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산울림’은 없었다 / 엄현옥
또 한번의 결단이 필요하다. 스멀스멀 늘어나는 물건들로 인해 수납장을 정리할 때면 나의 판정을 기다리는 수 십장의 LP판이 애처롭다. 버리려다가 고비를 넘긴 것들이지만 다시 분류할 수 밖에 없다. 그 중 퀸, 핑크 플로이드, 비틀즈 만을 남긴다. 몇 번을 들추어도 차마 버릴 수 없는 것 중에는 ‘산울림’의 앨범들도 있다. 그것이 소장가치가 높은 소위 ‘명반’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1977년 겨울, 라디오에서 생경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제목부터 심상찮은 〈아니 벌써〉, 〈문 좀 열어 줘〉,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등은 포효하는 청춘의 함성으로 나를 찾아왔다. 3형제 락 밴드 ‘산울림’과 그렇게 만났다.
도전과 저항이 통할 수 없었던 시절, 청년문화라 불리던 것들은 대안을 찾지 못하고 쇠퇴하고 있었다. 여성들의 스커트 길이는 물론 남성들의 두발 길이까지 나라가 손수 관리해주던 친절한 시대였다. 자와 가위를 든 경찰의 모습은 일상의 한 풍경이었다. 가요계는 포크 락의 기세가 차츰 꺾였으며, 가사 검열에 따른 금지곡 파동으로 술렁거렸다.
1집 《아니 벌써》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전 심의에 퇴폐적 판정을 받았으나 우회적으로 개작하여 위기를 넘겼다. 지금과는 달리 연예인들이 부당한 대우를 감수하던 시절, 사람들은 명문대 출신 형제들이 왜 딴따라를 자처하는지에 대해 의아해 했다. 이들 형제의 음악에 대한 관심을 맏형 김창완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연쇄 폭발하는 듯한 그들의 침공은 통쾌했다. 나른했던 음악계는 젊은 피를 수혈한 듯한 생동감으로 넘치기 시작했다. ‘산울림’은 통념을 거부한 자유로운 사고로 70년대 후반의 가요계를 이끌고 나갔으며, 음지의 밴드 이미지를 젊고 밝은 인상으로 인식하도록 하는데 기여했다. 그들의 콘서트가 열릴 때면 주변까지 인파로 장사진을 치게 만들었던 열기는 좀처럼 수그러지지 않았다.
글이 아닌 말로 표현하던 그들만의 어법은 구체어였다. ‘산울림’이 노랫말에 대한 절제와 책임감으로 대중가요의 한계였던 상투성을 극복한 것은 획기적인 전환이었다. 독백 형태의 신선한 노랫말에 담긴 분명한 의미는 기타를 통해 듣는 수필인양 들을수록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솔직하고 독특한 분위기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신중현의 뒤를 잇는 락 특유의 감각과 파격은 아마츄어적인 자유로움으로 더욱 가깝게 느껴졌을 것이다.
‘산울림’은 내게 감정이 이끄는 대로 표현해보는 것도 괜찮다고 부추겼다. 양희은과 송창식에 경도되어있던 내게 이런 음악도 있으니 긴장을 풀고 마음껏 즐기라고 했다. ‘산울림’ 이전의 대중음악이 위안이었다면, 그들은 또 다른 뉘앙스로 나를 돌아보게 했다. 새롭게 찾은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삶을 향유하라고 속삭였다.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웠던 그들의 모든 것은 경직된 사고의 내게 대리만족을 안겨주었다.
그들은 잔잔한 서정으로 파고들다가 어느새 격렬한 샤우트 창법으로 폭발했다. 지금껏 오래 남아있는 곡은 젊은이답지 않게 세상을 달관한 듯한 노랫말이 대부분이다.〈독백〉, 〈창문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내게 사랑은 너무 써〉 에서는 체념한 듯 속삭이다가, 〈청춘〉에 이르러서는 ‘차라리 보내야지 돌아서야지 그렇게 세월은 가는 거야’ 을 낮게 읊조리며 처연함의 절정을 이루었다. 그런가 하면〈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는 3분 남짓한 전주가 인상적이었다. 전주를 듣는 동안 노래에 대한 기대감과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그대 길목에 서서 예쁜 촛불로 그대를 맞으리’ 이 노래에 잠길 때면 누군가를 맞아드릴 마음의 준비가 된 것처럼 내 마음에도 주단이 드리워졌다.
그들도 현실적인 문제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주체할 수 없는 창의성으로 어른까지 동요를 부르게 만들었던 김창완은 동생들의 입대와 사회생활 등의 여백에도 불구하고, 9집까지 발간하여 가요의 역사를 새로 쓰는 작업에 몰두했다. ‘산울림’이 대중의 폭발적 정서와 포근한 정서를 순차적으로 정복하여 수명이 짧은 우리나라 락 밴드의 현실을 극복했다는 평가가 결코 과장된 것은 아니리라. 초기의 락에서 벗어나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무려 13집을 내기까지 장수한 것은, 비틀즈에 비견되기도 하는 천재적인 실험성 때문이다.
그들의 다양한 음악적 시도와 실험은 진화를 거듭했다. 초기 통쾌한 락 사운드를 벗어나자 더욱 서정적인 노랫말로 대중을 파고들었다. 기존의 관념을 깨트린 혁신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씌여진 가사와 멜로디였다. 친근하게 감기는〈어머니와 고등어〉에서는 고등어를 절여 냉장고에 넣어두고 잠든 우리들의 소박한 어머니가 구체적으로 연상되었다. 또한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기를 거부하며〈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는 신선한 제안을 하기도 했다.
팀의 리더 김창완은 지금도 우리와 가깝다.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잃지 않는 그는, 겉으로는 동네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아저씨이지만 속으로는 능구렁이에 광기를 지닌 연구대상의 인물임이 분명하다. 본말이 전도된 듯 드라마에 얼굴을 내밀거나 FM라디오의 친근한 진행자로, 마음만 먹으면 그의 목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다. 그의 불가사이함은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주변의 상황에 스스로 녹아들어가는 자연스러움 때문이다.
그의 변신을 보는 대중의 눈길도 다채롭다. ‘형편없는 대중음악계에 보내는 김창완 식의 야유’라는 긍정적 비호와, 스스로 창조한 신화를 져버린 일종의 자기 모독’ 이라는 비판적 시선도 있다. 그만큼 대중들이 그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다시 그들을 듣는다. ‘그대 떠나는 날에 비가 오는가…….’ 겨울비 때문인지 촉촉이 흐르는 처량한 음조에 착잡해진다. 그날만큼의 설렘은 없지만 희미한 옛사랑을 기억하듯 잔잔한 감흥이 인다. 작은 파장과 기분 좋은 떨림에 감각의 촉수를 세운다. 마음에 빗장을 열고 그들의 선율에 나를 맡긴다.
지금, 지금은 그날에 견줄만한 감동에 목이 마르다. 오늘과 다름없는 내일이 오리라는 것을 아는 중년의 하루는 비참하다고 하던가. ‘파격’이라는 어휘로도 부족했던 그날의 ‘산울림’처럼 파격적인 무언가에 나를 취하게 하고 싶다.
그들은 이제 다시 오지 않을까. 아마 이 순간에도 녹음실에선 ‘산울림’의 후예들이 음악에 대해 고민하고, 새로운 곡들은 날마다 나오고 있겠지. 어디선가 몰려올 산울림들을 만나고 싶다. 이미 그것은 내 안에 있는지 모른다. 그들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척박해진 내 마음 때문일까. 귀를 열자, 알싸한 겨울 내음이 와락 안기도록 마음에 문을 열자. 나에게도 선물을 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