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누리 자유게시판 음쩜셋님이 쓴 글입니다..
글의 상황이나 명칭이 낯설어 이해가 안가는 부분도 있겠지만,
일단 다섯 단락까지만 읽어보시고, 마음이 끌리면 마저 읽어 보셔요~
------------------------------------------------------------------
밥 딜런을 오랜만에 다시 꺼내서 듣고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어야 무고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었음을 깨달을까요'를 묻고 그 대답이 바람에 실려 있다고 한 게 벌써 사십여 년 전이군요. 반전? 솔직히 말씀드려 저는 그것이 장례식과 유사한 것이라고 보는 입장을 상당히 지지하는 편입니다.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를 위한 것이며, 전쟁의 현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쟁을 바라보는 자를 위한 것이라고 말이죠. 파시스트들이 전쟁을 인간형의 지고지순한 완성 과정으로 보고 있다면, 어떤 감수성의 에너지는 반전이라는 테마를 인생에 대한 사유의 한 범주로 자연스럽게 상정하고 있습니다. 문화 상품들의 생산 층위에서 반전은 전쟁 없이도 허벌나게 존재하여 왔지요. 쁘띠적 자유주의의 윤리학 같은 것 말입니다.
그렇지요, 쁘띠에게 반전은 윤리적인 문제이고, 예를 들자면 완전군장에 반대하는 나체이며 전투기의 속도에 반대하는 멈춤이며 미사일의 폭발음에 반하여 고요를 원하는 일정한 반문명의 입장입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무정부적인 것이고 이데올로기보다는 정서와 양심의 아픔입니다. 아픔. 정말이지 마음이 아픕니다. 이라크 인구의 25퍼센트를 차지한다는 아이들이 내몰린 학살의 공포 앞에서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이 고통은 단순한 공포의 전이가 아닙니다. 제 자신이 거기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는 식의 이기가 아니라는 겁니다. 쁘띠는 최종 국면에서 자기를 파괴합니다. 저의 아픔은 제가 전쟁을 중단시킬 수 없다는 무기력에 의한 거의 종교적인 원죄의식입니다. 딜런의 거친 목소리를 따라 바람에 귀를 기울여보지만, 거기에 실린 대답은 핵폭풍의 소리, 혹은 전쟁 시장을 장악하기 혈안이 된 뉴스 프로그램들의 오케스트레이션 효과음뿐입니다. 저를 고통스럽게 하는 윤리학적 자극은 그저 고통만을 줄 뿐 해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쁘띠가 좌파를 향해 던지는 관심은 무슨 이유이겠습니까?
바로, 최종적인 대답입니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답입니다. 사람을 죽이지 않고 볼 일이지 죽은 뒤에 49일 동안 기도를 해준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오해하지는 마세요. 쁘띠는 사실 정치적 실용주의 같은 건 별로 관심 없습니다. (쁘띠가 관념론을 철학적 기반으로 삼고 있다는 걸 망각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만일 좌파가 단지 일반적인 반전의 지형에서 제 옆에 서 있는 것에 불과하다면 적어도 반전에 관한 한 '좌파를 지향하는 쁘띠'라는 저의 정체성은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되겠지요. 제가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직면해서도 여전히 좌파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좌파란 건 최종 심급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저의 일정한 신뢰와 존경 때문이지요.
1. 반전의 통일 대오를 반대합니다.
왠지 몰라도 이렇게 시작하고 싶습니다. 일종의 원론입니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반전의 대오를 흐뜨려서는 안된다'는 식의 주장은 좌파인가 아닌가 하는 점과는 사실상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좌파는 반전 이후에 존재하는 개념이랄까요. 반전이 어떤 인간주의의 윤리적 발현이라면 좌파의 반전은 그러한 낭만적 에너지가 구체적인 정치 지형에서 표현되고 충돌하는 지점들에 대해 정확한 입장을 제출하는 것이 되어야겠지요.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뉴스 보도문 수준의 반전에서는 시라크를 반전의 지도자로 이미지화할 수 있지만, 유엔에 예치되어 있는 4백억 달러의 이라크 석유 대금의 용도를 둘러싼 이전투구의 차원에서는 전쟁의 실체적 원인인 제국주의 자본 포악의 한 축으로 파악이 됩니다. 좌파에게 반전은 이를 테면 안티 시라크를 명확히 표현하는 반전 방법의 모색이 될 겁니다. '진짜 반전' 이라는 것이지요.
조금 막말을 해볼 수도 있습니다. 좌파의 반전은 어느 분의 게시물 제목처럼 '제국주의에 의한 전쟁을 제국주의에 대한 전쟁으로 전환'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혹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 반대가 사실상 각국의 주전론자에 대항하는 일정한 내전을 조직한다는 말도 가능할 겁니다. 저는 이런 종류의 수사학에 대해 일반적인 정서의 차원에서 당연히 거부감을 갖고 있습니다. (달리 쁘띠이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저의 정서가 자유주의적이고 좌파의 정서가 계급인식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단순한 감수성의 충돌은 아닐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최종 심급의 문제, 혹은 구체성의 문제일 뿐입니다. 반전을 제국주의 타격/내전으로 전환하는 이데올로기에 찬성하기 위해서는 그 격돌로 인해 대체될 수 있는 시스템에 대한 납득을 당연한 전제 조건으로 합니다. 굳이 내전이라는 격정적인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겠지요. 반전 대오의 통일성이라는 건 솔직히 말해 블랙 호크 다운의 한 장면을 삽입하여 시간전을 드라마화한 뒤 오폭과 민간인 사상의 위험을 전하는 뉴스 보도의 무기력한 시스템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쁘띠의 자기파괴적 경향은 본질적으로 부르조아 정치 시스템의 유연함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입니다. 한 손에는 기관총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반전 피켓을 들고 있는 남신상이 바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시스템이라는 것입니다.
반전의 근거라는 측면을 한 번 보지요. 예를 들어 수군작님의 글을 비판하도록 하겠습니다. 수군작님은 '왜 정치 총파업이냐고?' 라는 게시물에서 '전쟁은 결국 젤로 만만한 우리와 우리 자식들을 죽이니까!'라는 부분을 첫번째 항목으로 거론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긍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죽음이라는 공포는 경우에 따라서 '한반도 전쟁의 사상자가 될 수 있으므로 이라크의 희생을 묵인한다'라는 정치적 입장과 동상이몽식의 해괴한 충돌을 벌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국제연대/계급적 세계주의의 관점에서 이라크 민중에 대한 형제애를 논거로 제시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사실 자유주의적 감수성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앞서 저는 제 마음의 아픔이 단순한 공포의 전이가 아니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제법 일반적인 심리학이라고 결론내릴 수 있습니다. 쁘띠적 차원에서 반전은 공포감을 일단 뛰어넘은, 전쟁중단의 윤리적 욕망인데, 한편으로는 그 욕망은 발현되자마자 한계와 무기력에 부딪쳐 좌절합니다. 한 캔의 맥주만으로도, 혹은 짧은 엘레지를 듣는 것만으로도 난데없는 세계평화를 바라는 한 방울의 눈물이 흘러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좌파의 반전 근거는 공포가 아닌, 바로 이러한 일반적 반전 욕망의 종착점 바로 다음 걸음에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밥 딜런으로는 부족해. 바람이 아니라 좌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렴, 하고 넌지시 유혹하는 것입니다. 혹은, 진짜 전쟁이 중단되기를 바란다면 좌파의 에너지에 동의하라,고 자신있게 소리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약간의 오해가 있을 수 있어, 첨언합니다. 수군작님을 텍스트 삼은 것은 그 분의 유명세에 기대어 좌파의 뚜렷하지 못함을 언급하기 위함이지 수군작님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닙니다. 수군작님은 제가 뽑은 게시물의 다른 항목들에서 '좌파'라는 것과 '힘'의 문제를 분명히 언급하고 계십니다. 일부 발췌에 의한 오독은 아니라는 점을 주의해 주시길.)
저는 반전 대오의 통일을 위한 좌파의 노력을 반대합니다. 좀 너스레를 떨어 표현하자면 좌파의 자리는 반전 대오의 지도라는 매우 낡고 위험한 의자입니다. 반전 대오의 통일? 솔직히 조금 우습게 들리기도 합니다. 전쟁이라는 최고의 폭력에 직면한 정치적, 철학적, 문화적 에너지들은 어차피 각각의 다양한 근거 속에서 울부짖고 몸을 부대낍니다. 그러나 전투를 중단시키는 것은 장기간의 전쟁으로 인해 손익분기점을 벗어난 베트남의 경우처럼, 혹은 전술적 실패로 인해 국익의 자극을 받아 이루어진 미군의 소말리아 철수처럼, 더 멀리는 십자군의 경우처럼, 주전론자들의 분열과 회계장부였을 뿐입니다. 반전 에너지가 실제로 전쟁을 중단시키는 일이 만일 생긴다면 그것은 좌파의 몫이 될 것입니다. 좌파가 그것을 하지 못한다면, 더이상 좌파가 아니겠지요. 좌파는 바로 그 꿈을 위해 일종의 악역을 떠맡아야 합니다. 현대적 도덕률로 정체되어 있는 반전 욕망을, 매우 실제적인 어떤 생산으로 전환하는 것이 바로 좌파가 개척해야 할 신대륙입니다....수사학 남발해서 좀 죄송합니다....
2. 반노 탄핵 비판.
이미 진보누리의 서명 운동이 변화했기 때문에 비판의 실제적 의의는 약하겠습니다만, 적어도 그 기저에서 지속되고 있는 조금 이상한 에너지의 측면이 있으므로 언급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최근 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헌법책을 펼쳐본 적은 없지만 한 시절 법학도였던 입장에서 간단히 실체적인 지적을 해보지요. 어떤 분이 정리해 놓으신 탄핵 서명의 궤적을 보면 잘 알려진 논객 하나가 검찰 고발 비슷한 걸 제기하고 그 주장이 탄핵서명으로 발전(?)되었더군요. 무척 죄송스런 표현이 되겠습니다만, 이건 마치 80년대 어떤 법대의 1학년 과대표와 2학년 과대표가 계단턱에 앉아서 교환하는 '나름대로 정치 실천' 같은 느낌을 주더군요. 대통령을 고발할 수 있다는 정치적 상상력의 찬란한 황당함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문제는 '탄핵'이지요. 과거의 예를 들자면, '해체 민자당'이 있었고 '분쇄/타도 민자당'이 있었습니다. 반민자당 전선의 국면에 따라, 알아서 기라는 의미를 포함한 '해체'가 이쪽에서 끝장을 내주겠다는 의미의 '분쇄/타도'로 발전했습니다. 슬로건은 가능한 범위에서 정치적 지형을 정확히 반영하는 입장이어야 하는데, '탄핵'은 분명한 오버였습니다. 단순 헌법 보호 논리로 따져보아도 '탄핵'을 정당화 하기 위해서는 이라크 침공이 침략적 전쟁이라는 사실을 논증해야 하고, 그것이 5조 1항의 '세계 평화'와 조율되는 문제를 따져 보아야 하며, 중요하게는 대통령의 취임 선서를 규정한 조항과의 어울림도 분석을 해봐야 합니다. (솔직히 탄핵 사유가 되질 않는다는 게 제 생각이라는 겁니다.) 과학생회 회의를 해도 구호 하나 가지고 열 몇 시간씩 입씨름을 벌이는 게 좌파의 특성이었는데 어째 그 미덕과 진정성이 보이지 않았다는 막말도 보태겠습니다.
단순하게 말할 경우 이러한 헛발질 (제가 보는 차원의 표현이니 저급함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은 합법주의에 경도된 흐름에 의해 가능했다고 지적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런 지적에 대해 일면 동의하면서도 조금은 자세히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일단은 한국 좌파의 역사성이라는 게 있습니다.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좌파의 화두 중 중요한 것으로는 (비록 제가 목격한 껍데기는 학생 운동에 한정해 있었습니다만) '전문성의 획득'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좌파가 조합 만들고 파업이나 벌일 게 아니라 계급 구성원들의 매우 실제적인 이익 현장에서 계급적 요구와 해결들을 찾아내야 한다는 정도의 논거였지요. 문화운동의 중요성이 언급되고 과학기술자운동 같은 것이 제안되는 것이 이러한 환경과 일정하게 관련을 맺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이 뭐냐면, 어느 순간부터인가 바로 그러한 전문성의 획득을 실용주의적 접근으로 오독하는 경향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사사방의 전설이었던 이진경이 무슨 청소부던가 하는 매우 실용적인 철학 교양서를 발표하고, 현실과 과학의 논객 중 한 명이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락 비평가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작업들은 물론 좌파의 외연 확대라는 측면에서는 배척해야 할 이유가 없는 실천이기도 합니다만, 다른 측면에서는 차라리 무인 도서관을 운전하는 승합차 운전수가, 그리고 펑크를 90년대식으로 변형해 짭짤한 수익을 올린 드럭의 운영자가 차라리 좌파적인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충분히 던질 만한 사항이기도 했습니다. 왜? 간단하지요. 시스템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좌파가 어떻게 좌파일 수 있습니까?
정치적인 측면에서 합법주의의 강한 발현이 나타나는 것을 저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인으로써의 전문성'이 무엇이겠는가 하는 겁니다. 부르조아 시스템에서 정치는 입법과 행정 (법의 집행)이고, 국회의원에서 법률가가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결국 좌파가 기존 시스템에 발을 들여 놓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법정신을 필요로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만약 그 준법정신이 민노당의 부유세와 같은 입법의 측면이라면 문제 삼을 바가 적겠습니다만, 전문성을 실용주의로 오독하는 경향의 연장선에서 준법정신의 발현은 '상대자의 위법을 지적'하는 실천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지요. 이건 뭐 좌파냐 아니냐를 떠나서 그냥 헤겔 이전의 문제입니다. 즉자적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기저에 깔린 정서가 온당하다면 전술적 오류는 크게 비판 받을 만한 사항이 아닙니다. 저는 근본적으로 탄핵을 생산한 '반노'에 대해서도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보고 싶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지요. 반노는 정권타도 투쟁으로 파이를 키워온 좌파 습성의 매우 단순한 반복일 수도 있습니다. 반노 좌파는 이렇게 노짱론자들을 향해 비아냥거립니다. '파병을 결정한 노무현에 대한 지지철회 없이 무슨 반전이냐?'라고 말입니다. 이거, 어딘가 논리적 정합성의 나사가 빠진 것 같지 않습니까? 작년 12월에 대통령 선거하면서 우리나라 국민들이 이라크 파병 찬반 여부로 대통령 뽑았습니까? 물론 반노 좌파는 반박할 겁니다. 이라크 파병은 다른 모든 이해관계를 합친 것보다 중요한 정치적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고스란히 되묻고 싶습니다. 정말로 이라크 파병이 다른 모든 국가적 과제들을 더한 것보다 중요한 정치 판단의 기준인가요? 어째서요? 혹시 이 언명은 사실상 윤리학적 범주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요?
정권타도 투쟁의 연장선이라는 측면을 좀 자세히 언급해 보겠습니다. 표현의 불쾌함을 무시한다면 제가 드리려는 말씀이 어떤 것인지는 쉽게 잡아내실 수 있으리라 추측합니다. 김영삼 정권의 출범 이후 시작된 좌파 인자들의 다양한 투항과 합법화를 생각해 보지요.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세계 질서의 한 축이 무너졌다는 측면도 있긴 하겠습니다만, 그들의 논거는 사실 김영삼 정권이 타도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것에서 출발하는 조잡한 인식론이었습니다.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면 지지하고 참여해야 한다? 어쩌면 좌파는 쁘띠의 일상적인 정치적 무관심에서 수를 배워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쁘띠의 무관심은 여의도를 향해 오줌을 눗지 않더라도 어차피 자신의 삶이 대단히 정치적이라는 것을 무언으로 주장하고 있는 현상일 수 있다는 겁니다. 정권 타도 슬로건의 거짓스럼에 대한 통찰을 한국의 민중들은 이미 87년에 경험을 했습니다. 안티 노무현으로 하다못해 정체성의 확립이라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좌파 일각의 편의주의이지 정치적 현실은 아닙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극단적으로 표현을 하더군요. '박정희 전두환한테 하도 머리를 맞아서 무정부주의 정신병에 걸린 게 한국의 좌파'라고 말입니다. 이 언술의 기저가 어떠한 것이든, 의미론에서 아주 틀렸다고 얘기하기는 힘들다는 게 요즘의 제 생각입니다.
자, 그런데 하나의 구체적인 문제가 더해집니다. 인터넷 정치, 게시판 문화, 기타 등등으로 명명할 수 있는 십 여 년 정도의 짧은 역사입니다. 저는 반노/탄핵이 자유주의/신보수와 좌파의 게시판 대립을 생산하려는 인터넷 정치의 개싸움 특성을 확대하는 조급한 전술의 한 형태라고 단언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문제는 '대립의 생산하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개싸움'에 있습니다. 무엇이 개싸움인가 묻고 싶으십니까? 저는 원리주의자적인 습성이 있습니다. 전술은 전략을 정당화할 수 없고 왜곡을 생산하는 것은 주체가 아니라 시스템입니다. 반노/탄핵이 서프를 비롯한 인터넷 논객들의 타격 지점으로 정확한가 하는 점이 곧바로 인터넷 정치의 현 지형에 관한 반노 좌파의 영토 확장을 온당한 것으로 추인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는 타격의 지점을 이렇게 상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노무현이 새로운 대미관계를 구축할 것이며 한반도의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지지 이유를 밝혔던 지지자들은 이제 지지를 철회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실제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계셨던 것 같은데 누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 방식은 엄밀히 말해 자유주의 지식인들이 흔히 보여주는 코드 플레이의 연속선에 놓여 있습니다. 대선 직후부터 화합을 가장해 확산되고 있는 세대론 (연공주의 서열주의 타파라는 미명 아래 진행되고 있는 낮은 기수 중심의 서열주의 확립 같은 것) 의 문제 때문에 노무현을 지지한 사람이라면 이라크 전쟁과 상관없이 노무현을 지지해도 되는 것일까요? 조금 서프 수준의 반문이긴 합니다만 파병을 독촉하는 한나라당은 대선 때의 입장을 번복하여 노무현 지지를 선언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런 식의 그야말로 수준 낮은 말싸움이 게시판을 얼룩지게 만들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렇게 한 번 말해보겠습니다. 좌파는 쁘띠의 정치적 행동력에 대해 경멸이라는 껍데기와 공포라는 알맹이를 가지고 있다고 말입니다. 예를 들어 서프의 문제는 절대 그들이 노무현 용비어천가의 인터넷 진지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 차원에서 서프를 뚜렷한 타격 대상으로 사유하기 위해서는 대선 당시의 투표율이 남한의 정치 인식론을 산술적으로 정확히 반영한다는, 다시 말해 거의 반동적인 세력과 신보수 중도 우파가 남한의 정치 지형을 양분하고 있다는 결론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극우와 중도 우파의 경쟁 시스템이 대선 득표율만큼 공고한 것일까요? 비판적 지지로 요약되는 일반 민주주의에 대한 남한 민중의 기대감이 갖는 문제점은 그 에너지의 성격이 실제로 중도우파적인 것이기 때문라기 보다는 그로 인해 표현되는 정치 시스템이 민중의 정치를 왜곡하고 있기 때문 아니던가요?
저는 앞서 좌파의 반전이 쁘띠적 윤리학의 최종점 이후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서프로 대표되는 중도우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규정을 내릴 수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들의 지향점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미성숙이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서프는 중도 우파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곳이 아니라 일정하게 (행동력의 차원에서) 선진 대오를 형성한 눈팅/아마추어 논객의 정치적 생존 욕망을 중도 우익적인 것으로 왜곡/봉쇄/차단하고 있는 매우 자연스럽고 유연한 시스템입니다. 아마 이렇게 물으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장황한 지적이 도대체 어떻게 서프/중도 우파 타격을 비판하는 논거가 될 수 있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주의해 주세요. 저는 지금 전술의 문제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만약 서프 논객, 혹은 강준만과의 게시물 싸움을 통해 그들의 넷질을 봉쇄하는 것이 가장 유효한 타격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피투성이식 살생부 작성과 무엇이 다른가 하고 묻고 싶습니다. 반전파업을 비판할 때 사용됐던 현실성이라는 문제는 오히려 이런 부분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사고되어야만 합니다. 현실적으로, 두세 개의 게시물이 오고간 뒤 빠돌이들을 거느린 당사자들의 인신 공격으로 매듭지어지는 것 말고 그 어떤 정치 인식론의 발전이 지금 지형에서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이라크 파병이라는 고난이도의 함수로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결국 문제는 원론적인 것으로 돌아갑니다. (직전의 게시물에서도 잠시 목마름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저는 좌파가 '반전이라는 호재를 만나 파병을 빌미로 노무현을 들입다 씹어대는' 것이 아닌, 파병을 결정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좌파의 이해를 알고 싶습니다. 파병이 한국 노동계급의 이해에 정면으로 반한다는 고전적인 결론도 좋고, 21세기 국제 정치의 격동 속에서 좌파 포지션의 능동성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찰도 좋습니다. 최소한 그 결론은 반전에 관한 쁘띠 윤리학 뛰어넘기를 포함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것이 빠져 있기 때문에 저는 탄핵이든 단순한 반대이든 '반노'에 대해서는 동참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그럼 너는 파병 찬성하는 거냐고 물으실 분은 없으리라 믿겠습니다.)
3. 반전파업 지지 해명.
어, 이건 대단히 단순한 이유 때문입니다. 혹시 웃으실지도 모르겠는데....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밝히자면....미국의 군수노동자들이 파업을 결행하면 어차피 전쟁 못하는 거 아닌가요? 한전 노동자들이 총파업 하면 국회랑 청와대에서 촛불 켜놓고 파병안 통과시킬 건 아니겠지요....웃지 마세요. 쁘띠는 원래 관념론으로 좆나리 복잡하게 가다가 아주 간단하고 구체적인 현실 앞에서는 맥을 못추는 법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반전파업을 비판하시는 분들과는 달리 반전파업이 '현실적인' 반전 운동의 백미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지를 하는 겁니다. 이 문제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군요.
반전은 궁극적으로 전쟁을 멈추게 해야 합니다. 글의 서두에서 저는 파시즘한테 전쟁이라는 수양의 과정이 있는 것만큼 현대의 쁘띠들한테는 반전이라는 테마가 있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쩌면 대립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라크 침공의 논리적 이유는 대량 살상 무기의 확산 방지이고, 전사자의 모자이크 화면을 내보내는 것은 단순 보도가 되지만 포로의 모습을 방영하는 것은 놀랍게도 제네바 협약 위반이 됩니다. 감수성의 차원에서 반전은 적어도 이라크 전쟁에서는 학살의 앞뒤를 감싸고 있는 논리 근거들이 되기까지 합니다. 현대적 파시즘이 단순히 뭇솔리니와 히틀러의 재현이 아니므로, 차라리 반전조차 그 유연하고 끈적끈적한 시스템의 일부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던질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반전으로 인해 전투가 멈추게 되기는 할 것입니다. 바그다드의 시가전이 장기화 되면 사상자가 늘어날 테고, 유가는 급등하며 주가는 곤두박질 치겠지요. 베트남의 반복이며, 전세계 쁘띠들의 발작이 시작될 겁니다. 그렇게 종전이 되면 2차 대전이 그러했던 것처럼, 세계 이데올로기 지형에는 갖가지 정신적 사생아들이 날뛰게 되겠지요. 시스템은 다시 새롭게 반전과 주전을 혼합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전쟁의 당위성을 확립할 것입니다. 전쟁이 멈추는 게 아니겠지요, 이것은.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가 반전파업을 지지하는 이유는 계급 의식과는 아직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새벼리님을 비판해 보겠습니다. 새벼리님은 '동맹파업과 맹휴로 노무현을 타격하라!'라는 게시물의 3항에서 '대체, 이라크 민중을 학살하는 전쟁과 남한 민중들의 이익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입니까?' 라고 다소 도발적으로 묻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새벼리님이 같은 챕터에서 말씀하신대로 '미국과 한국의 정치 경제는 초국적 자본의 이해와 요구라는 측면에서 일치하고' 있지요. 그런데 막말로 자본이 이득보는 만큼 떡고물 몇 덩어리 떨어뜨려주는 것은 현대 자본주의의 자명한 산수이지 않습니까? 무엇을 비판하고 싶은 것이냐구요? 좌파가 무슨 노동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으로 치부되는 심리적 기저를 지적하고픈 겁니다. 만약 이라크 민중을 학살하는 것이 남한 민중들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면 새벼리님은 침공을 찬성하실 건가요? 오, 이건 '국익 논쟁'의 함정입니다. 좌파의 자리는 이런 한심한 우물이 아닙니다. (수군작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새벼리님의 문장을 텍스트 삼은 것도 그 문장이 반영하고 있는 에너지를 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새벼리님의 게시물 전체 맥락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비판은 미리 사양하겠습니다. 새벼리님의 진정성을 의심할 만큼 제가 바보는 아니거든요.)
제가 이번 격동을 통해 가장 놀란 것은 이라크 현지에서 그야말로 단두대에 목을 걸어 놓고 활동하는 각국 반전 평화팀의 실천력이었습니다. 그들은 정밀함을 뻐겨대던 미군 전투 지휘부를 아주 히스테리칼 하게 만들었지요. 그들의 실천은 아마도 거의 종교적인 헌신감일 텐데, 저는 그들에 대한 존경을 소화하는 과정에서 좌파의 반전이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 점을 추론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수사학적으로 말해서 그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파업하고' 이라크 침공 반대를 선언한 것입니다. 평화팀의 귀를 스치는 사막의 노래 바람은 밥 딜런이 노래했던 바로 그 '대답이 실린 바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헌신과 순교는 쁘띠적 실천의 피안이고, 좌파는 거기에 대답을 해야 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려는지 아시겠습니까? 반복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갈 데까지 가버린 쁘띠의 눈물겨운 노력과 열정, 그 다음 걸음을 좌파가 내디뎌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쟁이 자본가의 이익을 위한 것이고 반전은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논증은 솔직히 설레발을 까는 한심한 차원의 노력입니다. 반전이 시작되는 순간 쁘띠들은 이미 부당이득에 대한 거부를 분명히 밝혔으니까요. 결국 좌파는 그렇게 고양된 정치 의식을 계급적으로 조직함으로써 반전의 물리력을 뚜렷하고 강한 것으로 재생산하는 몫을 담당해야 할 것입니다. 반전파업. 이것 말고는 정말이지 어디에도 실제적인 반전 운동은 없습니다. 그것을 통해 좌파는 분명히 말해야 합니다. 미국은 이라크의 석유 확보를 통해 잉여의 위기를 돌파하려 하고 프랑스는 석유 대금 물물 교환의 구조 지속을 통해 유로 경제의 현상 유지를 노리고 있다. 한국도 중동의 불확실성 제거에 의해 총론적인 의미에서 돌파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 중 다만 얼마간이라도 노동자/민중의 주머니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좌파는 분명히 요구한다. 그 이익을 포기하라. 선도적으로 부당이득을 거부한 쁘띠 헌신자들을 존경하고 착취 시스템의 구체적 발현에 세계 노동자의 입장에서 저항하라. 이렇게 말입니다. 너무 무시무시하고 도취적입니까? 역으로 제가 한 번 묻겠습니다. 저는 자영업자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실천이라고는 반전 피켓팅에 참여하는 것뿐입니까, 아니면 거기에 더해 반전파업에 지지하며 일일휴업을 선언하는 것입니까? 제게 저의 이익을 버리라고 요구를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저를 실제적인 반전 대열에 포함시킬 수 있으시겠습니까?
반전파업의 비현실성을 지적하는 분들이든 혹은 반전파업의 선동적 확산에 주목하는 분이든, 바로 이 '계급 이익'의 함수를 너무 난감하게 받아들이고 계시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반전파업을 하면 당장 부딪칠 불법자의 낙인과 생계 곤란이 있다? 또한 그걸 알고 있으니 당장 총파업을 하자는 게 아니라 논의를 해보자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반전을 형성하는 일반적인 쁘띠 윤리학의 에너지는 이미 그런 이해타산의 함수를 조잡한 것으로 치부하고 뛰어넘은 상태입니다. 좌파의 출발은 쁘띠적 성과를 자연스런 전제로 깔고 출발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보지요. 1인 파업은 반전파업이 아닙니까? 쁘띠 시민 운동이 개척한 1인 시위의 정치적 형태가 단순히 쇼맨쉽의 측면만 지닌다고 보십니까? 근대 군중 집회를 대체하는 탈근대적 정치 행위의 어떤 단초로 볼 수는 없을까요? 총파업을 하자면 각 단위 노조의 총회를 거쳐야 하고 투표를 통해 단결된 의지를 표현해야만 합니까? 반드시 그렇습니까? 혹시 그것은 계급의 연대를 '계급이익'의 필수 조건 이상으로 사유하는 뭔가 이상한 포지션에서 비롯된 그림 아닌가요? 알고 보면 여러분들이 논박하고 인정한 파업의 비현실성이라는 게 '비현실적인 것만을 파업이라 상정한 상태'에서 진행하는 동어반복의 게임은 아닙니까?
다시 한 번 묻습니다. 1인 파업은 반전파업이 아닌가요? 임투에서라면 1인 파업은 성립할 수 없겠지만, 반전이기 때문에 오히려 가능한 실천 영역이 되는 것 아닌가요? 토요 휴무제의 확산으로 인해 금요일 오후가 되면 타올랐다가 월요일이 되면 주말을 기약하는 반전 취미 활동을 타격해야 할 필요는 못 느끼십니까? 왜 정치파업의 불법성으로 인한 피해를 지레 걱정하십니까? 정치파업 선언하지 않고 그냥 결근하는 파업은 순정 부품이 아니기 때문입니까? 1인 파업을 제안하고, 평일에 회사를 제껴버린 노동자들이 광화문이든 대학로든 주저 앉아 8시간 농성을 벌인다면, 그것은 전시 생산 체제를 파업하고 반전을 생산하는 것으로 정당화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만약 그 자리에 1백명의 결근자가 앉아 있다면, 그것은 1백명의 조합원으로 조직된 단일 노조의 정치파업과 비교하여 형편없이 우스꽝스러운 좌파들의 쁘띠적 퍼포먼스가 되나요?
거듭거듭 묻습니다. 총파업만 파업인가요? 양대 노총이 총파업을 선동한 것은 총파업 불발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전선의 확인이라는 의미를 지니겠지요. 그렇다면 단순히 노동자들이 업무를 제껴버리는 것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지요? 87년 반독재 투쟁 당시 총파업 논의가 있었습니까? 노조조차 거의 없던 시절이니 파업은 없었지만, 시민 항쟁의 주 세력에는 흔히 넥타이 부대로 불리우는 노동 계급의 실천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까? 광주는 또 어떻습니까? 광주 항쟁의 물리적 근거가 민중이었다는 건 좌파의 이견 없는 동의 사항 아닌가요? 광주에 무슨 공식적인 민중 회의 같은 게 있었습니까? 정작 민중/노동자의 실천은 시스템을 초월하여 진행되는데 어째서 좌파의 입담은 정치파업의 불법성이나 파업 찬반 투표의 난간함 같은 해괴한 함수를 붙들고 옥신각신 하고 있지요? 혹시 제대로 된 '총파업'의 환상적 그림을 위해 당장의 가능한 실천을 방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제 한계가 쁘띠라서 그런지 몰라도 계급 연대를 너무 자명한 문장으로 사유하는 좌파의 심리를 이해하기가 아주 힘듭니다. (1인 파업 제안할 경우 저는 최소한 1명 정도의 참여자는 이미 확보했습니다. ^^)
아니, 연대라는 측면에 대해서도 조금 이상한 것은 있습니다. 앞서의 게시물에서 저는 '전세계 노조와 지식인들이 미국 군수산업의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촉구하는 것'이 제가 그려볼 수 있는 가장 거창한 꿈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미국의 전시 체제 돌입을 비판하는 그 어떤 좌파의 칼럼에서도 선언적으로나마 미국 노동자들의 행동을 요구하는 내용을 발견할 수 없다는 데 대해서 상당히 의아해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맑스가 '전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잃을 것은 쇠사슬뿐이다'라고 했더라도 연대에는 연대하는 세력간의 충돌과 반발이라는 게 있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저는 앞서 좌파의 반전은 최종 심급에서 전쟁을 중단하게 할 수 있는 측면에서 현실성이 논위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린 바 있고, 또한 좌파가 반전을 말하기 위해서는 부당이득의 포기를 언명해야 한다는 점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막말로 묻겠습니다. 미국 군수 노동자들의 파업 없이 세계 노동자 연대의 반전이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까? 아마도 이렇게 비판하시고 싶으실 겁니다. 한국 총파업도 못하는 판국에 미국 노동자 파업 촉구 운운하는 건 뻘짓이라고 말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런 측면의 비현실성에 주목한다면 법학개론 정도의 마인드도 없이 고발 운운하고 멀쩡히 한나라당 과반수인 상태에서 탄핵 서명 들고 나온 것도 무척 비현실적인 뻘짓입니다. 왜 어떤 뻘짓은 실천하고 다른 뻘짓은 상정조차 되지 않을까요? 거기에는 혹시 계급 연대를 단순한 형제애로 환원하려는 정서적 편의주의가 작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좌파는 밥.꽃.양이 가져다 준 문제 의식을 계급 연대의 관점에서 단순히 불미스러운 사건 같은 것으로 접어버린 걸까요? 제가 지향점이 아닌 포지션으로 좌파를 사유했다면 저는 양대 노총에 대해 요구를 할 것입니다. 미국 노동자들의 파업을 직접 촉구하고, 그 촉구에 동참해주기를 다른 나라의 노조 지도부에 전달함으로써 생동하는 국제적 노동자 연대의 단초를 마련하라고 말입니다. 이런 건 정치적 실용주의라는 비판을 받더라도 한 번 해볼 만한 짓일 겁니다.
불협화음의 연대를 소망하는 연장선에서 저는 방송사 파업 '촉구'라는 것도 가능하리라 생각을 합니다. 어떤 분이 방송사의 신명난 전쟁 보도는 시청자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실상은 방송 송출 노동자의 파업과 관련된 문제라고 말씀하신 것을 읽었습니다. (잡동사니 청소부님이셨던 것 같습니다.) 이 말의 구체성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기에서 제가 비판적으로 보는 '계급 이익'이 나타나는 실루엣을 정서적으로 경험합니다. 단도직입적인 요구는 불가능한 것일까요? 예를 들어 뉴스 보도를 보면 미국의 입장은 '밝혔다'가 되고 이라크의 입장은 '주장했다'가 되는 교묘한 어법이 일관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무슨 전쟁 영화를 찍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듯 미디 오케스트레이션을 깔아버리는 꼭지 구분의 한심한 미학에 대해서는 길게 언급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시청자가 뉴스 시청 거부를 선언하고, 방송사의 파업을 촉구하는 것은 어째서 논리 형성이 되지 않는 것일까요?
아마 저의 반노/탄핵 비판에 대해 이렇게 반박하시고 싶었던 분도 계실 것입니다. 실제로 탄핵이 진행되었을 경우를 상상하자면 그것은 직접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엄청난 의의를 갖게 되고 그런 목표를 위한 작은 실천으로 이해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말입니다. 아니, 지금의 저는 그런 식의 짝짓기는 거부합니다. 국민에 의한 탄핵 발의는 직접 민주제와 거의 관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직접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한 상태니까요. 어째서 갈수록 좌파적 대의들이 시스템의 부속 함수로 전환 사고되는 것인지 정말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반노/탄핵이 실제로 고양되어 명실상부한 국민소환제를 생산한다고 하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차라리 그 직접민주주의라는 것을 정치파업에 연결하는 논리쪽에 유효표를 던지고 싶습니다. 역사적으로 그것이 계몽과 야만이라는 양날의 폭력으로 얼룩지긴 했어도 좌파의 직접민주주의는 꼬뮌과 소비에트에서 그 근거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 이러한 저의 접근을 19세기적인 것으로 몰아붙인다면, 반노/탄핵의 직접민주주의 따위는 4천년전의 그리스 민주주의에서 이미 실패로 판명된 실험이라고 단언하고 싶습니다. 제가 반전 파업을 지지하는 마지막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반전 파업은 좌파가 제시하는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시스템을 단순히 타격하는 수준이 아니라 대안 시스템을 '생산'하는 직접민주주의의 일환이 바로 반전 정치 파업이기 때문에 저는 지지합니다.
4. 긴장한 뒤 상상합시다.
어리버리한 입장을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이 있다면,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참 무쟈게 기네요. 언제쯤 되면 나는 짧고 명료한 게시물을 쓰게 되려나.) 이 챕터의 제목은 결론이자 요약입니다. 좌파가 양심과 윤리에 따라 반전 대오를 꾸린다면 저는 적어도 반전에 대해서 만큼은 저의 지향점을 포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전쟁은 자본의 집결이며 물리력의 총화이고, 기계 장치들의 버라이어티 쇼입니다. 진짜 반전을 하기 위해서는 주전론자들에 버금가는 고도의 정치적 긴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전쟁은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인간 아닌 것으로 만드는 (죽여버리는) 대단히 인간적인 행위입니다. 현실성의 가장 구체적인 측면은 인간 세계에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라는 식의 자포자기라는 것입니다. 반전은 이미 그 시작점에서 몽상으로써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반전 실천이 다양하고 세밀한 상상력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도 바로 그러한 몽상적 본질 때문이지요. 1인파업으로 시작된 생산기능의 중단, 세계 노동자들의 압력에 견디다 못한 미국 군수 생산 질서의 멈춤, 어쩌면 실현 가능할지도 모르는 뉴스 시청 거부 운동과 방송사 파업 촉구, 저는 이런 환상들이 정치적 실용주의에 의해 배격되는 모습보다는 보다 많은 상상들을 통해 실천을 잉태하고 배양할 수 있는 좌파의 커다란 힘을 기대해봅니다. 모든 몽상이 바슐라르적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쩌면....매우 화가 나서 묻고 싶은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음쩜셋 너의 말은 반전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반전을 통해 좌파가 반성하고 성장해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고....음. 맞습니다. 저는 서두에서 분명히 반전이 장례식을 닮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제 인식론의 나름대로 복잡한 한계는 모든 것에 대한 제법 냉정한 불신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비극을 보고 눈물을 흘릴 정도의 정서는 있습니다만, '살아남은자의 슬픔'이라는 문장에 대해 슬픔을 느끼는 것을 빼고는 사실 살아남았다는 것과 살아남으리라는 것을 환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환희의 연장선임을 알기에 반전 제일주의 도덕론자들에 대해서는 취미 없습니다. 좌파 지향은 미세하나마 저의 사유 중 열려 있는 부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할 겁니다. 좌파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대답이 실제 저의 삶을 바꿔 놓을지는 두고 볼 노릇입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