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서면 학선리에 작년에 귀농하신 신종영 (쇼에)님의 글입니다.
재일교포 분이시고, 한국에 온지는 약 7년되셨습니다.
약간 어법을 벗어난 부분이 있을텐데, 이해해주시구요.
이 글을 여러 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하셔서, 제가 대신 올려봅니다...
살아온 반세기를 되돌아보고
톨스토이에게서 받은 메시지
2012년1월25일
작년 4월1일부터 전기, 가스, 상수도 없는 집에서 자급자족생활을 시작했다.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는 성경말씀대로,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넉넉한 추수를 누린 다음, '구들도 보일러도 없이 한국의 겨울을 어떻게 지낼까'라는 과제의 고개를 넘는 12월 말 이야기이다.
멋대로 관리해온 내 몸의 정기검진을 위해 찾은 서울에 있는 한의원의 대기실. 녹색평론 115호 김종철 선생님이 쓰신 '다시 돈 이야기'를 휘리릭 넘겼다. 잠자리를 꼭 따뜻하게 하라는 김기적 선생님의 말씀이 가슴에 남은 채 사랑하는 친구들과 크리스마스파티 겸 송년회가 있는 남성역으로 갔다.
옆방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시끌벅적한 소리를 들으면서 깰 듯 말 듯 누워있었다. 오래간만에 본 아기와 말이 필요 없이 나눈 환희의 웃음의 따사로운 뒷맛과 영하14도의 겨울밤에 에어컨이 완비된 고층 건축물 안에서 먹은 유기농아이스크림이 들어간 뱃속의 시큰거림이 섞인 내 감각기관에 톨스토이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
모든 현상은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 '좋다', '나쁘다' 없이 단지 마음만이 체험을 하고 있다.
노예제 없는 시대의 노예생활
노예제가 과거이야기가 된 21세기,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 자유의지로 행복을 누리고 살고 있는가?
아닐 것이다. 눈에 보이는 제도가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히려 자기노예생활을 인식조차 못하고 자유와 헷갈리고 있다. 태어났을 때부터 그런 환경에서만 자라오다가 어쩌다보니 지금 살고 있는 상황까지 끌려와버린 자신이 있다. "먹고 살기 힘들지만 참아서 해내기만 하면 맛있는 것도, 여행·오락 등 즐거운 것도 많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라고 받아들이기에 익숙해져 온 것뿐이다.
지구 전체를 보면 그런 생활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아주 소수에 불과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그것조차 오래 견딜 수 없을 것은 이제 누구의 눈에도 분명하다. 환경파괴, 자원고갈, 기후 이상, 식량위기(균형에 인한 기아)...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그런 위기를 매체보도를 통해서 바라보고서는 가끔씩 "이러면 안 되지"라는 의심이 떠오를 때도 있지만 너무나 복잡한 생활 속에 온통 얽혀 "어쩔 수 없다"며 그냥 흐름에 자신을 맡기고 있지 않을까?
자유를 찾는 시도들
하지만 모두 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영혼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여서 이상적인 생활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어느 시대에도 그렇듯 오늘날도 일부의 농부(혁명가), 지식인들이 소수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경제사회에서 대다수가 본이 아니게 사는 상황을 자세히 분석·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 분석·시도를 해보고 있다.
clean...., green...., 유기농, 친환경, 생협, 직거래, 생태공동체, local food, local money, local brand, slow life, 경쟁이 없는 교육, home schooling, 지속가능한 생활,....... 요컨대 여러 현대사회문제의 근원은 부단히 커져가는 탐욕이라는 인식에 의해서 그 저주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시도들임에 틀림이 없다. 즉, '돈'의 영향을 받지 않거나 그 힘을 줄여서 (소농의) 자급자족 생활을 중심으로 새로운 생활공동체를 세우려는 시도들이 20세기 후반부터 점점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거의 모든 시도들이 잇따라 돈의 지배하에 끌려가고 만다.
자기의 화살로 다치는 개혁의 시도
유기농, 친환경, 생태적이라는 시도를 꾀하자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지배층의 대명사인 정부, 다국적기업, 주식시장 등이 그 시도의 근본이념을 자신들의 정반대되는 행동을 정당화 시키는 광고의 캐치로 쓰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양심적인 지식층 농민들이 지방마다 세우고 있는 독립 생협들은 다른 생협보다 더 빨리 새로운 상품화 기술을 배우고 경쟁력을 강화시키는 일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오래전부터 "아이들의 개성을 살려주자"고 여유 있는 교육을 방침으로 지도해온 교육청. 그런 체제하에서 배운 자국학생의 학습능력이 발전국가 중 몇 번째 인지의 보도에 일희일비하고 있는 국민전체.
산업사회의 중심인 대도시를 떠나서 농촌으로 옮겨와 유기농업에 의해서 생계를 꾸리려는 사람들을 지원·지도하고자는 소위 귀농학교, 농촌만들기진흥회 등의 활동은 어떨까? 먼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나' 라는 경제적인 전망을 확립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며 찾아오는 섬세한 사람들의 마음에 불안감부터 심고 있다.
그러면 농촌에 정착해서 생계를 꾸리고 있는 귀농인들의 관심이 어디에 있을까? 현장을 살펴보면 그들의 관심의 중심은 역시 '돈'이다. 그들의 일상대화의 내용을 보면 이야기에 가장 자주 나오는 말들은 바로 "얼마?" "비싸다!" "바쁘다" "열심히 해야 해!" 이다. 이건 무슨 뜻인가? 원래 도시생활을 버리고 시골에서 살려는 목적은 시간과 돈의 지배 하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으려는 것이 아닌가?
'비싸다'란 말의 뜻은?
'얼마' '바쁘다'는 말할 것도 없지만, '비싸다'는? 그 말을 조용히 살펴보면 자본주의 경제의 본질이 보인다.
그 말인 즉슨 어떤 기준에 의한 판단이 아니라 한 없이 더 싸게 하려는 마음의 표현이다. 비싸다고 할 때 화자가 지속적으로 무언가가 모자란다는 불안의 상태, 그리고 너, 나 나뉘어져서 서로가 이해관계를 맺고 있음을 뜻한다. 이 두 가지 상태가 우리를 스스로 노예화시키는 과정에서 놓치지 못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부족·불안상태
먼저 모자란다는 부족·불안의 상태부터 보자.
내일 먹을거리를 어떻게 확보할까? 자급자족상태를 깨뜨린 바람에 다른 사람들과 그들을 연결시키는 체제가 필요하고, 그 체제 속에서 필수품을 얻기 위해 돈을 벌어야 된다. 홀로는 살지 못하는 생활의 심리적인 근본이다. 자기가 언제까지 값을 지불 할 수 있을지 보장할 수 없다. 따라서 하기 싫은 일도 해야 되고 일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늘 경쟁력을 늘려가야 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실업·부도가 필수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불안=의존상태는 심각화의 일로를 걸을 수밖에 없다.
그 불안을 해소하기위해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 일자리의 기반이 되는 사회 자체가 실제로 필요에 의한 계획경제사회가 아니라, 각자가 이익을 위해서 자기 멋대로 세운 계획에 따라 생산하는 폭주(暴走)사회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필수품을 여러 사람들이 생산자로, 살아남기를 위해서 더 싸게 더 좋게 싸워가며 만든다. 그러나 같은 사람이 상반된 입장에서는 소비자로 모두 소홀히 써 버린 다음에, 더 싼 것 더 좋은 것을 요구한다는 무한반복고리이다. 그런 사회의 구성원은 '편함'을 위해서, '더 많이', '더 빨리' 해야 함의 끝이 없는 압박 아래서 살수 밖에 없다. 세계를 분열시킨 강국들이 자기만의 정의를 주장하다가 서로 의심을 차곡차곡 쌓아간 결과 지구를 몇 백 번이나 파괴할만한 핵무기를 소유하게 한 냉전과 같은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불안이야말로 자본주의사회를 끌어가는 원동력임은 말 할 것도 없다.
자기중심성
둘째, 그 말은 분열된 나와 너의 관계를 뜻하고 화자(말하는 사람)가 자기욕구만 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자기가 사는 사회, 환경을 볼 때 "나, 너"의 이해관계, 내지, 나만의 이기적인 관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보인다. 거래란 원래 스스로 만들거나 마련해야 하는 일, 물건을 스스로 못하거나 하기 싫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대신해준 것을 돈을 내고 얻는 행동이다. 그런데, 비싸다는 말을 할 때 화자는 자기가 돈을 벌었을 때, 얼마나 고생했는지만 통감하고 그것을 상대방(일이나 물건을 제공하는 자)에게 주장하고 있다. 반편 상대방과 그 이전의 과정에서 어떤 사람이 어떤 고생을 해서 그 상품을 제공하고 있는지에는 하나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사먹는다는 것은
음식을 예로 들어봅시다. 농촌에서 먹고살기 힘들다고(너무 이상한 말인 데 자주 쓰고 있다.) 도시에서 사는 자식들에게 버림당한 어르신들. 그들은 먹고 살기를 위해서 수익도 없는 농업을 그만둘 수도 없고 아픈 몸에 채찍질하면서 한 노동의 결과물인 경우가 많다. 완전히 구부러진 몸으로 땅바닥에 무거운 비닐을 깔고 마스크도 안 쓰고 약을 뿌리는 일들을 혼자 하신 분들이 무척 많다. 혼자 못할 때 도움을 구하려고 해도 마을에는 젊은 손이 없어서 어쩔 수도 없는데도 말이다. 그 노동의 결과물을 원하는 대로 유통시킬 능력도 없고 아무데나 맡기는 탓에 헐값으로 팔아버리는 경우가 많다.
반편 과학기술상품이라면 화자의 나라보다 더 (자본주의경제에서 정의하는) 소위 개발도상국의 농민을 밭에서 쫓아내고 공장에서 '해야 하는 일'을 시킨 결과물일 것이다.
비싸다고 할 때 그런 식으로 자기가 흘린 땀처럼 아껴야 하는 땀이 상품의 뒤에 숨어있음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다.
역전의 구조? 돈의 마력, 그 배경은?
여기서 물음은 왜 돈의 지배를 부정하는 자가 거꾸로 그 전제인 자본주의사회의 원동력이 될 행동을 하게 돼 있나? 이다. 먼저 이 현상이 소수의 혁명기획가들에게 한정 된 것이 아니란 것이다. 그 외, 즉, 대부분의 도시생활자는 자본주의사회를 생활(존)의 전제로 하는 데 아무런 저항도 보이지 않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돈을 쓸 때 또는 돈을 쓸 것을 생각할 때 그 삶에서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 지에 상관없이 개괄적으로 불안·부족상태에 빠지고 이기적이 된다고 가설할 수 있겠다.
그것은 모두 다 우리가 평소 그것을 별로 신경도 쓰지 않고 다용하고 있는 돈이라는 매개 때문이다. 말하자면 돈은 그것을 매체로 쓰는 사람이 자신의 욕구밖에 보이지 않게 하는 마법의 거울이다. 그 배경을 찾으려면 (돈을) 갖고 있는 자(강자)가 노동자(약자)의 노동의 결과물을 약탈하던 산업혁명 직후 통용된 약육강식의 이론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 보인다. 돈을 손에 들었을 때면 의존의 불안이 사라지자마자 바로 무자비한 지배자가 된다. 흥미로운 점은 그 반전(反轉)의 정도가 도시 생활 속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심해지고, 거꾸로 시골의 자급자족이 어느 정도 아직 남아 있는 곳에서는 돈이 그다지 판치지 않다는 것이다. 단지 여기서 본 사례에는 그 현상이 계층이 아니라 개인의 사이에서 보인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산업·과학기술제품 의 실체(實體)
인식의 큰 함정
그런데 어떻게 되면 자본주의사회 피라미드를 깨뜨리려는 귀농자가 바로 그런 사회의 원동력이 될 수가 있을까?
채식하는 나를 보고 아이들이 왜 고기를 안 먹느냐고 묻는다. 동물을 죽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면 어차피 죽은 것인 데 무슨 말이냐며 웃는다. 그것을 듣고 우스개로 여길 것이다. 자기가 먹기 위해서, 누가 어떤 동물을 죽인다는 배경이 있어야만 비로소 죽은 동물(고기)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 못하는 것은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인 듯하다.
구멍가게, 대형마트, 그리고 FTA
자기가 아는 귀농자 친구가 경영하는 구멍가게가 있다고 하자. 자주 찾아가서 장사가 잘 됐으면 하고 마음에 걸린다. 그러다가 유기농채소를 사려는 데 저쪽에 생긴 생협의 마트에 들어가보니 같은 상품이 가격이 더 저렴하고 종류도 다양하다. 결국 생협 마트에서 채소를 샀다.
여기서는 단순히 어떤 판단기준에 의해서 선택을 한 것인지 만을 주목하자. 선택의 기준에는 상대방의 사정이나 정신적인 요소는 전혀 없다. 더 싸고 더 다양하다는 점 뿐이다. 여기서 이 행동이야 말로 FTA를 초래, 추진하고 있다고 하면 발끈할 지도 모른다. 다시 한 번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자.
비싸다 = 집권·노예제를 승인함
실은 그 마트를 고르는 행동이 바로 더 큰 산업기구가 존속·증대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즉, 마트의 주주, 직원을 비롯해서 거기에 공급하는 업체, 유통기관, 공공기관에서 종업하는 사람들, 수입된 상품의 생산업소, 수입된 동력, 자재의 원료 채굴장에서 노예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피라미드 안에서 일한 과거를 인정하고 앞으로도 그 상태를 유지, 확대시키기 위해 다음의 사냥감(더 싼 노동력과 자원 및 새 시장)을 구하고 손 써줄 힘이 되어 동시에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소위 계층 간 투쟁에 밀어 넣고 있다. 그대로 가면 다국적 대형 매장을 유지할 때까지도 멀지 않을 것이다.
과학기술의 실체
친환경농업을 하는 귀농자도 마찬가지이다. 생산력을 높이려고 과학기술을 집약한 기계, 직거래를 위한 통신유통기관을 쓴다면 과학기술·산업사회의 발전과정을 가능하게 해 온 모든 권력집중체제 및 노예노동, 게다가 권력집중을 위해 필수적인 공공기관에 의한 세뇌·통제교육을 인정하고 앞으로도 양적, 지리적으로 확장시킬 원동력을 공급하고 있다.
이런 일상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는 우리 행동이야말로 자본주의 산업기구를 존속, 증대시키고 있는 원동력의 실체이다. 아직 무슨 뜻인지 모른다면 앞에서 말한 고기 앞에 있는 아이들과 같이 감각, 사고, 감정, 인식의 흐름에 적신호가 생긴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돈이 사람을 움직이는 힘을 갖고 있다기보다 권력집중 및 노예제와의 관계 속에서 사람의 내적인 조화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반복이 될 것 같지만 중요한 점이니 끝까지 지켜보자.
아까 본 사례를 들어 권력집중의 또 하나의 산물인 과학기술에 대한 사람의 내적인 반응을 봅시다. 실제 손으로 하면 1년이나 걸릴 농사일도 이앙기, 포크레인, 콤바인을 쓰면 하루만에 끝난다. 그런 경이적, 마력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힘을 당연시 하고 얼마 후에는 소홀하게 취급한다. 무겁고 잔인한 역사와 어두운 미래의 대가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있다. 맛있는 닭고기를 죽자 살자 비명을 지르는 닭의 목을 꺾고 죽인 것이라고 전혀 안 믿으려는 일과 다름없는 현상이다.
반대운동?
원전이 왜 생겼을까? 우리가 당연히 누리고 있는 과학기술, 산업구조는 세기를 넘어서 개발·유지·발전시켜온 과정의 필연적인 결과물일 뿐이다.
현대에서 정책에 대한 반대들은 반대 하는 사람(을 포함한 사회)의 자아욕구가 상당히 긴 시간의 형성과정을 지낸 다음에 어떤 실현형태로 보이기 시작하거나, 그 형성 후 잠재적인 문제가 눈에 띄게 됨으로써 비로소 이루어지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중국채소가 자꾸 비난의 표적이 되는데 안정성문제가 밝혀질 때 까지는 오랫동안 우리 모두 더 싼 상품을 실컷 소비한 사실, 그리고 그런 우리 행동이 중국농민생활에 어떤 변화를 남길 지에 언급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반대운동, 그 대부분은 실은 자기가 원하는 방향과 반대 방향의 열차 안에서 거꾸로 가는 행위에 불과하다.
여기까지의 검토를 정리합시다.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기본생활양식 즉, 외부의존, 과학기술 중심의 생활은 부족·불안상태, 자기중심적인 관점, 정신적인 부조화를 일으키고 있다고 추정이 된다. 따라서 이 정신적인 부조화가 자본주의사회에서 어떻게 형성될지 그리고 그 배경에서 돈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돈의 역할
옛날에는 돈 그 자체가 가치 높은 물질(예를 들어 금)을 쓰고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 귀중함은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위광을 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갖고 있는 자는 사람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을 보고 그 마력적인 힘을 자기의 힘으로 오해하고 제 멋대로 처신했을 것이다. 그 위광은 우상숭배까지 누리게 됐다. 그 힘이 지금도 돈을 가진 자의 마음에 큰 작용을 끼치고 있다. 반면에 갖고 있지 않는 자는 계층이 없어진 바람에 완전한 복종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계층이 없음에 근원적인 해결을 포기하고 체제를 인정하면서 그 속에서 어떻게 위로 올라갈 지에 대한 개인적인 분쟁을 선택하게 됐다. 보이는 계층이 없는 현대에서는 사람들이 자기가 얼마만큼 갖고 있나 라는 지극히 변동적이며 주관적인 인상, 즉 그때 그때의 마음상태에 따라 지배자도 되고 노예도 된다는 너무 혼란스러운 정신 상태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갈라진 마음의 루시퍼
우리의 마음상태가 바로 피라미드이다.
이 우리의 불안정한 마음 상태를 이해하기 쉽게 '음'의 상태라고 하자. '음'이 무엇인가. 하나의 생명인 '양'의 상태에서 깨지거나 떨어짐으로써, 분리, 분열되고, 그 순간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 및 은폐, 부족·불안 및 그의 반동인 흡입욕구(지식욕, 문제의식 및 그의 외부기인성향, 물질사회), 시간개념(과거, 현재, 미래), 자연에서 소외됨 및 그의 극복욕구(자연과학, 산업, 의학)가 생겼다. 거기에 모든 자본주의사회의 근본이 감춰져 있다. 즉, 우리 각각의 마음이 피라미드이며 그것이 모여서 우리 사회가 형성되어졌다. 그것을 인식 못하고 돈의 지배를 없애려고 외부에서 원인을 찾는 것도 그 '음'의 성향 때문이다. 자기 그림자를 밟으려는 행동만큼 영원히 미제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변혁을 시도하는 사람들의 의지가 정반대의 행동으로 귀결한다는 사태도 설명이 될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 일이 가능한가? 악마가 실존하고 뒤에서 조종하지 않는 한 그런 상상할 수 없이 정교한 올가미를 마련할 수 있겠나?
'양'으로 부터 '음'으로의 전환
먼저 일본, 한국의 예를 들어 자급자족의 소위 '양' 상태에서 어떻게 '음'의 자본주의사회로 전환됐는지 대강 살펴보자.
20세기 전반부터 미국에서는 자본주의 경제사회를 안정화시키기 위해 정치, 행정, 경영, 교육, 매체의 지도자들을 통제 체제하에서 철저하게 감시·관리함으로써 국민 전체를 오랫동안 세뇌해온 결과로 자동노예화체제가 확립됐다. 그러나 자국의 노예(저렴한) 노동력과 시장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 여겨 그를 대신할 터를 찾았다. 그 즈음 아직 자급자족적인 공동체를 기본으로 하던 아시아서국을 정의전쟁이라는 이름으로 황폐의 땅으로 만들었다. 그 후에 설탕, 전기제품을 비롯한 마력적인 산업제품을 '원조'함으로써 물질의존의 영역으로 이끌었다.
그 결과 '양' 상태였던 아시아 국민들 마음을 반전시켰다. 어떻게 됐을까?
(그 전환기 전에도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는 것까지는 여기서 언급하지 않겠다.)
음=자본주의
전체를 쉽게 파악하기 위해서 이념을 모델화 해봅시다. '양'의 마음이 하나의 '구'(동그라미)라고 합시다. '음'의 마음은 조각난 '구'. 조각난 '구'는 원래의 '구'로 돌아가려고 다른 (갈라진)'구'를 찾는다. 그 조각난 '구'의 성향은 조각난 '구'들 서로가 타자를 흡수하고(먹고) 스스로를 수복하려는 것이다. 실제는 더 큰 (조각난) 구는 자기보다 작은 자를 흡수하는데 그 결과는 더 큰 조각난 '구'가 될 뿐이며 욕구는 충족되지 않고 오히려 커진 만큼 흡수욕구가 증대해간다는 욕구팽창의 고리에 빠진다.
◐ + ◐ = ◐
≠ ○
양 ○ 자급자족의 상태
모두 다 하나이다. (모자란 것이 없고 독립함)
하나여서 다 보인다. (조화, 지혜)
그대로 충분하다. (안정, 자급자족, 믿음)
모든 현상은 스스로 창조한다. (자주성, 창조성, 의지)
지금 다 해서 살아 있다. (시간의 개념이 없음, 영원, 생명력)
음 ◐ 자본주의사회속의 의존생활
나, 너, 타인 분열, 불안, 의존
먹고 살기를 위해 일을 해야 함. 부족, 불안, 의존, 의무와 권리, 약육강식
내일이 걱정된다. 바쁘다. 확보, 소유, 시간개념(과거, 현재, 미래) 기계화, 양산
인정 허가를 받아야.. 남보다 더...... 타율, 집중체제에 복종, 비교, 통제교육
자연, 병·죽음이 두렵다, 더럽다 자연극복, 과학기술, 물질의존, 은패, 광고, 매체
문제가 많다. 힘들다. 비관적, 지식욕, 분석, 외부기인, 오락, 중독
돈 = 우상 그리고 악마, 역사를 거친 사실
이런 인식은 여기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2000년 전에도 명료했던 사실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무릇 있는 자는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마태 25.29)의 갈라진 마음을 갖고 있는 자의 이야기는 마음상태가 모든 현실을 만들어내는 현상의 본질을 묘사하고 있다.
'아무도 하나님과 돈이라는 두 주인을 함께 섬길 수 없다. 한 편을 미워하며 다른 편을 사랑하고나, 한 편을 극진히 위하며 다른 편을 업신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6.24),
그리고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 (마태13.22) 이라는 두 가지 말씀은 마음이 갈라진 상태로는 돈을 부정하는 모든 노력이 수포가 되어버린다는 현상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돈은 마술사가 최면을 걸 때 쓰는 금화와 같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옭아매는 스위치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런 마음의 부정적인 성향을 교활히 구사하는 힘이 존재한다. 그야 말로 우리가 적으로 삼아야 하는 세력이다.
경제학에 관해서
그 세력과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것이 경제학이다. 말하자면 경제학이란 지금까지 설명해 온 '음'의 법칙을 어쩌면 의도적으로 복잡화 시킨 것에 불과하다. 현대사회활동의 기본법이라고도 하고, 세뇌기관의 중심축인 교육이 일관적으로 구성원의 머리에 심고 있는 경제학이란....
어린이에게 '구'형이 무엇인지 알려 주려고 한다 하자. 공 하나를 꺼내고 손에 건네주면 일목요연인데 대신 중심점, 거리, 방사, 일정, 직선이란 개념을 두고 설명하려는 것과 같다. 이해가 안 되는 개념이 있을 때 하나씩 다른 개념들을 두고 설명해간다. 자본주의경제(약육강식=조각난 '구'의 성향)를 전제로 하는 사회이니 거기서 살아가려면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학교를 만들고 오랫동안 교육을 시킨다. 하지만 분열의 성향 때문에 한없는 세분화(전문화)에 빠진다. 수단일 뿐인 돈을 배우려고 해도 결국은 돈이 목적이 되어버린다. 왜냐하면 원래 존재 그대로의 삶 자체를 목적과 수단으로 분리시켜서 이해하려고 할 때, 먼저 배우려는 수단(생활양식)이 삶 자체가 되고 목적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법이다.
여기서는 구성원이 전제의 진위를 확인하거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아본다는 근본적인 행위가 결여된다. 그 결여야말로 세뇌의 주 목적임은 말 할 필요도 없다.
'음'의 세력과 세뇌수단
'음'의 힘을 다 알고 그것을 구사해서 스스로 손을 대지 않고 인류를 지배하는 세력.
여러 가지 명칭이 있지만 여기서는 '음의 세력'이라 하자. 경제학도 그들의 전형적인 수단의 하나일 뿐이다. 보도, 광고, 연예와 같이 지배하는 자가 체제의 유지, 확장을 위해서 지배받는 자들이 본질을 간파하며 개혁을 시도할 능력을 빼앗으려고 전개해 온 기구이다. 불안, 분열, 흡입 즉, 만사를 의심하고 분명하게 하기위해 눈앞의 보이는 부분만을 파고 들어가는 욕구를 수반하는 갈라진 마음. 그 탓에 전체상을 파악 못하는 근시안적인 관점을 간파한 그들에게는 그 힘을 이용하고 지식욕, 경쟁심, 세분화경향을 자극하여 본질인식능력을 빼앗는 강력한 수단이다. 방법은 극히 쉽다. 왜냐하면 피지배자가 다 스스로 하기 때문이다. 단지 '음'의 힘의 흐름만 정리하면 된다. 그 전형적인 예가 광고이다. 피지배자의 시선을 끌기위해 (시각적인 효과가 가장 크다) 형평에 어긋나는 과장, (대게 본질부분인 데)삭제, 은폐라는 편법으로 보는 사람이 그것을 원하도록 자극하고 유인한다. 마술사가 한 쪽으로 관객의 눈을 끌면서 안 보이는 데서 다른 일을 하는 것과 같다. 그 중의 중독성이 높은 것은 담배와 술이다. 자급자족을 깨뜨린 속임수는 농약, 농기계, GMO 등이다. 잠재적인 문제가 소위 약자(대중)에게 밝혀질 때까지는 중독증상, 의존성 내지 사회구조의 일부분화가 진전을 마쳐서 되돌아가지 못한 생태가 되고 있다. 요새는 중독성을 인식하기 어려운 설탕, 아미노산 등으로 천천히... 하지만 널리 깊이 우리를 침노하고 있다. 맛있는 것을 많이 먹는다는 극히 당연한 즐거움은 21세기 세뇌의 주역이 되고 있다.
뉴스란 무엇인가?
뉴스란? 새로운 정보? 그 내용의 대부분은 (긴장감을 높이는 효과음을 배경으로)경제지표, 경쟁력(경제, 스포츠, 교육), 재앙의 보도가 치지하고 있다. 왜 경제 성장률을 끊임없이 전하고 있을까? 또한 빈부의 격차가 커지고 있다고 되풀이 보도를 하는 걸까? 모두 자본주의사회의 자명한 본질이며 하나도 새로운 일이 아닌 데도... '뉴스'를 보고 시청자는 무엇을 받고 있나? 긴장, 불안, 바쁨, 경쟁심, 흥분, 성공욕구, 선망... 그 결과 무엇이 생기나? 다른 말로 하면, 누가 기쁠까?
이것은 어떤 뜻으로는 수 십 년 전의 전쟁 때 국민방송이 반복한 적국의 사망자 수의 방송과 다름이 없다. 자국민의 죽음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성장률이란 무엇인가? 생명의 성장이라면 스스로가 커져간다. 반편 경제적인 성장은 실제적으로 다른 나라를 희생시켜야 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하다. 국가가 살아남으려면 다른 나라를 떨어뜨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국민(병사)의 지기를 높여야 된다.
여기서 놓치면 안 되는 것은 국민방송이 아무 물음도 알림도 없이 자본주의를 대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국민은 태어났을 때부터 자기가 살아가는 법을 고르는 자유를 실질적으로 (소극적인 강제로)빼앗기고 있다는 것이다. 정보는 그대로 온전하지 않는 한 그것을 보내는 자의 이익을 위해 수신자를 이용하는 수단이 되어버린다.
아이돌(Idol) = 우상
그런 광고, 보도는 연예계와 함께 약자들의 시선을 끈다. 배우, 가수, 스포츠선수. 연예계의 중심인물들을 우리는 아이돌이라고 부르며 동경한다. 그 아이돌이란 'Idol=우상'이다. 아이돌에 열광하고 있는 동안에는 본질에 눈이 가지 않는 법이다. 영화, 현대음악을 중심으로 엔터테인멘트의 세계도 그 성장단계부터 중앙정보기관을 통한 철저한 검열의 대상이 된다는 이야기는 벌써 언급했다.
떨어진 천사의 힘
'음'의 세력에 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겠다. 단지 그들은 엄격히 계율을 지키고 지극히 제한된 자 사이에서 흑마술 등의 비밀을 전수해왔다. 그 마력이라도 될 경의적인 지혜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악마=Lucifer'이란 떨어진 천사이다. 즉, 피조물 사이에서도 가장 높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창세기 때 사람이 악마의 유혹에 빠져서 지식(선악의 구별)의 열매를 먹은 바람에 낙원에서 추방당했다고 한다. 즉, 하나인 마음이 갈라진 순간부터 물건을 가르고 일해야 먹고 살 수 있게 됐다는 상황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거기서 갈라진 마음, 즉, 믿음을 버린 자는 대신 악마에서 지식을 얻었다. 그것이 경의적인 힘이라도 수긍할 수 있는 이야기다.
우리사회의 광기
그런 식으로 보면 전경이 명료해졌을 것이다.
불특정다수에 향한 '그대만의 특별할인'의 광고.
원래 건강한 몸만들기를 지도하며 스스로는 없어져야 되는 병원들이 거대스폰서(의료기기, 제약회사)와 정부하고 공모하고 거액의 건강보험료의 약탈을 구조화시키는 국민건강보험제도. 그 제도하에서 싸워서 환자(손님)를 확보하려고 최신의료기술, 설비를 선전해 대는 광고. 아이들을 중독 시킴으로써 폭리를 탐하는 살육게임시장과 컴퓨터산업.
우리는 그것들을 아무런 저항 없이 누리고 있다.
모두 다 '이웃을 죽이라. 그러면 살아남을 것이다."라는 신앙의 충실한 실천이다. 틀에 박힌 드라마의 주인공과 자기 자신을 겹쳐놓고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도시 아파트에서 고독사 해 버린 이웃이 '사망자 수'라는 숫자의 증가로 밖에 안 보이는 우리마음.
초, 중학생이 극히 잔인한 '우리가 말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우리 마음의 필연적인 산물에 불과하다. 예를 들면 한없는 광기. 그것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 마음이라.
갓난아기와 스마트폰, 과학기술의 위험성
덧붙이면 과학기술의 위험성, 가공국가의 역점에 관해서 인식할 만한 것이 몇 가지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권력집중이 필수인 것은 벌써 보아 왔다. 그 집중 즉, 지배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발전의 진행이 빨리 나아간다. 그리고 고속통신기기, 원자력, 비행기술, 약품, 농약과 같이 그 기본원리의 발견을 제쳐두고 실용화의 과정은 군사 전략적인 사용을 위한 체제의 지원이 불가피하다. 거기서 없을 수 없는 것이 갖고 있는 자의 막대한 투자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 모두가 당초부터 폐해의 가능성이 명확한데도, 아니면 해가 없음을 증명하지 못한 채로 제품화되어 대중생활 속에 도입되고 있다. 그 제품들은 거의 다 필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결과, 우주, 지구, 생태, 인체에 파괴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대중도 폐해가 나타날 때까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그 은혜를 기꺼이 누리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첨단이라는 '스마트폰'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느끼지 못하더라도 갓난아기들은 그렇지 않다. 아직 세뇌 받지 않은 만큼, 올바른 인식력을 갖고 있다. 아기들에게 갑자기 피라미드를 우뚝 세우는 리모컨을 손에 쥐어줬다 상상합시다. 실제로 상상하지 못하는 산물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열광할 것이다. 그 후에는 일상의 사물에 집중하지 못하는 현상도 그 손에 닿은 경의적인 힘에 의한 장애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파의 영향도 아무도 모르는 채 대중은 겨루어서 손에 넣으려고 한다. 그 위협에 우리가 아무렇지 않은 것이 갈라진 마음의 실증이다.
가공국가 국민이 서로에게 '싸게 싸게' 하라 하면...
일본, 한국은 원료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원료수입가공수출국으로서 '성장'해 왔다. 그 근면함으로써 둘 다 급속한 '발전'을 이뤘다. 그리고 그 근면에는 일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하는 성향이 있다. 즉, 노동에 대한 금전적인 평가를 별로 인정하지 않는 편이다. 팁을 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버리기가 어렵다. 더 빨리, 더 싸게...라는 것이 제품의 경쟁력 향상을 위해서는 적절하다. 하지만 한 걸음 나아가 물어봅시다. '싸게 싸게' 국민이 함께 가격을 내리려는 것은 무엇일까? 동력을 비롯하여 값을 내릴 수 없는, 나라 밖에서 온 원료를 빼면 노동의 값, 즉, 인건비를 내릴 수밖에 없다. 스스로의 인건비를 한없이 줄여간다. 즉, 스스로의 노예화가 틀림없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면서 냉담한 웃음을 짓고 있는 자들이 있다. IMF개입을 보면 일목요연하다. 갖고 있는 자는 그냥 기다리면 된다. 모든 것이 다 공짜로 손에 들어올 것을.
우리들의 갈라진 마음이 스스로 자본주의사회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 그 인식이 왜 불가능한지를 보아왔다.
이 메시지의 목적은 무엇인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다 마음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있다.
단지 마음이 원하는 대로 놓으면 된다.
(이 메시지를) 보내는 자와 받는 자의 만남도 마음이 원한 것이다.
마음을 알면 된다.
하지만 마음을 알 수 없다면?
갈라진 마음을 인식 못하는 상태.
문을 여는 비밀번호를 안에 놓아두고 잠궈버렸다면......
그래도 관대한 '하나(Oneness)'는 내버리지 않는다.
혼란한 흐름을 원상으로 되돌려주면 된다.
실마리는 말이다.
입에서 나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모든 것이 마음의 산물이다.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내뱉기 전에 마음의 눈으로 바라본다.
거기에 마음의 발자국이 촘촘히 모이기 시작한다.
'마음을 움직이기'를 알게 되면 감각, 사고, 감정, 인식이 조화를 되잡는다.
맑은 마음은 Logos = 말씀(이)과 하나이다.
그리고 그 때가 '벌서 행동하고 있을 때'이다.
제가 살아온 50년을 되돌아보고
왜 태어나서 무엇을 하러 온지 이제야 알게 된 것 같아.
나누며 경험하기를 위해서.
뱃속에 가진 순간부터 이후 몇 년 동안이나, 온 몸과 마음으로 다 해주시며 나를 '먹여'주신 어머니 철이 들자 그 부모님한테 반항하고 이윽고 '먹고 살아야 한다고' 학교, 직업에 마음을 빼앗긴다(忙=바쁘다). 정신이 들었을 때에는 벌써 어느 사이에 늙어서 병든 부모님. 먹고 살기를 위해서 그 부모님을 시설에 보내는 아이들. 죽은 사물에 마음을 빼앗겨서(忙) 생명을 주신 부모님과 삶을 나누지도 못하고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리고 결국 이별의 눈물만 흐른다. 효도하고 싶을 때 이미 부모는 없다. 어버이 마음을 자식은 알지 못하고, 자식의 마음을 어버이 알지 못한다. 아는 자는 그 치열한 아픔을 전하려 해도 전하지 못한다. 되풀이, 되풀이... 그냥 입장이 바뀌고 (경험하는)사람만 바뀔 뿐이다.
사랑하려는 데 갈라진 사회에서 살기 때문에 서로를 다치게 한다. 그것도 마음이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신이 들어 밖으로 나갈 때 어머니가 목숨을 걸어서 가르쳐주신 절대적인 사랑이 계속 진실인 사회라면 그 잔인한 경험, 우리가 맛보고 있는 광기의 세계는 사라질 것이다.
사랑합니다.
살아 있어요.
첫댓글 와오 끝가지 읽는 데 시간과 인내가 필요했지만 중요한 멧쎄지를 담고 있어서 정성스럽게 읽었습니다. 진심어린 글은 감동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