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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기를 하다“만자”를 외치는 아이들
박철영
1.
뿌연 신작로가 당산 고개를 돌아 고개를 내밀었다 금새 동네 앞을 지나 모퉁이 쪽 진 씨 집안의 비석 앞을 지나갔다. 그 길을 물고 요천 검문소 쪽으로 기다랗게 길을 내고 달려가면 무주 진안 장수 장계 함양 거창 멀리 대구까지 갈 수 있다. 나중엔 나는 그 길을 타고 포항까지 다녔으니 우리 마을 신작로는 세상으로 나가는 큰 통로였다. 그런 신작로가 지나가는 마을 끄트머리에 진 씨 조상을 모시는 비석에는 제법 많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조상에 대한 좋은 뜻을 후세에 알리는 글이었을 것이다. 대여섯 개의 비석이 있는 둘레로 측백나무가 여럿 있었고 신작로 쪽 입구 양옆으로 두 그루의 벚나무가 봄이면 흐드러지게 피다 지곤 했다. 그러고 달 반 지나 유월이면 버찌가 새까맣게 익어 떨어졌다. 그것을 아이들은 따먹거나 주워 먹으며 놀았다. 그곳에 아랫물 동로골 선 후배들이 토요일이나 일요일이면 자연스럽게 모여들었다. 물론 아이들 주력은 동로골 선배들이었다. 어설프게 나도 동로골을 벗어나 노는 물을 조금씩 넓혀 아랫물까지 놀러 갔다.
그곳에서도 진돌이를 하였는데 앞동산보다는 재미가 덜했다. 그것은 앞이 신작로였고 간간이 차가 지나가기 때문 거칠게 놀 수 있는 환경이 안되었다. 진돌이 놀이는 행동반경이 커서 신나게 쫓다 보면 신작로를 달려온 차에 치이기 십상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앞동산에서 놀 때보다 빨리 흥이 깨지고 만다. 그렇게 놀다 시들해지면 장가실 떡 네 추수가 끝난 논에서 막대기를 이용한 자치기를 했다. 요즘으로 치면 한국형 골프라고 보면 될 것이다. 자치기를 하는 방법도 진돌이와 마찬가지로 양 진영을 비슷하게 나누고 선배들이 주축이 되어 진행했다. 방법은 주변을 평평하게 한 뒤 땅에다 옴폭한 홈을 파내 15센티쯤 되는 막대를 15도 각도로 비스듬히 세워놓으면 되었다. 그 쳐든 막대기 끝을 50센티 정도 긴 막대로 내리쳤다. 그러면 작은 막대가 공중 제비를 돌며 땅에 떨어지기 전 경계선 바깥으로 쳐내는 놀이였다. 게임 구조가 야구와 비슷했고, 우리는 선배들 틈에 끼여 놀이를 하는데 어린아이들은 잘 쳐내지를 못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놀이의 재미를 위해서 오히려 우리처럼 실수를 잘하는 아이들이 있기를 은근히 바라는 상대 팀이 있었다. 그렇지만 팀에는 탁월한 실력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 선배들은 어떤 여건에서도 작은 막대를 잘 쳐올렸고 그것을 상대 팀이 받아내지 못할 정도로 높이 그리고 멀리 날아가도록 했다. 반대 팀은 작은 막대를 받아내지 못하고 그것을 땅으로 떨어뜨릴 때가 많았다. 그러면 공격팀은 긴 막대로 거리를 재다가 일정한 수를 넘으면 “만자”라고 함성을 지르며 감격해 했다. 야구로 치면 홈런인 셈이다. 그럴 때 같은 팀이라는 즐거움까지 덤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경기이기 때문에 끝나갈 무렵이면 좋게 끝나지 않았다.
이마에 핏대를 올리면서 논쟁하기 좋아하는 균섭이 선배 또래들이 추억 속에서 얼굴을 짓궂게 들이밀고 있다. 하지만 경기가 끝나고 헤어지면 그만이었고 나쁜 마음은 없었다. 며칠 있으면 오늘 핏대를 올린 아이들과 같은 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은 전선에 늘어선 참새 떼가 모여 쫑알대듯 왁자지껄 끝이 없었다. 하지만 비석거리에도 밤이 찾아오면 사방이 서서히 조용해졌다. 자연법칙에 충실한 시골 아이들은 순수했다. 현섭 선배, 춘호 선배 또래까지 함께 놀았으니 동네 아이들이 다 모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참새떼는 한곳에 계속 진을 치지 않는다. 어른들에게 싫은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동네 아이들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바로 신작로를 건너가면 방앗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심부름으로 어두운 그곳을 지나가면 왕겨가 나오는 뒤가 꺼멓게 튀어나와 나를 따라오는 것만 같아 그곳에서는 냅다 달렸다. 어둠은 중학교 3학년 때까지 나를 무섬증으로 괴롭혔다. 우리 마을도 서서히 변화가 밀려 왔다. 군데군데 시멘트 전봇대가 골목에 박히고 전선공이 집을 누비기 시작했다. 긴 어둠이 걷히며 뒤안에도 오 촉짜리 전구에 환한 전깃불이 켜졌다.
가을 쌀 방아를 찧고 나면 방앗간은 한가했다. 큰 방앗간이 텅 비듯 조용할 때는 그곳도 그래서 무서웠다. 그런 방앗간을 어쩔 수 없이 다녀와야 할 때도 있다. 아이들 머리에서 옮긴 도장 버짐 때문이었다. 위생이 열악한 환경에다 빡빡머리도 잘 감지 않았으니 도장 버짐이 유행처럼 번진 것은 당연하다. 그런 아이들과 놀다 보면 머리끼리 접촉을 할 때가 있었다. 도장 버짐이 옮은 아이가 조심을 해줘야 하는데 그렇질 않았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한 거다. 도장 버짐에 좋은 약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선 당시는 양잿물을 만들어 사용했다. 그것으로 놋그릇을 닦았고, 누구의 생각이었는지 도장 버짐에도 좋다는 말이 돌았다. 그 독한 것을 머리에 찍어 발라 지금도 머리가 나지 않는 형이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동네 방앗간의 발동기 벨트에 찍어 바르는 모빌유가 좋다고 입소문을 탔다. 아이들 스스로 방앗간 뒤쪽으로 들어가 모빌유를 가져다 머리에 찍어 바르곤 했다. 생각만큼 빨리 낫지 않은 것이 도장 버짐이었다. 도장 버짐에 걸려 머리가 거뭇거뭇한 동네 아이들이 계속 늘어났으니까. 그래도 방앗간은 아이들이 동네에서 맘 놓고 놀 수 있는 곳 중 하나였다. 가끔 여자아이들까지 합세하면 목소리는 더 커졌다. 아이들 목소리가 어른들 소리처럼 퍼졌다.
2.
방앗간이 있는 동네는 들판이 크거나 인근 들판을 배경으로 자리를 잡는다. 일정한 경작 면적이 주변에 있어야 허가가 난다. 우리 마을에 방앗간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런 조건을 갖췄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 마을 앞 들판은 남원 시내에서 광한루 위쪽을 기점으로 가장 큰 들판이었다. 물론 요천수의 풍부한 수량으로 누대에 걸쳐 범람하는 홍수가 기름진 들판을 만들어준 탓이다. 그 들판을 일구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일가를 이루고 들판의 땅 한 떼기라도 손실하지 않으려고 골짜기에다 집을 짓고 살았을 것이다. 1차 산업에 종사하는 마을 사람들이 전부라면 방앗간은 벼를 가공하는 2차 산업의 주체인 것이다. 방앗간은 신작로 아래쪽에 있었다. 방앗간을 돌리는 사람은 우리 동네에서 최고의 기술자나 마찬가지다. 우선 동네에서 그런 기술을 가진 사람이 없을뿐더러 겨우 할 수 있다면 보리 타작을 할 때 쓰는 발동기를 돌리는 정도였다. 발동기라도 돌릴 수 있는 기술자는 상인이 양반뿐이었다. 얼마 후부터 그런 기술을 응용해 방앗간을 돌리는 기술자가 되어 동네의 쌀 방아를 다 찧어주었다.
처음부터 기계를 잘 다룬 것은 아니었다. 보리 타작하는 발동기를 돌리면서 기술을 습득하고 이후 입소문을 탔고 방앗간을 돌리는 기술자로 과수원집에서 섭외를 한 것 같다. 한동네에 살면서 방앗간을 관리할 수 있는 점도 높이 샀을 것이다. 상인이 양반도 득이 되는 것은 농사지으며 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우리 동네 방앗간은 단순히 쌀, 보리 방아만 찧는 방앗간이었기 때문이다. 가을에 벼를 수확하여 마당에다 건조해 가면 순서를 기다려야 할 정도로 방앗간이 붐볐다. 기다리다 어중간한 시간이면 집에 갔다가 짬짬이 내려와 순서를 확인하곤 했다. 쌀 방아를 찧으면 쌀은 안쪽으로 떨어졌고 왕겨는 뒤쪽으로 풍구를 통해 날아가 멀리 떨어졌다. 벼를 많이 찧으면 뒤쪽 왕겨를 받는 장소가 좁아 틈틈이 기어들어가 당그래로 긁어내야 했다. 수건을 머리에 둘러도 목덜미 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왕겨를 막을 수는 없었다. 거기다 까끌까끌 한 것이 살갗을 파고들어 슬슬 짜증을 돋울 땐 소갈머리가 나곤 했다. 대개 어머니와 방아를 찧는데 짜증 내는 나에게 미안해하는 어머니의 얼굴을 생각하면 죄송하고 안쓰럽다.
어찌 살다 보니 전주에서 남원으로 시집와 어머니도 잘못 꿰인 인생인데 말이다. 하지만 어린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 왕겨를 긁어내고 나면 어느 순간 벼 껍질이 다 벗겨져 왕겨가 더는 날아오지 않았다. 왕겨가 벗겨진 현미 상태의 쌀알을 몇 분을 돌리느냐에 따라 쌀의 품질이 달라졌다. 그 당시는 팔분도 미米 라는 쌀을 최고로 쳤다. 지금 생각해보면 현미 상태가 최고의 쌀이란 것을 몰랐던 거다. 그렇게 좋은 쌀을 얻기 위해 한참 더 시간을 보내면 쇠죽 끓일 때 조금씩 넣어주는 죽겨가 나왔다. 죽겨를 가마니에 퍼 담을 때는 쌀 냄새와 손에 닿는 촉감이 좋았다. 영양가 높은 쌀알 껍질이라 그랬을까. 그것을 소나 돼지 먹이로만 쓴 것은 아니고 달광이라고 했던 단무지를 담글 때 노란 색소 대신 죽겨를 버무려 갈무리하면 달광이 노릇노릇하게 만들어져 색소처럼 요긴하게 썼다. 요즘 단무지는 생 무를 그대로 사용해 색소만 먹여 만들지만 그때의 단무지는 수세미처럼 기다랗게 생긴 무를 뽑아다 시렁에 엮어 말렸다. 어느 정도 수분이 빠져나가면 무 껍데기가 우리 엄마 입가 주름처럼 쪼글거렸다. 그것을 우리는 달광이라고 했고 그것 몇 조각이면 물 말은 밥 한 그릇 정도는 뚝딱 해치웠다. 지금도 시장을 가면 옛날 단무지라고 만들어 팔지만 이름부터 눈에 와 닿지 않는다. 지금도 단무지를 왜 달광 이라고 했는지는 모르겠다. 혹시 우리 동네 누군가의 집에 가면 그런 달광 맛을 볼 수 있을른지 모르겠다. 쉽지 않을 것이다. 이미 그런 손맛을 내던 장동아지매도 안 계시고 작은 집 큰어머니도 안 계시니까.
동네에서 잘 나가던 진완택 아저씨네 과수원집이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그토록 아끼던 방앗간을 상인이 양반에게 팔아넘기고 말았다. 시골에서 방앗간을 갖는다는 것은 동네에서 유지가 되었다는 선언과 같다. 그 이후 상인이 양반은 돈을 벌어 동로골에서 아랫물로 땅을 사 집을 지어 나갔다. 확실히 기술이 있는 사람은 어디다 데려다 놔도 눈썰미가 있는가 보다. 기어이 서울로 올라가 큰 공장을 운영한다는 것을 큰형에게 들었다. 이후 몇 차례 주인이 바뀌더니 아예 헐려 터만 남았지만, 소중한 기억을 그대로 가진 곳이다. 방앗간은 공간이 넓어 숨바꼭질 하거나 자전거를 배우는 장소로 최고였다. 당시는 중학교에 들어가면 6킬로 정도로 멀어 자전거를 사주곤 했다. 삼 년 선배인 영하 상희 상석 청호 형이 그곳에서 자전거를 끌고 나와 자랑 겸 위세를 하느라 원을 그리며 자전거를 탔다. 그러다 선배들이 자전거를 세워 놓으면 신기해하던 아이들이 페달을 손으로 돌려 본다거나 바퀴를 만져보며 놀았다. 재수 있으면 선배의 자전거 뒤에 타보는 행운도 얻을 수 있었다. 나도 그런 맘이 꿀떡 같았지만, 기회는 몇 년 후에야 찾아왔다. 남원 중학교에 진학해서 한 반이었던 여기용이란 친구가 맘껏 연습하도록 배려해주었다.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는 선배들의 느긋한 표정이 생각이 난다. 기껏해야 삼천리 중고 자전거였다.
그런 방앗간은 명절 때 튀밥 튀는 아저씨가 읍내에서 종종 올라와 펑펑 튀밥을 튀겨내곤 했다. 그런 튀밥을 튀길 때 여기저기 몰려든 아이들이 주위에 서성이면 동네 어머니들이 튀밥을 한 주먹씩 나눠 주었다. 그 당시는 튀밥도 귀한 거라 작은 집 큰어머니가 눈처럼 하얀 튀밥을 그릇에다 담아 오기도 했다. 그런 날은 하루가 너무 짧았고 잠속에서도 튀밥 튀기는 소리가 펑펑 울렸다. 튀밥 튀는 아저씨가 장작불을 빼내고 준비를 할 때면 아이들은 작은 귀를 감싸 안고 소리가 날 순간을 숨죽이며 기다렸다. 튀밥이 튀겨질 때마다 아이들의 바람도 그만큼씩 더 커졌다.
아침이면 동네에서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는 모습이 요란했다. 우선 골목이 경사가 심해 브레이크 잡는 소리가 삑 삑 거리며 골목을 빠져나갔다. 한두 집이 아니기에 그런 소리는 연이어 났다. 당시는 아이를 넷 이상 일곱 여덟은 낳았기 때문 집집마다 중학교 다니는 선배들이 있었다. 그런 선배들이 동네 신작로를 벗어나 당산고개를 넘어갈 즈음 뒷집 상태네 아버지도 동로골을 빠져나갔다. 선생님이라 그런지 브레이크 잡는 소리가 아이들보다 부드러웠고 조심스럽게 내려오는 것이 들렸다. 뒤이어 논에 가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빠져나가고 골목 안에 사는 상기네 아버지 한동 양반이 니어까에다 쇠 거름을 싣고 빠져나갔다. 소란스럽던 골목이 잠잠해지면 상태가 우리 집 대문간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매일 똑같은 놀이라도 같은 것이 아니었다. 밤 동안 어떤 생각을 하였는지 놀아보면 알 수 있었다. 가끔은 형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도 실감나게 전해주곤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세상을 배워 나갔다. 깊은 밤이 되면 식정리 마을 하늘엔 유난히 반짝이는 별들이 많았다. 집 마당에서 모깃불을 피워놓고 비료 푸대를 오려 만든 만능 부채를 살살 흔들며 올려다보는 밤 하늘은 별천지였다. 그 별처럼 빛나던 아이들이 세상에 나가 밤마다 별처럼 세상을 밝히고 있을 것이다.
첫댓글 신기해요~이름들을 전부 기억하고있다는게
다음편엔 어떤 글이 나올지 기대됩니다^^
나도 신기해요. 함께 했던 시간속의 소중한 사람들이 생각나는 것이,
오히려 너무 늦게 찾아간 것이 아니었나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