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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흥군은 천경자 화백 큰 딸 이혜선씨와 전시관 설치 협약식을 맺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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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경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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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경자 화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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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경자 화백은 전남 고흥 출신이다.
현재 팔순이 넘은 나이에 머나먼 미국 뉴욕 땅에서 병마와 싸우고 있지만, 그 누구보다 고향을 사랑했던 이 지역의 대표적인 예술인 중의 한 사람 천경자. 결혼 이후 고향을 떠나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살아야 했던 천경자 화백이 고향에 새로운 둥지를 틀게 됐다.
8일 오후 2시 고흥군청 회의실에서 천경자 화백의 큰딸 이혜선(62·섬유공예가)씨와 박병종 고흥군수는 천경자 전시관 설치 협약식을 맺었다. 고흥종합문화회관 1층에 들어설 전시관에는 천 화백의 스케치 작품, 미술도구, 저서 등 50여점의 유품이 전시될 예정이다. 지난 5월 이혜선씨는 경기도 양주시와 장흥관광단지에 미술관을 짓기로 결정한 바 있다.
고흥군은 기존 홍보관으로 사용돼 온 45평의 공간을 이달부터 실내 인테리어 및 작품 설치공사에 들어가 오는 11월 1일 '고흥 군민의 날'에 정식 개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늦어도 11월 중에는 공사를 마치고 일반에 전시관을 개방할 예정이다.
이날 협약식이 끝나고 직접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이혜선씨의 거부로 천경자 화백의 근황 등 궁금한 것은 취재할 수 없었다. 이날 박병종 군수는 훗날을 대비해 천경자 화백의 사후 묘지를 포함한 추모시설 제공도 제안했지만, 이혜선씨로부터 확실한 답변은 듣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동안 세월이 흐르면서 사실 고흥에는 천경자 화백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몇몇 지인들이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고,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잠시 관내 모학교에서 임시교사로 지내던 시절 교내에서 처음 전시회를 가지고 작품도 기증했지만, 지금은 소재를 찾을 길이 없다.
천경자 화백의 고향, 전남 고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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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영산 아래 점암면 성주마을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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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경필 |
| 이번에 고흥군은 천경자 화백이 태어난 팔영산 아래 점암면 성주마을 입구에 출생지를 알리는 관광안내표지판도 세울 계획이다. 지역 출신 주요인물에 대한 생가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추진 중인 것.
하지만 천경자 화백의 생가는 그동안 몇 차례 이사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고 생가라고 주장할 만한 근거를 찾기조차 쉽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소장품을 전시할 미술관 건립도 중요하겠지만, 그동안 정작 고흥의 대표적인 예술인에 대한 지역의 평가와 고향주민들의 관심이 부족했던 것은 되짚어 봐야 할 점이다.
천경자 화백은 당시 외가인 점암면 성주마을에서 태어나 잠시 어린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필자가 지난 2004년 천경자 화백의 고향에 대한 취재에 나서면서 그동안 펴낸 자서전과 친인척, 마을 주민들의 증언으로 확인한 것이다.
현재도 이 마을에는 당시의 그대로 형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기와 주택이 남아 있다. 호적상에는 고흥읍 호형리(동촌마을)로 기재되어 있다. 실제 본가는 읍내에 있었지만, 이사를 두어번 해서 집터와 생가 여부는 아직도 불확실한 실정이다. 그동안 생가로 알려진 고흥읍 옥하리는 나중에 읍내로 이사를 한 외가가 있었고, 현재는 헐리고 경찰서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외조부의 사랑을 받았던 '짜야', 천경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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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가운데 검은 기와주택이 천경자 화백이 태어난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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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경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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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3년 당시 실제 외조부를 모델로 직접 그린 작품 조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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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특히 천경자 화백은 외조부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당시 외조부는 어린 외손녀를 "짜야"라고 불렀다. 천경자 화백의 원래 이름은 '옥자'였다. 대부분의 인물기록에는 1924년 11월 11일생으로 기재되어 있지만, 자서전과 가까운 친척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는 1923년 10월 5일생이다. 호적에는 1년 늦게 실렸다.
천경자 화백은 일제강점기 고흥동초등학교(당시 보통학교)를 나와 전남여고(당시 광주공립여고보, 후에 통합하여 광주욱고녀로 개칭)를 졸업했다. 당시 고흥군에서 6명이 입학시험을 치러 3명만이 합격할 정도였다.
전남여고에 진학하기 전까지 고흥에서 성장했다. 또 결혼(당시 전통 혼례)도 당시 동촌마을 생가에서 했고 결혼 직후 전남여고 교사로 직장을 옮기면서 사실상 고향을 떠났다.
일본 유학을 떠나기 전 부유했던 외가와 집안의 가세도 기울어졌다. 각종 전시회와 홍익대 교수로 안정된 삶을 찾기 전까지 천 화백은 가난했고 한국전쟁 때 첫 남편의 실종으로 사실상 두 번의 결혼 등 여성으로서 힘든 삶을 살았다.
천경자 화백은 자서전 성격의 수필집을 여러 권 발간했을 정도로 수필가로도 실력을 인정 받았다. <유성이 가는 곳> <언덕 위의 양옥집> <한>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탱고가 흐르는 황혼> <나는 내 삶을 살고 싶다> <꽃과 색채와 바람> <나의 소녀시절> <남태평양에 가다> 등 펴낸 수필집은 대부분 자서전 형태로 어린 시절 고향에서의 추억, 그리고 결혼 이후 고단했던 삶을 회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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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교(보통학교) 선배를 소재로 한 길례언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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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특히 해방 이전의 내용들은 당시 시대상과 고향에 대한 기억, 고향마을과 가족에 대한 애정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어 향토사료적으로도 그 의미가 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천경자 화백의 작품 중에 유명한 <길례언니>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보통학교 선배로 당시 소록도병원 간호사였고 그 후 작품에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천경자 화백의 두 동생은 먼저 세상을 떠났다. 4살 터울 누이동생은 1952년 24살에 악성 결핵으로 사망했다. 쌍둥이라 불릴 정도로 서로 닮았고 친하게 지냈던 누이동생의 죽음은 초기 작품에 많은 영향을 미칠 정도로 큰 충격이었고 아픔이었다.
누이동생 '옥희'는 서울대 미대에 합격했지만, 해방전 일제학교(광주욱고녀)를 졸업했다는 투서로 합격이 취소됐다. 다시 홍익대에 입학하게 됐지만 결국 병으로 꿈을 펼쳐 보지도 못했다. 남동생도 육사11기 출신(전두환 전대통령과 동기)으로 중령으로 예편하여 지난 2000년에 사망했다.
이국 땅에서 병마와 싸우고 있는 천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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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경매에서 12억원에 낙찰된 초원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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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경자 화백의 가족사는 그의 작품에 투영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화려한 채색의 작품 속에는 그녀의 고독과 고단했던 삶, 한 여인의 슬픔이 여백조차 남기지 않은 채 살포시 숨겨져 있다. 수억원을 호가하는 작품도 이 어둡고 험난했던 삶을 이해할 수 있다면 더 쉽고 진솔하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5월 K옥션 경매에 나온 작품 <초원2>는 12억원에 낙찰됐다. 지난 해에는 정중헌씨(조선일보 논설위원)가 천경자 평전 <천경자의 환상여행>을 펴냈고 중앙M&B가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등 그동안 펴낸 수필집을 재발간하는 등 노 화가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시도되고 있다. '인간 천경자'에 대한 미술애호가들의 관심과 사랑이 식지 않고 있는 것.
이제 실제 나이 84세이고 2003년 뇌출혈로 쓰러져 언어소통과 거동이 불가능한 상태라고 한다. 병의 원인은 지난 1991년 <미인도> 위작시비 사건으로 얻은 충격으로 전해진다. 당시 천경자 화백은 위작이라고 주장했고 소장했던 국립현대미술관과 화랑협회는 진품이라고 맞섰지만, 8년만에 위조범 권모씨가 자백하면서 사실상 일단락됐다.
노 화가는 고향을 무척 사랑했다. 하지만 얽힌 가족사와 부유했던 집안의 퇴락으로 마음 편하게 고향을 찾아가지 못했다. 화가의 자존심으로 영글어진 작품의 가치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던 주변의 공짜 작품 요청도 고향에 대한 애증과 함께 적당한 거리를 두도록 작용했던 것 같다.
어느 날은 고향이 그리워 찾았지만, 지인들을 만나지 못하고 홀로 조용히 소록도만 둘러보고 가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도 70~80대의 마을 노인들은 아직도 천경자 화백이 아닌 인간 '옥자'를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부디 병을 떨치고 다시 일어서 추억이 서린 고향의 푸른 산천과 벗들을 다시 만나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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