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 29일 화요일 흐림 어김없이 6시면 모닝콜이다. 7시에 식사를 하고 8시쯤에 호텔을 출발하였다. 어제와 달리 짐을 싸들고 나와 차에 실었다.
낙양을 떠나 3시간 반 정도 걸려 개봉(開封)에 도착하였다. 개봉은 중국에서 서안(西安) ․ 낙양(洛陽)과 함께 3대 고도(古都)로 알려졌다. 황하(黃河)의 중하류에 위치한 개봉은 북송시대에 이미 인구 100만이 넘는 큰 도시였다고 한다. 황하의 범람은 자못 유명한 데 송대의 개봉은 현재의 개봉 지면에서 13미터 아래에 묻혀 있다고 할 정도로 황하의 위용은 대단했던 모양이다. 재미있는 것은 《맹자(孟子)》라는 책은 맹자가 양혜왕(梁惠王)을 만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데 개봉이 바로 그 양(梁) 땅이었다고 하니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 없었다.
개봉에서 처음 들른 곳은 철탑공원이라는 곳이었다. 13층짜리 철탑이 웅장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 가히 장관이었다. 말은 철탑이지만 실제로 철로 된 것은 아니었다. 도자기 벽돌로 만든 것인데 마치 철로 만든 것처럼 보여 철탑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10위안을 주고 탑 안을 들어가 보았는데 통로가 좁은 데다 어두워 더듬거리며 올라가야 했다.
공원을 빠져 나올 때 장택단(張擇端)이 그렸다는 유명한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하나를 사들었다. 두루마리로 되에 펼치면 제법 길쭉하여 집에 걸기도 버거운 것이었지만 비교적 싼 값인 20위안을 주고 하나 거머쥐었다. 청명상하도는 송대 청명절에 개봉 사람들이 성묘를 가며 교외로 나들이 가는 것을 주제로 그린 그림으로 당시의 실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하여 유명한 그림이라고 한다.
12시 반에서 1시 20분까지 옥상대주점(玉祥大酒店)에서 점심을 해결한 뒤 대상국사(大相國寺)라는 절을 찾았다. 전국시대 4공자의 하나로 유명한 위(衛)나라 신릉군(信陵君)의 집이 있었던 자리라고 한다. 그곳에 북제(北齊) 때 건국사(建國寺)라는 절이 세워졌고, 나중에 상국사로 고쳐진 것은 당(唐)나라 예종(睿宗)이 황제가 되기 전 상왕(相王)이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상국사로 고쳤다고 한다. 현란한 건물이나 조각품들이 눈길을 끌었지만 그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관심 있게 다가온 것은 아무래도 신라 승인 김교각 스님의 상이었다. 김교각 스님이 이곳에서는 지장보살로 섬김을 받는다고 하니 한류의 기원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던 모양이다. 길을 지나다 대장금과 관련된 포스터가 하나 눈에 들어온다. 한류의 현장을 조금이나마 친견할 수 있었던 셈이다.
대상국사를 빠져 나오기 전에 조각품 하나가 유독 눈을 끌었다. 도대체 절에 있을 것 같지 않은 동작을 취하고 있는 묘한 조각상이 딱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자세히 보니 수호지에 등장하는 힘깨나 쓰는 노지심이 틀림없었다. 어떤 연유로 내로라하는 이름난 사찰에서 그의 조각상을 설치하게 되었던 것인가? 수호지에 보면 노지심이 중노릇하는 장면이 있는 데 이 절이야말로 바로 그가 주석한 곳으로 묘사되었던 것이다. 수호지야 시내암이 지은 소설이니 사실일 리 없지만 이렇게 그의 모습이 사실처럼 둔갑하여 그 잔재를 여기에 덩그마니 남기게 된 것이다. 언젠가 칠장사에 갔더니 임꺽정을 촬영한 장소라고 사진을 붙여놓은 것을 본 일이 있는 데 사람들의 생각은 국가를 초월하는 뭔가가 있는 가보다.
어쨌든 그 조각상은 괴력의 노지심이 두 손으로 나무를 부여잡고 그것을 뿌리째 뽑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 중 어떤 사람은 그곳에 기대어 사진을 찍기도 하였고, 어떤 사람은 노지심과 같이 나무를 뽑는 포즈를 취하며 다녀간 흔적을 남기고자 하였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것은 왠지 약간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또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건 힘쓰는 모양으로 보아 나무를 뽑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나무를 심으려고 하는 것 같다고. 같이 있던 사람들이 따라 웃으며 얼마간 수긍하는 눈치였다.
다음으로 들른 것은 포공사(包公祠)였다. 시침은 이제 2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포공사는 개봉성의 남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데 우리에게 포청천으로 잘 알려진 포증(包拯)의 사당이다. 그는 청렴결백한 관리로 공평무사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지방관으로 있을 때는 부당한 세금을 없애고 백성들 편에서 억울한 사건을 명쾌하게 해결해주었으며, 판관이 되어서는 부패한 관리들을 엄정하게 처벌하여 그 명성이 자자하였다. 송대 이후 청대에 이르기까지 그를 주제로 한 소설 작품이 수없이 많이 나왔다고 하니 드라마 포청천의 인기는 결코 어제 오늘에 비로소 생긴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포청천은 자손들에게도 벼슬하다가 뇌물 받는 자가 있으면 본가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고 죽은 뒤에도 선산에 묻히지 못하게 하라고 유언할 정도로 공사를 구분하는 데 철저했다고 한다. 그의 무덤마저 친구가 쓴 묘지명이 있을 뿐 부장품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사치와 향락을 무슨 대단한 위세인양 하고, 뇌물 받는 것을 관행으로 여겨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관리들이 한번쯤 깊이 새겨 보아야 할 일이다. 인생은 짧고 역사는 길다는 사실을 그는 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3시가 가까워서 일행은 용정공원(龍亭公園)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은 옛날에 황궁 터가 있었다고 하지만 황하의 범람으로 지하 수십 미터 속에 묻혀버렸다고 한다. 명청대에도 나름대로 위용을 뽐냈던 곳 같은 데, 현재는 공원으로 되어 있고 길 양편으로 큰 호수를 끼고 있다. 올해 북경에서 개최될 올림픽과 곧 있게 될 춘절(春節)과 관련된 현란한 시설물들이 지나는 이들의 눈을 두리번거리게 하였다.
용정의 관람을 마치고 나왔을 때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일행 중 같이 온 한 가족의 부자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을 찾느라 잠시 차 안에서 기다렸다 떠나는 촌극을 빚어야 했다. 얼마 있다 우리는 한원(翰苑)이라고는 곳에 들러 관람을 하였다. 중국 역대의 유명한 글씨들이 벽마다 빼꼭하게 들어차 있었다. 시간 관계상 오래 지체할 수는 없었고 그야말로 주마간산 격으로 죽 훑어보며 지나칠 수밖에 없다는 점이 좀 아쉬웠다.
4시 50분 청명상하원(淸明上河園)이라는 공원을 방문하였다. 이 공원은 앞서 산 바 있는 장택단(張擇端)의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라는 그림을 복원하여 만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공원 내로 들어서자마자 큰 동상이 우리를 맞았고 바로 그가 장택단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니 우리는 송대의 그림을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이제 아예 그림 속으로 들어간 셈이다. 송대 당시의 시가지 및 교외, 교량, 조운선, 농촌 풍경 등이 죽 펼쳐진 채 우리를 끌어들였다. 몇 백 년의 시공을 초월한 만남이 자연스레 이루어졌던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는 잠시 시장에 들러보기로 하였다. 중국인들의 실제 삶을 현장에서 지켜보고자함이었다. 길이 진창이라 다니기가 불편했고, 딱히 살 만한 물건은 없어보였다. 춘절이 가까워서인지 복(福)자가 쓰인 종이기구 같은 것이 눈에 많이 띄었고 역시 붉은색을 좋아하는 중국인의 색상들이 곳곳에 넘쳐나고 있었다. 자가용, 오토바이, 자전거 등이 사람들과 뒤섞이며 잘도 지나다녔다. 무질서한 듯하면서도 뭔가 나름대로의 질서 속에 사람들은 부지런히 오가고 있었다.
6시에 저녁을 먹고 7시 30분에 호텔로 들어갔다. 5성급 호텔로 이름은 개봉중주국제반점(開封中州國際飯店)이라 했다. 입구부터 번쩍번쩍하는 것이 이왕의 다른 호텔과는 달리 고급스러워보였다. 별 하나 차이가 이렇게 나는가 싶을 정도로 호화롭게 우리를 반겼다. 방에서 전기 코드를 꽂다 뭔가 잘못되어 방의 전등이 모두 나갔는데 바로 와서 고쳐주었다.
이제 중국에서 보내는 밤도 하루뿐이었다. 그러니 이들이 누구라고 그냥 지나칠 리가 있겠는가? 이미 호텔 방에 들어서기 전에 9시에 로비에서 모이자는 귀띔이 있었다. 시간이 되자 하나 둘 각자의 방을 빠져나와 로비에 모여들었고 우리는 밤길을 10여 분 이상 걸어 야시(夜市)를 찾았다. 포장마차처럼 된 허름한 집들이 도열해 있었고 우리는 그 중 한 집을 골라 찾아들었다. 술은 당연히 그 중심적 위치를 사양할 리 없었고, 양꼬치를 비롯한 몇몇 안주가 사람들 사이로 놓여진 상태에서 이러저러한 이야기꽃을 피우며 중국에서의 마지막 날을 보내는 아쉬움을 달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