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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걸 2 - 대영제국을 세운 엘리자베드 여왕과 당나라 여황제 측천무후!
1) 해가 지지않는 나라 대영 제국의 기초를 닦은 엘리자베드 여왕
영국왕 헨리 8세가 죽은후 에드워드 6세가 왕위를 계승했으나 병약하니 일찍 죽고 큰 딸
메리 1세가 왕위를 이은후 38세에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결혼하지만 남편 얼굴
보기가 힘드니 자식을 낳지 못하고 1558년에 죽자 동생인 엘리자베드가 왕위에 오릅니다.
엘리자베스는 1558년 부터 44년간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를 다스렸으니..... 열강들의 위협,
인플레이션, 종교전쟁으로 혼란스러운 16세기 초반에 유럽의 후진국인
잉글랜드를 세계 최대의 제국으로 발전시키는데 이바지해 대영 제국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헨리 8세가 캐더린과 이혼후 앤 불린과 결혼하니 로마 교황이 파문에 처하자 잉글랜드는 국교회(성공회)로 독립
했으나, 언니 메리 1세가 즉위하면서 다시 가톨릭 국가가 되었고 엘리자베드 등극후 가면을 벗어던지고
가톨릭에서 국교회로 돌아 가면서 개종을 강요하는 가운데 수많은 차람이 처형되니 피가 강물 처럼 흘렀습니다.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의 위협 속에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 가톨릭에서 독립시키길 바랐고 가톨릭 교도들은 는 엘리자베스를
가톨릭 가문과 결혼시켜 잉글랜드를 가톨릭으로 돌리려고 필사적이었습니다.
처음 혼담은 스페인왕 펠리페 2세인데 메리 1세의 남편으로 잉글랜드에서 평판이 나쁜지라
깨졌고.... 두번째는 신성로마제국 카를 대공, 사보이아 공작 필리베르토,
스코틀랜드의 왕위 계승권을 가진 신교도 로버트 더들리경에 스웨덴왕 에리크 14세 입니다.
러시아 뇌제 이반 4세의 청혼을 거부하니 이반 4세는 꿩 대신 닭이라고 여왕의 시녀 레이디
메리 헤이스팅스에게 청혼을 하니 러시아가 잉글랜드와 교류를 강화하기
위함이었지만...... 메리는 '미개한 야만인 나라 러시아에는 가고싶지않다' 고 싫어했습니다.
엘리자베스가 결혼하지 않은건 남편과 권력을 나누기 싫어서거나 안좋은 결혼관계를 많이 봐왔기
때문인데, 외국 왕족은 대부분 가톨릭 교도였기에 잉글랜드 국교회가 흔들릴 것이며
외세의 간섭 또한 심해질 것이니, 메리 1세가 잉글랜드인들에게 인기를 잃은 이유도 이것 입니다.
프랑스와 에스파냐등 외세로 둘러싸인 잉글랜드에서 미혼이라는 신분이 큰 자산이었기에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결혼 교섭중에는 침략을 받지 않을것이니
혼담이 들어올때 마다 반가워하며,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하는 모습을
보이다가도 진전이 되면 상대가 받아들일수 없는 종교, 비용, 영토를 내걸어 무산시킵니다.
토마스 시모어는 38세였지만 "매력적인 남성" 이었고 열네살 처녀 엘리자베스와 희롱에 가까운
장난을 치기 시작했는데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캐서린 파는 "두 사람이 진하게 포옹"
하고 있는걸 발견하자 토마스와 이혼하면서 키우다시피했던 "엘리자베스" 를 집에서 쫓아냅니다.
엘리자베스는 잉글랜드 국력이 프랑스나 에스파냐에 못 미친다는 것을 알고 세력균형 정책을
펴면서 뒤로는 신대륙에서 오는 스페인 배를 습격해 금은을 빼았던 프랜시스 드레이크등
해적들을 지원하였으며, 개신교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후원하자 에스파냐와 금이 가게 됩니다.
1568년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자 로마 가톨릭교도 메리 스튜어트가 남편을 죽인 일로 장로교 귀족의
반란에 잉글랜드로 망명했는데, 메리는 헨리 8세 누나의 적손녀임을 내세워 엘리자베스
1세를 제거하고 영국 왕위를 차지할 음모를 꾸미다가 덫에 걸려 1587년 2월 단두대에 처형됩니다.
영국 해적선이 스페인 보물선을 공격한데다가 메리 스튜어트 참수는 에스파냐에 잉글랜드
침공 명분이 되어 주었으니 1588년 5월 20일 선원 9천명에 병사 2만명을 태운
펠리페 2세의 무적 함대 130척이 리스본을 출발해 7월 19일에 영국해협에 도착합니다.
무적함대는 180명의 “가톨릭 수사와 사제” 가 동승했는데 십자군 전쟁과 같은 성전(聖戰) 이니
참여하면 “죄사함” 을 얻을수 있다며 "면죄부" 를 발행했으니, 임무는 네델란드에 주둔
중인 “파르마공작 3만 대군의 영국상륙을 엄호“ 해 5만으로 런던으로 진격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속도가 느린 배” 와 대열을 맞추다 보니 시일이 “오래 걸려 수병과 선원들이 질병과 굶주림“ 에
지친데다가... 폭풍이 몰아쳐 함대가 흩어져버리는 바람에 ”함선들을 모으는데만
1개월“ 이나 걸렸는데, “잉글랜드 함대는 영국 남단 플리머스” 에서 무적 함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잉글랜드함대 수장도 전투 경험이 없는 노팅엄백작 찰스 하워드 였으나 다행히 휘하에는 “항해와 해전” 에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 가 있었으니, 잉글랜드 함대는 플리머스를 떠났지만....
“남풍” 이 불어 회군하니 34척 군선과 사략선 164척을 합해 197척 이었지만 “영국해협 곳곳에 흩어져” 버립니다.
무적함대가 잉글랜드 실리제도에 도착한건 1588년 7월 19일로 메디나는 잉글랜드 남부 해안을 따라 동남단
마르게이트에서 파르마의 상륙정들과 만나 도와주는 것으로 이해 했지만, “네델란드의 스페인 총독인
파르마” 는 무적함대가 “ 상륙정들을 네델란드 됭케르크에서 잉글랜드 해안” 까지 엄호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독립전쟁중인 “네덜란드 해군” 도 전력이 만만치 않았으니 플랑드르와 네덜란드 해안에는 “67척 네덜란드
군선” 이 에스파냐군을 괴롭혔으며 영국과 연합하면 무적함대도 곤란을 겪을수 있었으니.... 파르마가
네덜란드를 떠날때 무적함대가 늦게되면 에스파냐군은 “네덜란드 군선의 공격” 에 물귀신이 될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무적함대가 네덜란드(벨기에) 해안에 접근해 입항하자니 “해안은 수심이 얕은” 데다가
크고 작은 “모래톱이 해안을 가로막고” 있어 스페인의 큰 함선들이 접근할수 없었으며
네덜란드 해안을 잘 아는 항해사 조차 없으니 “네덜란드 해안에의 접근” 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7월 19일 드레이크는 여섯척 함선을 이끌고 플리스머스를 나섰으며 “30척 잉글랜드 군선” 이 뒤를 따랐으니
무적함대와 조우하였는데, 잉글랜드 함대는 “구경이 크고 강력한 함포를 지닌 무적함대” 와 정면
충돌하기 보다 잉글랜드의 함포가 가볍고 “사정거리가 긴” 점을 이용해 “장거리에서 하나씩 사격” 합니다.
해전에서 중요한건 "대포 사정거리" 니 임진왜란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해전과 명량해전에서 조선 배는 손상이
없었으며, 전사자도 한산도해전 3명에 명량해전 2명에 불과하니 조총은 사정거리가 100미터지만,
조선 대포는 600 미터가 넘으니 300미터 거리에서 사격하면 조선군은 전혀 피해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집니다.
장거리인지라 잉글랜드 함대 포격으로 입은 피해 보다는 진형을 유지하기에 급급하던 무적함대 내 “충돌
사고에 의한 피해” 가 더 많았으며 “화약이 폭발하는 사고” 도 발생하는데... 잉글랜드 함선
들의 추격을 받던 무적함대는 포틀랜드섬에서 바람의 방향이 바뀌자 “잉글랜드 함대에 역습” 을 가합니다.
하지만 잉글랜드 함선들은 “우수한 기동력” 을 이용해 스페인 함선들에게 접근을 허락 하지 않는지라
“무승부” 로 끝났고 메디나는 네델란드로 향하는데... “모래 언덕에 배가 걸리는 위험” 을
감수할수 없었기에 네델란드(벨기에 북부 플랑드르) 대신에 7월 27일 프랑스 “칼레 항구” 로 들어갑니다.
무적함대는 잉글랜드의 공격을 막기위해 적벽대전이나 또 백제 부흥운동 663년 백강에서 왜선 1천척이 풍랑과
당군에 대비했듯 “밀집 진형으로 정박” 하고 있었으니 서풍이 불자 잉글랜드 함대는 “8척의 화공선” 을 내려
보내니 칼레해전 (아르마다해전) 인데, 스페인 배는 화공선들을 피해 "닻줄을 끊고 출항" 하는수밖에 없었습니다.
화공선은 피했지만 일부 선박은 "충돌 피해" 를 입었으며 "닻줄을 끊으면서 브리튼섬 해안에 배를 정박시킬수
없게" 되는데... 잉글랜드 함선들은 바다로 나온 무적함대가 "재결집하기 전에 공격" 을 가했으니
"그레이 브라인 전투" 에서는 근거리 포격전을 벌였고 잉글랜드 함대와 무적함대 양쪽에 사상자가 발생합니다.
잉글랜드 함선은 1척도 침몰하지 않은데 비해 무적 함대는 "두척이 격침되고 세척이 나포" 당했으며
나머지 함선도 피해를 입은 상태에서 "거친 북해" 로 물러나올수 밖에 없었는데....
잉글랜드 함선이 포탄을 맞고도 침몰하지 않은건 에스파냐가 급하게 포탄을 만며 "너무 급히 식힌" 탓?
철포탄의 경도가 높아 발사할때나 적함의 단단한 부분에 부딪히면서 오히려 “스페인군의
포탄이 부서졌던 것” 이라는데, 잉글래드 함대를 피해 “북해로 밀려난 무적함대” 는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의 군선들을 뚫고 파르마의 육군과 랑데부 하는건 불가능
하였으니 멀리 북쪽으로 항해해 “브리튼섬을 돌아 에스파냐로” 돌아가는 것 뿐이었습니다.
닻이 없는 스페인 함대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돌아 에스파냐로” 오는 과정에서 피해를 입었으니
거친 바다에서 항해를 견디지 못하고 “침수되거나 해안에서 암초에 부딪혀 침몰” 했는데,
1588년 9월 11일 무적함대가 코루나항에 도착 하였을 때 65척으로 줄어 있었으니
잉글랜드 상륙은 시도조차 못해 보고 “67척이나 되는 배와 수병, 그리고 병사” 들이 사라진 것입니다.
다음해 1589년 엘리자베스 1세는 해적 드레이크를 제독으로 하고 존 노리스 장군과 함께 영국 함대를 스페인
으로 보냈으니 잉글랜드 군인 23,375명을 태운 150척 전함이 스페인과 해전을 벌여 잉글랜드가
대패하였으니 15,000명 사상자가 발생했고 40척 선박이 침몰 또는 포획되었으니 스페인 해군력은 부활합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잉글랜드는 스페인등 외국과 대결 속에 국민들의 정신적 결속과 일체감이
생겨났으며....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대를 국민 문학의 황금기로 만들었으니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문학과 프랜시스 베이컨의 경험론 철학이 이 시대의 대표적인 성과였습니다.
2) 당나라의 여황제 측천무후와 왜국의 스이코 여왕(천황)
측천무후 (則天武后) 는 당나라 고종의 황후이자 무주(武周) 국의 여제로 공포정치를 했다는 비난과 민생을
보살핀 여제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데 그녀가 통치했던 15년을 ‘무주의 치' 라 부르니.... 이름은
무조(武照)이고, 아명(兒名) 은 무미랑(武媚娘) 이며 현종때 당나라가 전성기를 맞는 디딤돌 역할을 했습니다.
636년 당 태종 이세민이 황후 장손씨를 잃자 무조 (武照) 의 용모가 빼어나다는 얘기를 듣고
12세 무조를 입궁시켜 무미 (武媚) 라는 칭호를 내렸는데 후궁 중 낮은 지위인
재인 (才人 : 정5품) 으로..... 후궁들의 업신여김을 받으며 어려운 궁중 생활을 보냈습니다.
태종 이세민이 대신들에게 성질이 사나운 말울 다룰수 있겠느냐고 묻자 무조가 나서 "신첩에게는 철편,
철추, 비수 세가지 물건만이 필요합니다. 철편으로 말을 때리고, 듣지 않으면 철추로 머리를
치고, 그래도 듣지않으면 비수로 머리를 잘라 버리겠습니다" 고 답하니 이세민은 기개를 칭찬했답니다.
649년 7월 태종 이세민이 사망하고 9남 이치 (李治) 가 황제에 오르니 고종으로, 무조는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감업사 (感業寺) 에 가는데 고종은 태자
일때, 부황 이세민을 간호하던 무조를 본 적이 있었으니 이후로 그녀에게 반했다고 합니다.
고종은 650년 분향차 감업사에 들렀다가 무조를 본 순간 옛정이 떠올랐고 무조도 이치에게 몰래〈여의낭〉
(如意娘) 이라는 시를 지어 보이니 무조는 그길로 고종을 따라 입궁했는데, 황후 왕씨는 고종의
사랑을 독차지한 소숙비(蕭淑妃) 를 질투해 무조에게 머리를 기르게 하고 후궁으로 삼으라고 부추깁니다.
무조는 652년 이홍 (李弘) 을 출산했으며, 왕씨와 결탁해 소숙비를 폐출시키고 비 (妃) 가 된후, 왕씨의
오만한 태도와 나쁜 평판을 기회로 반대하는 궁인들을 모았고, 무조가 654년 안정공주를 낳자 황후
왕씨가 다녀가자 무조는 자신의 손으로 딸을 교살하고 황후에게 뒤집어 씌워 죽이고는 황후에 오릅니다.
황후 무씨는 고종의 외숙부 승상 장손무기를 자결시켜 장손씨를 몰살시켰고 656년 황태자 이충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폐위시키고 자기 아들 이홍을 황태자에 올리니, 보다 못한 이치가 대신들을 불러 무씨의 폐위를 의논
하였으나 무씨 심복들이 밀고했고, 그녀는 폐황태자 이충과 대역죄를 꾸미려 했다면서 대신들을 처형해버립니다.
이 해인 656년경에 당나라의 사실상의 황제는 무황후라고 할수 있는데..... 그녀는 가스라인팅
을 당한 것 같은 심약한 이치에게 '건언12사' 라는 건의문을 올렸고 이치는
수용하였으며 얼마뒤, 이치는 건강이 악화되자 황태자 이홍에게 제위를 물려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홍이 병으로 먼저 죽으니 그녀 차남 이현 (李賢) 이 황태자에 책봉되었는데 장회 태자는 색을 좋아해
노비 조도생과 친해 금, 비단을 많이 내려주니 측천무후가 사람을 시켜 고발하게 하니 680년에 황태자
에서 폐출당하였고 이치의 요청으로 죽음만은 면하고 파주 (巴州) 로 유배됐지만 무후에 의해 죽습니다.
무씨는 자기 셋째 아들 이현 (李顯) 을 황태자로 삼으니 유약해 어머니 말에 순종했는데, 3년후 683년
고종이 사망해 황제에 오르니 중종으로, 얼마 안돼 무씨는 그를 폐위 시켰으니 이현의 처 황후 위씨
와 아버지 위현정이 정사를 농단했 때문이었으며 자신의 막내아들 이단을 황제에 올리니 예종입니다.
이때부터 그녀는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정사를 직접 관장하였으니 낙양을 신도 (神都) 라 고치고
관제도 개편하자, 684년 9월 양주의 서경업이 군사를 일으켜 장안으로 진군하니
무씨는 30만 진압군을 파견해 40일 만에 반란은 평정되었고 동조하였던 모든 대신들을 처형합니다.
조카 무승사가 '성모임인 영창제업' (聖母臨人 永昌帝業, 황태후께서 군림하시니 여제의 기운이
대대손손 번창하리) 라고 쓰여진 돌을 가져와 무씨에게 바쳤고, 무씨는
반발하는 이들을 제압한후 690년 국호를 '주' 로 고치고 15년간 황제로 중국을 다스렸습니다.
그녀는 황제에 오르자 혹리를 동원해 충성 세력들을 양성한후 당 황조의 종친과 구대신 들을 몰살시켰으며, 혹리
들의 정치참여를 꺼려 그들을 죽이는 '토사구팽' 을 시행했는데, 잔혹한 방법으로 황제에 올랐지만
정치가로서는 유능한 면모를 보여주었으니 국법을 엄격히 해 주나라의 통치시스템 구축과 사회안정을 이룹니다.
그녀는 과거제도를 개편해 회시, 공사, 전시의 순으로 국가에 필요한 많은 인재들을
배출해 적재적소에 등용시켰으니.... 뽑힌 신흥 세력들은 훗날 현종
이융기를 도와 '개원의 치' 를 성립시키는데 일조해 당나라를 다시 한번 중흥시킵니다.
적인걸, 장간지 등을 등용하니 백성들의 생활은 풍족하였으며 근무 태만한 관리들은 파면했고, 불교를 중흥
시켜, 불교 사원을 세우고 승려들을 양성시켰으며 그녀가 재위하는 동안 당나라 장안성은 인구
100만명이 넘는 동서양을 통틀어 최고의 국제도시이자 동서양이 만나는 장을 만든 유능한 군주였습니다.
그런데 무씨가 사실상 황제로서 실권을 쥔게 황태자를 폐해 죽이고 자기 아들을 황태자로 세운 656년
인데, 그 4년후 백제가 망하고 12년후 고구려가 망했으니 역사 에서는 당 고종의 치세로
기록되었지만.... 실제로는 저 무씨에 의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것이라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612년 수 양제 100만 대군의 침략을 "이름을 알수 없는 요동성주" 와 을지문덕 징군이 격퇴했고,
645년에 당태종의 30만 정예군도 역시 "이름을 알수 없는 안시성주" 가 물리쳤습니다.
645년 이세민은 “이름을 알수없는 성주가 지키는 요동성” 에 개모성과 비사성, 백암성등 4개
성을 함락했으나, “이름을 모르는 (양만춘?) 성주의 안시성” 공략에 실패해 철수한 후
에도 우진달과 이세적등 소규모 부대를 자주 보내 고구려 강역을 어지럽혀 피곤하게 만듭니다.
당태종은 신라 김춘추를 맞아 나당동맹 (고구려는 당이 차지하고 백제는 신라가 차지한다! )
을 성사시켰으며, 용사들을 모집하고 수군 기지에 군량과 자재들을 쌓은후
침공을 준비 하다가....... 649년 4월에 죽으면서 요동 전쟁을 그만두라고 유언 했습니다.
후계자 황태자 이치는 귀공자로 곱게 자라 실전 경험이 단 한번도 없으니 전쟁에 대해
모르는지라 큰 전쟁을 벌이다가 실수할까 염려했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하지만 655년에 신라가 고구려와 말갈이 성 36개를 빼앗음을 호소하면서
구원을 청하니 영주도독 정명진, 좌위중랑장 소정방이 출진해 고구려군을 쳐부숩니다.
656년 당나라 실권을 손에 쥔 무태후는 다음해 657년 설인귀에게 명하여 정명진을 보좌해
요동을 공략토록 하였는데 귀단수에서 고구려를 깨트려 3,000명을 베어
죽였고 다음해 양건방, 계필하력과 더불어 고려 대장 온사문에 맞서 횡산에서 싸웠습니다.
서기 658년 6월에 영주도독 정명진, 우령군 설인귀로 하여금 병사를 거느리고 고구려의 적봉진을
함락시켜 400명을 참하고 포로 100명을 잡았는데, 고구려는 대장 두방루가 3만명으로
대항했으나 정명진이 거란을 이끌고 거꾸로 들이쳐 크게 깨트리니 참수한 것이 2,500명 입니다.
고구려가 당나라와 일진일퇴를 벌이던 660년에, 18만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니
고구려를 협공할 교두보가 마련됐는데... 13만 대군이 서해를 횡단하는
미증유의 대 상륙 작전이었으며 귀환한 당의 주력군은 증편되어 다시 서해를 건넙니다.
660년 겨울 당고종은 고구려 원정을 발표하니 소사업과 정명진이 이끄는 부대는 육로, 소정방
부대는 해로로 전진했고 그외 임아상, 방효태에 글필하력이 지휘한 요동도행군은
해로를 통해 압록강으로 침공했으며 김인문을 귀국시켜 문무왕에게 고구려 출병을 요구합니다.
당나라의 고구려 원정군 35개 군은 30만 정도로 보는데.... “661년 7월 이 달에 소장군 (蘇將軍) 과 돌궐
(突厥) 의 왕자(王子) 계필가력 (契苾加力) 들이 수륙양로로 가서 고구려 성밑에 이르렀다.” 《일본서기》
소정방은 661년 8월 패수에 상륙해 고구려군을 격파한후 평양성을 포위해여 공성을 시작
했는데, 평양성은 외곽, 외성, 내성 등 3중 구조로 되어 있었고, 강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요새기에 소정방군 단독으로 공략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장기전으로 이어집니다.
글필하력군과 소사업군은 남생의 군대를 쳐서 3만을 죽이고 남하하다가 서북에서 튀르크계
철륵이 반란을 일으켜 귀환하자 당의 작전은 꼬여버렸으니, 소정방군은 고립되어 식량
부족을 호소했고, 신라 김유신은 쌀 4,000석, 조 22,000석을 보급하니 밥을 지어먹고 퇴각합니다.
왜국 스이코 여왕은 인질인 의자왕의 동생(아들?) 풍왕자에게 5천 왜군을 주니 한반도로 나와 백제 왕위를 이은후
백제부흥군과 웅진을 노렸기에 신라는 부흥군과 치열한 혈투를 벌이고 있었으니 군대를 평양까지 움직일수
없었고, 7세기 신라의 제1 목표는 백제였기 때문에 반쯤 공략된 상황에서 고구려 공격에 나서지 못한 것입니다.
또 방효태등 당군이 많이 죽은지라 당 건국후 정국을 지배하던 무천진 관롱 집단은 정치적 지배권을 잃었으며,
중소 지주층과 손잡은 측천무후 와의 정치 투쟁에서 패배해 실권을 상실하는데... 이러한
당 내의 정치 투쟁이 진행되면서 당은 소모전 까지도 자제 하며 백제 방면의 웅진 도독부에서도 철수합니다.
2년전 풍왕자에게 5천 왜군을 주어 한반도로 나가 백제왕위를 잇게 한 왜국의 스이코 여왕은 수도를
나라 아스카에서 규슈 후쿠오카로 옮기고 총동원령을 내려 배를 만들고 칼과 무기를 제조합니다.
왝구 전국의 농가에서 쌀을 징수해 군량을 확보한 후 663년 3만 왜군을 1천척 배에 태워 한반도로
보냈으나.... 금강(동진강?) 하구에서 당나라 수군의 화공을 받아 대패하고 왜국으로 철수합니다.
고구려는 신라군의 공격에도 반응하지 않으면서 전쟁확대를 피했으며 당나라 봉선 의식에 태자를
보내는등 굴복했고 연개소문이 사망하고 장남 연남생이 태대막리지의 지위에 올랐는데 동생
남건, 남산이 형의 지위를 탐하여 권력투쟁을 벌이다가 무력행사로 확대되면서 내전이 벌어집니다.
태대막리지 연남생은 두 아우 남건과 남산에 쫓겨 평양성을 나와 국내성을 근거지로
삼아 대항하다가 힘이 부치자.... 급기야 적국인 당나라에 국내성을
비롯한 성 6개와 10만호에 달하는 무리를 거느리고 투항하여 군사 지원을 요청합니다.
666년 12월 3형제의 삼촌이자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고구려 남부 12개 성 763호의
주민 3,543명을 들어 신라에 바치고 투항하니 신라 조정은 군대를 보내 지키게
하는 한편 연정토와 막료 24명에게 재물과 주택을 내려 신라에서 살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667년 신라 조정은 연정토를 당나라에 파견하였는데 고구려 침공에 대해 당나라 조정과 의논
하기 위한 것으로 연정토는 신라로 돌아오지 않고 당나라에 남았으니 조카 남생
이나 남산이 당나라 항복후 당나라에서 잘 대우 받았던걸 보면 천수를 누렸을 것으로 봅니다.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는 내부에서 사분 오열되고 있었던 것인데 속일본기의 기록을 보아
고구려가 일본에 군사지원을 요청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이니, 고구려는
666년 정월과 10월, 그리고 멸망하기 일보 직전인 668년 7월에도 일본에 사신을 보냈습니다.
일본은 663년 백제부흥군의 백강 전투에 지원군으로 대군을 보낸 전례도 있었지만 백제 부흥군
이 몰락한후 신라에 우호적인 태도로 전환해 한반도 개입을 그만두고 혹시모를
당나라 공격에 대비해 성을 쌓고 방어태세를 갖추는 중이었으므로 고구려를 돕지 않았습니다.
당고종은 666년 12월 이세적과 글필하력, 설인귀 등을 총관에 임명하고 군사를 주어
고구려를 침공했으니 고구려와 오랜 전쟁을 겪어 경험이 풍부한 장수들
이었으며 또한 측천무후와의 권력 투쟁에서 살아남은 몇 안되는 공신들 이기도 했습니다.
남생의 배신으로 고구려 정보와 기밀이 당으로 새어나갔고 연남생이 바친 고구려 성 6개에 10만호가
당나라의 보급 기지가 되면서 전황은 당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니, 당군은 고구려를 칠때
보급 문제로 골치가 아팠는데, 연남생의 항복으로 고구려성 에서 조달받으니 저절로 해결된 것입니다.
667년 봄에 이세적을 총지휘관으로 당나라 대군이 연남생의 고구려군을 길잡이로 고구려로 진격했으니
요하를 건너 신성을 포위하니, 가을까지 치열하게 항전했지만 9월 “사부구” 라는 자가 신성
성주를 묶어 당군에 항복함으로써 함락당했으며 신성 주변의 16개 성 역시 당군에게 격파 당합니다.
사부구와 같은 배신자가 백제 웅진방령(성주) 예식으로,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달아났지만 닷새만에 예식에게
묶여서 항복하니, ‘삼국사기(三國史記)’ 는 “18일 의자왕이 태자 및 웅진방령이 거느린 군대와 웅진성
에서 사비성으로 와서 항복 하였다 (十八日 義慈率太子及熊津 方領軍等 自熊津城來降)” 라 기록 했습니다.
신라는 의자왕을 처형할 것을 요구했지만, 소정방은 660년 9월 3일 의자왕과 1만 2,807명의
왕족, 귀족 및 백성들을 붙잡아 보름간 항해로 9월 18일 산동성 봉래에
도착해 육로로 2000여리 길을 40여일간 걸어 낙양에 도착해 당 고종에게 포로로 바칩니다.
‘구당서’ 에 ‘소정방이 백제왕 부여의자와 태자등 58인을 측천문에서 포로로 바치자 꾸짖고 사면하였다’ 하고
‘일본서기’ 는 낙양에 와있던 왜(倭) 사신 이길련박덕 (伊吉連博德) 은 ‘11월 1일 장군 소정방 등이
백제왕과 태자 융과 왕자 13인, 대좌평 사택천복· 국변성 이하 37인등 50여명을 천자에게 끌고갔다고 합니다.
소정방은 낙양성의 황궁 정문인 측천문으로 의자왕을 끌고가 고종과 측천무후에게 전리품으로 바치고 원정
결과를 보고했는데, 전쟁포로는 죄를 물어 처형하거나 유배를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나 의자왕과 백제
포로들은 당 고종이 죄를 물어 꾸짖었지만 모두 사면하였으니 여기에는 소정방의 노력이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의자왕이 병으로 죽은뒤 당 고종은 백제 신하들이 가서 곡을 할수 있도록 하였고, 낙양
북쪽의 망산에 장사를 지내고 비석도 세워줬으니, 의자왕은 오 (吳) 나라
마지막 군주인 손호와 남조 진(陳) 나라 마지막 군주인 진숙보의 무덤 곁에 묻혔다고 합니다.
668년 당군의 침공에 요하에 주둔한 15만명 고구려군과 금산 대전에서 초기에 고구려군 이
고간의 당군에 승리를 거두었지만, 철수하는 당군을 추격하는 도중 설인귀의 당군에
측면을 공격당해 고구려군 5만명이 전사하니 요동방어선의 정예부대는 궤멸되었습니다.
이후 고구려군 10만명이 말갈족 수만명을 끌어들여 남소성에서 항거하자 글필하력이
고구려군을 쳐서 10,000명을 죽이고, 기세를 타서 남소성, 목저성, 창암성을 함락
했으니 요동 후방에 천리장성 방어선도 붕괴되니 남은건 압록강 방어선 밖에 없습니다.
668년 2월 이세적과 설인귀가 부여성을 함락시켰고 부여주에 딸린 40개 성이 전투 없이 항복하니, 연남건은
부여성 탈환을 위해 50,000명의 병력을 보내 이세적과 설하수에서 교전했으나 3,000명의 병력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했으며 당나라는 국내성에서 연남생의 군대와 만나 함께 압록강 방어선으로 내려옵니다.
연남건은 압록책에서 당군의 진격을 1차적으로 저지하는데는 성공했으나, 이후 당군은 압록강을 건너 대행성,
욕이성을 함락시켰으니 압록강 방어선도 뚫은 당군은 마침내 고구려 수도 평양성을 포위하게 됩니다.
같은해 신라도 문무왕과 김인문 등이 대군으로 고구려 영토로 북상하니 규모는 20만명 으로
대곡성(大谷城) 과 한성(漢城) 등 2군 12성으로 부터 항복을 받으며 남부 전선을
돌파해 평양 근교에 도달했으니 7월, 사천전투 등에서 고구려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여 승리을 거두었고 나당 연합군은 결국 평양성을 함락하니 고구려는 망합니다.
중국인에게 고구려는 70년 전쟁을 거치며 공포스럽고 원망스러운 존재인데 마침내 꺼우리(고구려)
를 멸망시켰으니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다스릴수 있겠지만 훗날 변란 (안사의난등)
이 일어나면 꺼우리들이 반란을 일으켜 고구려를 세울 것이니 후환을 없애기 위해
카르타고나 이스라엘에 유대 처럼 고구려인을 모두 당나라로 잡아가니 장안까지 조리돌림을 합니다.
연도의 중국인들은 침을 뱉고 돌을 던지며 오랜 원한을 화풀이 했는데.... 장안에서 일부는 노비로 주고
3만호(15만명) 는 실크로드 오르도스에 추방했으며 또 일부는 전쟁에 참가한 거란족에
전리품으로 주니 영주로 잡혀갔고, 나머지는 강남의 숲속에 가두어 농노로 부렸는데, 훗날 중국이
혼란에 빠지니 일부가 남쪽으로 도망쳐 미얀마 국경에 라후족과 아카족에 이수족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신라가 차지한건 고구려의 면적과 인구에서 10분지 1에 불과한 황해도 뿐이라? 그후 잡아갈때
도주한 피란민이 남하하고 발해 멸망후 일부 귀순하니 살아남은 고구려인의
20% 남짓 신라가 거두었나 봅니다. 성씨로 보면 오늘날 한국인 중에 고구려 후손은
진주 강씨등 3~4% 정도에 불과한데..... 측천 무후가 당나라 실권을 쥔지 12년 후의 일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