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진실의 전부를 주지 마세요 [제4편]
좋은 시는 작은 진실들에 충실하다. 좋은 시인은 그 진실이 아무리 작더라도 그것이 참이라면 경의를 표한다. 그 경의는 작은 진실의 세목들을 충실하게 묘사하는 것에서 숨길 수 없이 드러난다. 모름은 모르는 것이고, 아는 것만이 아는 것이다. 좋은 시인은 모름을 모름으로 인지할 뿐,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시인은 “멀리 이동하는 짐승들의 무리가 보였다/어디로 가는지는 몰랐다”(유진목, 「동산』)라고 쓴다. 시는 삶의 찰나들, 모호한 무의식적 꿈의 신호들, 구체적 경험의 국면들, 아침이 오고 다시 저녁이 오는일 따위에 대해 쓴다. 시인 유진목에 따르면, 시인이란 사랑하는 이의 심장으로부터 오는 가을, 내가 모르는 체위로 사랑을 하는 것, 앙상해진 심장 가까이 나침반을 대어보는 일, 펄럭이는 바람을 타고 나뭇잎 묻은 영혼이 오는 사태에 대해 쓰는 자다.
화분을 키우고 소리 내어 점을 친다 그리하여 당신이 모르는 일을 알게 된다 죽지 않는 법을 익히고 항상 그래왔다 믿는다 맨 처음 식물이 죽던 날 이유를 몰랐다 왜 죽었을까 나 때문일까 죽어가는 식물에게 물을 주고 남은 목을 축이는 일 모자란 햇빛이 그늘을 넓히는 일 밤에는 화분을 옮기고 커튼을 친다 누군가 구둣발로 오줌을 누었다 창문을 두드리는 오줌 줄기 어떤 노래를 들으면 지린내가 나는 일 귀를 막고 숨을 참는 일 죽는다 안 죽는다 산다 못 산다 병든 잎을 떼어내면서 낮에는 화분을 들고 산책을 한다 맑고 따뜻한 날씨의 감정을 간직하려고 보드라운 구름의 생각을 따르면서 그러다 보면 그늘에서 쉬어가는 일도 그중에 좋아하는 그늘이 생기는 일도 조금 더 자라면 분갈이를 해줄게 봐둔 게 있어 그리고 나도 집을 옮기게 되겠지 발코니가 있었으면 좋겠다 죽은 화분을 버리고 돌아오던 날 바로 거기서부터다 나는 당신이 모르는 일을 많이 했다
-유진목, 「식물의 방」 전문
「식물의 방」은 반지하 방에서 살며 식물을 키우는 이의 소소한 경험을 바탕으로 씌어진다. 이때 중심을 꿰뚫고 지나가는 것은 현실과 꿈의 어긋남에서 빚어지는 슬픔이다. 시의 화자는 화분을 키우고 점을 치며 산다. 그가 거주하는 곳은 햇빛이 잘 들지 않고, 그늘에 잠긴 화분의 식물들은 잘 시든다. 반지하 방 생활자들은 함부로 방뇨하는 자의 “창문을 두드리는 오줌 줄”" 소리와 “지린내”가 만드는 불쾌함과 악취의 고통에 방치되어 있다. 이것은 삶이 품은 모종의 비참과 수모의 작은 표상들일 테다. 반지하 방 생활자가 화분 속 식물의 “병든 잎을 떼어내면서 낮에는 화분을 들고 산책을” 나서는 일은 범상한 부분이다. 딱히 이유를 모른 채 시들어 죽어가는 식물들이 처한 상황과 ‘나’의 처지는 닮아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겨우 “죽어가는 식물에게 물을 주고 남은 목을 축이는 일”이다. 향일성 식물들에게 햇빛을 쬐게 하고, 분갈이를 해주는 것은 곧 삶의 최저주의에 대한 미약한 저항이고, 생명 세계 일원으로서 쇠락의 어두운 기운에 감싸인 세계를 향한 가장 낮은 단계의 도덕적 실천일 테다. 반지하 방 식물들에 드리워진 그늘은 모든 생명 억압적인 어둠의 작은 표상이다. 시인은 무심코 "나도 집을 옮기게 되겠지 발코니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소망을 펼쳐낸다. 잘 산다는 것은 주어진 세계에 피동적으로 존재하기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섬, 즉 초월적 기투다. 반지하 방에서 발코니가 있는 지상의 집으로의 이사는 지하에서 지상으로, 그늘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에로 나아가는 향일성의 무의식적 욕망과 초월적 기투를 드러낸다. 그런 맥락에서 이 시는 햇빛의 생명 정치학, 향일성의 시학을 펼쳐내고 있는 셈이다.
장석주 「은유의 힘」
2024. 3. 15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