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관명상 - 2 / 일중 스님
명상수행 매진하게 하는 기반
몸 더러움에 자결한 비구처럼 자기 몸 혐오하게 될 수 있어
죽음 대한 엄숙한 자각·숙고로 회피 않고 직면할 때 삼독 끊어
초기불교에서 부정관(不淨觀)명상은
‘몸이 본질적으로 아름답거나 깨끗하지 않다’는 것을
삼매와 지혜로써 알게 하는 명상법이다.
이 명상을 통해 수행자는 자신과 타인의 몸에
탐심이나 집착을 덜어낼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깨달음과 해탈로 가는 수행 여정에서
명상수행에 올곧게 매진하도록 기반을 깔아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부정관명상은 약간의 위험 요소도 있다.
수행이 충분하게 익지 않은 초심자가
몸의 부정함을 리얼하게 인식하게 되면,
자신의 몸을 강하게 혐오하고 싫어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붓다 당시에 부정관 수행을 하다가
몇 십 명의 비구들이 자결을 했다는 기록이
‘웨살리경’과 ‘율장’에 언급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부정관명상의 일화 한 가지를 얘기하고,
시체를 관하는 공동묘지 관찰 수행을 정리 요약해보고자 한다.
‘상윳따 니까야’의 ‘웨살리경(S54:9)’에 의하면,
붓다는 보름간의 집중수행에 들어간다.
이 기간에는 하루 한 끼 음식을 가져다주는
시자를 제외하곤 아무도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제자들은 부정관명상에 전념했다.
이전에 부정관명상에 대해서 붓다가 칭송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자들이 부정관명상으로 ‘몸이 더럽다’는 것을 인식하자
몸에 대해 혐오스러워하고 전율을 느끼며 넌더리를 쳤다.
더 나아가 자결을 시도하거나 죽여달라고 요청을 하면서
몇십명의 비구들이 죽게 되는 일이 발생했다.
보름 후에 수행에서 나오신 붓다는
왜 비구 승가의 숫자가 줄었는지 물었고,
아난다 존자는 사건의 경위를 상세하게 보고 드렸다.
그리고 부정관명상법이 아닌 다른 수행법을 가르쳐달라고 요청해
그때부터는 호흡명상을 많이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그럼 공동묘지(Sivathika) 관찰명상은 어떤 것인가?
말 그대로 공동묘지에 버려진 시체를 관찰하는 부정관명상이다.
이 묘지관찰명상은 사마타나 위빠사나로 수행할 수 있다.
‘대념처경’이나 ‘신념경(몸에 대한 마음챙김경)’ 등
여러 중요한 경전들에서 제시하고 있으며,
‘청정도론’은 아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럼 ‘맛지마 니까야’의 ‘신념경(身念經, M119)’에서
제시한 아홉 가지 공동묘지 관찰 내용을 인용해보자.
“비구들이여, 비구는 마치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죽은 지 하루나 이틀 또는 사흘이 지나 부풀고 검푸르게 되고
문드러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바로 자신의 몸을
그에 비추어 바라본다. ‘이 몸 또한 그와 같고,
그와 같이 될 것이며, 그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여기 경전의 문구를 보면 시체의 상태를 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그 시체를 자신의 몸에 비추어본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도 또한 시체와 같이 죽게 될 것’이라는
엄숙한 자각과 숙고이다. 이렇게 반조하고 마음을 챙기다 보면
다음과 같은 수행결실이 얻어진다고 ‘신념경’은 말한다.
“그가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물면,
마침내 저 세속에 얽힌 재빠르게 일어나는 생각들이 사라진다.
그런 생각들이 사라지기 때문에 마음은 안으로 확립되고
고요해지고 하나에 고정되어 삼매에 든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 명상법을 통해 본 삼매 선정을 얻을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체에서 두 번째 보게 될 대상은 동물들이 쪼아 먹고
벌레가 파먹는 과정이며, 세 번째는 시체가 해골이 되어
살과 피가 힘줄로 얽혀있는 상태이고,
네 번째는 살은 없고 피는 남아 있는 채
힘줄에 얽혀 이어져 있는 상태이다.
계속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시체는 백골이 되고
그 백골이 삭아 가루가 된 것을
아홉 단계로 보는 과정이 바로 공동묘지 관찰명상이다.
굳이 이런 명상법을 해야만 하는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필자는 붓다의 자비심이 어린 방법이라고 해석해본다.
‘몸은 부정하다’는 불편한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여실히 직면하고 인식할 때, 갈망과 탐진치의
추동력을 끊어낼 수 있고, 유신견(有身見)과 전도견,
사견을 타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중 스님 동국대 강사
2022년 11월 16일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