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저녁 5시 혜경양의 결혼식에서 돌아오니 밤 10시 30분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느긋하게 여장을 꾸려 하나하나 배낭 근처에 주욱 늘어놓았습니다. 겨울 장기산행으로 준비해야 할 짐이 넘쳐났습니다. 오후 3시 함백에서 만나기로 하고, 잠깐 병원 사무실에 들러 미흡한 짐들을 찾아 배낭에 넣어 출발하여 함백에서 요한,요셉 형제를 만나 길을 떠났습니다.
제천 이마트에 들려 필요한 부식으로 몇가지 반찬과 라면, 쵸콜릿, 햄, 음료수, 등을 준비하고 곧장 중부고속도로를 따라 대구로 88고속도로로 대전통영간고속도로를 따라 단성나들목에서 중산리 방향으로 차를 몰아 숙소인 지리산장에 도착했습니다. 9시가 되어 도착한 산장에서 지리산평화 곽승희를 만나 그동안의 긴긴 소식들을 나누다 밤늦게 잠이들었습니다. 곽승희는 정선에 살다 어린이 공부방을 운영하기 위해 지리산자락의 작은 산골교회를 담임하고 있어 지난해에도 상정님과 아내와 지리산 산행에 차를 돌려준 고마운 분입니다.
아침을 미리 밥솥에 해놓고 잠을 잔 터라 아침은 한가롭게 저녁에 먹었던 찌개를 데워 밥과 함께 부지런히 먹고, 남은 밥으로 도시락을 싸 중산리 매표소에서 10시쯤되어 천천히 출발합니다. 산길로 약 2시간여를 걸어 로터리 휴게소에서 점심을 하려는데 점심시간에 맞추어 취사장엔 발디딜 틈이 없이 사람이 가득해 밖에서 라면을 끓여볼 요량이었습니다. 바람은 불고 영하 15도를 넘는 추위에 눈까지 날려 손발이 시리고 금새 체온이 떨어져 밖에서 점심을 하기에는 무리라고 생각되어 취사장에 사람이 비기를 기다려 한켠에 자리를 잡아 라면을 끓이는데 가져간 가스마저 추위에 얼어 불이 시원치 않았습니다. 발을 동동 구르며 라면과 밥을 말아 점심을 다 먹을 즈음엔 먼저 온 이들이 다 길을 떠난 후에 늦게야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멀리 보이는 지리산 주봉 천왕봉은 그 높이가 1,915m 답게 쉽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다가가면 멀어지고 또 다가가면 멀어지는 천왕봉을 따라 거의 5시간 만에 정상에 닿았습니다. 정상에는 차가운 칼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쳐 모자와 마스크, 두꺼운 장갑과 껴입은 점퍼에도 불구하고 10분을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정상 바위를 뒤로하고 장터목으로 향하는 길, 나무도 별로 없는 광활한 개활지를 걸어 지는 해를 따라 내리막을 걸어 장터목에 이를 즈음 날씨는 더욱 차가워집니다. 간신히 도착해서 바람을 피하며 한참을 기다리니 일행이 도착했고, 일행이 쉬기를 기다려 이제는 부지런히 길을 재촉합니다. 거센 바람에 눈은 몰아쳐 길을 덮어버리고, 해는 뉘였뉘였 서산으로 빠알갛게 넘고있습니다. 장터목에서 두시간은 걸어야 세석까지 가는데 해는 짧아지고 일행 중 요셉이가 자꾸 걸음이 느려지고 마음이 급해집니다. 랜턴을 준비했지만 해떨어지면 기온이 급강하하여 밤길에 미끄러운 눈길을 걷기가 더 어려워질텐데 불안한 마음에 지친 발길을 재촉해 6시가 되어 해는 지고 땅거미가 질 무렵 숙소로 예약된 세석대피소에 도착하였습니다.
자리를 배정받고 먹을꺼리를 준비해 취사장에 가 찌개를 끓이고 남은 밥을 같이 끓이려는데 대피소에 물이 없습니다. 밤길에 눈보라를 헤치고 식수를 구하러 내려가니 약 70m를 걸어야 물을 구할 수 있습니다. 차가운 얼음물에 장갑도 없이 두 개의 코펠에 담은 물을 들고 얼어서 감각이 없어지는 언 손으로 물을 구해오고 얼기 직전의 찬물에 음식을 끓이니 시간은 더디고 가스도 얼어 불도 시원찮고 시장기는 더해오고 이 고생을 왜하나 싶습니다.
미처 충분히 익지도 않은 라면과 찌개를 시장이 반찬이라고 따뜻한 국물로 먹으니 몸은 조금씩 따뜻해집니다. 밥을 먹기 시작한 게 7시가 넘은 시간인데 방송에서는 8시에 등을 끈다는 방송이 나옵니다. 부지런히 먹고 씻어 놓고, 내일 아침에 그대로 그 자리에서 아침을 해 먹을 요량으로 모든 음식을 취사장에 모아두고 숙소로 와 자리를 펴고 가져간 베게를 바람 넣어 준비하고 젖은 장갑과 양말을 널고 준비를 대충 마치자 불이 꺼집니다.
20분이 못되어 저녁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도 코고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담요을 깔아도 마루로 된 숙소 바닥은 차가워서 옷을 다 입은체로도 몸을 뒤척이게 됩니다. 옆에서 자는 요한이 베게는 자꾸 바람이 빠져 자다가 일어나 다시 바람을 불고, 다시 빠지고 다시 불고를 6-7번 하는 걸 보면서 잠을 설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내일 걸어야 할 길은 장장 10시간이 넘는 노고단 길이 될 것이니 일찍 일어나 서둘러야 할 것이고 일찍 잠을 청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6시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화장실에 가려는데 눈보라와 회오리가 만나 온 산을 윙윙거리며 눈발로 하얗게 덮어 그 바람의 기세에 눌리게 합니다. 영하 20도를 넘는 올겨울 가장 추운 혹한의 날입니다. 취사장 한 곳에서 쌀을 씻어 밥을 짓는 사이 일행들이 내려오고 어제의 그 샘가에서 물을 길어오고 저녁에 먹은 찌개에 밥을 넣어 죽으로 만들어 셋이 나누어 먹고, 새로 한 밥은 배낭에 넣고 배낭마다 물을 채우고 밤새 언 등산화로 인해 발은 시리고 바람과 눈의 기세는 날이 새어서도 잦아들지 않습니다.
곰곰이 지도의 이정표를 살펴보아도 도저히 노고단까지 계획대로 걷기는 힘들 것 같은데 마침 대피소 직원이 취사장에 달려와 오늘 기상특보가 발령되어 장터목, 천왕봉 코스로는 입산이 통제되었다고 알려줍니다. 어떤 등산객들은 지리산 주봉인 천왕봉에 가려했는데 여기까지 와서 정상에 못가보고 간다며 아까워하는데, 우리는 바로 어제 그 길을 지나온 것이고 이제 하산길로 접어들어 다행이긴 하지만 그 길고 긴 20여 km의 길을 이 사나운 날씨에 걷기는 무리라고 판단했습니다.
제가 지리산 경험이 있는 대장이니 나의 제안으로는 요셉이를 생각하면 장터목으로 중산리로 하산하면 가장 쉽고 차를 돌리기 위해 후배들 신세를 지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또 다른 길은 삼신산 쌍계사 길은 8시간 정도에 16km를 걷는 길로 시간에 비해 길이가 길어 길이 험하지 않으니 충분히 걸을만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짧은 길에 날씨까지 사나워 섭섭한 요한이는 쌍계사로 가자합니다. 결국 짐을 꾸려 쌍계사 길로 접어드는데 거친 바람에 길이 묻혀 등산로마저 희미한 곳에 발목을 빠지게 하는 눈이 쌓인 곳이 종종 나옵니다.
4시간이 넘게 걸려 삼신산에 이르고, 청학동 가는 길과 갈라진 곳에서 다시 걸어 삼성궁 갈림길, 다시 걸어 불일폭포 지나 쌍계사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4시입니다. 배낭 속에선 물도 얼고, 밥도 얼고, 귤도 얼고, 쏘시지도 얼고, 달랑 몇 개의 쵸콜릿과 효소 작은 병 하나에 셋이 의지해서 점심도 먹지 못하고 긴긴 길을 걸은 것입니다. 쌍계사를 지나 1시간 정도 내려와 미리 기다리고 있는 김은환이를 만나 반갑게 차에 올라 중산리로 향합니다.
쌍계사는 하동의 화개장터에서 멀지 않은 지리산 자락입니다. 차를 타고 화개장터 지나 섬진강 겨울 모래사장을 보며 달려 중간에 하동군의 한 중식집에 들어가 짬뽕을 먹습니다. 점심도 거르고 내려온 요셉이가 제일 먼저 한 말이 “무엇이든 먹기부터 해야겠어요. 짬뽕 먹고 싶다!”였습니다. 저녁을 국물까지 싸악 비우고 중산리 차를 세워둔 곳으로 가는 길에 은환이는 중산리에서 우리가 내려온 쌍계사까지 차로 1시간 30분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결국 은환이는 왕복 3시간을 우리에게 차로 돌려주느라 수고를 한 셈이지요.
차를 찾아 엊그제 묵었던 지리산장에 전화를 해 방을 따뜻하게 해달라고 전화를 하고 도착하니 방을 최대로 따뜻하게 해준답니다. 씻고, 젖은 옷들을 바닥에 널어 말리고 따뜻한 온돌에 누우니 아이고 소리가 절로납니다. 다시 찾아온 은환이는 음료수와 과자를 곽승희는 오리와 치킨을 가져와 닥치는대로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로 밤을 맞았습니다.
노곤한 몸으로 잠이 까무륵 드는가 싶었는데 아침8시나 되어 일어났습니다. 따뜻한 방에서 푹자고 일어났는데도 몸은 무겁고 쑤시고 다리는 당기고 무리한 산행에 피로는 가시지를 않았습니다. 아침은 세석에서부터 지고 내려온 언 밥을 밥솥에 담아두었던 것으로 하고, 물만 부어 먹게 만든 육개장으로 국을 끓여 깨끗이 먹고 설거지를 마치고 짐을 주섬주섬 정리해서 차에 올랐습니다.
오던 날 88고속도로가 피곤하다던 운전수 요한이가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로 대전으로 증평으로 충주로 길을 잡아 고속도로를 달려 증평 어느 맛난 해장국 집에서 뼈해장국과 선지국으로 점심을 하고 돌아오는 길, 영월에서 볼 일이 있다는 요한이 따라 영월에서 한 30여분을 있다가 함백에 도착하니 오후 4시를 넘긴 시간입니다.
가는데 6시간, 오는데 6시간, 산행 16시간, 긴긴 시간과 길과 길을 지나 집으로 향하는 길, 집에 돌아오니 오후 5시였습니다. 배낭에서 짐을 꺼내어 빨래감과 남은 반찬을 내어놓고 장비들을 분리하고 쓰레기를 버리고, 생각을 합니다. 모든 짐들에는 내가 걸어온 모든 길들의 기억들이 배어있다고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 몸에는 우리 인생의 모든 길들이 아로새겨져 스며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혹한의 추위에 물과 양식마저 다 얼어버리고 시린 손과 차가운 바람에 따끔거리는 양볼을 문지르며 무거운 배낭과 미끄러운 눈길을 거닐은 지리산 1박2일, 27km의 긴 길에서 저는 나의 신에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 저의 길에 주님이 동행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다만 주님의 길에서 제가 주와 동행할 수 있다면 아무리 어렵고 힘든 길이라도 끝까지 걷겠습니다.”
삼신산 지나 이 고백을 주님께 드리며 와락 눈물이 솟구쳐 흐릅니다. 복받치는 눈물과 뜨거운 가슴에 삼신산에서 주님의 은총을 입어 하늘하늘 거닐었습니다. 삼신산이라 삼신할매인지 무슨 삼성각의 삼신인지 모르나 나에게는 그래 하나님도 삼신이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 삼신이렸다.
어떤 모습으로 나에게 오시든 주님과 동행하는 주님의 길이라면 끝까지 끝까지 포기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그 길 위에 거닐고 거닐겁니다. 사방으로 뻗은 장엄한 지리산 능선들이 아련히 눈앞을 아른거려 지워지지 않습니다.
첫댓글 무지하게 고생하셨네요 겨울 산 황량한 바람 을씨년스런 풍경
보이는건 오직 흰 눈과 윙윙 거리는 바람 소리 어디 정 붙일때 없는
풍광 이지만 사위가 다 죽은것 같은 그곳에서 나의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감사망극 하셨다니 ....
좋은 도반들과 함께 묵상하며 걷는 길위에 산과 도반과 하느님이 삼위일체가
되어 걸었으니 더 바랄게 무었이겠습니까 !
감사하고 보고싶습니다. 오대산이나 한 번 같이 가실까요? 소백산 나들이도 하고싶구요. 사부자님도 평안하신지요? 지리산장에 묵으며 신세지고 왔습니다. 참 좋았지요. 인근에 카리스마타 수도회 소속의 후배들과 지리산평화 공부방을 운영하는 후배도 있어 반가웠구요. 전국 어딜가도 지인들이 터잡고 있어 참 좋습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