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안토니 후크마 목사님께서는 ‘중생’과 ‘회심’을 설명하시면서 ‘하나님만의 단독 사역으로서 중생’과 ‘중생의 발현에 따른 중생자 반응으로서 회심’을 ‘순간 동시 단회 사건’으로 설명하십니다. 그리고 ‘중생과 회심을 동시 사건’으로 설명하며 드시는 비유가 ‘전등불 비유’와 ‘수도꼭지 비유’입니다.
중생: 전등불 스위치를 누른다. 회심: 전등불이 켜진다.
중생: 수도꼭지를 튼다. 회심: 수돗물이 나온다.
안토니 후크마 목사님 이 비유에는 ‘중생이 자라나 회심이 이르게 된다.’는 개념이 없습니다. 즉, 주님께 중생에 대한 도리를 들으면서 영적 탄생을 육적 탄생에 빗대 이해했던 니고데모, 거듭나지 못한 니고데모 사고방식으로서 “중생이 임신 기간을 거쳐 출산(회심)에 이르게 된다.”는 연중론 개념이 없습니다.
그런데 ‘연중론을 심장으로 삼는 {양무리 마을}’에 한국 교회 연중론 수장 손성은 목사님이 [오순절 성령강림의 구속사적 의미와 회심]을 올리셨군요. 긴 글이라 모두는 살펴보지 못한 채 수박 겉핥기로 훑어보니, ‘포괄(넓은) 의미의 중생’은 ‘하나님만의 단독 사역으로서 중생이라는 엄밀한(좁은) 의미의 중생’과 ‘엄밀한(좁은) 의미의 중생의 발현으로서 회심이나 회심과 성화’까지도 포괄하는 개념임에도, 여전히 현대 개혁신학 ‘엄밀한(좁은) 의미의 중생’ 개념과 ‘포괄(넓은) 의미의 중생’ 개념을 정리하지 못한 채 “새 생명(좁은 의미의 중생)이 자라나 회심(넓은 의미의 중생)에 이르게 된다.”고 하시며 {개혁주의 구원론}에 적힌 안토니 후크마 목사님 중생론을 언급하셨군요.
링크 겁니다. ‘안토니 후크마 목사님 중생론에 대한 손성은 목사님 해석’을 옮기고 싶은데, 복사금지 설정이 돼 있어서 아쉽습니다.
손성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구속사적 의미와 회심]
cafe.daum.net/yangmooryvillage/RkzJ/23408
다음은 {페북} 제 담벼락에서 있었던 연중론에 대한 손성은 목사님과 제 토론 때 손성은 목사님 목사님이 저를 차단하신 뒤에 [삼일절(317)을 앞두고 손성은 목사님 없이 홀로 하는 연중론 비평]이라는 제목으로 썼던 글입니다.
.
박채동 : <수태 뒤 잠자는 믿음의 씨: ‘안토니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immediately”와 “mediately”에 대해 ①>
<“회개와 믿음도 없는 채로 회심했다고 하는 주장이 교회에 미치는 폐해다.”는 손성은 목사님 주장에 대해 ①~④>에서 보여드렸다시피 이토록 손성은 목사님 답변은 {영혼의 의사}와 똑같이 좌충우돌 뒤죽박죽입니다. 이 제목으로 쓸 게 더 있습니다만, 이 제목으로 쓴 ‘①~④’에서 ‘한국 교회 연중론 수장 손성은 목사님은 연중론 개념조차도 뒤죽박죽일 뿐만 아니라, 연중선의 적선敵船인 순중선조차도 제대로 못 보는 눈을 가진 나머지 화포를 엉뚱한 데로만 발사하셨다 사실을 서술했다.’ 생각해 더 쓸 글은 뒤로 미룹니다.
연중론은 “출산 완료”를 선언해 줄 수 있는 중생론입니다. 실제로 손성은 목사님이 {양무리 마을}에서 ‘연중론을 공부한 뒤 회심하게 됐습니다.’는 내용을 담은 어떤 형제 간증 글을 읽고 “참된 회심을 축하드립니다.”며 ‘출산 완료’를 선언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양무리 마을}에서 준회원으로 활동하다가 손성은 목사님에게 또 강퇴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손성은 목사님이 ‘조엘 비키 {Prepared by Grace, for Grace}’를 “연중론을 지지하는 책입니다.”며 일부 번역하신 글들을 {양무리 마을}에 올리실 때였습니다. 2014년 1월 3일이었습니다. ‘순간 중생에 대한 성경구절들을 올린 제 글’에 ‘회심 체험과 {영혼의 의사}’를 ‘{성경}을 뛰어넘는 절대 진리’로 여기시는 손성은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댓글을 쓰셨습니다.
≪믿는 사람이 지금 깊은 밤중에 잠을 자고 있습니다. 이 사람 안에는 지금 믿음이 활동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함께 잠자고 있습니까? 만일 잠을 자고 있는 이 신자 안에 여전히 믿음이 있는 것이라고 하면 그 믿음이 잠자고 있는 중에는 어떤 식으로 표현되고 있나요? 표현되고 있기나 하나요?
성경구절 백 개 천 개를 갖다 붙여둬도 필요한 한 구절이 없다면 그것들이 효과가 있을까요? 효과가 있다는 식으로 이런 구절들을 많이 갖다 붙여두는 것이야말로 미신적입니다. 송구영신 한다면서 성경구절 하나씩 제비뽑기로 받아서는 그것이 금년도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이란 식의 미신과 별반 다를 것이 없지요. 미신에서 벗어납시다.≫
그리고 한국 교회 연중론 좌장 윤영상 목사님이 끼어든 댓글 달기 놀이(?) 뒤였습니다. ‘“5 곱하기 5는 25다.”는 사람①과 ㅡ숫자와 곱셈은 약속(법칙)이니까 숫자는 고무줄과 같이 늘일 수 없음에도ㅡ “5 곱하기 5은 30000이다.”는 사람②이 싸운 뒤 사또에게 가 봐야 사또에게 곤장을 맞는 사람은 ②가 아닌 ①이다.’ㅡ바로 이게 갈릭 목사님께서 2012년 여름 연중론 비평을 그만 두신 까닭 하나입니다.ㅡ는 마음, 답답한 마음으로 ‘이 시점에서 강퇴 당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퇴 당하는 방법은, 이번 손성은 목사님이 저를 차단하시기 전에 쓴 제 댓글처럼, 손성은 목사님 콤플렉스를 건드리는 댓글을 쓰는 것입니다. 옮깁니다.
하르 ≪연중론은 순중을 인정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순중을 인정할 때 무엇을 근거로, 어떤 성경 구절들을 가지고 인정하십니까?≫
holyjoy ≪순간적으로 중생했다고 하는 사람의 간증을 먼저 하나라도 소개해 보십시오.≫
하르 ≪아, 연중론에서는 하나님 말씀보다 간증(경험, 체험)이 중요하군요. {개혁주의 마을}에 <회심의 때와 경험에 지나친 집착을 보이는 연중론>이라는 어울림 님 글이 있던데, 이 글은 홀리조이 님에게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 봅니다. 꼭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근데 간증했다가는 {양무리 마을} [손 목사의 회심 이야기]에 적힌 “비 건전한 신비주의 체험”으로 ‘매도’될까, 두렵군요.≫
하르 ≪[손 목사의 회심 이야기]를 보면 손 목사님이 “그분은 일반 은총을 통해서 나타나신 하나님이라고나 할까요? 아직은 특별 은총을 통한 구원의 하나님으로는 저에게 현현하지는 않았었던 것입니다.”라는 말씀도 하시는 것을 보면 ‘손 목사님은 순간 중생’ 같던데, ‘홀리조이 님은 연속 중생’인가, 보네요.≫
하르 ≪근데 “그분은 일반 은총을 통해서 나타나신 하나님이라고나 할까요? 아직은 특별 은총을 통한 구원의 하나님으로는 저에게 현현하지는 않았었던 것입니다.”라는 문장은 ‘그분께서는 일반 은총을 통해서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라고나 할까요? 아직은 특별 은총을 통한 구원의 하나님으로는 저에게 현현하지는 않으셨던 것입니다.’로 고치면 더욱 좋겠지요. ≫
holyjoy ≪이렇게 엉뚱하게 동문서답하고 있는 하르 님과는 더 이상 대화의 가치가 없다고 여겨져서 강퇴합니다. 저를 개인적으로 잘 아는 분 같은데, 안다면 더욱 예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3월 2일 오후 9:49
박채동 : <수태 뒤 잠자는 믿음의 씨: ‘안토니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immediately”와 “mediately”에 대해 ②>
‘조엘 비키 {Prepared by Grace, for Grace}’를 손성은 목사님은 “{은혜에서 은혜로 예비되다.}”로 번역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르’라는 별명으로 제가 “{특별 은혜를 위해, 일반 은혜에 의해 준비되다.}”로 의역해 드렸습니다. 손성은 목사님은 제 의역에 대해 동의하셨습니다. 물론, 하르가 저인 줄 아셨다면 동의하지 않으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Prepared by Grace, for Grace}······. 저는 “Prepared by Grace”를 ‘초자연의 씨인 믿음의 씨를 품고 예정된 나무를 향해 불어오는 바람, 위로부터[요 3:7] 불어오는 바람의 upon 사역’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예정된 나무에 스치는 바람 소리가 가장 크게 들릴 때를 중생의 때’로 생각합니다. 즉, ‘중생의 바람이 예정된 나무를 서서히 점진(little by little)으로 흔들며 다가와 예정된 나무를 꺾어 버리는 순간을 중생의 바람이 믿음의 씨를 심는 순간’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예정된 나무 곁에는 유기된 나무들도 있습니다. ‘유기된 나무들도 바람에 흔들리지만, 그 유기된 나무들 가운데 꺾이는 나무가 있을지라도 믿음의 씨는 예정된 나무만을 위한 씨이기 때문에 바람은 예정된 나무에게만 믿음의 씨를 심는다.’고 생각합니다.
3월 2일 오후 10:28
박채동 : <수태 뒤 잠자는 믿음의 씨: ‘안토니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immediately”와 “mediately”에 대해 ③>
故 ‘John Murray’ 목사님 존함이 {영혼의 의사}에는 “존 머리”로 돼 있습니다. “좋은 머리”로 들릴 수 있습니다만, “잔 머리”로 읽는 인터넷 글을 읽은 적이 있어서 저는 “존 머레이”로 씁니다.
{페북}에서 손성은 목사님이 저를 차단하기 전에 쓰셨던 댓글 두 곳을 옮깁니다.
≪저는 후크마 중생론을 성경적인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그것이 연중론과 결코 모순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님의 비판 논리가 후크마 주장을 잘못되게 연중론 비판에 들이댄다는 뜻입니다. 후크마를 들먹이려면 그가 좁은 의미 중생과 넓은 의미의 중생을 구분하고 있다는 그 전제를 잊지 말고 그의 전체 글을 보셔야 한다는 점만 환기해 두겠습니다.≫
≪존 머리 교수 ‘부르심’ 정의가 모순된다거나 후크마 교수가 “immediately”와 “meidately”의 차이를 두면서 좁은 의미의 중생과 넓은 의미의 중생을 설명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셔서 좀 더 깊이 묵상하시면 Jo Jae Yeol 님 연구에 주님의 은혜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다음은 {영혼의 의사} 58쪽입니다. <회심의 1단계: 영적 수태> 첫째문단입니다.
≪수태(초기중생)는 전체 회심 과정의 첫단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수태 단계에서 영혼 속에 매우 값진 생명의 씨앗을 뿌리십니다. 그래서 회심의 전 과정이 시작됩니다. 수태는 짧은 순간에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약 1:18. 벧전 1:23]을 듣거나 읽거나 아니면 생각하는 순간에 동시적으로 발생합니다. 수태가 된 사람은 그 순간부터 자신의 영적 필요에 대해서 각성하게 되고 자신의 죄에 대해 깨닫기 시작합니다. 오직 수태가 돼야만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옮긴 윗글 증거성구를 옮깁니다.
그분께서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약 1:18]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됐느니라. [벧전 1:23]
이 두 구절은 개혁신학 중생론 이른바 “넓은 의미의 중생” 증거성구입니다.
다음은 2011년 12월 29일에 카페 {강릉00}에 {영혼의 의사}를 두고 쓴 제 비평문 <존 머레이 ‘구원론’을 두고 피터 마스터스는 ‘Text 비평’에 충실했는가? ①>에서 옮겨 옵니다. 글 전체를 옮기지는 않습니다.
.
···(비평문 전략)···
다음은 ‘안토니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네째판’ 156쪽~157쪽에서 정의한 중생 개념입니다. 각주는 생략합니다. 읽기 쉽게 제가 문장을 구분하거나 칸을 띄웁니다. 숫자 ‘①, ②’는 제가 적습니다.
1. 세 가지 의미에서 중생
성경은 세 가지 서로 다른 의미에서 중생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서로 연관을 갖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1) 중생이란 새로운 영적 생명의 시작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성령에 의해 우리 안에 심겨지며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믿음에 이르도록 하는 의미에서 중생이다.[요 3: 3,5]
(2) 심겨진 새 생명이 처음으로 나타날 때를 가리켜 중생이라 하기도 한다.[약 1: 18. 벧전 1: 23]
(3)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최종적인 완성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중생이라 하기도 한다.
···(중략)···
본장에서 나는 위에서 언급한 의미들 중 첫 두 가지 의미들만을 다룰 것이다.
‘초기 개혁신학에서 중생이란 단어가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의미보다 훨씬 넓은 의미로 사용됐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칼빈은 중생을 “우리가 전적으로 새롭게 되는 것ㅡ돌이킴과 성화를 포함해ㅡ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했다. 1561년 벨직 고백서도 중생을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대부분의 17세기 신학자들 역시 중생을 돌이킴(conversion: 회심, 개종으로 구체적으로 번역함: 제8장 참조)과 동일시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① 좁은 의미의 중생ㅡ위의 (1)의 의미ㅡ과
② 넓은 의미의 중생ㅡ위의 (2)에 해당ㅡ을
구별할 필요를 느끼게 됐다. 다시 말하면, ‘성령에 의해 새로운 생명이 심겨지는 것’과 ‘돌이킴을 통해 새 생명이 처음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과 구별이다. 나는 일차적으로 좁은 의미에서 중생의 의미를 다루려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라볼 때 ‘중생이란 성령의 사역’이다.
···(비평문 하략)···
“나는 일차로 좁은 의미에서 중생의 의미를 다루려 한다.”는 글은 ‘중생을 돌이킴(회심)과 동일시했던 17세기 신학자들 중생론’과 다르게 ‘중생과 돌이킴(회심)을 구별하는 최근 개혁 신학 관점에서 중생론을 일차로 다루겠다.’는 뜻입니다.
···(비평문 중략)···
“구원의 과정의 이러한 국면들은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동시적인 발생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안토니 후크마 목사님께서는 이 대大 전제 아래 {개혁주의 구원론} 182쪽, 183쪽에서 다음과 같은 서술을 하십니다. [제7장: 중생] 편에 적힌 글입니다. 각주는 생략합니다. 굵은 글씨는 강조하려고 제가 굵게 씁니다.
넓은 의미의 중생은 성경을 통한 설교에 의해 이뤄진다고 할 수 있다. {돌트신경}에는 복음을 가리켜 “중생의 씨앗”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서 직접, 즉각, 철저하게 우리 안에 좁은 의미의 중생을 일으키시긴 하지만, 그러한 새로운 영적 생명의 최초 외적 표출은 말씀을ㅡ그것이 전파된 말씀이든, 가르쳐진 말씀이든, 읽혀진 말씀이든 상관없이ㅡ 통해서 존재하게 된다. 새로운 영적 생명은 하나님께서 즉각 부여하신다. 그러나 새로운 출생은 말씀을 통해 차후적으로 일어난다.
···(비평문 중략)···
앞서 제가 규정한 “대大 전제”에서 {양무리 마을} 이른바 “제2 중생”인 ‘새로운 출생, 신생新生’을 {양무리 마을} 이른바 “제1 중생인 초기중생, 수태”와 함께 “즉각, 동시 사건”으로 표현하셨던 안토니 후크마 목사님······. 그리고 “새로운 출생은 말씀을 통해 차후로 일어난다.”······. 이 문장이 뜻하는 것은 ‘안토니 후크마 목사님께서는 “일차로 좁은 의미에서 중생의 의미”를 다루신 뒤, 이차로 김홍전 목사님 “포괄 의미”에서 중생을 다루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저는 “새로운 출생은 말씀을 통해 차후로 일어난다.”는 안토니 후크마 목사님 문장을 ‘순간(즉각)과 동시 사건 속에 있는 시간적 순서를 규정하는 문장’으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ㅡ‘적’짜를 배경색을 칠해 강조한 까닭은 ‘시간’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닌 ‘순간’과 ‘동시’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ㅡ ‘이 이해 아래 “거듭남이 믿음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존 머레이 목사님 말씀을 순간과 동시 사건 속에 있는 시간적 순서를 규정하는 말로 이해해도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순간과 동시 사건 속에 있는 시간적 순서······. 사실, ‘말이 되지 않는 말이다.’고 생각합니다.
···(비평문 하략)···
.
제 ‘{영혼의 의사} 비평문’에서 인용한 안토니 후쿠마 목사님 “새로운 영적 생명은 하나님께서 즉각 부여하신다. 그러나 새로운 출생은 말씀을 통해 차후로 일어난다.”는 문장에서 “즉각”은 “immediately”입니다. 그리고 “차후로”는 “mediately”입니다. 그동안 연중론 비평 토론을 하면서 이 문장 원문이 공개됐음에도, 영어 콤플렉스 때문에 원문에는 관심이 없는 나머지 며칠 전에 안 사실입니다.
3월 2일 오후 11:58
박채동 : <수태 뒤 잠자는 믿음의 씨: ‘안토니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immediately”와 “mediately”에 대해 ④>
“immediately”와 “mediately”에 관심을 가지게 된 까닭은 앞서 옮긴 손성은 목사님 댓글 때문이었습니다.
≪존 머리 교수 ‘부르심’ 정의가 모순된다거나 후크마 교수가 “immediately”와 “meidately”의 차이를 두면서 좁은 의미의 중생과 넓은 의미의 중생을 설명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셔서 좀 더 깊이 묵상하시면 Jo Jae Yeol 님 연구에 주님의 은혜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복사를 해 문서창에 붙이기를 하니, “meidately”에 오타를 알려주는 붉은 점선이 그어져 있었습니다. 이 단어를 인터넷 검색을 해 봤습니다. 물론, 나오지 않았습니다. ‘{개혁주의 마을}에서 이 두 단어를 두고 거론이 됐던 것 같던데,’ 하는 생각이 들어 {개혁주의 마을} 검색창에 “meidately”를 검색했습니다. 물론,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immediately” 검색했습니다.
‘우리나라’ 님 댓글이 떴습니다.
우리나라 ≪댓글 중, 한 분은 홀리죠이 님이 “immediately”를 ‘즉각’으로 번역하지 않고 “매개물 없이”로 자의적으로 번역한 것을 훨씬 더 나은 번역이라고 칭송하고 있네요. 한글만 아니라 영어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님 댓글이 쓰인 본문을 보니 {개혁주의 마을} 카페지기님 글이었습니다. 손성은 목사님이 {양무리 마을}에 2012년 8월 22일에 올리신 글, ‘holyjoy <후크마는 연속적 중생론자임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합니다!!!>’를 옮기신 글이었습니다. 이 글에서 중요한 곳만 옮깁니다. 인용한 곳 셋째문단을 다음 글에서 또 인용하겠습니다.
.
먼저, 야고보서 1장 8절을 언급하면서 “그가 ······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는 구절에 나오는 “낳으셨다”는 구절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The verb here used, apokyein, does not mean ‘to beget’ but ‘to give birth to’. ······ The new birth as James here describes it is not generation in the narrower sense - the implanting of new life - but in the broader sense, namely, the first manifestation of the new life in conversion. Regeneration in this broader sense, James is here saying, is produced in us through the word of truth, through the Bible.”
이런 후크마 설명은 베드로전서 1장 22절~23절에 나오는 “거듭난 것”이란 말에 대한 설명에서도 계속됩니다. “······ We note again that regeneration in the broader sense is brought about through the preaching of the Bible. The gospel is, in fact, called 'the seed of regeneration' in the Cannon of Dort.”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We conclude, therefore, that though God by his Holy Spirit works regeneration in the narrower sense in us immediately, directly, and invincibley, the first manifestations of that new spiritual life come into existence through the word - whether it be preached, taught, or read. New spiritual life, in other words, is bestowed immediately by God; but the new birth is produced mediately, through the word.” (홀리죠이 역: 그러므로 결론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령에 의해서 우리들 안에서 좁은 의미의 중생을 어떤 매개물 없이, 직접적으로, 그리고 저항할 수 없이 일으키시지만, 그 새로운 영적 생명의 첫번째 발현은 말씀을 통해서, 설교중이든, 강의중이든, 아니면 성경을 읽는 중이든, 말씀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새로운 영적 생명은 어떤 매개 없이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지만, 새로운 출생은 매개물을 통해서, 곧 말씀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후크마 결론은, 지금 현재 {양무리 마을} 중생론 토론과 연관해 말한다면, 넓은 의미의 중생 속에 하나님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결론을 겸허하게 인정한다면, 이 결론에 기초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 토론자의 자세일 것입니다.
이 말씀이 도대체 어떻게 좁은 중생을 한 사람들의 영혼 속에 작용하는가?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바로 {개혁주의 구원론} [중생] <중생과 설교자> 목적입니다.
설교자가 좁은 의미의 중생을 한 사람들에게 넓은 의미의 중생 곧 회심ㅡ이 둘은 동시적인 사건이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르게 명명된 것임을 수 없이 홀리죠이가 반복해서 강조해 왔습니다.ㅡ에 이르도록 촉구하라는 것입니다.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후크마는 그래서, 연속(장)적 중생론을 주장하는 개혁주의 신학자인 것입니다.
.
3월 3일 오전 12:40
박채동 : <수태 뒤 잠자는 믿음의 씨: ‘안토니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immediately”와 “mediately”에 대해 ⑤>
앞서 언급한 셋째문단을 다시 옮깁니다. 중요한 단어에 제가 번호를 붙입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We conclude, therefore, that though God by his Holy Spirit works regeneration in the narrower sense in us immediately①, directly, and invincibley, the first manifestations of that new spiritual life come into existence through the word - whether it be preached, taught, or read. New spiritual life, in other words, is bestowed immediately① by God; but the new birth is produced mediately②, through the word.” (홀리죠이 역: 그러므로 결론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령에 의해서 우리들 안에서 좁은 의미의 중생을 어떤 매개물 없이①, 직접적으로, 그리고 저항할 수 없이 일으키시지만, 그 새로운 영적 생명의 첫 번째 발현은 말씀을 통해서, 설교 중이든, 강의 중이든, 아니면 성경을 읽는 중이든, 말씀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새로운 영적 생명은 어떤 매개물 없이①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지만, 새로운 출생은 매개물②을 통해서, 곧 말씀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invincibley”에 오타를 알리는 붉은 점선이 그어져 있군요. 그런데 손성은 목사님 번역을 보니 “즉각”이라는 말이 그 얼마나 싫으셨는지 “immediately①”를 “매개물 없이”로 번역하셨군요.
CLC 판 ‘안토니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류호준 목사님 번역 ≪새로운 영적 생명은 하나님께서 즉각① 부여하신다. 그러나 새로운 출생은 말씀을 통해 차후적②으로 일어난다.≫
손성은 목사님 번역 ≪새로운 영적 생명은 어떤 매개물 없이①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지만, 새로운 출생은 매개물②을 통해서, 곧 말씀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부개사 판 ‘안토니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이용중 님 번역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즉시①, 직접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 좁은 의미에서의 거듭남을 일으키시지만, 그 새로운 영적 생명의 첫 번째 현상은(말씀을 선포하든, 가르치든, 읽든 관계없이) 말씀을 통해 생겨난다고 결론짓는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새로운 영적 생명을 직접적①으로 주신다. 그러나 새로운 탄생은 말씀을 통해 간접적②으로 발생한다.≫
‘위로부터 태어남인 중생’에 대한 성경의 비유는 모두 부활과 같은 순간 창조입니다. 그리고 제가 성경 원어를 모릅니다만, 조재열 전도사님도 밝히셨다시피 성경 원어 해박하신 목사님들에 따르면 “성경 원어 의미는 모두 순간 단회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야고보서 1장 18절과 베드로전서 1장 23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개혁신학은 “성령 충만은 곧 말씀 충만이다.”고 합니다. 그런데 ‘모태에서도 중생해 성령 충만(말씀 충만)할 수 있다.’고 믿는 저, “순간과 동시 사건 속 시간적 순서”로 이해한 제가 그릇됐을까요?
3월 3일 오전 1:23
박채동 : <수태 뒤 잠자는 믿음의 씨: ‘안토니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immediately”와 “mediately”에 대해 ⑥>
그분께서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약 1:18]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됐느니라. [벧전 1:23]
개혁 신학 중생론 이른바 “넓은 의미의 중생” 증거성구인 이 두 구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넓은 의미의 중생’은 ‘좁은(엄밀한) 의미의 중생’을 ‘포괄한 의미의 중생’ 개념으로 이해하지 못한 채 ≪엄밀한 의미의 중생→ ‘믿을까, 말까?’ ‘회개할까, 말까?’ 갈등하며 되풀이 하는 일반 믿음과 일반 회개→ 넓은 의미의 중생≫이라는 도식을 가진 연중론 개념으로 이해해야 합니까?
‘위로부터 탄생’을 거듭나지 못한 지성으로 ‘자연의 탄생’으로 빗대 생각했던 니고데모, ‘니고데모 사고’에 미혹(세뇌) 당한 데서 벗어나 {영혼의 의사} 58쪽
≪수태는 짧은 순간에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약 1:18. 벧전 1:23]을 듣거나 읽거나 아니면 생각하는 순간에 동시적으로 발생합니다.≫를 {영혼의 의사} 48쪽
≪중생을 생명이 영혼에 들어가는 결정적인 순간으로,≫라는 피터 마스터스 목사님 정의에 맞춰 “수태”를 “중생”으로 고칩니다.
‘중생은 짧은 순간에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약 1:18. 벧전 1:23]을 듣거나 읽거나 아니면 생각하는 순간에 동시(함께, 同) 발생합니다.’
제가 목포고 입시 시험을 앞두고 벼락치기 공부를 하면서 국어는 공부를 하지 않은 까닭이 있습니다. 영흥중 3학년 담임선생님이 국어 선생님이셨는데, 수업 시간마다 종종 강조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국어는 본문에 답 있다.” ‘국어 시험지에 제시된 본문에 답이 있다.’는 뜻입니다.
“국어는 본문에 답 있다.”는 선생님 말씀을 ‘성경은 본문에 답 있다.’로 고칩니다. ‘성경은 본문에 답 있다.’는 말은 ‘계시 의존 사색을 하라.’는 뜻입니다.
3월 3일 오후 7:39
박채동 : <수태 뒤 잠자는 믿음의 씨: ‘안토니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immediately”와 “mediately”에 대해 ⑦>
제가 {영혼의 의사} 58쪽 “수태”를 {영혼의 의사} 48쪽 정의에 맞춰 “중생”으로 고친 문장 ‘중생은 짧은 순간에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약 1:18. 벧전 1:23]을 듣거나 읽거나 아니면 생각하는 순간에 동시 발생합니다.’······.
제 ‘{영혼의 의사} 비평문’, <존 머레이 ‘구원론’을 두고 피터 마스터스는 ‘Text 비평’에 충실했는가? ①> 맨 앞쪽을 옮깁니다.
.
다음은 ‘김홍전 {그리스도 안의 유아} 초판’ 174쪽, 175쪽에 있는 강설입니다. 숫자 ‘①, ②, ③’은 제가 적습니다.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새로운 생명이)’는 제가 더합니다. 읽기 쉽게 제가 문장을 구분하거나 칸을 띄웁니다.
신학적으로 엄격히 구분할 때
① 중생에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심어 주신 부분이 있고,
② 다음에는 그 사람 속에서 그 생명이 충분히 인간성을 발휘하는 신생新生이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① 먼저 임플랜테이션(implantation)이라는 것이 있고,
② 그 다음에 거기서 나오는 뉴 버스(new birth)라는 것이 있습니다.
① 이렇게 새로운 생명을 심어 주셔서
② 새로운 사람으로 나타나면 그의 기본적인 성향이 확실해지는데, 그 방향은 지금까지 인간적으로 자기를 추구하고 이 세상으로 흘러가던 것이 자연스럽게 본능적으로 자꾸 하나님을 향해서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지배적인 성향, 거버닝 디스퍼지션(governing disposition)이라고 합니다.
③ 포괄 의미로는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새로운 생명이) 하나님을 향해서 전진해 나가는 성향을 가지고 일보를 디디는 그 장면까지를 신학적으로 중생이라는 제목으로 다룹니다.
.
한국 교회 연중론 목사님들은 위 ‘①’과 ‘②’ 사이에 ‘임신 기간’을 넣고 “김홍전 목사도 연중론자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김홍전 목사님 여러 강설집에 나오는 ‘믿음의 씨, semen fidei’ 개념은 한국 교회 연중론 목사님들이 생각하시듯이 위 ‘①’과 ‘②’ 사이에 ‘임신 기간’을 넣은 개념이 아닙니다. 계시 의존 사색을 위한 성경 본문으로 갑니다.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행 16:14]
“한 여자가 들었는데” → ‘값없는 복음의 초청’으로서 ‘외소, 보편 부르심’입니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 위 김홍전 목사님 강설에서 ‘①’입니다.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 위 김홍전 목사님 강설에서 ‘②’입니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 위 김홍전 목사님 강설에서 ‘③’입니다.
물론, 루디아 회심에서 김홍전 목사님 정의 “하나님을 향해서 전진해 나가는 성향을 가지고 일보를 디디는 그 장면”은 당연히 “청종”입니다.
3월 3일 오후 8:10
박채동 : <수태 뒤 잠자는 믿음의 씨: ‘안토니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immediately”와 “mediately”에 대해 ⑧>
≪immediate ㅡ a. (공간적) 직접의. 바로 이웃의. (시간적) 곧 일어나는. 즉시의.≫
≪immediately ㅡ ad; 곧. 바로(at once). 즉시. 바로 가까이에. ~하자마자.≫
≪mediate ㅡ vt; 중재하다: a; 중간에 서는. 중개의. 간접의. 중개에 의한. ≫
≪mediation ㅡ n; 중개. 조정. 중재. 화해.≫
≪mediately ㅡ mediate의 파생어로 ad. ≫
≪The Mediator ㅡ 중보자. 즉, 예수 그리스도.≫
≪ New spiritual life, in other words, is bestowed immediately① by God; but the new birth is produced mediately②, through the word.≫ → “immediately”와 “mediately”가 적힌 ‘안토니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원문 문장.
* 류호준 목사님 번역 ≪새로운 영적 생명은 하나님께서 ‘즉각, immediately ①’ 부여하신다. 그러나 새로운 출생은 말씀을 통해 ‘차후적, mediately ②’으로 일어난다.≫
* 손성은 목사님 번역 ≪새로운 영적 생명은 ‘어떤 매개물 없이, immediately ①’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지만, 새로운 출생은 ‘매개물, mediately ②’을 통해서, 곧 말씀을 통해서 일어난다.≫
* 이용중 님 번역 ≪하나님은 새로운 영적 생명을 ‘직접적, immediately ①’으로 주신다. 그러나 새로운 탄생은 말씀을 통해 ‘간접적, mediately ②’으로 발생한다.≫
* 제 의역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예정된 자가 하나님 말씀을 듣거나 묵상할 때 예정된 자에게 ‘새 생명(semen fidei)’을 주심과 함께(同時에) ‘새 생명(semen fidei)’으로 즉시 태어난 새 사람에게 하나님 말씀을 ‘(특별) 은혜의 방도’로 쓰셔서 새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도록 하신다.≫
류호준 목사님 번역은 “차후적”이라는 말 때문에 ‘시간’ 개념을 느낄 수 있는 번역입니다. 그러나 손성은 목사님 번역과 이용중 님 번역은 ‘시간’ 개념을 느낄 수 없는 번역입니다. 그러면 제 의역은 무시하고, 세 분 번역 가운데 어느 분 번역이 원문 의미에 가까운 번역, 원문 의미를 파악한 번역일까요?
‘어떤 단어나 어떤 문장의 정확한 의미는 앞뒤문맥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문장 해석학 원칙에 따라, 저는 ‘류호준 목사님 번역’으로 생각합니다.
3월 3일 오후 9:40
박채동 : <수태 뒤 잠자는 믿음의 씨: ‘안토니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immediately”와 “mediately”에 대해 ⑨>
왜 류호준 목사님께서는 “mediately”를 “차후적”으로 번역하셨을까요? “mediately”가 적힌 ‘안토니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제7장: 중생] <제7항: 중생과 설교자> 앞뒤문맥에서는 이를 알 수가 없습니다. 답은 2012년 여름 {양무리 마을} 연중론 비평이 한창이던 8월에 {페북}에서 윤영상 목사님과 Hyo-nam David Kim 목사님께서 ‘청교도 신학자들 준비 은혜’에 대해 나누신 대화에서 윤영상 목사님 댓글에 있습니다. 옮깁니다.
≪즉 (좁은) 중생과 회심 사이에 간격이 바로 뻘콥이 말한 회심이 순간적이기도 점진적이기도 하다라고 말할 때 그 “점진적”인 상태가 위의 상태인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이 외에는 뻘콥이 말한 회심의 점진성이 달리 어떤 상태를 점진적이라는지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중입니다.≫
류호준 목사님 역 ‘안토니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제8장: 돌이킴] <제4항: 돌이킴 형태의 다양한 변형들>로 갑니다. 증거성구는 생략합니다.
≪회심에서 가장 보편적인 구별은 점진적인 돌이킴과 급진적, 위기적 돌이킴이라 할 수 있다.: 급진적인 회심의 가장 좋은 성경적 예는 바울이다. 바울의 개종보다 더더욱 극적인 회심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중략)··· 루디아 회심과 빌립보 감옥 간수 개종 역시 위기적 형태의 급진적 돌이킴이다. 바울과 그밖의 사도들에 의해 개종한 대부분의 이방인들 역시 위기적 회심을 한 것처럼 보인다. ···(중략)···
신약성경은 선교사들에 의한 교회 설립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점진적인 돌이킴에 관한 구체적 실례들을 우리에게 주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해서 많은 시간을 두고 일어나는 개종들에 대해 말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아마 디모데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 역시 신자들이었으며 디모데 역시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디모데 역시 그가 자라왔던 유대교 신앙과는 구별되는 기독교 신앙을 아마도 어떤 특정한 때에 가지게 됐을 것이다. 아마 루스드라에서 바울을 만났을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권면으로 미뤄 볼 때, 그리스도인 부모들 자녀들이 겪는 회심은 일반적으로 급진적인 위기심보다는 점진적인 형태의 회심이라 할 수 있다.
···(중략)···
그러므로 언약의 자녀들 돌이킴은 일반적으로 점진적인 유형의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결코 같지 않은 것처럼 그들 돌이킴에서도 많은 차이점들이 있을 것이다.≫
“언약의 자녀들 돌이킴은 일반적으로 점진적인 유형의 것이다.”······. 바로 이것이 류호준 목사님께서 “mediately”를 “차후적”으로 번역하신 ‘까닭’, 즉 ‘배경’입니다.
“언약의 자녀들 돌이킴은 일반적으로 점진적인 유형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제 담벼락 노트 글 <연중론이 말하는 디모데의 회심: 임신 기간이 있는 점진 회심>과 <연중론: 중생(위로부터 태어남)을 설명하는 일에서 개혁 교회 조직신학이 동원한 용어, ‘무의식’과 ‘의식’이라는 심리학 용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를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이해를 돕는 중요한 부분만 옮깁니다.
.
00 14.02.03. 21:16
사계 님,
① ≪‘어릴 때 새 생명을 심어 주신 경우, 어린 아이는 복음을 지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의식)이 없는데, 회심은 복음을 지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의식)과 관련이 있음으로 이런 사람은 복음을 지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의식이 있을 때 회심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② ≪우리는 중생한 어린 아이를 ‘유아 단계에서 중생하고, 그 이후 그가 이해력과 분별력을 갖는 나이가 될 때 회심하는 것’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결코 아니다! ‘어린 아이가 중생할 때 어린 아이 마음속에 초보적 영역에서 회심과 일치하는 어떤 것이 일어난다.’는 의미에서 그 어린 아이는 회심한다.≫와 배치되지 않는 말인가요?
①은 ‘어릴 때는 의식이 없으므로 의식이 있을 때(컸을 때) 회심이 있게 된다.’는 뜻으로 읽혀져서요.
사계四季 14.02.04. 09:13
예. 서로 배치되는 주장입니다. ①은 ‘가정假定중생론을 주장하셨던 아브라함 카이퍼 목사님’과 ‘아브라함 카이퍼 목사님과 영향을 주고 받으셨던 헤르만 바빙크 목사님’ 주장입니다. 또한 ‘루이스 벌콥 목사님’ 주장입니다. ‘믿는 가정(언약의 가정)에서 태어나는 어린 아이(언약의 후손) 경우, 그 아이가 어릴 때 중생한다면 중생 뒤 점진 회심을 한다.’는 이론입니다.
그런데 ‘루이스 벌콥 목사님 {조직신학}은 헤르만 바빙크 목사님 {개혁교의학}을 변주한 책이다.’는 사실을 00 님도 아실 것입니다.
┗ 사계四季 14.02.04. 09:13
②는 ‘해박한 성경원어 실력으로 중생에 대한 바울서신 바울 사도 구절들과 요한일서 요한 사도 구절들에서 확정(definitive) 성화를 발견, 20세기 개혁 교회에 확정 성화 교리(진리)를 확립하셨던 존 머레이 목사님’ 주장입니다. ‘믿는 가정(언약의 가정)에서 태어나는 어린 아이(언약의 후손) 경우, 그 아이가 어릴 때 중생한다면 중생 시 즉각 회심한다.’는 이론입니다.
20세기 개혁 신학자들께서는 ‘확정 성화 발견’을 “존 머레이 목사님 위대한 업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확정 성화 발견은 존 머레이 목사님께서 ② 주장을 하실 수 있게 만든 까닭 하나일 것이다.’고 저는 추측합니다.
.
3월 3일 오후 11:21
박채동 : <수태 뒤 잠자는 믿음의 씨: ‘안토니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immediately”와 “mediately”에 대해 ⑩>
≪우리는 중생한 어린 아이를 ‘유아 단계에서 중생하고, 그 이후 그가 이해력과 분별력을 갖는 나이가 될 때 회심하는 것’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결코 아니다! ‘어린 아이가 중생할 때 어린 아이 마음속에 초보적 영역에서 회심과 일치하는 어떤 것이 일어난다.’는 의미에서 그 어린 아이는 회심한다.≫
“결코 아니다!”······. 2012년 여름 {양무리 마을} 연중론 비평 토론이 끝난 뒤 구입한 ‘존 머레이 {조직신학 ①, ②}’······. 이 책을 사자마자 펼쳐서 읽었던 곳은 당연히 {조직신학 ②} [제16장: 중생]이었습니다.
모태에서 성령 충만해 ‘마리아 뱃속에 계신 주님’을 알아 뵙고 기뻐 뛰어놀았던 세례 요한을 생각하며 ‘모태에서 중생하면 모태에서 회심한다.’고 생각해, 이른바 “중생 뒤 점진 회심”, ‘어릴 때 새 생명을 심어 주신 경우, 어린 아이는 복음을 지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의식)이 없는데, 회심은 복음을 지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의식)과 관련이 있음으로 이런 사람은 복음을 지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의식이 있을 때 회심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이론을 ‘계시 의존 사색’을 따르지 않은 ‘사변’으로 여겼던 저는 ‘“결코 아니다!” 하신 존 머레이 목사님께서도 사변으로 여기셨구나.’ 생각했습니다.
3월 4일 오전 12:38
박채동 : <수태 뒤 잠자는 믿음의 씨: ‘안토니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immediately”와 “mediately”에 대해 ⑪>
다음은 {개혁주의 마을}에서 비밀댓글로 나눈 글입니다. 허락을 받지 않고 옮겨오는 글이기 때문에 저와 대화를 나누신 분은 ‘홍길동’으로 익명 처리합니다.
.
사계四季 14.03.01. 07:04
헤르만 바빙크 목사님 중생론은 ‘중생 시 성령의 실제 내주’를 말하고 연중론은 ‘중생 시 성령의 원리 내주’를 말한다는 점에서 두 중생론은 완전히 틀립니다. 그런데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난 이른바 언약의 자손의 경우 어릴 때 중생한다면 복음을 이해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이 자란 뒤 점진 회심을 한다.”며 그 예로 홍길동 님께서 디모데를 드신 것은 저는 ‘그릇됐다.’고 생각합니다. 즉,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낫다.’고 생각합니다.
┗ 사계四季 14.03.01. 07:05
어린아이 중생 문제에서 ‘헤르만 바빙크, 루이스 벌콥, 안토니 후크마 목사님 중생론’은 ‘존 머레이 목사님 중생론’과 차이가 납니다. 세 분 목사님 중생론과 존 머레이 목사님 중생론은 절대 같은 중생론이 아닙니다. 어린아이 중생 문제에서 앞 세 목사님께서는 ‘중생 뒤 점진 회심’을 말씀하시지만, 존 머레이 목사님께서는 ‘중생 시 즉각 회심’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 사계四季 14.03.01. 07:05
제가 연중론 때문에 중생론을 살펴보면서 안 것은, ‘헤르만 바빙크 목사님과 아브라함 카이퍼 목사님 중생론이 모토라고 할 수 있는 화란 자유대학 계통 중생론’과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전신인 프린스턴신학교, 프린스턴신학교 초대교장이셨던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 중생론이 모토라고 할 수 있는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계통 중생론’은 크게 차이가 난다는 사실입니다.
┗ 사계四季 14.03.01. 07:05
그 차이점을 자세히 적을 수는 없습니다만, 화란 자유대학 계통 중생론은 사변적입니다. 사변적이기 때문에 ㅡ그러께 여름 {양무리 마을} 연중론 비평 토론 때 갈릭 목사님께서 평가하신 말씀을 적자면ㅡ “바빙크 목사님 중생론은 혼란스런 중생론입니다.” 그리고 이 중생론을 이어받아 정리하신 게 루이스 벌콥 목사님 중생론입니다.
그런데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계통 중생론은 ‘중생을 부활과 같은 순간 창조 사건으로 설명하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단순하고도 명쾌하기 때문에 사변적이지가 않습니다. 이 단순하고도 명쾌한 점이 여실히 드러난 게 바로 존 머레이 목사님 중생론입니다.
┗ 사계四季 14.03.01. 07:05
이런 문제를 두고 지난해 여름에 독립개신교회 형제 교단인 독립개혁장로교회, 독립개혁장로교회 00교회 000 님과 전화 통화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000 님에게 “존 머레이 목사님 {조직신학}은 그 분량에서 루이스 벌콥 목사님 {조직신학}보다 월등히 적지만, 루이스 벌콥 목사님 {조직신학}에서 애매모호했던 부분들이 명쾌하게 설명이 됩니다. 그런 부분이 바로 중생론 부분입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000 님은 “수 년 전에 제가 저희 교회 담임목사님께 조직신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하자, 저희 목사님도 ‘루이스 벌콥 목사님 {조직신학}을 공부하면서 꼭 존 머레이 {조직신학}을 공부하십시오.’ 하시면서 사계 님과 비슷한 말씀을 하시더군요.”라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 사계四季 14.03.01. 07:05
어린아이 중생 문제에서 ‘중생 뒤 점진 회심을 말씀하시는 헤르만 바빙크, 루이스 벌콥, 안토니 후크마 목사님 중생론’과 ‘중생 시 즉각 회심을 말씀하시는 존 머레이 목사님 중생론’과 틀립니다. 절대 같은 중생론이 아닙니다.
┗ 사계四季 14.03.01. 07:06
참고로, 윌리엄 퍼킨스 목사님 ‘구원의 황금사슬’을 시작으로 청교도 신학자들 ‘회심 형태(과정)론’이 생겨났는데, ‘청교도 신학자들 회심 형태론이 극단으로 간 것이 바로 연중론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생과 회심 사이에 ‘시간 간격’을 두는 ‘극단’의 청교도 신학자들 ‘회심 형태론’에 맨 처음 의문을 품으셨던 목사님이 바로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이십니다. 청교도 신학자들 ‘회심 형태론’에 의문을 품으신 뒤 성경의 가르침대로 ‘중생 시 즉각 회심’을 말씀하신 원조, 이른바 “순중론의 원조”는 바로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이신 것입니다.
┗ 홍길동 14.03.01. 09:15
화란 자유대학 계통 중생론과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계통 중생론의 다름에 대해서 언제 한번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잘 배우겠습니다~ ^^
그런데 제가 읽기로는 유아 회심에 대한 차이로 보이는 부분은 용어 차이가 아닐까 싶은데요. 왜냐하면 어린아이 회심에 대해서 존 머레이 목사님은 항상 단서를 붙여서 설명하시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초보적 영역에서 회심과 일치하는 어떤 것이 일어난다는 의미에서 그 어린아이는 회심한다.” 식으로 말이지요. 만약 유아 경우에도 “중생 시 회심한다.”는 원리를 견지하려면 회심의 의식 영역적 측면이 결국 모호해질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 홍길동 14.03.01. 09:17
이 원리를 견지하게 되면 결국 태아 경우도 중생 시 회심하게 되고, 그들도 모태에서 ‘회심한다.’까지 가게 되지 않을까요?
궁금해서 질문 드립니다.~~^^
┗ 사계四季 14.03.01. 21:14
저는 모태에서 중생과 회심을 한 인물로는 세례 요한으로 생각합니다. 즉, 성령님께서 모태에 있는 세례 요한에게 충만하실 수 있으셨던 것은 성령님께서 모태에 있는 세례 요한을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즉, 중생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세례 요한 어머니 엘리사벳을 방문하자 성령 충만한 세례 요한은 엘리사벳 뱃속에서 마리아 뱃속에 계시는 주님을 알고 기뻐 뛰어놉니다. 이것은 중생한 세례 요한의 반응입니다. 즉, 중생의 발현입니다.
존 머레이 목사님 <어린아이 중생>을 이 관점에서 읽으시면 됩니다.
┗ 사계四季 14.03.02. 07:00
연중론은 ‘중생 시 즉각 회심’과 ‘중생 뒤 점진 회심’을 주장합니다. 물론, 제가 위 댓글에서 언급했다시피, 헤르만 바빙크, 루이스 벌콥, 안토니 후크마 목사님 ‘중생 뒤 점진 회심’ 이론은 연중론의 ‘중생 뒤 점진 회심’ 이론과 차원이 다릅니다.
‘수태’라는 말은 곧 ‘임신’이라는 말과 똑같은 말이건만 {영혼의 의사}는 “수태를 통해 임신을 하게 되고”라는 엉뚱한 서술을 하고, 중생 시 주시는 ‘생명’이 곧 ‘새로운 본성ㅡ성경 에스겔서에 적힌 용어로는 “새 마음”ㅡ’이건만, “중생 시에 생명을 주시고 출산 시에 새로운 본성을 주신다.”는 엉뚱한 서술을 하는 것이 {영혼의 의사}이기 때문입니다.
┗ 사계四季 14.03.01. 21:14
즉, 연중론 목사님들과 연중론 지지자 분들만 모를 뿐, {양무리 마을}에서 ‘soon’ 님이 잘 지적하셨다시피 ‘좌충우돌 자중지란 연중론’은 ‘두 번 중생’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 사계四季 14.03.01. 21:14
지금 {양무리 마을}에서 홀리조이 님은 “헤르만 바빙크 목사님 {개혁교의학}을 많이 참고했다.”는 예장 고신 ‘유해무 목사님 중생론’을 언급하시며 연중론을 변호하기에 애를 쓰시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개혁주의 마을} 연중론 비평에 관한 제 글들은 모두 ‘중생 시 즉각 회심’만을 말해 왔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양무리 마을} 연중론 비평 처음부터 아예 헤르만 바빙크, 루이스 벌콥, 안토니 후크마 목사님 중생론에서 ‘중생 뒤 점진 회심’ 이론은 배제했습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마을}에 써 놓은 제 연중론 비평문들을 읽으시면, 제가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홍길동 님도 아실 것입니다.
3월 4일 오전 00:42
박채동 : <20세기 개혁 신학 보물로서 확정성화 진리>
“{개혁주의 마을}에 써 놓은 연중론 비평문들을 읽으시면, 제가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홍길동 님도 아실 것입니다.” 의미는 ‘벌콥 목사님 중생론 독해 문제로 {양무리 마을}에서 한국 교회 연중론 목사님들과 토론을 해 봐야, 영겁회귀 도돌이표 토론입니다. ‘중생 뒤 점진 회심을 말씀하시는 벌콥 목사님 중생론’으로 연중론과 싸워봐야 끝낼 수 없는 토론입니다. 즉, ‘20세기 개혁 신학 보물로서 확정성화 진리를 확립하신 존 머레이 목사님 중생론, 중생 시 즉각 회심만을 말씀하시는 존 머레이 목사님 중생론으로 연중론과 싸워야 끝낼 수 있는 토론입니다.’는 뜻이었습니다.
3월 4일 오전 00: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