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참 지랄 같은 영화다. 욕을 해야하는 건지, 칭찬을 해야하는 건지 무슨 말을 던져야 할지 어렵게 만든다. 장선우 감독은 그런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그가 꽤 많은 영화를 찍었음에도 참 말이 많은 사람이다. 100억을 넘게 들여 만든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에서는 논란의 종지부를 찍지 않을까 생각했다. 100억이 애들 껌같도 아니고, 대박을 터뜨리든지 작품성을 인정받던지 해야... 돈이 전부가 아니지만 돈이 없으면 영화는 찍을 수 없으니까. 그런데 그의 실험성은 끝이 없어 보인다. 실험성을 실현시키기 위한 그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인지 유쾌한씨도 알지 못할 일이다.
125분이란 시간동안 이 영화에 집중하기란 쉽지 않다. 귀를 긁어대는 사운드와 경계가 모호한 설정에 가미된 현란한 액션들... 영화를 보는 내내 꽤 고생했다. 유쾌한씨는 시끌벅적한 오락실, PC방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각기 다른 기계들에서 쫓아져 나오는 각각의 소리가 어우러진 소음의 혼돈은 버겁다. 근데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오락실이나 PC방에 앉아있는 기분이니 집중이 될 턱이 있나. 그렇다면 게임매니아들은 어떨까. 그들 역시 영화에 집중하기 힘들다. 왜? 영화를 한번 보시라 몸소 체험해봐야 되지 않겠는가. 그게 이 영화에 매력인지도 모르겠다. 집중력을 분산시키는 것, 그래서 더욱더 집중하도록 애쓰게 만드는 것 말이다. 그러기에 감독은 관객들이 집중력으로부터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게임의 하나는 정확하게 명시한다. 그 규칙만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면 영화를 따라갈 수 있다고 놀리는 것처럼... 우리는 그 게임의 규칙을 기억하고 영화를 즐기면 된다.
모 잡지에서 장선우 감독의 인터뷰기사를 읽었는데 장선우 감독은 선승같은 말만 하더구만. 요즘 시대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러한 뜻을 찾아나서기에 앞서 관객들에게는 이 영화를 즐길 의무이자 권리가 있다. 영화를 보기 위해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이 영화는 100억을 들였다는데 그만큼은 충분히 보여 준다. 어디 100억이 헐리우드에 가져가면 배우 한명 구하면 끝날 돈이겠지만 여기는 한국이다. 장선우 감독은 자기가 쓸 수 있는 돈 안에서 최대한 보여주고 있다. 유쾌한씨는 이제까지 한국영화가 보여준 액션 중에서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영화의 규칙을 지키면서 오락하는 기분으로 영화를 즐기면 된다. 그런데 말이야 우리나라 관객들은 본전을 찾고자 하는 정신이 투철하다는 것이지. 말 그대로 한국형 블록버스터인데 한국형을 빼고 헐리우드 영화와 자꾸 비교하면서 본전 생각을 한다는거야. 본전 생각 버리면 영화가 확 달라지는데 말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떠올랐다. 지난 몇 년간 중남미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기는 했지만 한국에서 접할 수 있는 중남미 문화는 미비하다. 중남미 관련 서적을 다 때려 합쳐야 100권정도 이니 할말 다했지. 그나마라도 한국에 나와있는 중남미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어보면 어디까지가 리얼리티이고 어디부터가 환상인지 모른다. 즉, 그 경계가 애매모호한 것이다. 그래서 중남미 영화나 소설의 큰 특징을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부른다. 마술적인데 분명 그건 리얼리즘이란 얘기다. 더 재밌는 사실은 중남미 문학, 영화에서 나타나는 환상적인 측면을 우리는 허구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중남미인들은 그것을 현실로 느낀다는 것이다. 유쾌한씨가 생각하기에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마술적 리얼리즘의 형태를 띠고 있다.
장선우를 따라다니는 화두 중에 하나가 리얼리티의 문제이다. 이것은 참 복잡다난한 문제이니 미뤄 두고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보자. 이 영화에서는 게임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하다. 게임에서 일어나는 일이 마치 현실처럼 다가선다. 임은경이라는 배우를 쓴 것 역시 그녀의 배우의 연기력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TTL 광고에서 보여준 신비함, 즉 경계의 모호성 때문이다. 게임 속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의 구분이 영화 속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현실에서도 비일비재하다. PC방에 가서 오락을 하는 많은 이들이 왜 남을 그토록 이기려고 하고 레벨업에 치중하는가. 그건 그저 놀이일 뿐인데. 그것은 가상세계의 쾌감이 현실세계로 전이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가상세계와 현실세계는 불분명해진다. 우리 시대의 환상은, 마술은 가상세계인 것이다. 뭐든지 할 수 있는 그 곳. 장선우 감독은 이 점을 이용했다. 말이 갖다 붙이기 나름이다. 장선우 감독처럼 장자의 호접몽에 갖다 붙이면 그럴싸한 말이 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무리수가 있다. 그래서 유쾌한씨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마술적 리얼리즘이라 부른다. 하하 ^^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있다. 세상에는 참 버릴 말이 많이 있지만 이 말 역시 그 중에 하나다. 아는 만큼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아는 만큼 밖에 보지 못한다. ‘인상주의 작품은 이러이러한 특징을 지녔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전혀 보지 못했던 인상주의 작품을 접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밖에 말하지 못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아는 만큼 보인다”가 아니라 “사랑한 만큼 보인다.”는 것이다. 애정을 가지고 자꾸 말을 걸면 거기에 대한 대답을 해준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후반부에서는 이 장자의 호접몽에 관한 이미지가 짙게 깔리는데 이것을 이해하는데 장자를 알고 모르고는 중요하지 않다. 영화를 보신 분이라면 주가 시스템에 침입해 들어갈 때 스쳐지나간 한문을 보셨을 것이다. 알고 보니 이게 금강경에 나온 말이라고 하더구만. 근데 말이지 이 말을 알고 모르고는 중요하지 않단 말이지. 당신이 이 영화를 제대로 봤다면 영화가 끝났을 때 자신의 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답에서 이 영화의 장르가 각자에 맞게 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