ' 바다는 생전의 노동과 고통, 삶의 무게를 함축하는 . 반면 하늘은 죽음 이후의 세계, 해탈과 초월' 의 가능성을 환기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화자는 바다를 떠난 존재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진술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이 여전히 무엇인가를 재고 있다고 말한다. 이 지점에서 신비평 인식의 중심인 '시적 긴장'이 발생한다. 다시말하면 생전의 노동이 끝났는데도 노동의 동작은 사라지지 않는다. 노동의 대상만 바다에서 하늘로 바뀐다. 따라서 마지막 행은 단순한 해탈의 선언이 아니라 끝나지 않는 존재의 행위가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가는 순간이다.
2-1. 라캉의 상징계 — 뼈에 새겨진 언어 이전의 울음
라캉에게 인간은 언어의 질서, 곧 상징계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고 욕망을 구성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일반적인 언어로 환원하기 어려운 표현이 등장한다. "붉은 울음 박힌 뼈 마디마디" 여기서 울음은 소리로 발화되지 않는다. 울음은 뼈에 박혀 있다. 청각적 현상인 울음이 시각적 색채인 붉음과 결합하고, 다시 육체의 가장 단단한 조직인 뼈에 정착한다. 이러한 감각의 전이는 라캉적 관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언어로 충분히 표현되지 못한 고통이 육체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라캉의 실재계는 단순히 말로 표현되지 않은 감정과 동일하지 않다. 실재계는 상징화에 끝내 포섭되지 않는 불가능성의 차원이다. 따라서 이 시의 '붉은 울음'은 실재계 자체라기보다, 상징화되지 못한 고통의 잔여를 독자에게 감지시키는 시적 기표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바로 이 표현에서 풍경은 기록을 넘어 시적 사건으로 변한다.
2-2. 라캉의 실재계 — 죽음은 재현할 수 없는 빈자리다
노스님들은 어디로 갔는가?
그들은 무엇을 재고 있는가?
하늘에도 깊이가 있는가?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즉 언어의 기표는 '죽음(death)이다. 그러나 시인은 죽음을 직접 묘사하지 않는다. '입적'이라는 제목과 '만행 끝낸 노스님들'이라는 표현으로 죽음을 암시할 뿐이다. 모름지기 라캉적 독법에서 이 생략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할 수 있다. 죽음은 언어로 명명할 수 있지만, 죽음의 경험 전체를 언어로 소유하거나 완전히 재현할 수는 없다. 화자는 바로 그 재현 불가능한 영역을 설명하지 않고 남겨둔 것이다. 그라니까 독자가 그 빈틈을 타고 스스로 다양한 의미를 상상할 수 있도록 여백을 마련헤 주기 위함이며 이는 결국 . 언어의 의미를 미리 확정하지 않고 뜻의 개방성을 유지하고 함이다. 그 결과 죽음은 시의 종결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의 출발점이 된다.
위 질문에 대한 확정적인 대답은 없다. 대답할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이 작품의 시적 여백을 형성한다. 이는 라캉이 말하는 결핍의 구조와 연결하여 읽을 수 있다.
2-3. 기표의 미끄러짐 — 바다의 깊이가 하늘의 깊이로
이 작품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창작기술은 '깊이'라는 기표의 이동이라고 본다. 라캉은 기표가 하나의 고정된 기의에 영원히 묶여 있지 않으며, 다른 기표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가 발생한다고 보았다. 이 작품에서도 '깊이'는 처음에는 물리적 세계에 속한 말처럼 등장하지만, 마지막에는 인간의 인식이 닿을 수 없는 초월적 차원으로 이동한다. 특히 마지막 행의 '재고 있다'는 동사는 앞의 '바다 깊이를 옮겨주는' 행위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여기서 의미의 반전이 일어난다. 생전에는 바다의 깊이를 옮기던 존재가 죽음 이후에는 하늘의 깊이를 재는 존재가 된다.그러나 하늘의 깊이는 과연 잴 수 있는가? 바로 이 불가능성이 시를 완성한다. 측정할 수 없는 것을 측정하는 행위.. 이 역설 속에서 기표는 사전적 의미를 넘어 새로운 시적 의미를 발생시킨다.
2-4. 욕망과 결핍 — 노스님들의 만행은 정말 끝났는가?
라캉의 시학적 완성의 판단은 '언어의 비틈과 결핌을 통해 마르지 안는 창작의 열망을 보여줬다'는에 있다.욕망과 결핍이 그 중심에 놓여 있다. 욕망은 어떤 대상을 얻는 순간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대상으로 옮겨가며 지속된다. 작품의 중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 번뇌를 풀어 놓고, 이제야/ 만행( 卍行) 끝낸 노스임들" 이 구절은 불교적 해탈의 의미를 강하게 환기한다. 번뇌를 내려놓았으니 더 이상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는 존재가 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마지막 행에서는 여전히 어떤 행위가 지속된다. " 하늘 깊이를 재고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긴장이 형성된다. 불교적 사유에서는 번뇌를 벗어난 해탈의 이미지가 나타나지만, 라캉적 관점에서는 끝없이 새로운 대상을 향하는 욕망의 구조를 떠올릴 수 있다. 물론 불교의 번뇌와 라캉의 욕망은 동일한 개념이 아니다. 그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이 작품은 두 사유가 만나는 시적 접점을 마련한다. 번뇌는 끝났지만 존재의 물음은 끝나지 않는다. 필자기 이 문장을 작품의 중심 명제로 제시하고 싶은 이유다.
3. 맺으면서
이 작품의 사진에는 오래된 목재 구조물과 여러 부재가 얽혀 있는 풍경이 보인다. 그 물질적 형상은 시의 '뼈 마디마디'라는 표현과 시각적으로 연결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진 속 사물을 시인이 있는 그대로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진의 물질적 형상은 언어 속에서 노동의 육체가 되고, 다시 수행을 마친 노스님들의 존재로 전환된다. 이러한 변환은 세 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시각적 발견이다. 사진 속 낡고 얽힌 물질의 형상을 포착한다. 둘째, 상징적 치환이다.물의 형상이 '붉은 울음', '뼈', '노스님'이라는 새로운 기표와 관계를 맺는다. 셋째, 의미의 초월적 확장이다. 물질적 풍경은 '하늘의 깊이'라는 측정 불가능한 질문으로 확장된다. 이것은 예술디카시에서 특히 중시할 만한 지점이다. 사진은 문자에 종속되지 않고, 문자 역시 사진을 해설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다만 사진과 문자의 의미적 거리가 다소 큰 작품이므로, 독자가 두 매체를 연결할 수 있는 시각적 단서가 충분한지는 별도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마지막 행은 사진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호출함으로써 작품의 사유적 지평을 넓힌다.
「 입적」 의 시적 성취는 죽음을 슬픔이나 소멸의 언어로 종결하지 않는 데 있다. 시인은 생애의 노동을 뼈에 새겨진 울음으로 형상화하고, 수행의 끝을 다시 측정의 시작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 결과 바다는 하늘이 되고, 노동은 수행이 되며, 죽음은 또 다른 깊이를 향한 물음으로 변모한다. 라캉적 관점에서 보면 마지막 행의 '하늘의 깊이'는 결코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대상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재려는 행위는 계속된다. 여기에 작품의 존재론적 역설이 있다. 생은 끝나도 깊이에 대한 물음은 끝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죽음에 관하여 말하는 시이면서 동시에 죽음 너머에 관하여 아무것도 확언하지 않는 시다. 바로 그 확언할 수 없는 빈자리에서 독자의 사유가 시작된다. 필자는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시적 성취를 '죽음의 완결성을 존재의 미완결성으로 뒤집어 놓은 결구의 힘'에서 찾는다. 그리고 이것은 悳泉의 예술디카시 창작론에서 강조해 온 '풍경 너머의 의미 발생'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사례가 된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은 바다의 깊이를 이야기하는 듯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 존재의 깊이가 어디까지인지를 묻는 시다. < 悳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