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세다성의 교전 (천문 7년(1538)) 상대편 > 삿슈(薩州)가의 시마즈 사네히사(島津實久)군
16세기 초의 시마즈가는, 본 종가라고 할 수 있는 수호가는 쇠약하여,
분가인, 삿슈(薩州)가와 소슈(相州)가가 서로 주도권 다툼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14대 당주 마사히사(勝久) 때, 삿슈가의 시마즈 사네히사가 실권을 쥐고, 호시탐탐 수호를 넘보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마사히사는, 당시 삿슈가와 대립하던 소슈 시마즈가에게 지원을 요청합니다.
소슈 시마즈가는 가독 계승을 조건으로 이를 승낙.. 사네히사와 다투게 됩니다.
소슈 시마즈가의 요시히사가 마사히사의 가독을 계승하여 수호직이 되지만..
25세의 마사히사는, 원수였던 사네히사와 손을 잡고 실권 회복을 꾀합니다.
그러나, 우유 부단한 마사히사에게 실망한 사네히사는 이용가치가 떨어졌다고 판단되자.. 그를 추방..
시마즈가 종주권을 놓고, 삿슈가와 소슈가가 본격적으로 대립하게 됩니다.
추방된 마사히사는 각지를 방랑하다가, 결국엔 분고에서 생을 마치죠.
사네히사와의 전투에서 소슈 시마즈가는 가세다성을 공략하다가 대패를 하는 등, 어려움을 겪지만...
1537년 말, 드디어 사네히사를 그의 거성인 가세다성에 몰아넣는데 성공..
소슈 시마즈군은 섣달 그믐날에 가세다성에 대한 야습을 감행합니다.
공성전은 섣달 그믐날로부터 설날까지 진행되어 성이 떨어진 것은 천문 8년 1월 1일이였다고 전해집니다.
후에, 시마즈가가 중흥하자.. 이 싸움을 시마즈가의 가장 어려웠던 전투라고 평했답니다.
가세다성의 교전에서 패배한 사네히사는 예전과 같은 세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사라집니다.
시마즈가는 요시히사를 배출한 소슈가의 1가문으로 정리가 되고..
숙원인 산슈통일과 더 나아가 규슈통일을 목표로.. 가문의 모든 역량을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암검성의 교전 (천문 23년(1554)) 상대편 > 가모우(蒲生)군
사네히사를 물리치고, 집안 문제를 정리하는데 성공한 요시히사는..
본래 시마즈가의 영지였던 오오스미와 휴가를 되찾으려 합니다.
당시 사쓰마와 오오스미의 국경에는 가모우가가 버티고 있었고..
그 세력도 강해서.. 수호인 시마즈가를 만만하게 여기고 반항했습니다.
가모우가는, 거성인 가모우성 주위에.. 암검성을 비롯한 4개의 지성을 쌓고..곧 벌어질 전쟁에 대비합니다.
1554년 9월, 가모우가는 시마즈가에 속한 기모쓰케 가네히로(肝付兼演)의 가지키성을 선제 공격합니다.
요시히사는 이것을 구원하기 위해.. 가모우가의 암검성에 병사를 출진시킵니다.
암검성이 위태로워지면, 가지키성을 공격중인 가모우군이 기수를 돌리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요시히사는 이 싸움에 아들인 요시히사(義久), 요시히로(義弘), 도시히사(歲久)를 참가시키는데..
그들의 첫출전이었다고 합니다.
암검성은 벼랑에 둘러싸인 산 위에 있었습니다.
요시히사는 그런 암검성의 지세를 보고난 후..
<이 성은, 너희 3형제(요시히사, 다카히사, 다다마사)중, 누군가가 죽지 않으면 떨어뜨릴 수 없을 것이다.>
라고 했다는군요..
공방전은 9월 12일에 시작이 되고..
시마즈군은 가문의 사활을 걸 정도로 많은 병사들을 암검성 공략에 투입시킵니다.
13일에 시마즈군의 본영에 승리의 길조가 보였다고 하며..
14일엔, 요시히사의 아들 다다마사(忠將)가 성 밖에 나와있던 암검성군에 대해서 철포공격을 퍼부어 큰 성과를 올리고..
이에 대해서 암검성측에서도 철포공격으로 응전..
이것이 일본에서 철포가 실전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전투라고 전해지는군요.
시마즈군은 군량작전도 시행하면서.. 암검성에 서서히 압박을 가하고..
10월 2일에, 시마즈군의 총공격이 시작됩니다.
먼저, 시마즈 요시히사군이 성의 서문을 공격하면서 성곽에 불을 지릅니다.
성의 수비병들이 불을 끄는데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 사이..
요시히사와 요시히로군이 성에 가까이 접근합니다.
한편, 시마즈군이 암검성을 포위했다는 것을 전해들은 가지키성의 가모우군은..
요시히사의 의도대로 가지키성의 포위를 풀고 암검성 구원을 위해 군대를 이동시킵니다.
이 소식을 접수한, 요시히사와 다카히사군 등은, 구원하러 오는 가모우군을 요격하러 출진..
암검성 북부의 히라마쓰에서 양군이 조우하여 접전.. 난전 끝에 가모우군이 패배합니다.
가모우측의 원군을 물리친 시마즈군은 암검성에 항복권고를 하고..
농성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 성주 게토 요시시게는 야음을 틈 타 성을 탈출하고..
성은 시마즈군의 손에 떨어집니다..
계속해서, 시마즈군은 완강하게 저항하는 가모우가를 치고.. 1557년에야 비로소 그들을 제압합니다.
이 교전은 시마즈가가 총력을 다했으며.. 오오스미 공략의 첫걸음이었다고 합니다.
기자키원의 교전 (에이로쿠 11년(1568)) 상대편 > 이토(伊東)군
이토가와 시마즈가와의 본격적인 항쟁은, 오에이 4년(1397)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후, 14세기 말부터.. 15세기 초까지.. 가와미나미의 지배를 둘러싸고 대립은 이어지고..
결국, 덴쇼 5년(1577)에 이토가가 오토모가에 의탁하러 갈 때까지 계속됩니다.
한 때는, 시마즈가를 산세이까지 몰아부치고..
오비성을 둘러싼 다툼에선, 시마즈 다다치카가 성을 이토가에게 명도할 정도로 강성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에이로쿠 11년에, 시마즈 다다치카의 땅을 손에 넣었던 이토 요시스케는..
이 후, 휴가의 서남부에 있는 마사키원 탈취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는데..
요시히사의 명으로 시마즈 요시히로가 마사키원의 중심인 가쿠도조와 이이노성을 손에 넣고 여기에 근거하는 일이 벌어지고..
이에 대응한 이토가는 산시산을 장악하여, 가쿠도조와 이이노 진출을 위해 시마즈군과 다시 한번 대치하게 됩니다.
요시히사가 죽은 것을.. 절호의 기회로 안 이토 요시스케는 사가라가와 결탁하여 병을 일으킵니다.
같은 해 8월, 이토가는 대군을 산시산에 집결시키고, 이이노 공략을 향한 진을 칩니다.
겐키 2년(1571)에는, 몇 번의 소규모 전투가 벌어지고..
다음 해 5월, 드디어 이토군이 가쿠도조를 목표로 하여 산시산을 출발합니다.
병력은 3000명이라고 전해지며.. 이이노성을 지키는 시마즈 요시히로군의 총 병력수는 300명이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이토군은 이미 이긴것이나 다름없다며 전승 기분에 빠져버립니다.
이토군은 이이노성을 북쪽에서 보면서 시라토리산기슭을 통과하여, 가쿠도조에 육박합니다.
그 무렵, 300백에 조금 모자란 수하의 군사를 이끌고, 이이노성을 출격한 요시히로는..
성의 수비에 50인을 할애하고, 주력인 230명을 거느리고 가쿠도조로 향합니다.
진군 중에, 요시히로는 다시 병사를 나누어, 60명은 이노가와 기타기시에게 주어 선발대로 시키고..
40명은 시라토리산기슭의 입구에 매복시킵니다.
시마즈군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이토군은.. 근처에서 시마즈의 원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전군 철퇴를 하다가.. 퇴로를 시라토리 곤겐의 주민들에게 차단당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고..
이를, 복병으로 잘못 판단한 이토군은.. 방향을 바꾸어 퇴로와 반대방향으로산을 내려가게 되는데..
130명의 요시히로군과 조우.. 요시히로는 무모하게 이토군에게 덤비지만.. 패배..
후퇴하면서 급속히 무너지는 요시히로군과 그들을 기분좋게 추격하는 이토군..
그러나, 어느정도까지 후퇴하자 시마즈의 원군들이 속속 요시히로군에게 가담하게 되고..
그 수는 점점 불어, 시마즈군이 이토군을 압도하게 됩니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요시히로는 재빨리 병사들을 수습하여 반격으로 맞섭니다..
이를 예상하지 못했던 이토군은, 이 역습에 휘말려 혼란을 일으키고 사분오열하게 됩니다.
마침, 전장에 도착한 니로 다다모토 부대의 일격은.. 패배한 이토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줍니다.
대장을 호위하는 병사들까지 괴멸.. 요시히로의 대승리로 끝이 납니다.
이 패전소식을 접한 사가라군이 서둘러 이토군에 대한 원군을 파견합니다만..
요시히로가 준비하고 있던 위병에 속아.. 싸우지 않고 퇴각하게 됩니다.
기자키원의 교전이라고 불리는 이 싸움은, 남규슈의 오케하자마라 불립니다.
기자키원에서의 어이없는 참패로 이토가는 막대한 타격을 입고 이반자가 속출.. 쇠퇴의 길로 가게 됩니다.
결국, 1577년에는 거성 도노코리성에서 축출되어 소린에게 의탁하게 되죠.
이 교전 후, 요시히로는 전장에 적군 전몰자들의 공양탑을 세우고.. 사망자들에 대해 공손히 애도를 했다고 합니다.
요시히로는.. 훗날 조선침입 때도 적군의 전몰자들을 위한 공양탑을 세웠다고 전해지죠..
다카기성과 미미천의 교전 (덴쇼 6년(1578)) 상대편 > 오토모(大友)군
시마즈가는 휴가의 이토가를 공략하게 되는데..
이에 못 견딘.. 이토가는 오토모가에게 의지하기 위해 분고로 도망을 칩니다.
북휴가의 스치모치가도.. 결국, 시마즈가에 속하게 되죠..
시마즈가가 급성장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던, 오토모 소린은 매를 들 때가 왔다고 여기고..
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병을 일으키기로 하죠.. 기독교의 이상향을 휴가에 세우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만..
덴쇼 6년, 4월에 휴가로 침공을 개시하여, 스치모치가를 축출.. 미미천의 북쪽인 북휴가를 제압.
오토모군은 진군 중에 각지의 절과 신사를 파괴하여 주민들의 분노를 사게 되는데...
당시, 오토모군의 총병력은 43000명으로.. 대장은 다하라 쇼닌.. 오토모군은 곧 남하를 시작..
선봉인 다기타 시게카네, 등은.. 10월에 시마즈가의 야마다 아리노부가 지키는 다카기성을 공격..
그러나, 구원군을 이끌고 온.. 시마즈 이에히사군을 다카기성에 들어가게 만드는 실수를 범합니다.
구원군의 병력은, 약 3000.. 그들의 활약으로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오토모군은 다카기성에 대한 대대적인 공략전을 펼치지만, 또 다시 낙성에 실패.. 도리어, 큰 피해만 입죠..
이번엔 방법을 달리하기로 하고.. 성을 포위하여 외부와 차단하는 군량공격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시간을 번 시마즈군...
11월 초, 시마즈 요시히사가 다카기성 구원을 위해 40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휴가 사도와라에 도착.
때를 같이 해, 시마즈 요시히로도 이이노를 출발하여, 다카라베성으로 들어가죠.
한편, 노즈에 진을 친 오토모 요시무네는, 히고의 사가라 요시히와 협력하고 히고에서 휴가로 진공할 계획을 수립.
여러 장군들과 1만의 병력을 히고로 이동시킵니다.
하지만, 히고에서 장수들이 휴가공격에 반대하며, 사가라 요시히와 합류를 하지 않고, 한달 이상이나 움직이질 않습니다.
여기에, 오토모군의 총대장인 다하라 쇼닌은, 시마즈군의 전력이 소규모하는 점을 과소평가하고..
오마루천를 도하하여, 11월 12일에 다카기성을 중심으로, 시마즈군과 오토모군 양군이 드디어 격돌..
병력이 우세한 오토모군에 대항해서.. 시마즈군은 정면엔 시마즈 요시히로가,
측면은 시마즈 요시히사가 포진, 거기에 다카기성의 시마즈 이에히사군이 3면에서 오토모군을 일시에 공격..
괴멸적인 타격을 받은 오토모군은 철퇴를 하게되고.. 이를 추격한 시마즈군은 미미천에서 오토모군을 따라 잡아 도륙(?)을 시작..
오토모군의 전사자는 약 4천명 정도라고 전해질 정도로, 시마즈군의 대승리로 끝납니다.
오토모군의 패인으론, 총대장인 다하라 쇼닌의 방심과 무모함, 그리고 결전에 즈음하여 다카기성에서 농성중인 이에히사군을 무시하여 그쪽 포진을 소홀히 한 것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당주와 아들이 종교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자신들이 벌인 전투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
반면에, 다카기성의 위기는, 산슈의 전체 위기로 파악하여 잘 대응한 시마즈 요시히사의 판단이..
시마즈군에게 승리를 안겨준 요소 중 하나라고 합니다.
거기에, 요시히로의 교묘한 유인병과 복병전술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오토모 소린이 후방에 있었던 점에 비해, 시마즈 요시히사는 직접 군을 지휘..
시마즈군의 사기가, 오토모군의 사기를 능가했다는 점도 무시해선 안 될 요소입니다.
패전의 소식은, 소린 아저씨에게 부풀려져 보고되어, 수행하던 선교사의 진언에도 귀 기울이지 않고..
분고와 부젠에서 퇴각합니다.
패전 후.. 분고, 부젠, 지쿠젠의 오토모가의 영내에선 토착민중들의 반역이 빈발해지고..
히젠의 류조지 다카노부와 적대하는 사이가 됩니다.
이 전투를 계기로, 시마즈가는 꿈에도 소원이던 산슈(사쓰마, 오스미, 휴가)의 통일을 이루고..
전성기를 구가하던 오토모가는 점점 쇠퇴의 그림자가 드리웁니다.
오키타의 교전 (덴쇼 12년(1584)) 상대편 > 류조지(龍造寺)군
히젠의 류조지가는, 원래 쇼니가를 따랐는데..
류조지 다카노부가 가독을 계승하면서, 주가인 쇼니가를 멸하고 독립..
용맹한 가신단의 활약으로, 지쿠젠, 지쿠고, 히고에 그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었습니다.
다카노부는 <히젠의 곰>이라고 칭해질 정도로 무용에 뛰어났던 무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잔인한 성격도 겸비하고 있었기에.. 신참 무장들 중엔, 그에게 심복하지 않는 자들도 더러 있었죠.
덴쇼 9년(1581), 북진을 목표로 시마즈가가 군사행동을 개시하여 히고까지 그 세력을 확장합니다.
이에 고무된(?), 히젠의 시마바라에 있던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가 류조지가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이것을 안 다카노부는, 적자 마사이에(政家)에게 아리마가 토벌을 명합니다.
하지만, 아리마가는 마사이에 처의 생가라, 아리마가 토벌은 잘 진행되지 않습니다.
이에 기다리다 지친 다카노부가.. 친히 3만의 군을 이끌고 시마바라에 상륙..
아리마가의 거성을 목표로 진군합니다.
한편, 아리마가의 병력은 약 3천이었고, 다급해진 아리마 하루노부는 시마즈가에 원군을 요청합니다.
원군 요청을 받은 시마즈가에선, 원군 파견에 대해 의견이 분분해지나..
시마즈 요시히사는 시마바라에 원군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파견군의 총대장엔 시마즈 이에히사를..
참가무장으론, 시마즈 다다나가, 니로 다다모토, 이주로인 다다무네, 등이 정예 3천을 이끌고..
아리마가 구원에 파견됩니다.
시마즈군의 파견으로 인해.. 아리마군의 사기는 오르지만.. 여전히 수적인 열세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를 감안, 이에히사는 아리마군의 무장들과 협의한 끝에, 전장을 시마바라 북부인 오키타에서 치르기로 결정합니다.
오키타는 습지대였고, 중앙은 겨우 2 ~ 3명이 나란히 서서 통과할 수 있었기에.. 대군을 전개하기가 불편한 장소였습니다.
이에 대응한 류조지 다카노부는 오키타부근으로 군을 이동시키고..
류조지군의 선봉 부대와 시마즈군이 조우.. 류조지군은 소규모의 시마즈군을 단숨에 쓸어버릴 듯이 공격을 합니다.
소규모의 시마즈군은 유인부대였고.. 그들의 뛰어난 연기에 힘입어..
류조지군이 이에히사가 기다리던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시마즈군의 철포대를 중심으로 한 복병대가 일제히 사격을 개시..
생각하지 못한 총탄의 세례에 류조지군의 선봉 부대가 무너지고..
속속 후속부대가 도착하여 퇴로도 막힌 류조지군은, 좁은 길 가운데에서 대혼란에 빠집니다.
이 때, 다카노부도 총탄에 맞아 비명횡사..
류조지군은 동요를 하기 시작..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퇴각을 하였고..
류조지 사천왕들은 어렵사리.. 2만의 장병들을 무사히 사가까지 퇴각시키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이 교전으로 말미암아.. 규슈 북부 일대를 장악하던 류조지가는 쇠락을 하게됩니다.
시마즈가는 적은 인원으로써, 류조지가의 대군을 격파하고 당주까지 전사시키는 횡재(?)를 하였는데..
이는, 시마즈 이에히사의 작전이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됩니다.
이것으로, 시마즈가는 규슈 제패의 길에 한걸음 더 나갈 수 있게 되었죠.
벳키천의 교전 (덴쇼 14년(1586)) 상대편 > 시고쿠 연합군(조소카베(長宗我部)씨, 소고(十河)씨 등)
시마즈가가 오토모가와 류조지가와의 교전에서 연거푸 승리하면서, 규슈의 패자로 데뷔할 무렵..
영지를 지참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소린을 핑계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시마즈 요시히사에게 오토모가에 대한 파상적인 공격을 중지하도록 명하지만..
시마즈가가 변명을 하면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죠..
다시 2차례의 통보.. 즉 <규슈의 반을 줄테니, 군을 철퇴시켜라. 이에 응하지 않는다면 토벌하겠다.>
란 메시지도 무시되어 체면을 구긴.. 히데요시는 규슈 정벌을 생각하게 됩니다.
시마즈가의 총공세를 앞두고.. 오토모가는 어쩔 수 없이, 교토로 가서 히데요시에게 구원을 요청.
OK한 히데요시는 스스로의 출진을 1587년으로 정하고 규슈 정벌을 명합니다..
모리가에게 규슈 정벌을 위한 출병을 요청하고.. 이에 화답한 모리가는 병력 4만을 지쿠젠 방면에 진출시키는데..
모리군은 지쿠젠에서 유일하게 시마즈군에 대항하고 있던 다찌바나산성의 다찌바나 무네토라와 협력하여..
지쿠젠의 시마즈 세력을 싹쓸어 버립니다.
여기에, 오토모가를 돕기 위한 약 6000명의 시고쿠의 연합군이 편성되어..
덴쇼 14년(1586) 10월, 분고에 출진의 명이 떨어지고..
센고쿠 히사히데가 연합군의 군감을 맡고,
선봉에는 소고 나가야스(十河存保), 고사이 누노스케(香西縫之助)등이..
그리고, 조소카베 모토치카와 그의 아들인 노부치카들도 이 연합군에 편성되어 출진합니다.
군을 수습한 시마즈군은, 부젠을 침공하여 부젠성 앞에 위치한 스루가성을 2만의 병력으로 포위..
하지만, 스루가성의 수비병 2000명의 격렬한 저항으로 일단 물러나게 되고..
스루가성은 부젠성의 오토모 요시무네에게 구원을 요청하지만, 히데요시가 무리하지 말라고 주의를 줬고..
또, 요시무네도 병사가 부족한지라.. 원군 파견은 소극적이 됩니다.
그러나, 군감 히사히데가 원군 파병을 주장하게 되고..
병력이 적다는 것을 감안, 히데요시의 무리하지 말라는 명을 어길 수 없다는 연합군의 명장들의 주장이 이어지나..
군공에 욕심이 난, 히사히데는 원군파병을 결정합니다..
시마즈 이에히사는 원군 파견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스루가성의 포위망을 풀고..원군의 움직임을 주시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원군이 예상보다 적다는 것을 알고.. 행동을 개시합니다.
시마즈군과 시고쿠 연합군과의 교전장소는 분고 벳키천의 가와하라..
또 다시 연합군 내의 명장들과 마찰이 일어나지만..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강을 건너 시마즈군을 공격하라고 명하는 군감 히사히데..
결국, 연합군은 오토모군의 도착을 기다리다가 도하하여, 시마즈군의 전초부대를 치고.. 스루가성을 목표로 진군..
이를 관망하던, 시마즈 이에히사는 앞으로 너무 튀어나온 아와지군을 보고, 출진의 명령을 내리고..
병력 3천 정도의 시마즈군이 연합군의 아와지군과 정면에서 격돌.. 히사히데를 도주시킵니다.
그러나, 두번째 붙은 토사군의 선봉인 노부치카군에게 막히고.. 일진일퇴의 난전이 시작..
이것을 본, 연합군의 사누키군이 동진을 멈추고 기수를 돌려 토사군을 지원..
시마즈군은 다수의 적들에게 집중공격을 받는 처지가 되지만..
곧 전선에 투입된 시마즈군의 지원군의 활약으로 토사군의 전후가 분단되고..
산간을 우회한 시마즈군이 사누키군의 측면을 공격.. 시마즈군에 포위된 연합군은 말그대로 괴멸..
연합군의 맹장이던, 소고 나가야스가 전사하고.. 토사군도 노부치카가 전사함으로써.. 심리적인 타격이 매우 컸습니다..
무리한 작전을 강행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큰 쪽팔림을 선사한 센고쿠 히사히데는..
재빨리 전장에서 이탈했었고.. 후에 패전의 책임을 물어 영지가 몰수되지만..
후에 부활(?)에 성공.. 많은 영지를 소유한 대명이 됩니다.
시마즈군은 이 전쟁 이후, 분고를 장악하지만..
25만의 대군을 이끌고 규슈에 도착한 히데요시와의 전투에선 연패..
결국, 히데요시에게 속하게 됩니다.
시마즈군의 교전법
A. 소수의 유인부대를 이용하여 적군을 유인, 잠복하고 있던 복병으로 포위한 후 습격하는 방법.
이 작전은, 유인부대의 뛰어난 연기력을 필요로 하고..
지휘관의 풍부한 전장경험과 진퇴의 찬스를 포착하는데 탁월해야 성공할 확률이 높습니다.
이 유인책은, 4차 가와나카지마 교전에서 다케다군의 별동대가 우에스기군을 끌어들일려 하지만..
겐신에게 읽혀져 실패하기도 했죠.
그만큼, 실전에선 매우 어려운 난이도를 자랑하지만..
시마즈군은 이것을 매우 애용(?)하였고.. 꽤 성과도 올렸다고 전해집니다.
특히나, 이 작전을 할 때.. 복병 1순위는, 시마즈군이 자랑하는 철포대였고.. 그 효과는 압승..
이 작전이 응용된 교전은..
1. 이토(伊東)군과의 기자키 원의 교전,
2, 오토모(大友)군과의 미미천의 교전,
3, 류조지군과의 오키타(沖田)의 교전,
4, 히데요시의 선봉대였던 시고쿠 연합군과의 벳키천의 교전,
5, 명나라군과의 교전에서.. 효과를 봤다고 합니다.
특히, 명나라군과의 교전에선 명군측도 이 유인책을 시도했다고 알려지는군요.
그러나, 시마즈군은 이 교전에서 두 개의 유인부대를 활용.. 승리.. 아깝네요..--
B. 철포
1543년 화승총이 전해지고.. 그로부터 6년 후엔, 반시마즈진영에서 최초로 실전에 투입하지만..
그 진가를 알아차린 시마즈군도 점점 철포를 중시..
1554년에 철포를 실전 배치했다고 전해집니다.
다른곳에선.. 일반병사들이 철포를 소지했지만..
시마즈군은 무장과 병사 모두 철포 장비를 의무화했다고 합니다.
거기에, 평범한 사격훈련에만 만족하지 않고.. 응용법도 연구..
철포대에 의한 돌격 전법도 시도됐다고 합니다.
특히, 시마즈군 철포대의 정예병은 10 ~15초에 1발을 쏠 수 있었다고 하며..
전술 운용면에선.. 역시 앞에서 말한 복병군의 임무가 가장 큰 역할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총포의 연속 사격은 나가시노의 교전때의 삼단 사격이 유명하지만..
시마즈군도.. 이에히사(島津家久), 등에 의해 연속사격법이 도입됐는데..
그들이 도입한 연속 사격법은 두가지로.. 나가시노 때와 같은 삼단 공격과..
사이가패거리들이 주로 애용한 1명의 사격수와 보조수 2명으로 이루어진 협조플레이..
즉, 사격수는 쏘고, 보조수 2명은 예비총을 장전해서 사격수에게 건네주는 방식입니다.
이 방법은, 숙력도가 높아지면.. 3 ~ 4초에 1발을 쏠 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C. 총대장이 있는 적의 본진만을 목표로 돌진하는 방법.
주로 적보다 전력이 적을 때 쓰는 방법으로..
1. 적을 분열시켜 각개격파.
2. 적의 약점을 찾아 집중적인 공격... 이 두가지가 기본인데..
오케하자마의 기습전은 이 2가지 요소가 합해진 결과죠.
시마즈군은, 여기서 2번째 방법을 집중적으로 사용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전국시대의 전투 방식이 총대장이 쓰러지거나.. 본거가 함락되면.. 대부분이 몰락하는 코스로 갔기 때문에..
매우 효과적이지만.. 아군의 희생도 막대했다고 하는군요..
D. 퇴각전시에 주로 사용된 방법은, 가미가제식의 육탄방어였다고 합니다.
병사 1 ~ 10명이 퇴로에서 추격하는 적의 무사나 대장급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것으로..
활과 철포가 없다면 칼과 창으로 추격대를 조금이라도 저지할려고 했답니다.
이 전법을 스테가마리라 불렀고.. 거의 죽음을 각오하고 했다니...
하지만, 당시 시마즈군은 무사로서 마지막을 화려하게 맞는다고 해서, 매우 명예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는군요.
참고자료는 전국교전사에 관련된 책인데..
빌려본 터라 제목이 가물가물하군요..
쇼군에 나오는 시마즈가의 인물들에 대해서..
후에 봐서.. 올리죠..
첫댓글 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