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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밭 그 사나이] 03
S#1. 시골집 뒤꼍 축사 (새벽)
(2부 엔딩에 이어서)
불쑥 얼굴 들이대는 택기를 피해 고개 돌리는 지현. 인상 구겨지는데,
택 기 아하! 그럼, 영감님이 말한 손녀딸이 바로 너였어?
지 현 (속마음 소리. 괴로운) 뭐야? 저 놈이 왜 여깄지?
택 기 내를 강간범 만들어가 쌩고생을 시키더니, 여기 와서 만났네? 억수로 반갑네!
지 현 (괴로운데)......
택 기 니가 내를 피해갈 수 있을 거 같애? 이건 운명이야, 운명! 운맹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만날 수가 엄따! 포도값 물어낸다꼬 본인 입으로 말 한거는 생각이 나제?
지 현 (갑자기 열 받아) 물어내면 될 거 아니에요?
택 기 물어내.
지 현 (주춤하며) 1년만... 기다려요.
택 기 1년? 1년 같은 소리 하네.
지 현 정말 줄게요. 주면 되잖아요? 1년만 기다리면, 그깟 포도가 문제가 아니에요, 내가! 아니, 근데 댁은 왜 여깄어요? 우리 당숙 할아버지 댁에?
택 기 (장화 챙겨 탈탈 털고) 여기가 내 직장이야.
지 현 (순간 머리 굴리더니, 오호라) 그럼... 포도밭 일꾼?
택 기 뭐, 그렇지... (다시 큰소리) 아니, 근데 와 딴소리야? 포도값 물어내라니까?
지 현 그럼 뭐 댁에 포도도 아니잖아요? 우리 할아버지 포도 아니에요?
택 기 뭐... 영감님 포도지.
지 현 그럼 오늘부로 내 포도니까, 댁이 상관할 문제가 아니거든요?
택 기 (기가 차서) 뭐라? 니 포도?
지 현 네. 아직 얘기 못 들으셨나보죠? 나한테 포도밭 주신다는 얘기?
택 기 (가당치도 않다는) 뭐? 니한테 포도밭을?
이때 방에서 나오는 병달.
병 달 와 이리 시끄럽나?
S#2. 동 부엌 (새벽)
할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두 사람.
병 달 서울서 내려온 내 재종 손녀딸인데, 참 야무지고, 착하데이.
택 기 착하죠. 말도 못하죠. 얼굴에 벌써 딱 써있네? 착하다꼬.
병 달 니들 벌써리 인사는 했드나?
택 기 예, 찐하게 했심다.
병 달 그래, 요즘 젊은 아들은 초스피드라. 인사는 했다니까 됐고, 우쨌든 간에 둘이 한번 잘 지내보거레이.
지 현 (죽을 맛인데)
택 기 (지현을 노려보며) 그라지요.
병 달 (갑자기 생각난, 흥분) 참, 그 포도값 떼묵고 도망간 서울 가시나 말이다. 그 아랑 통화는 됐나?
택 기 아, 마침 말씸 잘 하셨심다. 곧 연락이 될깁니다. 멀리 있는 거 같지 안아예.
지 현 (당황, 안절부절인데)
병 달 (더 흥분) 그 포도가 으떤 포돈데? 그 아를 당장 잡아가 요절을 내던지, 다리몽댕리를 뽀사뿌러라. 절대 그냥 넘어갈 생각, 하지 마레이.
택 기 하문요. 그냥 두문 안 돼지요. (지현 빤히 본다.)
지 현 (자리 피하고 일어나려고 젓가락 놓자)
병 달 (부드럽게) 와? 맛이 엄나?
지 현 아니요. 원래 아침은 안 먹어놔서... 커피나 한잔 마실게요. (일어나는데)
병 달 (펄쩍 놀라) 아침을 안 먹으면 쓰나?
지 현 (찔끔해서 얼른 다시 앉는데)
병 달 아, 그라고. 택기 니는 야한테 오늘부터 하나씩 잘 갈켜봐라.
지 현 (갑자기 의아해서) 뭘요? 제가 뭘 배워요?
병 달 농사를 배우지, 뭘 배울라카는데?
지 현 아. 농사요.
병 달 택기를 나다. 그래 생각하고, 단디 배워야 한대이. 알 것나?
지 현 예. (덜떠름)
병 달 택기 니는, 야가 농땡이라도 치면 바로 내헌테 야그해야 된대이.
택 기 그러문요. 즉각즉각 말씸 드리겠심더.
병 달 (지현에게 부드럽게) 마, 그런 일은 없겠지만서도, 사람이라카는 게 자꾸 편해질라 하는기 있거덩. 택기 말 잘~ 듣고, 농사를 우째 짓는가 함 잘~ 배와보그래이. 택기 야가 농사에는 실력 있고 전문가라! 알았제?
지 현 (똥 씹은 표정) 네.
택 기 지한테 딱 매껴뿌소. 성심성의껏 함 지도해보겠심다.
병 달 (일어나며) 그럼 나는 다녀오꾸마. (가방을 들고 나간다.)
지 현 (가방 보고 놀라) 어? 할아버지 어디 가세요?
병 달 내 얘기 안했나? 마을에서 효도관광. 며칠 못 올 기야. (돌아서면)
지 현 (더 놀라며) 네? 며칠이나요?
병 달 2박3일인가, 3박3일인가 그래.
지 현 (택기 보며 불안에 떨며, 다급히) 그럼 저는요?
병 달 내 여태 얘기 안했나. 택기한테 많이 배아라. 갔다와서 한번 보꾸마. 택기 니만 믿는데이. (그대로 나가고)
벙찐 표정으로 보는 지현.
S#3. 서울집 안방 (아침)
울리는 전화벨.
지현모 (눈도 못 뜨고, 짜증) 몇 신데 벌써부터 전화야?
지현부 (돌아누우며 짜증) 누구야? 빨리 좀 받어.
지현모 (손 뻗어 받으며) 또 지현이겠지, 뭐. 얘가 뻔질 전화네? 여보세요?
지 현 (E. 호들갑) 엄마! 나 어떡해?
지현모 몇 신데 벌써 전화니...
지 현 (E. 신경질) 난 몇 시에 일어났는 줄 알아?
S#4. 시골 지현방 (아침)
지 현 (울쌍, 우왕좌왕) 나 갈래. 뭔가 쫌 이상해. 돌아가는 분위기가. 여기 아는 사람이라고는 할아버지밖에 없는데, 할아버지는 관광가시고, 어떤 시커먼 놈한테 나를 감시하라고 붙여놓고...
지현모 (E. 잠결에 귀찮은) 그게 뭔 소리니 또...
지 현 아무튼 나 서울 갈래.
지현모 (E. 버럭) 얘가 너 미쳤어!
지 현 그럼 할아버지도 없는데 어쩌란 말이야!
S#5. 서울집 안방 (아침)
지현모 (벌떡 일어나며, 딴소리) 뭐? 할아버지가 없다니? 너 그새 할아버지한테 뭐 또 잘못했지?
지 현 (E) 아후, 내가 미쳐.
지현모 할아버지가 있든 없든, 포도밭이 니 손에 들어올 때까지 거기 꼼짝 말고 붙어있어. 알았어?
S#6. 시골 지현방 (아침)
이때 갑자기 밖에서 쾅쾅 방문 두드리는 택기.
택 기 뭐해? 밭에 안 갈 거야?
지 현 아이, 씨, 나중에 전화할게. (얼른 끊고, 문에 대고) 아직 여섯시도 안됐는데, 벌써부터 밭엔 왜 가요?!
택 기 밭에 가면 할일 많아. 빨리 나와. (사라지고)
지 현 아이, 씨. 미치겠네? 한숨 잘라 그랬는데? (이불 대충 한쪽으로 밀며) 근데 저 놈이 뭔데 여기서 설치는 거야?
S#7. 동 시골집 앞 (아침)
시동 건 경운기에 앉아있는 택기.
택 기 뭘 꾸물대고 안나오는 기야? (보면)
아까와는 달리, 한껏 멋을 부리고 나오는 지현.
하늘하늘 미니스커트에 핸드백 들고 하이힐 샌들 신고, 귀걸이도 달랑달랑...
택기, 지현을 빤히 쳐다보면,
지 현 (속마음 소리) 그래, 예쁜 여자 첨보겠지. 마음껏 봐라. 그렇다고 그렇게 티를 내며 쳐다보냐? 촌스럽게?
택 기 옷이 그게 뭐야? 어디 놀러가나?
지 현 (당황, 외면하며) 남이사?
택 기 밭에 가는 거야. 패션쇼하러 가는 게 아니라.
지 현 (기분 상해) 알아요. 밭에 가는 거.
택 기 신발 그런 거 신고 밭에 못가. 다른 거 신어.
지 현 다른 거 없어요.
택 기 농사지으러 왔다는 기 신발을 달랑 그거 하나 갖고 왔어? 빨리 옷이라도 편한 걸로 갈아입고 나와!
지 현 (난감한) 다 이런 건데? 그냥 갈래요. (경운기 뒤로 가면)
택 기 (한심해서) 위험해. 옆에 타.
지 현 싫어요. (뒤에 타는데, 하이힐과 치마 때문에 어기적거리며 이상한 포즈로 올라탄다.)
택 기 (백미러로 보며, 한심한) 옆에 타라니까....
지 현 빨리 가기나 해요! (혼잣말) 재밌겠다. 이런 거 타보고 싶었는데...
S#8. 포도밭 가는 길 (아침)
상쾌한 듯 바람을 맞으며 경운기 뒤칸에 서서 가는 지현.
지 현 (경치구경하며 즐겁다.) 음, 시원하다. 이건 더 빨리 못 달려요? 좀 밟아봐요!
택 기 경운기는 밟으면 서.
지 현 그래요? 그래도 좀 빨리 달려봐요.
택기, 어이없다는 듯 속도를 내면, 덜컹거리는 경운기.
놀이기구 타듯 환호성을 지르며 즐거운 지현.
S#9. 포도밭 (아침)
경운기에서 내려서며 포도밭 둘러보는 지현.
푸른 포도나무들이 울창한 밭.
지 현 음~ 세상에... 경치 좋다! 너~무 아름답다! 이게 다 포도나무예요?
택 기 (비료포대, 필름상자 등 옮기며) 포도나무 첨 봐?
지 현 (자기감정에만 들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구요?
택 기 (대꾸 없이 바쁘게 옮길 뿐)
지 현 (둘러보며) 야! 진짜 넓다...! 엄청나네... 정말 돈 되겠다...
택 기 (그 소리에 못마땅한 듯 뜩 쳐다보는데)
지 현 (속마음 소리. 좋아 죽겠는) 이게 20억이란 말이지? 여기에 로또가 있었네...? 당첨확률 100퍼센트 로또...!
지현의 시야로 보이는 포도밭 Insert.
포도나무에 열린 포도 대신 만원권 지폐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지 현 (끄덕끄덕) 여기다 펜션 지으면 딱이네...!
택 기 (어느 새 뒤에서) 그러면 그렇지. 받으면 바로 팔아묵을 생각부터 하는구만.
지 현 (뜨끔해서) 내가 언제 팔아먹는대요? 경관이 그 정도로 좋다 이 말이지?
택 기 영감님한테 절~대 땅 주지 말라해야겠네.
지 현 허? 지가 뭔데? 일꾼 주제에? 내가 이 포도밭 받으면 당신부터 자를 거야!
택 기 그러세요? (포대 들쳐 매고 밭으로)
지 현 (따라 들어가는, 샌들 뒷축이 까질까봐 살살 걷는) 아이, 씨, 새 신발인데, 뒤축 다 까지겠네...
이때 하이힐이 땅에 박혀 맨발만 쑥 빠지자,
깨끔 발로 서서 박혀있는 하이힐을 손으로 들어 올리는 지현.
하이힐에 박혀 딸려 올라오는 커다란 마른 소똥뭉치.
지현 소똥덩이를 빼내려고 포도나무에 툭툭 치면,
택 기 뭐야? 왜 이래? 포도나무 상하게!
지 현 디게 그러네... (손으로 소똥 떼어내며) 이게 뭐야...?
택 기 소똥 처음 봐?
지 현 네? 소똥이요? (손에 들린 소똥 냅다 버리고) 으~ 냄새.
택 기 시간 없으니까, 빨리 시작해. (장갑과 가위를 안겨준다.)
지 현 (장갑과 가위 보며) 뭘 시작해요?
택 기 농사지으러 왔다매?
지 현 (샌달 신으며) 이쯤에서 정확히 말해두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난 포도밭 구경삼아 한번 둘러보러 온 거지, 일하러 온 게 아니거든요?
택 기 안되겠네? 영감님한테 보고 해야지. (목에 걸고 있는 핸드폰 열면)
지 현 아니, 치사하게? 알았어요! 일하면 되잖아요!
S#10. 동 포도밭 일각 (아침)
파랗게 매달린 작은 포도송이 보며, 설명하는 택기.
택 기 요래 요래 굽은 거, 알이 너무 빽빽한 거, 이런 거는 알을 솎아줘야 된다고. 함 해봐. 벨로 어려울 건 엄써.
지 현 (떼어내며) 요렇게요? (포도알이 우두둑 떨어지면)
택 기 아, 거 참 말귀 못 알아듣네. 대학 나온 거 맞아?
지 현 이렇게 하래매요?
택 기 다시 잘 봐봐. 비실비실한 거 요런 거만. 알았어! (보면, 지현 선글라스 끼고 있다.) 뭐 하는 거야? 그런 거 끼고, 포도알이 잘 비나?
지 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절루 가요. (하는데 알만 주루룩 떨어뜨린다.)
택 기 (버럭) 뭐해? 포도 다 망치네!
지 현 처음이니까 그렇죠! 댁은 뭐 첨부터 잘했어요?
택 기 이거 다 백화점에 납품할 건데, 잘 안되면 장갑을 벗어! 벗고 해!
지 현 아이, 씨... (장갑 벗으며) 난 디자이너라 손 망가지면 안되는데... (야한 색은 아니지만 매니큐어 바른 손가락들.)
택 기 회사 쫓겨났다꼬 내 그날 똑똑이 들었는데 무슨 디자이너야? 백쑤지!
지 현 (뜨끔해서 펄쩍 뛰며) 어머, 내가 무슨... 회사를 짤렸다구 그래요? 나... 회사 안짤렸어요! 진짜 이상한 소리 하고 있어? (또 포도알 주루룩 떨어뜨린다.)
택 기 (성질 팍) 안 되겠네, 진짜?! 그거 고마하고, 일루 와!
죽을 쌍이 되는 지현.
S#11. 동 포도밭 다른 일각 (낮)
포도 넝쿨을 살피며 여기저기 가위를 들이댔다 말았다 고심하는 지현.
가위로 웃자란 순따기를 하고 있다.
택 기 (근처에서 알솎기 하며 계속 잔소리) 그기 1차 적심 한 건데,
지 현 (궁시렁 궁시렁) 적심은 또 뭐야? (치마 자락 오므리며 신경 쓰고)
택 기 (계속) 잎파리 오륙매에서 끊는다꼬. 너무 잘 자라는 건 부초가 나오니까, 부초만 2차 적심 해주는 기야.
지 현 (뭘 자를까 고심 중, 피식거리며) 부초는 또 뭐야? 대체 뭘 자르라는 거야...?
택 기 뭐해? 빨리 빨리 안하고! 그래 꾸물대서 은제 이 밭을 다 해!
지 현 하고 있어요! (애라 모르겠다, 대강 싹뚝!)
택 기 (화들짝 놀라 쫓아오며) 지금 뭘 자른 거야!
순간 경기에 들린 듯 깜짝 놀라 돌아보는 지현. 동시에 아야! 비명 지른다.
지현의 달랑거리는 귀걸이가 포도가지에 걸렸다.
택 기 (무슨 사고라도 난 줄 알고) 왜 그래?
지 현 저기, 이거요, 이거... 귀걸이 좀 빼봐요.
택 기 내 이럴 줄 알았어. 누가 이런 거 달고 오래?
지 현 빨리 좀 빼봐요.
택 기 가만 있어봐.
지 현 아, 아...! 잡아당기면 어떡해요? 아프잖아요!
택 기 포도가지 이거 상하면 열매 못 맺어.
지 현 아이, 정말? 뭐해요? 가지를 자르면 되지? 빨리 좀 빼요!
택 기 가만 좀 있어. 가지 자르면 포도 망쳐. 귀걸이를 뺀찌로 자를까?
지 현 뭐요?
이때 언제 왔는지, 쪼로록 둘러서서 두 사람을 쳐다보는 포도밭 일꾼 아낙들.
이장댁 (경상도) 옴마야, 포도밭 안에서 요상한 일이 벌어지네~?
지현 무심결에 아낙들 돌아보느라, 또 귀가 아픈데,
이때 택기가 귀걸이를 막 떼어낸다.
이장댁 택기 니 아침부터 다방 커피 시켰나?
명 숙 못 보던 아가씨네? (지현에게) 새로 왔나봐?
지 현 (귀 만지며, 기분 나빠 시선 돌리는데)
택 기 서울서 농사지으러 내려온 영감님 손녀예요. (지현에게) 인사해요. 일하러 오신 아주머니들이세요.
지 현 안녕하세요.
이장댁 (아래위로 훑어보며) 농사지으러 왔다카문서 그래하고 왔나?
지 현 네...?
명 숙 그러고 밭에 들어오면, 풀독 다 올라. 벌레도 쏘이고.
이장댁 놔두라. 뭐 으때? 택기총각 마음이 싱숭생숭 하겠네. (자기들끼리 낄낄대는)
택 기 (얼굴 빨개져, 딴소리) 저기, 오늘은 여부터 저쪽으로 죽 해가세요.
이장댁 (수건 쓰면) 그래, 마, 우리는 일이나 하자꼬.
아낙들 위치 잡고 일 시작하는데,
지 현 (택기에게) 아니 일꾼이 요것밖에 안되요?
이장댁 (대뜸 나서며) 요것이라니?
지 현 네?
이장댁 (성질) 아니, 우리가 요것이가?
지 현 아니요... 그게 아니구요...
택기 피식 웃으며 잘됐다는 듯 슬쩍 자리 뜨면,
지 현 (얼른 택기 따라가며) 저기, 일꾼들 더 올꺼죠?
택 기 무슨 일꾼?
지 현 아니... 만평을 다 할려면... 저 분들 갖고는 적지 않나? 한 30명쯤은 된다고 하던데?
택 기 여기가 무슨 기업인줄 아나? 일꾼 쓰면 포도 팔아서 인건비도 못 건져!
지 현 네? 아니, 그래도 만평이면...
택 기 바쁜데 씰데없이 말 시키지 말고, 일루 와. 그럼 이거나 해. 괜히 포도 망치지 말고. (작업복에서 스탬프 꺼내 순묶기 시범 보인다.) 새순을 묶어주는 거야. 이건 쉬워. 할 수 있지? (스탬프 넘겨주며) 자, 함 해봐.
지 현 (해보는데)
택 기 저 끝까지 쫙 다 해놔. 알았지? (가면)
지 현 (포도밭을 보며) 헤? 이걸 언제 다하지? (가지 골라 스탬프 찍는데)
이장댁 (소근소근) 아이구, 볼만 하네. 농사지으러 왔다는 게 판쓰 자랑하러 왔나?
지현 치맛자락 오므릴라, 스탬프 찍을라, 죽을 맛이다.
S#12. 동 포도밭 다른 일각 (낮)
지 현 (계속 스탬프 찍으며) 이게 쉽긴 뭐가 쉬워? 아후 손아귀야. 고개 아파 죽겠네.
문득, 하이힐을 벗어서 본다.
지 현 아이, 씨... 벌써 쫌 까졌잖아? 안되겠다.
하이힐을 철사에 스탬프로 찍어 걸어놓는다.
맨발로 다니면서 순묶기를 하는 지현.
지 현 아이고... 발바닥이야... 앗 따거...
(시간경과) 이글거리는 태양.
땡볕에서 땀을 찔찔 흘리며, 인상 잔뜩 쓰고 순묶기하는 지현.
지 현 아후, 고개야. 고개가 끊어질 것 같네.
택 기 (근처에서 일하며) 개우 고거 하고, 무신 고개가 아프다꼬? 빨리 빨리 해.
지 현 (눈 흘기고는, 시뻘건 어깨 만지며) 벌써 살이 익었나? 쓰라려 죽겠네...
택 기 누가 그런 거 입고 오래? 엄살 부리지 말고, 빨리 해.
지 현 아이, 씨... 저 괴물 같은 놈. 아이, 씨... 배고파. 아침도 안 먹었는데... (시계 보며) 아직 열시 밖에 안됐잖아? (고개 빼고 둘러보며) 언제 밥 먹나...? 새참도 안 주냐...? 서울에선 아직도 자고 있을 시간인데... 벌써부터 더워서 쪄죽겠네...
택 기 꾀부리지 말고, 빨 빨 해! (그러다 스탬프 박아놓은 거 보고) 지금 이게 뭐꼬? 포도순 다 베렸네! 이렇게 빡빡하게 묶어놓으면 어떡해? 성장을 방해하잖아! (성질내며 스탬프 뺏는) 이거 고마하고, 저~ 가서 비니루나 갖고 와!
지 현 (쫄아서, 흉내 내며) 저~가 어디에요?
택 기 (지현이 한 순묶기 다시 풀며, 신경질. 고개로 가리키며) 저~ 농막!
지 현 (두리번) 농막이 뭐야? (대강 감으로 간다.)
S#13. 동 농막 근처 (낮)
지 현 농막이 여긴가...? 비니루가 뭐야? 무식하게? 비닐이지. 비닐이 어딨어...?
이것저것 들추며 보는 지현.
박스 들춰내자 돌돌 감긴 긴 비닐뭉치가 보인다. 엄청 크고 무거워 보인다.
지 현 (기가 막혀) 이걸 나보고 들고 오라고...?
이때 멀리서 바쁜 택기가 소리친다.
택 기 뭐하나? 빨리 안 가오고?
잔뜩 찌푸린 지현, 낑낑 매며 비닐을 들어 올린다.
S#14. 동 포도밭 비탈길 (낮)
지현이 낑낑대며 비닐 뭉치를 들고 간다.
어깨에 메어보기도 하고 등에 짊어져 보기도하지만 무겁고 힘들다.
지 현 (비틀거리며) 무거워 죽겠네. 아, 배고파. 현기증 날라 그러네.
이때 비닐을 놓치는 지현. 마침 비탈길로 굴어 내려가는 비닐뭉치.
비닐이 술술 풀리며 순식간에 쫙 깔린다.
지 현 (울쌍) 아! 내가 미쳐. (급히 맨발로 달려 내려간다.) 으, 발바닥이야.
S#15. 동 비탈길 아래 (낮)
지현이 비탈길 밑에서부터 다시 비닐 감아올리고 있다.
숨을 헐떡이며, 진땀이 줄줄 흐르고, 힘에 부친다.
지 현 (겨우 비닐 잡고 지탱하는데 팔이 바들바들 떨리는) 아이, 씨... 힘들어... 아이구...
잠시 쉬는데, 이때 다시 놓치면서, 다시 줄줄 풀리며 굴러 내려가는 비닐뭉치.
지 현 (더 울쌍) 으악~! 내가 미쳐...!
급히 달려 내려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발바닥을 움켜쥐며 우는 지현.
S#16. 동 포도밭 (낮)
엉망으로 헝클어진 비닐을 한 아름 안고 와 내려놓는 지현.
지 현 (땀으로 범벅이 된 처참한 몰골) 비닐 여?어요.
택 기 뭐하고 이제 와? (비닐 보며) 누구네 비니루고? 어서 줏어왔어?
지 현 우리 비닐 맞아요. (손으로 땀 닦으며) 어후, 더워...
택 기 (비닐 들어보며) 빵꾸 뚤버져서 못 쓰겠네! 니 비니루 갖고 뭐했어?
지 현 (신경질) 아무튼 가져왔으면 됐잖아요! 아후, 목말라. 아후...
이때 물을 마시는 마리아가 보이자,
지 현 (얼른 마리아가 놓고 간 물통 쪽으로 쪼르르 가며) 아휴, 목말라. 죽겠네, 진짜... (벌컥벌컥 마시고 남은 물을 얼굴에 뿌리며 다 쓴다.) 아, 시원해. 좀 살겠네...
이장댁 (어느 새 다가온) 아니, 뭐 이런 기 다 있나?
지 현 네?
이장댁 오늘 우리가 하루종일 먹을 물을 니 혼자 다 써버리면 우짜나? 니 입만 입이고, 우리 요것들은 물도 먹지 마라, 이 말이가?
지 현 (빈 물병 보며) 네...? 아니요, 물이 요것 밖에 없어요...? (둘러보는데)
택 기 (어느 새 다가와 빈병 뺏어들더니) 나, 참... 바빠 죽겠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일만 만들고 있네. (이장댁에게) 퍼뜩 가서 갖고 오께요. (급히 가고)
지 현 아니, 난 물이 더 있는 줄 알았지, 누가 요것 밖에...
지현을 흘기며 일하러 가는 이장댁.
S#17. 동 포도밭 다른 일각 (낮)
지현이 궁시렁 거리며 포도잎을 따서 챙이 넓은 모자를 제작중이다.
지 현 뭐? 일꾼이 30명? 농사짓는 시늉만 하면 된다구? 배고파 죽겠는데, 밥도 안주구, 땡볕에서 머리가 띵해 죽겠네... 난 시골 체질이 아니야. 여기랑 안 맞어. 아후, 어깨야... (발과 종아리 온통 까지고 쓸켰다.) 아후~ 아퍼... (허벅지 긁으면, 시뻘겋고 이미 부풀어 올랐다.) 아이, 간지러... 진짜 풀독 올랐나...?
모자 써보고는, 제법 자신의 솜씨에 만족하는데,
이때 물통과 옷가지가 든 봉지 들고 바삐 올라오는 택기.
택 기 (지현 보고 놀라) 니 지금 뭐하나? 생각이 있나 없나? 포도잎은 왜 따고 그래!
지 현 햇빛 좀 가릴려구요. (모자 써 보인다.) 멋있죠? 하나 만들어줄까요? 이래뵈도 디자이너 작품이라고 할 수 있죠. (뽐내는데)
택기, 바닥을 보면 포도잎이 수북하다.
택 기 (떨어진 포도잎 주워들고 주위의 앙상한 포도나무가지들 쳐다본다.) 아니, 이걸 다 땄어?
지 현 되게 그러네? 이파리 몇 장 딴 거 가지고? 포도알 딴 것도 아닌데 뭘 그래요?
택 기 포도잎은 멋으로 달려있는 줄 아나? 포도 한 송이당 네 잎은 달려있어야 성장을 하는데, 이게 다 뭐야! 니 포도농사 망칠라고 작정했나? 이게 몇 그루야? 엉? (손가락으로 잽싸게 세는데)
지 현 고거 쪼금 가지고 되게 그러네.
택 기 뭐? 쪼금? 이게 한그루에 40송이썩, 열 그루니까 400송이, 유기농이라 한 박스에 4만원썩, 240만원 어치야. 알아?
지 현 (놀라며) 네~? 240이요...?
택 기 니 저분에 서울 포도값 400에다가 240 합쳐서 640만원 물어내!
지 현 네? 아니... 저기... (그러다 생각난) 아니, 이 포도밭 주인이 난데, 내가 왜 물어내요? 별꼴이야?
택 기 니, 내가 영감님한테 포도값 떼먹고 도망간 서울 가시나가 누구라꼬 정확하게 알려주까?
지 현 아니... 뭐... (그러다 되레 큰소리) 되게 땍땍거리네, 진짜? 내가 일부러 그랬어요? 모르고 그랬지? 처음에 잘 갈켜주든가, 설명도 안해주고서, 왜 소리는 지르고 사람 죄인 취급하는 거예요? 스트레스 받게?
택 기 뭐? 참, 한심하네... 솔직히 내도 영감님 손녀딸이 농사지으러 온다케서, 좀 괜찮은 아가씨가 오나 쏙으로 기대를 했어. 그런데 니같이 싹수 노란 기 내려와가, 기본도 안된 거를 붙잡고 농사나 가르쳐야 되는 내가 디게 한심해. 알아!
지 현 아니, 뭐라구요? 당신 말 다했어! 그리고 왜 말 끝마다 반말이에요? 기분 나쁘게?
택 기 반말? 허허... 지금 반말하지 마라 이런 얘긴가?
지 현 그렇죠. 언제 봤다고 반말이에욧?
택 기 우리가 안 봤나? 마이 본 거 같은데? 화장실에 내헌테 변태처럼 다 비준 거를 (주변 아낙들 둘러보며) 여기서 함 얘기해보까?
지 현 (찔끔하며) 뭐요?
택 기 이거나 입고 해. (거칠게 수건과 몸빼, 긴소매 남방, 밀짚모자를 안겨준다.)
지 현 이건 또 뭐야? (살펴보는데)
택 기 눈물나게 고맙제? 일 잘하라고 주는 거지, 예뻐서 주는 기 아니야.
지 현 나 이거 못 입어요. 내가 디자이넌데, 이런 걸 어떻게 입어? (다시 내밀면)
택 기 싫으면 관둬. 멋 부리다 바비큐 통구이 되던가 말던가. 벌써 풀독 올라가 다리가 시뻘겉네. (가버린다.)
지 현 (다리 긁으며) 아이, 씨...? 스타일 구겨지게...
S#18. 동 포도밭 일각 (낮)
포도잎 모자를 쓰고 몸빼를 입은 지현이 나타나자,
택기도 힐끔 보고, 아낙들 모두 웃는다. (점심 먹던 중이다.)
이장댁 (비꼬듯) 별수 없제? 니도 입었네? 잘 어울리네!
명 숙 진작 그렇게 입었어야지. 좀 좋아?
지 현 (뚱하니 앉더니 새참 보며, 속마음 소리) 아니, 벌써 지들끼리 다 먹었잖아? (꼬르륵 소리 나고, 입맛 다시며 급히 젓가락 찾는데, 없다.)
명 숙 왜? 안 먹어?
지 현 아니요, 젓가락이... (멀리 있는 젓가락 힘들게 집는데)
이장댁 도시여자들은 다이어트 한다꼬 잘 안 먹는다 아이가.
지 현 (일단 밥공기 들고, 젓가락 뻗어 반찬 집으려는데)
이장댁 (그 반찬 집어가며) 이런 찬은 우리 같이 요것들이나 먹는 거지, 맛이 있겠나. (접시 멀리 놓는다.)
지 현 (떨떠름한 표정. 얼른 가까운 곳에 놓인 쌈을 싸서 한입 넣으려는데 입이 안 벌어진다.) 아, 고개야, 어후...!
명 숙 근데 농사 지으러는 왜 왔어? 도시 처녀가?
지 현 (속마음 소리) 아이, 씨, 배고픈데... (대사) 뭐 새로운 경험이고 해서요... (먹으려는데)
명 숙 얼마나 있을려구?
지 현 (속마음 소리) 왜 먹지도 못하게 자꾸 말 시키는 거야? (대사) 1년이요. (먹는다.)
명 숙 (놀라며) 1년이나?
이장댁 1년이나 여기 있으면... 택기 총각하고 정들것다!
지 현 (그 말에 표정 구기며 외면하고 우적우적 먹는데)
명 숙 에이, 설마요.
이장댁 혹시 또 아나? 택기 색시 될지?
택 기 (콧방귀) 하! 천만에예. 이 아가씨가 와 지 알라를 낳습니꺼?
지 현 (그 말에 살에 걸려 캑캑 댄다.)
명 숙 하긴 택기한텐 홍이가 있는데요, 뭘...
이장댁 맞다. 홍이가 들으면 눈이 히딱 디비질라꼬. 호호호...
마리아 (지현에게 물주며) 물, 물 묵어. 팍팍 묵어. 그래가 어디 농사짓겠니?
지 현 (물 급히 받아 마시며, 속마음 소리. 몹시 괴로운 투) 아니, 여긴 왜 다 반말이야?
이장댁 농사는 뭐 아무나 짓나? 택기한테 걸렸으니 앞으로 볼만 하겠네. 호호호...
명 숙 그 집 영감님도 그렇고, 두 성질머리하고 같이 지낼라문 욕 좀 보겠다.
겨우 진정한 지현, 다시 허겁지겁 쌈을 싸서 먹으려는데, 뭔가 이상해서 보면, 상추쌈 위에 파란 벌레가 꿈틀거린다. 비명 지르며 놀라 내던지는 지현.
이장댁 왜 먹는 걸 버려? 배 안 고픈갑다.
지 현 벌레가 있어요, 벌레!
명 숙 이게 유기농이라, 벌레도 먹어도 돼. 좋은 건데. (지현이 내던진 쌈을 주워 먹으면)
지현, 욱~! 비위 상해 돌아앉는다. 배에선 꼬르륵 소리가 나고, 허기진 배를 부여잡는 지현.
지 현 (속마음 소리) 아이, 씨... 배고파...!
S#19. 포도밭 일각 (낮)
자기들끼리 낄낄대는 아낙들 보이고,
지 현 (포도잎 모자 쓰고 다시 일하려는) 그래, 지금 상황파악이 안 되는 모양인데, 댁들도 내가 이 땅에 주인 되는 순간, 바로 아웃이야.
이때 언제 왔는지, 뒤에서 나타나는 택기.
택 기 와 일할라꼬?
지 현 (돌아보지도 않고) 그럼 일하지 뭐해요? (장갑 끼는데)
택 기 그만 돌아가지?
지 현 (일 그만하라는 소린가?) 네? 오늘 일 끝났어요? (미소 떠오르며 장갑 벗으려는데)
택 기 그만 서울로 올라가라고.
지 현 (그건 또 뭔 소리야?) 왜요?
택 기 포도밭 만평에 눈이 멀어서 왔나본데, 여기 그래 호락호락한 데 아니야. 내가 영감님께는 잘 말씀드릴 테니까네, 오늘이라도 짐 싸갖고 올라가.
지 현 별꼴이야? 내가 왜요?
택 기 어차피 오늘가나 내일가나 똑같은데, 괜히 고생만 더하지 말고, 내말 들어. (간다.)
지 현 흥! 상관 말아요! 지가 뭔데 가라마라야? 나를 어떻게 보고? (택기를 향해) 댁이나 관둬. 오늘 보니까 별로 하는 일도 없는 거 같은데. (일하며) 아이, 씨. 저런 놈한테 무슨 농사를 배우라고. 할아버지는 대체 뭐 하시는 거야?
S#20. 관광지 휴게소 (낮)
관광버스가 보이고, 파라솔에 삼삼오오 앉아있는 노인들.
병달이 사온 아이스바를 죽 나누어 주는데, 박영감에서 아이스크림 동난다.
박영감 나는 왜 안주냐?
병 달 니는 니 돈 내고 사 먹어라. 아이구, 다리야, 아이구, 다리야. (앉아서 먹는다.)
박영감 치사한 놈.
송할멈 (박영감에게) 제꺼 들어유.
박영감 (삐져서) 아이, 됐슈.
병 달 (박영감에게) 니 삐졌나?
박영감 그래, 이눔아. 니들 입만 입이고 내 입은 주둥이냐? 나쁜 놈.
병 달 아, 시원하고 좋다. 아~들은 농사 잘 짓고 있나, 모리겠네...?
송할멈 영감님도 참. 다 큰 손녀딸을 택기헌티 매껴두고 이렇게 놀러오면 워쩐대유? 밤에 뭔일이라도 생기면 워쩔려구?
병 달 배울 만큼 배운 아들인데, 뭔일이야 있것나.
송할멈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지유. 남녀가 정분나는 건 순식간인디.
병 달 뭔 일 좀 나면 으때? 정분나면 좋제, 뭐.
송여사 (놀라며) 네?
병 달 (송여사에게) 아, 먹어. 다 녹아. (박영감에게) 박가야, 한입 주까? (침 잔뜩 묻히더니, 내밀며) 자,
박영감 됐다, 이놈아.
S#21. 시골길 (석양)
택 기 (지현에게) 가다가 내리에 잠깐 들러서 감자밭 좀 보고 갑시다.
지현이 아무런 대꾸가 없자, 택기 돌아보면, 꾸벅꾸벅 졸고 있는 지현. 발갛게 익은 얼굴에 흙검댕이 묻히고, 잘도 존다.
S#22. 하우스 포도밭 (아침)
지붕이 열린 하우스 밭. 포도송이들이 탐스럽게 익어 있다.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를 날리고 있는 지현. (몸빼 차림 아니다.) 이슬을 머금은 탐스러운 포도송이들 사이로 아침의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 쬔다. 탐스럽게 익은 포도송이를 따서, 막 먹으려는 지현. 이때 갑자기 불길한 음악이 시작되며, 천둥번개와 함께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 지현, 재빨리 비를 피해 포도나무 아래로 몸을 숨기고, 다시 포도를 먹으려 하는데, 이때 지현의 등 뒤로 천천히 다가드는 검은 그림자. 하지만 지현은 아무것도 모른 채 포도만 맛있게 먹는다. 지현의 등 뒤로 다가선 그림자. 검은 우비를 입고, 손에는 커다란 낫을 들고 있다. 이내 지현을 향해 무시무시한 낫을 치켜 올리는 검은 그림자. 순간 번개가 번쩍 치며, 사내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드러난다. 다름 아닌 택기다.
택 기 누가 포도 따먹으라 그랬어?
지현 놀라서 돌아보면, 지현을 향해 그대로 내리찍는 낫.
S#23. 저수지 둑길 (석양)
순간 비명을 지르며 피하면서 몸을 일으키는 지현.
지 현 아악! 잘못했어요!
잠에서 깨며 벌떡 일어나는데, 순간 비틀하며 경운기 난간너머로 훌러덩 넘어간다. 그대로 저수지로 풍덩 빠지고 마는 지현.
택 기 (놀라서 시동 끄며) 뭐야? 쟤 혼자 와 저래? (달려 내려간다.)
‘어푸어푸’ 하며 물에 빠져서도 정신을 못 차리는 지현. 달려온 택기, 깜짝 놀라 저수지로 뛰어든다. 재빨리 지현의 목을 뒤에서 잡고 밖으로 헤엄쳐 나오려는 택기. 하지만 지현은 아직도 꿈속인지 택기를 사정없이 밀친다.
지 현 이거 놔요! 사람살려! 사람살려!
택 기 지금 살려주고 있잖아!
지 현 (택기를 보고 더 놀라) 엄마야? 사람 살려!
놀란 지현이 힘을 주며 매달리자 같이 물속으로 꼬로록 빠져드는 택기. 두 사람이 물 속으로 가라앉는다.
S#24. 동 저수지 (석양)
간신히 지현을 들쳐 업고 물에서 나오는 택기. 힘들게 나와 지현을 눕힌다. 지현은 정신을 잃었다. 이봐, 이봐요! 재빨리 지현의 따귀를 때리는 택기. 하지만 지현은 여전히 의식이 없다. 안되겠는지, 인공호흡을 하려고 지현의 입술에 입을 들이대려 하는 택기. 떨리는지, 눈을 껌뻑이다 감히 못하고, 이봐, 이봐! 다시 흔들어본다. 안되겠는지, 크게 숨을 들이마신 다음 지현의 입술에 입을 다시 들이대려는 순간, 지현이 번쩍 눈을 뜬다.
지 현 뭐하는 거예요? (따귀를 찰싹 때린다.)
지현의 코앞에 얼굴을 대고 멀뚱멀뚱 바라보는 택기.
택 기 야. 아이, 씨... 정말, 너?
지 현 (택기 밀치고 발딱 일어나며) 어? 내 신발?
지현의 한발에만 샌들이 있고, 다른 발은 맨발이다.
지 현 (굽이 달라 절뚝거리며 찾는) 내 신발 어딨지? 좀 찾아봐요.
택 기 찾든가 말든가 니 맘때로 해. (쫄딱 젖은 옷 짜며 경운기로 향하는데)
지 현 아이, 씨...? 내 신발, 내 신발... (물 속을 들여다본다.)
택 기 빨리 안 갈 거야?
지 현 그게 어떤 신발인데 그냥 가요?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갈 태세다.)
택 기 (달려오더니) 이 여자가 미쳤나? 겨우 건져 냈더니. 여기 깊어. 빠져죽은 사람만 몇 명이야. 물귀신도 살아.
지 현 (갑자기 으시시한 기분) 물귀신이요...?
S#25. 마을 길 (석양)
쫄딱 젖은 상태의 택기와 지현. 앞에 나란히 앉아 경운기 타고 오는데,
지 현 아이, 씨... 내 신발... 그게 어떤 신발인데...
택 기 아, 거 참. 되게 시끄럽네.
이때 퇴근길의 홍이가 마주 걸어온다.
홍 이 (경상도 사투리) 오빠야!
택 기 어, 홍이가. 이제 퇴근하나?
홍 이 엉. (지현을 경계하듯 힐끗 보고, 택기에게) 근데 누고?
지 현 (역시 홍이 힐끗 보고는 시선 돌리는, 신발 때문에 울쌍인 상태)
택 기 어... 영감님댁 먼 친척 손녀 딸.
홍 이 (지현 무시하고 택기에게만) 근데 와 둘이 쫄딱 젖었나?
택 기 그럴 일이 있었다.
홍 이 (얼른 가방에서 홍보용으로 받은 새 수건 꺼내 닦아주며) 오빠야, 감기 들겠다.
택 기 (넘사스러워 말리며) 괜찮다.
홍 이 (지현에게 들으라는 듯) 참, 서울 갔을 때 내 목걸이 사왔나?
택 기 사왔다. 집에 있다.
홍 이 그래? 나중에 가질러 갈게.
택 기 그래. 잘 가레이.
그대로 휙 가버리는 홍이. 택기 출발하면, 지현도 괜히 외면하고는 간다.
지 현 꼴에 애인이가부지?
아무런 대꾸 없이 가는 택기.
S#26. 시골집 마당 (저녁)
물에 쫄딱 젖은 지현이 신발 한 짝만 들고 망연자실 평상 위에 앉아있고,
택 기 (연고 가져와 내민다.) 많이 까졌네? 이거 발라.
지 현 내 신발... 이거 아직 할부도 안 끝난 건데...
택 기 참, 나... (연고 짜서 무릎에 발라주려 하면)
지 현 저리 비켜요.
택 기 안 아파?
지 현 지금 아픈 게 문제에요? 신발을 잃어버렸는데?
택 기 그럼 바르던가 말던가. (연고 던져놓고 가버린다.)
지 현 저 괴물 같은 놈. 아이구, 내 신발...
평상 위에 밥상을 내려놓는 택기.
택 기 밥 먹어.
지 현 으이, 씨... 총각귀신이나 되라. (외면하고 돌아앉는다.)
택 기 먹기 싫으면 관둬. (혼자 열심히 먹는다.)
지 현 (눈물 바람) 그게 어떤 신발인데... 내가 진짜 아끼는 샌들인데...
택 기 거 참, 말 많네.
지 현 아까워서 몇 번 신지도 않은 건데... 내 신발... (훌쩍이며 운다.)
택 기 허, 참. 누가 죽었어?
지 현 (흑흑흑) 내 신발...
택 기 이 여자 와 이래? 그거 신은 거 하나도 안 예쁘더만.
지 현 (발끈) 뭐요? 이게 명품이라는 거예요, 명품...! (운다.)
택 기 명품이든 아니든, 그게 발에 걸치는 거지, 머리에 쓰는 왕관은 아니잖아? 어서 밥이나 먹어.
지 현 지금 밥이 넘어가요? 내가 첫 월급 타서 백화점에서 산 건데...? (운다.)
택 기 고무신이나 장화나, 아무 거나 걸치면 되지, 진짜...! (밥숟가락 든 손, 확 한대 패버리고 싶다.)
지 현 댁은 아무 거나 걸치는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좋은 신발을 신어야, 인생이 좋은 길로 간다고요... 그래서 산 건데... 이제 난 다 틀렸어... (엉엉 운다.)
밥그릇 딱딱 긁어 먹고 숟가락 놓는 택기. 이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지현. 택기, 끄윽 트림하며, 잘 먹었다. 일어나 나간다. 지현, 훌쩍이며 돌아보고, 밥상으로 오면, 밥 그릇 두 개가 싹 다 비워져 있다.
지 현 (빈 밥그릇 들고) 아니, 저 놈이? 남의 밥까지 다 먹고 갔네? (울먹울먹) 왜 남의 집에서 밥까지 먹고 가? 여기가 지네 집이야? 아주 지 멋대로야? 배고파 죽겠는데... (운다.) 내가 여기 와서 뭐하고 있는 거야? 저런 놈한테 무시나 당하고... (딱 하나 남은 부침개 한점 먹으려고 집어 들고 보면, 김치 국물과 밥풀이 묻어있다.) 아이, 씨... 드러... (그냥 놓고 운다.) 엄마...!
S#27. 서울. 지현집 거실 (밤)
TV보면서 과일 깎아먹는 지현 가족들.
지현모 얘는 핸드폰으로 포도밭 좀 찍어서 보내라 그랬는데, 왜 안 보내는 거야? 만평이면 얼마나 될까? 바다처럼 넓을 거야? 끝이 안보이겠지?
지현부 우리 지현이 그 넓은 밭에서 일할래면 죽어나겠구만. 손에 물 한방울 안 묻히고 산 앤데...
지현모 걘 고생 좀 해봐야 되요. 물 한 그릇 지손으로 안 떠먹던 앤데... 그나저나 잘 하고 있나? 엄살이 하두 심해서...
지 호 방학하면 나도 내려가 봐야지?
지현모 나두 궁금해 죽겠다. 할아버지 안계신다는데 내일이라도 슬쩍 갔다와볼까?
지현부 거 쓸데없는 소리. 마을에 소문이라도 나봐. 우린 가만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지현모 알았어요...
지 호 엄마, 우리 집도 이제 뭔가 풀리나봐. 느낌이 좋다.
지현모 그러게나 말이다. 여긴 재개발 들어가지, 시골엔 포도밭도 생기지...
지현부 그렇게 좋아?
지현모 그럼요. 당신이 못해준 거, 어떻게 호박이 하나 잘못 굴러 들어와가지구, 말년에 나도 하빠리 인생 면하게 생겼는데, 안 좋아요? 호호호... 그나저나 얘가 조신하게 잘해야 될 텐데...
S#28. 저수지 (밤)
경운기 헤드라이트를 저수지 쪽으로 밝혀 놓은 채,
물 속에서 자맥질하는 택기.
택기가 물 밖으로 솟구쳐 나와 거칠게 숨을 몰아 내쉰다.
다시 큰 숨 쉬고 물속으로 잠수하는 택기.
S#29. 시골집 마당 (밤)
대야에 물을 받고, 수건과 갈아입을 옷을 챙겨놓는 지현.
준비가 끝났는지, 대문 밖을 한번 경계하듯 본다.
지 현 무슨 집이 샤워시설은커녕 대문도 없이 뻥 뚫려있냐...? 아, 끈적끈적해...
수돗가의 전등을 끄고는 옷을 벗는 지현.
대야의 물을 막 끼얹는데,
이때 쫄딱 젖은 택기가 슥 들어선다.
택 기 불 꺼놓고 뭐해?
옴마야! 놀라서 얼른 옷가지로 몸 가리고 자기 방으로 튀어 들어가는 지현.
S#30. 동 지현방 (밤)
깜깜한 방으로 튀어 들어온 지현.
지 현 (급히 옷을 입으며) 왜 또 왔어요! 빨리 가요!
S#31. 동 마당 (밤)
수돗가에 불을 켜면, 지현이 목욕을 하려고 했던 흔적들을 보는 택기.
저수지에서 건져온 진흙 묻은 지현의 샌들을 흐르는 물에 씻는다.
평상에 굴러다니던 신발 한짝과 함께 툇마루에 나란히 놔주는데,
이때 지현이 옷을 입고 튀어나온다.
지 현 아니, 왜 또 왔어요! (택기가 놔주는 신발을 보고는 찔끔해서) 저수지에 가서 찾아온 거예요...?
택 기 (그 말엔 대꾸 없이 수건으로 젖은 머리 닦는다.)
지 현 (내심 좋아서 신발을 집어 들고는, 택기 보며, 속마음 소리) 그래도 제법 괜찮은 구석도 있네?
택 기 목욕해요. 난 들어가 있을 테니. (자기 방으로 향하는데)
지 현 (어리둥절) 들어가다니요? 집에 안가요?
택 기 집? 여기가 우리 집인데, 어딜 가?
지 현 아니, 여기가 집이라니요? 빨리 가세요. 나도 좀 씻고 쉬게. 그리고 내일은 10시 반 쯤 데릴러 오세요. 아니아니, 11시! 난 일찍 못 일어나니까.
택 기 나 여기 살아. 내 방 저기야.
지 현 뭐라구요? 아니, 왜 여기 살아요? 누구 맘대로?
택 기 여기 사니까 사는 거지, 왜 살다니?
지 현 말도 안돼요. 당장 나가요.
택 기 니가 뭔데 나가라 마라야?
지 현 잊었어요? 나 이집 상속녀에요. 당장 나가요.
택 기 상속을 받아야 상속녀지. 그걸 지금 우째 아나?
지 현 뭐요? 그럼 오늘만이라도 다른 집에 가서 자고 오던지, 친구네라도 가요, 빨리!
택 기 내가 내 집 놔두고, 와 친구네를 가서 자?
지 현 그럼 오늘 밤 어떻게 한집에 있어요? 내가 댁을 뭘 믿고?
택 기 누가 할 소리? 니나 내한테 이상한 짓 하지 마! 서울에서처럼 내 덥칠 생각 말고.
지 현 뭐라구요? (소리 꽥) 어머, 정말 왜 이래요? 나 한숨도 못자고 꼴딱 새는 꼴 볼라 그래요!
택 기 잠을 자던지 말던지, 맘때로 해. (들어가 버린다.)
지 현 아이, 씨, 뭐 저런 괴물 같은 놈이 다 있어? (문득 생각) 아니, 왜 저 인간이 여기 살지? 할아버지도 이상하네? 저런 놈을 뭘 믿고 한집에 두고, 관광을 가신 거야? (택기 방을 경계하듯 본다.)
S#32. 동 지현방 (밤)
지 현 (대야의 물을 꼭 짜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이게 무슨 냄새지? 저수지물이 썩었나? 악취가 나네? 더워 죽겠는데, 저 놈 땜에 목욕도 목하고... 이러다 피부병 걸리는 거 아니야? 찝찝해, 증말... (물수건 대야에 던져두고) 아까 먹으라 그럴 때 그냥 먹을 걸... 배도 고파 죽겠네...
일어나 방문 고리에 숟가락을 꽂는 지현. 문이 열리나 흔들어보고 확인한다.
지 현 문 잘 잠그고 자야지... 욕구불만에 성격이상인 놈이야. 나를 언제 덮칠지 몰라. 조심해야 돼... (불을 끄고 자리에 눕는다.)
S#33. 동 마당 ~ 지현방 앞 (밤)
풀벌레 소리 들리고, 밤바람에 사르르 한 차례 흔들리는 나뭇잎들.
갑자기 대금에 가야금 산조 자진머리로 긴장감 넘치게 시작되면서...
살금살금 마당을 건너오는 짚신 발.
머슴 복장의 택기다.
지현의 방문 앞에 멈추어 선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턱 잡는 택기.
S#34. 동 지현방 안 & 방 밖 교차 (밤)
방 밖의 인기척에 놀라 화들짝 깨어 일어나는 지현. 정갈한 속적삼 차림이다.
지 현 (바르르 떨리며, 나직이) 누구냐.
택 기 (문을 부여잡고) 아씨... 문 좀 열어주세요...
지 현 네, 이놈! 감히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택 기 (절규하며) 아씨!
방문이 덜컹거리며 흔들린다. 문고리에 꽂힌 숟가락이 뽑힐 듯 요동치면,
지 현 (얼른 일어나 문고리 잡으며) 이 놈! 안된다! 썩 꺼지지 못할까?
택 기 (문을 부숴버릴 듯) 아씨! 내 마음에 불을 질러놓고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지 현 (당황해서 호들갑) 불을 지르다니? 누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리구나.
택 기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둘 밖에요.
지 현 뭐라...?
택 기 어서 문 좀 여세요.
지 현 (마치 망설이듯) 그래도... 안된다... 썩 물러 가거라.
택 기 아씨... 제발 좀 여세요. 저녁도 굶고 허기지실 거 같아서 야참 차려왔습니다요. 다른 뜻은 없습니다.
지 현 (꼬르륵 소리가 나는 배를 부여잡고) 그래...?
지현이 문풍지 사이로 보면, 밥상이 놓여있고, 택기가 없다.
문을 살짝 열고 밥그릇을 집어가려는 지현.
이때 택기가 손을 덥썩 잡는다.
지 현 어머나! 놔라, 이놈!
S#35. 동 지현방 (새벽)
이부자리 걷어차고 자고 있는 지현. 지현이 꿈을 꾸고 있다.
지 현 (혼자 손을 치켜들고, 잠꼬대) 썩 놓지 못할까? 안된다... 이놈... 이놈...
택 기 (문 벌컥 열며) 아, 씨...! 진짜, 귀팝 좀 파!
지 현 (놀라서 벌떡 일어나며) 뭐요? 안돼요!
택 기 안되긴 뭐가 안돼? 잠귀가 그렇게 어두워서 농사를 어떻게 지어? 빨리 나와! 밭에 가게. (사라지면)
지 현 (우거지상이 되며) 으악! 미치겠네...! 저 놈은 잠도 없나? (시계 보며) 옴마야... 또 다섯 시야...!
S#36. 동 마당 (새벽)
지현 허둥지둥 나와 장화 신으려 하면,
택기는 벌써 경운기 커버 벗긴다.
지 현 아침 안 먹고 가요?
택 기 나 혼자 먹었는데?
지 현 왜 난 안 깨우고 혼자만 먹어요?
택 기 곤하게 자길래, 더 자라고 안 깨웠지? 원래 아침 안 먹는다매?
지 현 (부엌으로 달려 들어가며) 안돼요. 먹고 갈래요! 기다려요!
S#37. 동 부엌 (새벽)
싱크대의 전기밥통을 열어 재끼고 숟가락으로 밥부터 퍼서 입에 넣는 지현.
아! 뜨거, 아 뜨거! 발을 동동 구르며 호호거리다가,
총각김치를 손으로 들어올려 와구와구 먹는 순간, 엄청 짜다.
지 현 (우거지상으로 일그러지며) 아이, 씨. 도저히 못 먹겠네...
김치와 숟가락 던져놓고 그대로 달려 나간다.
S#38. 집 마당 (아침)
밀짚모자에 수건, 다른 짧은치마와 끈나시, 선글라스, 장화...
아주 언발란스한 차림의 지현이 서있다.
택 기 (한심하게 보며) 니 어제 그래 고생하고, 오늘도 또 패션쇼하고 싶나? 아직 정신 못 차렸네?
지 현 어제 그 몸빼 못 입어요. (수돗가 보며) 저수지에 퐁당하는 바람에...
택기 보면, 수돗가에 그냥 널브러져 있는 몸빼와 남방.
택 기 저걸 미리미리 빨아놨어야지! 니 여자 맞나?
지 현 다른 거 줘요. 입을게요.
택 기 다른 거 없어.
지 현 그럼 그냥 가요! (집 밖 경운기로 먼저 향한다.)
S#39. 다른 버려진 포도밭 (아침)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우거지상으로 놀라며 포도밭에 들어서는 지현.
풀이 우거져, 사람 손이 안간 버려진 포도밭이다.
지 현 세상에! 이 밭은 뭐가 이래...?
택 기 일손이 모자라서 손도 못 댄 밭이야. 오늘은 여기 풀 쫙 다 베.
지 현 (낫을 들고 휘두르며) 헤! 이 풀을 나 혼자 다요?
택 기 (낫을 피하며) 으으~ 쫌 조심해, 쫌!
지 현 (낫 거두며) 알았어요...
택 기 낫질은 해봤어?
지 현 아니요. 낫도 첨 보는데, 무슨 낫질을 해봐요?
택 기 잘 봐. 요래 풀을 잡고, 손목에 스냅을 줘가 탁! 요래 끊는 거야. 함 해봐.
지 현 (엉성하게) 요래 잡고... 손목에 스냅... (풀이 안 끊어진다.)
택 기 아 하, 그래하면 클나. 까닥하다 다친다. (지현 손잡아 풀 같이 잡고, 뒤에서 지현을 안듯, 낫을 든 손도 같이 잡고 시범.) 풀은 요래 틀어쥐고...
이때 출근 차림으로 포도밭에 나타나는 홍이. 아니, 저년이~? 택기와 지현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눈이 뒤집히는 홍이. 밭으로 직행한다.
홍 이 오빠! 뭐해?
택 기 (지현에게서 떨어지며) 니 출근 안하고 여긴 뭐할라 왔나?
홍 이 여기서 이년하고 뭐하는 거야?
지 현 (동시에) 뭐? 이년?
택 기 (동시에) 농사 가르쳐 주지 뭐하긴?
홍 이 이년이 농사는 왜 배워? 비켜! 내가 가르쳐 줄게. (핸드백 던져놓고 택기에게서 낫 뺏어든다.)
지 현 아니, 이년이라니요?
택 기 (홍이에게) 니는 출근이나 해. 머할라꼬 나서?
홍 이 내가 지금 출근하게 됐나? (지현에게 낫든 손 휘두르며) 니 시골에 왔으면 조용히 있다 갈 것이지, 와 우리 오빠야를 따라다녀?
지 현 (기가 차서 상대도 안하며) 내가 언제 지네 오빠야를 따라다녔다고 이래?
택 기 (홍이 말리며) 됐다. 고마 가라.
홍 이 (지현에게 위협적으로) 낫 이거 위험해. 잘못해서 임자 있는 남자 건들면, 이걸로 목숨 잃는 수도 있으! 알아? (지현의 발 옆에 툭 던져놓는다.)
지 현 (화들짝 놀라 피하고)
택 기 (놀라 홍이 등 돌려 거칠게 내보내며) 야가? 큰일 날라고? 니 빨리 회사 못가나!
지 현 (질려서) 옴마야... 성격파탄잔가봐...!
(시간경과) 열심히 풀을 베다, 아고고고... 힘들게 허리를 펴고 둘러보는 지현.
지 현 이씨... 디지게 넓네...! 이걸 언제 다해?
택 기 뭐해? 쳐다본다꼬 풀이 저절로 비지나?
지 현 알았어요. 하면 되잖아요!
택 기 부지런히 해야 오늘 안에 다 베지, 오늘 못하면 내일 또 해야 돼.
이때 지현, 잘 안되자, 낑낑대다 아예 풀을 뿌리째 뽑는다. 됐다...! 만족스러운데,
택 기 (화들짝 놀라 쫓아와) 니 뭐하나? 와 풀은 뽑고 그래?
지 현 어차피 자라면 또 벨 거 아니에요? 아예 뽑아버리면 좋지, 뭘 그래요? 농사라는 게 머리를 써야지, 미련하게 그걸 매번 베고 있어? 그래서 우리 농업이 발전을 못하는 거야...
택 기 (뽑힌 풀 들고) 뭐? 이게 그냥 풀이 아니야! 호밀이야, 호밀!
지 현 호밀이요...?
택 기 이게 계속 자라야, 포도나무 뿌리에 산소도 공급하고, 위로 자란 건 거름되라고 베서 덮어놓는 건데, 왜 뽑아? 일부러 씨 뿌려서 키우는 건데!
지 현 그래요...? (얼른 뽑힌 거 흙에 꽂으며) 알았어요. 다시 심으면 되잖아요!
택 기 시키는 것만 해! 잔머리 쓰지 말고! (간다.)
S#40. 동 포도밭 다른 일각 (낮)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얼굴 닦으며 풀을 베고 있는 지현.
벤 자리 돌아보고는, 한숨쉬며 다시 열심히 풀 베는 지현.
우악스럽게 풀도 한 아름 안아다 옮기며, 앗 따거...!
풀 놓으면, 팔뚝에 붙어있는 벌레. 으아악~! 기겁 발광하며 떨어내는 지현.
택 기 (보고는) 생쑈를 하는구만.
지 현 (눈 흘기고는) 아이, 목말라... (근처 밭두렁에 놓인 사이다병을 들어 마시려 하면)
택 기 (놀라서 달려오며) 니 뭐하노? 스돕! 스톱! (사이다병 잡아채며 뺏는다.)
지 현 (신경질) 왜 그래요, 정말? 목말라 죽겠는데?
택 기 얘가 큰일 나겠네! 이거 옆집 농약이야! 마시면 죽어!
지 현 그래요...? 그럼 농약이라고 써놨어야지, 그냥 놔두면 어떡해요!
택 기 (옆 밭으로 던져버리며) 아무거나 함부로 쫌 마시지 마! 니 내가 따라다녀야지, 한시도 혼자 놔둘 수가 없네?
지 현 됐어요. 절루 가요. 옆에서 귀찮게 땍땍거리지 말고.
(시간경과) 내리쬐는 뜨거운 태양.
땀에 흠뻑 젖어 여전히 풀을 베고 있는 지현. 헤헤, 혓바닥 길게 뽑고 지친 모습. 더위 먹고 넋이 나갔다. 문득 멈추고는 힘들게 허리를 억지로 펴는 지현. 신음 소리 저절로 나온다. 지현 뒤로 풀이 베져 제법 깨끗해진 넓은 밭이 보이고, 낫을 쥔 손을 펴는데, 아귀가 안 펴지며 바들바들 떨린다. 진이 다 빠져, 택기에게 어기적어기적 다가오는 지현.
택 기 왜?
지 현 (낫 던져놓으며) 이건 도저히 못하겠어요. 너무 위험하고... 너무 힘들어요. 다른 거 할래요.
택 기 다른 거 뭐?
지 현 그건 뭐하는 거예요? 쉬워 보이는데?
택 기 (손아귀에 잡은 벌레 얼굴에 들이대며) 이건 해충 벌레 잡는 거야. 할래?
지 현 (기겁하며 물러나며) 싫어요.
택 기 그럼 따라와.
S#41. 동 포도밭 밖 공터 (낮)
이글거리는 커다란 장작 불길. 한쪽에 병들어 이파리가 마른 포도나무들 뽑혀져서 쌓여있고, 택기가 한숨 쉬며 마음 아픈 듯 포도나무를 불 속에 던져 넣는다.
택 기 그럼, 이 나무나 태워.
지 현 아니, 멀쩡한 포도나무를 왜 태워요?
택 기 병 걸려서 뽑아버린 거야. 생가지 남지 않게 끝까지 잘 태워야 돼.
지 현 이거 오늘 꼭 해야 돼요? 이 삼복더위에?
택 기 그냥 두면 바이러스 밭에 다 퍼져. 오늘 안에 다 태워. (착잡한 심정으로 포도나무들 한 번 더 보더니, 그대로 가버린다.)
지 현 (포도나무 낑낑 들어 불가로 옮기면서) 아이, 씨... 안 그래도 더워죽겠는데... 이게 뭐야...?
불길에 이글거리는 지현의 얼굴. 땀이 비 오듯 흐른다.
지 현 (여기저기 긁으며) 저 놈 때문에 씻지도 못해서 끈적거리고, 미치겠는데... (작대기로 불 쑤시며) 빨리 좀 타라. 빨리... (그 통에 연기가 날아오자) 아이, 눈 매워. 그냥 풀베기 할 걸...
S#42. 동 포도밭 다른 일각 (낮)
벌겋게 불에 익고, 땀으로 완전히 쩔은 지현이 축 늘어져서 온다.
택 기 벌써 다 태웠어? (돌아보면, 아직도 멀리 불길 연기가 보인다.)
지 현 도저히 못하겠어요. 차라리 날 불 속에 집어넣어요... 다른 거 할래요. (그늘에 주저앉는다.)
S#43. 동 포도밭 다른 일각 (낮)
비가림 비닐 덮는 것을 시범으로 해 보이는 택기.
택 기 이게 비가림 시설이라는 거야. 잡아서 단단히 찝어주기만 하면 돼. 할 수 있지?
지 현 (입이 나와) 아이, 씨. 더 어려운 걸 시켜.
택 기 군소리 말고, 여기 이 포도나무 다 씌워. 어차피 장마 오기 전에 다 씌워야 돼. (가버리고)
지 현 예? 이 밭을 다요?
둘러보면, 드넓은 포도밭.
지 현 아이, 씨... 이걸 언제 다해? 만평이라 일이 해도해도 끝이 없네? (비닐 꺼내 펼치는데, 손하고 엉킨다.) 밥은 왜 안 주는 거야? 배고파죽겠는데... (그러다 주위를 슬쩍 둘러보고는) 아니야, 이럴 때는 쓰러진 척 하는 게 최고야. 애라 모르겠다. (신음소리와 함께 사뿐히 쓰러지는데)
이때 멀리서 들려오는 택기의 목소리.
택 기 밥 먹고 합시다!
지 현 (꼬르륵 소리. 눈 빼꼼히 뜨고) 아이, 씨... 쬐끔만 늦게 쓰러질 걸...
이장댁 아이고, 택기 총각. 빨리 좀 와봐라!서울처녀가 더위 먹었는 갑다!
그 소리에 지현 얼른 눈을 감는다.
이내 달려오는 택기와 아낙들.
S#44. 동 농막 (낮)
지현을 들쳐 업고와 내려놓는 택기.
이장댁 (따라와 도와주며) 아이고... 야야, 니가 일을 은제 해봤겠노. 고생 쫌 하겠다.
명 숙 괜찮을까?
택 기 (지현의 가슴에 대고 숨소리 들어보며) 괜찮은 거 같네. 밥들 먹죠.
농막 한쪽에 차려진 새참에 둘러앉는 사람들.
저래가 며칠이나 견디겠노?
아이고, 오늘 새참 수준 참 높네. 누구 생일이야?
맛있겠다... 등등 얘기소리 들려오고...
지현의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요란하다. 지현 입맛 다시며 눈을 살짝 떠서 보면,
맛있게 먹고 있는 사람들.
지 현 (속마음 소리) 삼겹살 냄새잖아...! 지들끼리 다 먹네...
이때 갑자기 밭에서 시원하게 일제히 뿜어져 나오는 스프링클러.
화들짝 놀라 돌아보는 사람들.
명 숙 엄마야, 클났다. 누가 스위치 건드렸나부다.
택 기 (일어나 달려가며) 포도에 물 닿으면 클 나는데, 무신 일이고?
먹다 말고 우르르 달려 나가는 사람들.
이때 지현, 사람들 보며 몰래 일어나 허겁지겁 고기부터 집어 먹는데,
손이 떨리고 입이 안 벌어져, 어렵게 겨우 한점 먹고는 또 집는데,
이내 스프링클러 꺼지더니, 다시 우르르 돌아오는 사람들.
지현 얼른 손아귀에 고기 숨기고 잽싸게 눕는다.
사람들 둘러앉아 다시 먹기 시작한다.
고장 났는가...? 누가 장난쳤는 갑다. 등등...
지현, 침 꿀꺽 삼키며 입맛 다시면서, 슬쩍 손에 감춘 고기 한점 몰래 먹어볼까 하는데,
이때 개가 와서 지현의 입으로 들어가려는 고기를 낼름 먹는다.
지현, 개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너 죽었어? 표정 우그러지는데,
이때 지현의 얼굴로 킁킁 냄새를 맡으며 달려드는 개.
지현의 입가에 묻은 기름을 핥는다.
지현 끔찍해서 비명 지르며 발딱 일어난다.
지 현 으악~! 절루 못가? 이 개새끼!
밥을 먹던 사람들 일제히 지현을 쳐다본다.
이장댁 우짠지... 꾀병인 갑다.
명 숙 일하기 싫다고, 사람을 그렇게 놀라게 해?
지 현 아니에요. 진짜 더위 먹었단 말이에요.
택 기 (시끄럽다는) 와서 밥이나 먹어.
지 현 진짜라니까요? (슬쩍 새참 보며 무릎으로 다가오면)
이장댁 우짜지? 못 일어날 거 같아가, 우리가 다 먹었는데?
고기는 한점도 안 남고 빈 접시다.
열 받는 지현.
S#45. 동 포도밭 밖 일각 (낮)
거름더미에 ‘혼합유기질’포대 비료를 붓고는 삽으로 뒤적이는 택기.
택 기 꾀부리고 드러누울 생각 말고 거름 이거 다 퍼 날라. (삽을 지현에게 주면)
잔뜩 부어서 입이 나온 지현, 뚱하니 삽으로 수레에 거름을 퍼 담는다.
택 기 왜 아무 말도 없어?
지현, 말도 하기 싫다. 뚱하니 외면하며 낑낑대며 퍼 담기만 한다.
택기는 어이없다는 듯 비료포대 들고 가버린다.
S#46. 동 포도밭 이랑 (낮)
잔뜩 부어서 삐질 대로 삐진 지현이 수레를 몰고 낑낑대며 비틀비틀 간다.
지 현 두고 봐. 가만 안둬. 할아버지만 오셔봐.
이내 몇 걸음 못가 밭고랑에 수레와 함께 나뒹구는 지현.
비명과 함께 거름 속에 처박힌다.
지현 겨우 힘들게 몸을 일으키면, 머리까지 온통 거름을 뒤집어쓰고 울쌍이다.
지 현 (입에 들어간 것 뱉으며) 퉤, 퉤! 아이, 씨... 드~러! 으~ 냄새...!
S#47. 비닐하우스 안 (낮)
시원하게 뿜어져 나오는 스프링클러.
거름을 뒤집어 쓴 지현이 물줄기에 몸을 겨냥해 오물을 씻어내고 있다.
지 현 아이, 드러. 드러워 죽겠네... (머리와 몸에 비누칠을 하기 시작하며) 아, 쓰려. 땀띠 돋았나? 되게 쓰리네...? 안되겠다. 빨리 헹궈야지. (물줄기에 몸 들이대는데)
이때 갑자기 물이 꺼지며, 택기가 부리나케 달려온다.
택 기 (쫓아오며) 니 지금 뭐하나? 정신이 있나 없나?
지 현 (눈도 못 뜨며) 뭐야? 아직 비누 남았단 말이에요!
택 기 목욕은 집에서 할일이지, 와 여서 하고 그래?
지 현 아 따거. 눈에 들어갔단 말이예요. 빨리 켜요!
택 기 (분주하게 포도만 살피며) 포도에 물 다 튀었네! 포도에 물 닿으면, 당도 떨어지고, 병 생기는 건 시간문제야! 농사 망치는 거 몰라?
지 현 (거의 비명에 가까운 절규) 아! 빨리 좀 틀어봐요!
택 기 (분주하게 수건 가져와 바닥의 비눗물 닦으며) 바닥에 물이 흥건하네. 이거 땅에 스미면 어쩔라구, 비누까지 했어? 엉?
지 현 아니? 나를 닦아야지, 저 인간이? 포도가 사람보다 더 중요해요? (눈 비비며) 아이, 씨... 잠깐만 좀 켜 보란 말이에요!
택 기 (아랑곳 않고 화가 나서 바삐 바닥만 적셔 통에 짜넣으며) 유기농 포도한다꼬 ? 년을 고생고생한 줄 알아? 토양검사에서 부적합 판정 나오면 니가 책임질 거야? 니 뭐 할라고 왔어? 이럴 거면 당장 올라 가!
지 현 (눈 비비며) 아이, 씨. 나쁜 놈. 내가 알고 그랬어? 모르고 그랬지? 엄마...! (눈물 줄줄 흐르며 바닥에 주저앉아 운다.)
S#48. 지현방 (밤)
막 씻고 들어온 듯 머리를 수건으로 닦으며,
지 현 천하에 나쁜 놈. 인정머리라고는 한 톨도 없는 놈. 내장을 꺼내서 줄넘기를 해도 시원치 않을 놈...
그대로 방바닥에 힘겹게 어기적거리며 대자로 눕는다.
지 현 아이고... 아이고, 죽겠네... 완전 몸살 났나봐... (이때 갑자기 윙~ 모기소리. 자기 다리 퍽 때리며) 이놈의 모기새끼. (달아갔는지 엎드려 방바닥 때리며) 이놈의 모기새끼. 나만 물어. (방문 밖을 노려보며) 저 지독한 놈은 모기도 안 물리나봐.
이때 발 수십 개 달린 벌레(노래기나 지네)와 딱 마주치는 지현.
지 현 으~아아악~! (소리 지르며 방밖으로 뛰쳐나간다.)
S#49. 동 마당 (밤)
지현이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오자, 택기도 연이어 놀라 뛰쳐나온다.
택 기 왜? 왜 그래? (자다가 깨서 나온 차림)
지 현 (택기 뒤로 숨으며) 벌레가 있어요... 방에... 벌레가...
택 기 나, 참. 피곤하게...
지 현 빨리 어떻게 좀 해봐요! 어서요!
택 기 아이, 진짜... (지현의 방으로 들어간다. 휴지 뽑아들고 둘러보며) 어디?
지 현 거기요. 거기 있잖아요? 발 되게 많이 달린 거? 없어요?
택 기 어디 있다는 거야? (그냥 나온다.)
지 현 (문 밖에서) 잡았어요?
택 기 (휴지를 지현 얼굴에 휙) 어이!
지 현 (놀라 기겁하며) 옴마야! 왜 그래요? 증말?
택 기 들어가서 자.
지 현 잡았냐구요?
택 기 없어. 한번 나왔다 들어갔으니까 이제 안나오겠지.
지 현 (인상 구겨지며) 네? 그걸 잡아야지 그냥 나오면 어떡해요!
택 기 없는데 어떻게 잡아? (졸린지 하품하며 자기 방으로 향하면)
지 현 (평상 위로 발딱 올라가 무릎모아 세우고 웅크리는) 어후, 난 몰라. 못 들어가.
택 기 (돌아보고 어이없어 서 있고)
지 현 (울쌍) 어떡하지? 난 이제 저 방에서 못살아~.
택 기 (한숨쉬며 오더니, 피곤하다는 듯) 그럼 내 방에 가서 자. (지현 방으로 들어간다.)
지 현 아니, 저 인간이?
택기 들어가더니 바로 불이 꺼지는 지현방.
아이, 씨... 어떡하지? 지현 내키지는 않지만 할 수 없이 택기방으로 어기적어기적 간다.
S#50. 택기방 (밤)
방안을 둘러보는 지현.
택기의 방은 의외로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다.
간이침대(라꾸라꾸 침대)와 책상위의 컴퓨터, 책꽂이에는 식품과 농법에 관한 책들과 영어로 된 원서도 눈에 띄고...
지 현 뭐야? 꼴에 책은 어디서 많이 주워다 놨네?
제일 그럴 듯해 보이는 책 한권을 꺼내는 지현.
택기의 석사학위 논문이다. ‘유기농 과수재배에 대한 연구고찰.’
지 현 뭐야? 꼴에 대학원 나왔나? (페이지 넘기면 장택기 이름이 보인다.) 진짠가? 아니, 대학원까지 나온 놈이 여기 왜 있지? 사회부적응잔가? 아니면 인생낙오자?
이때 책갈피에서 사진 한 장이 떨어진다.
떨어진 사진을 주워드는 지현.
거꾸로 된 얼굴을 돌려서 보면 청순하고 지적인 느낌의 여자(수진)의 사진이다.
캠퍼스에 택기와 나란히 앉아 다정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 현 (입을 삐뚝거리며) 이 여잔 또 뭐야? 주제에 좀 따라 다녔겠지. (흥미 없다는 듯 다시 꽂아두고는, 침대에 걸터앉는다.) 이것두 침대라구... 여기서 자나? 아, 더워. 이 방도 장난이 아니네? (하면서 웃옷을 벗는데)
이때 문 벌컥 열리며 홍이가 들어선다.
홍 이 오빠야! 내 목걸이...
돌아보는 지현. 깜짝 놀라 얼른 옷 다시 내리는데,
지현을 본 홍이의 눈이 갑자기 뒤집힌다.
홍 이 (성큼 들어오며) 뭐야? 니가 왜 택기오빠 방에 있어? 여기서 뭐해? (다짜고짜 지현을 잡아 끌어내며) 저리 썩 못 꺼져?
지 현 (버티며) 왜 이래요? 이거 놔요.
홍 이 (계속 끌어내려 실갱이) 니 참말로 우리오빠야를 넘보는 모양인데, 내가 경고 했지? 와 자꾸 우리오빠야한테 꼬리쳐? 니가 그런다고 우리오빠야가 넘어갈 것 같애?
지 현 (홍이를 세게 밀리며) 도대체 왜 이래요? 이거 못 놔요?
홍 이 (뒤로 발라당 자빠진다.) 니가 내를 쳤어? 이년이? 좋게 말할라 했더니! (일어나며) 오냐, 니 오늘 잘 걸렸다. 내가 누군 줄 알아? 내가 바로 권총강도 때려잡고 9시 뉴스 탄 마을금고 여직원이야! 왜 이래?
다짜고짜 덤벼들며 지현의 머리채를 나꿔채는 홍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지현도 머리채를 잡힌 채 끌려가고 만다.
지 현 아! 너? 이거 안 놔! 이거 놔!
홍 이 그러게 와 임자 있는 남잘 건드려? 내가 10년 넘게 공들인 오빠야를 니가 한입에 채갈라고? 어디 니 꼬리 좀 보자, 을매나 긴지. 나쁜 년.
지 현 뭐? 이 씨, 좋아. 어디 해볼 테면 해봐. 나도 스트레스 받는데, 마침 잘됐다. (홍이 머리채를 잡고 싸우기 시작)
홍 이 (머리채 잡히자) 아야! 아니, 이년이?
두 여자 서로 머리끄댕이 잡고 나뒹구는데,
이때 문을 열고 들어오는 택기.
택 기 (손에 벌레 들고 싱글벙글) 잡았어! 벌레 잡았... (멈춘다) 둘이 여서 뭐 하노?
서로의 머리채를 잡은 채 택기를 돌아보는 홍이와 지현.
S#51. 동 마당 (밤)
지현은 자기 방 앞 툇마루에 앉아 씩씩대며 헝클어진 머리 매만지고 있고,
홍이는 평상에 앉아 혼자 분을 삭히고 있다.
홍 이 (들으라는 듯) 아니, 지가 오빠야 방에 왜 함부로 들어와 있냐, 이 말이야. 그리고, 왜 오빠야 포도밭에 와서 지가 농사를 짓는데?
지 현 (궁시렁) 이게 왜 지네 오빠야 포도밭이야? 내 포도밭이지? 웃기고 있어?
택 기 (홍이에게 물 떠다 주며) 시끄럽다 마.
홍 이 (물마시고 지현 째리며) 벌레는? 학실히 있드나? 잡았나?
택 기 잡았다.
홍 이 벌레가 무섭긴 뭐가 무서워? 그게 다 저년 작전이지. 오빠는 쑥맥이라 하나도 몰라.
저년이 자꾸 오빠야한테 꼬리를 치는기야.
지 현 (튀어나오며) 보자보자 하니까 증말? 내가 언제 꼬리를 쳤다고 그래? 니가 봤어?
홍 이 (발딱 일어나며) 그럼 봤제.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와 남으 남자 방에서 옷을 벗어? 옷 벗고 우리오빠야 기다릴라 한 거 아이가?
지 현 아후, 머리야, 아후 머리야... 이봐요. 내가 수준이 있지. (택기를 손가락질 하며) 저런... 참... 무식한 놈을, 어이가 없어서...
택 기 뭐? 지금 내한테 하는 소리가? 내도 니 같은 싸가지는 아무 관심 ?어. 니 같은 거 한 트럭을 갖고 와 봐, 내가 눈 하나 깜짝하나?
지 현 뭐요? 아니, 내가 어디가 어때서? 이래뵈도 나 좋다고 따라다닌 남자들 이 손으로 다 셀 수도 없어요!
택 기 없겠지. 하나도 없었을 끼니까.
지 현 뭐요? 당신 말 다했어? (불쑥 다가서 택기 앞으로 얼굴 들이대면)
택 기 (역시 만만치 않게 얼굴을 들이대며) 그렇게 노려보마 뭐 할낀데? 엉?
두 사람 사이로 냉냉한 바람이 분다.
홍 이 오빠야, 오빠야가 참아라. (택기의 팔짱 끼고 데리고 나가며) 아무튼 저런 가시나는 이제 절~대 방에 들여놓지 마라.
지현 노려보면, 대문 밖으로 다정하게 나가는 택기와 홍이.
홍 이 (E) 오빠 방에 뭐 중요한 거 없어졌나, 잘 살피봐라. 뭐 막 뒤지는 거 같던데?
지 현 아니, 뭐라고요?
택 기 (E) 뭐? 막 뒤져~?
홍 이 (E) 그래.
지 현 기가 막혀서 증말? (씩씩대고)
S#52. 동 집밖 대문 앞 (밤)
홍 이 아무튼 저런 여시는 다시는 쳐다도 보지 마라.
택 기 (버럭 성질) 니 내를 우찌보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하노?
홍 이 (움찔해서) 아니... 내는 오빠야를 못 믿는기 아이고...
택 기 (신문지에 쌓인 거 주며) 자, 목걸이 여?다.
홍 이 (펴보며, 감동) 오빠야... 정말 이쁘다. 내 줄라고 이걸 을매나 힘들게 샀겠노?
택 기 그냥 길거리에 산기다. 됐제? 인자 가라.
홍 이 알았다. 저 가시나는 은제 가는데?
택 기 모리겠다.
홍 이 빨리 내쫓아라.
택 기 안 그래도 쫌 있으마 갈끼다. 지가 여서 우째 살겠노. 니가 신경 안 써도 지발로 알아서 올라갈꾸마.
홍이 돌아서고,
S#53. 동 마당 대문 안 (밤)
지 현 (밖을 힐끗 내다보고) 기가 막혀. 내가 언제 가건, 지가 무슨 상관이야? 여기서 평생! 뼈 묻고 살 거다, 왜!
이때 들어오는 택기와 딱 마주친다.
택 기 밤에 뭐 하나?
지 현 꼴에 애인인가부죠?
택 기 와? 부럽나?
지 현 잘 어울리네. 튼튼하이 딱 농사꾼 마누래네!
택 기 자라, 고마. 시끄럽다.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지 현 넌 내일 할아버지만 오셔봐. 가만 안 둬. 감히 누구 머리채를 잡게 해?
지현도 자기 방으로 거칠게 들어가고, 불이 꺼지는 방들.
S#54. 지현방 앞 & 방 안 (새벽)
탕탕탕! 방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택기.
택 기 뭐 하노? 빨리 일나라는데! (벌컥 문 열며) 언제까지 내가 맨날 깨워야 돼? 빨 나와! (사라지는데)
지 현 (눈 흐미하게 뜨고, 끙끙 앓는) 아... 아...
택 기 (다시 와서) 뭐해? 빨 나오라는데?
지 현 도저히... 도저히 못 일어나겠어요...
택 기 니 또 꾀병인 거 다 알아.
지 현 몸이 천근만근이에요. 온몸이 다 쑤셔. (뒤척이며 신음소리) 아, 아...!
택 기 참, 내... (들어와서 발로 툭툭) 엄살 부리지 말고, 일나라, 퍼뜩.
지 현 (택기가 건드린 곳 만지며) 아! 아!! 건드리지 마요. 너무 아파... (앓는 소리)
택 기 일해서 난 병은 일을 해야 나아. 빨 나와. (나가려는데)
지 현 (기운 없지만, 노려보며) 피도 눈물도 없는 놈. 지옥에나 가라... 손 하나 까딱할 힘도 없는데, 무슨 일을 해? (돌아누우려는데, 잘 돌아눕지도 못한다.)
택 기 많이 아파?
지 현 죽으면 죽었지, 난 오늘 밭에 못 가요. (이불 뒤집어쓴다.)
택 기 그래...?
S#55. 택기방 (아침)
서랍을 뒤지는 택기. 이내 물파스를 찾아 들고 나간다.
S#56. 지현방 (아침)
돌아누워 끙끙 앓고 있는 지현의 등을 툭툭 치는 택기.
택 기 이봐.
지 현 또 뭐예요? 못 간다니까...
택 기 (물파스 주며) 이거 발라.
지 현 (귀찮다는 듯 돌아보며) 진짜, 귀찮게... (물파스 발견하고는 벌떡 일어나며) 이런 게 있으면 진작 주지. 왜 이제 줘요? (뺏더니 마구 팔에 바른다.)
택 기 (속마음 소리) 어라? 니가 꾀병이 맞구만. (대사) 근육통이 심한가부지?
지 현 (바르는 데만 여념 없는) 팔, 다리 허리 어깨, 모가지, 안 아픈 데가 없어요. 이거 하나 갖곤 택도 없겠는데...?
택 기 (넌지시 살피며 유도하는) 그래...? 그럴 땐 물파스를 눈 밑에 한번만 발라주면 직방인데...
지 현 눈 밑에요?
택 기 응. 원래 우리 몸에 모든 신경조직은 눈 밑에 모여가 있다꼬. 눈 밑에 한방만 바르면 온~몸의 통증이 싹 사라진다. 다른 데는 더 바를 것도 ?어.
지 현 에이, 정말이요?
택 기 우리도 몸살 나면 다 그래 해. 바르기 싫으면 말고. (나가버린다.)
지현 망설이듯 물파스를 쳐다본다.
S#57. 동 지현방 밖 (아침)
히죽 웃으며 나오는 택기.
S#58. 동 지현방 (아침)
콤펙트 손거울로 눈을 들여다보며, 망설이는 지현.
이윽고 화장하듯 물파스를 눈 밑에 바르는 지현.
아직 아무런 반응이 없는지, 눈을 깜빡깜빡해보는 지현.
지 현 뭐야? 아무렇지도 않은데?
한 번 더 바른다. 잠시 후 눈에 싸한 기운이 올라오는지, 표정 일그러지더니, 급격히 한꺼번에 고통이 뒤따르는 것. 이내 비명을 지르며, 두 눈을 뽑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부여잡고 떼굴떼굴 구른다. (그 고통 말로 다 못합니다.)
S#59. 동 지현방 밖 마당 (아침)
순간 예스! 통쾌해하는 택기. 즐거워하는데,
하지만 방에서 들려오는 지현의 고통스러운 소리 점점 더 장난이 아니다.
택 기 어? 저 바보 같은 기 쪼끔만 바르지, 드리부었나?
비명소리 사그러 들지 않고 더욱 자지러지며 고조되자, 발을 동동 구르며 안절부절 하는 택기. 이내 수건 물에 적셔 들고, 지현의 방으로 달려 들어간다.
S#60. 동 지현방 (아침)
택 기 (쫓아 들어오며) 야, 니 진짜 멍청하네. 그걸 바르랬다고 진짜 바르는 사람이 어딨나?
방안은 고통스러운 흔적으로 순식간에 난장판이고, 지현 벌덕 일어섰다, 떼굴떼굴 굴렀다, 이불을 쥐어짜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두 눈이 시뻘건 지현, 눈도 못 뜬 채 눈물 줄줄 흐르고...
택 기 (물수건 들이대며) 이렇게 해봐. 좀 닦아보게.
지 현 (시뻘건 눈 치켜뜨며 밀치는) 저리 비켜!
벌렁 넘어지는 택기.
지 현 (소리 꽥) 당장 나가! 으! (쥐어짜듯 두 주먹 쥐고 고통 참으며 괴로워한다.)
슬금슬금 나가는 택기. 아직도 고통의 끝자락을 참느라, 바르르 떨며 큰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지현.
지 현 (갑자기 가방 꺼내 짐을 싸며) 저런 놈하곤 못 살아.
S#61. 동 마당 (아침)
방에서 짐을 싸들고 나오는 지현.
택 기 (밭에 갈 채비하다 보며) 니 어데 가...?
가방으로 택기를 힘껏 후려치는 지현.
지 현 (나직하지만 한 맺혀) 나쁜 놈. 벼락이나 맞아라.
택기를 쏘아보며 대문을 향해 나가는 지현.
놀라서 쳐다보는 택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