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 드론이 난다. 도로에 고급차가 달린다. 목적지는 강원도 원주시 한 별장. 드론이 별장에 도착한 고급차를 담는다. 어둠이 내린다. 드론이 별장 안으로 들어간다. 책상에 놓인 1249쪽 짜리 문건을 포착한다. 제목이 보인다. ‘김 학 의 보 고 서.’ 검은 장갑이 제목을 덮는다. 자동차 서치라이트가 장갑을 비추고 그 그림자에 한자가 쓰인다.
'암장(暗葬)’
애초 첫 화면 구상은 이랬습니다. 검찰의 추악한 이면을 다룬 드라마 '비밀의 숲’을 패러디하고 싶었습니다. ‘〈시사IN〉 판 비밀의 숲’에는 ‘김학의 사건’ 관련자들의 얼굴이 실명 공개되고 얼굴을 클릭하면 쫘악 관련 내용이 뜹니다. 디지털 담당자가 이 구상을 듣고 “담대한 계획 보소…”라며 혀를 찼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구상은 담대했고 예산은 부족했습니다.
결국 ‘디지털 노가다.’ 〈시사IN〉 미디어랩 안희태 팀장, 최예린 기자에게 급히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아카이빙 기능에 최대한 충실히 하자는 쪽으로 선회했습니다. 아쉬웠습니다. 독자 참여를 이끌 방법이 없을까? 콘셉트를 다시 수정. 독자가 배심원이 되게 하자!
〈시사IN〉이 입수한, 대검 산하 과거사 진상조사단이 만든 〈김학의 보고서〉는 1249쪽에 달합니다. 저는 기사를 준비하며 수차례 이 보고서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2013년 김학의 전 차관을 무혐의 처분한 1차 수사 당시 자료를 주로 눈여겨보았습니다. 일부를 제723호 지면에 담았고, 나머지를 디지털 페이지를 만들어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김학의 사건’은 2013년 1차, 2014년 2차, 2019년 3차 수사를 거쳤습니다. 1차 수사 무혐의, 2차 수사 무혐의 처분을 내렸던 검찰이 3차 수사 끝에 김학의 전 차관을 기소한 사건입니다. 저는 1차와 2차 수사 때 왜 사건이 덮였는지, 그리고 3차 수사팀은 왜 1차와 2차 수사팀을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는지에 주목했습니다.
난관의 연속. 〈김학의 보고서〉를 어디까지 공개할 것인가? 먼저 명예훼손 가능성, 피해 여성에 대한 2차 가해 가능성을 검토했습니다. 함께 취재한 김은지 정치팀장뿐 아니라 자문 변호사 검토를 거쳐 공개 범위를 결정했습니다. 더 많이 공개하기보다 최대한 엄격한 자체 기준에 따라 공개 범위를 결정했습니다.
전문가 평가도 받았습니다. 1249쪽 〈김학의 보고서〉 전문을 변호사 4명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보고서를 검토한, 판사 출신 변호사, 검사 출신 변호사, 젠더 사건 변호사, 재심사건 변호사들의 평가를 각각 담았습니다.
'김학의 사건'의 전모를 다룬 디지털 페이지는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보고서에 나온 표현을 빌어 페이지 이름은 '암장(暗葬)’'으로 정했습니다. '남몰래 땅을 파서 묻다[暗葬].' 검찰이 '김학의 사건'을 다룬 방식을 표현하는 데 그 이상 적절한 단어는 찾기 어려웠으니까요.
배심원이 된 여러분을 위해 먼저 이번 사건을 ‘김학의 사건이란?’ 메뉴에서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스크롤 압박이 있긴 한데, 읽으면 복잡한 ‘김학의 사건’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김학의 사건 사람들’에서는 1차 수사팀, 2차 수사팀, 3차 수사팀 등을 실명 공개했습니다. 과거사 진상조사단 8팀 위원들도 공개했습니다. ‘김학의 사건’이 현재까지 진행되는 과정을 시간 순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보고서 Ⅰ’, ‘보고서 Ⅱ’, ‘보고서 Ⅲ’에서는 저희가 공개한 〈김학의 보고서〉 해설과 전문 변호사들의 평가를 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배심원인 여러분이 ‘김학의 사건’을 정의(定義) 내릴 수 있게 첫 화면에 의견 입력란을 만들었습니다. 화면에 나오는 빈 칸을 클릭한 뒤 내 생각을 남겨주시면 됩니다. 2021년 7월27일 현재 200명이 넘는 시민 배심원이 '김학의 사건'에 대한 정의를 남겨주셨습니다. '공공연한 사기' '검찰판 벌거벗은 임금님' '한국형 지록위마' 등 다양한 촌철살인이 넘쳐납니다.
비록 담대한 첫 구상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이 페이지는 김학의 전 차관에 대한 최종 재판 결과가 나온 뒤에도 유지됩니다. 언론 취재에는, 시민들의 알권리에는 공소시효가 따로 없습니다.
그동안 〈시사IN〉은 이명박 정부 국정원 정치 개입 사건을 다룬, ‘응답하라 7452’, 국정농단 사건을 다룬 ‘박근혜 게이트 아카이브’, 재일 조선인 노동자들의 역사를 다룬 ‘흩어진 역사, 잊혀진 이름들’ 등 디지털 특별페이지를 만들었습니다(사진). 그리고 지금도 유지하고 있습니다.
〈시사IN〉은 기록의 힘을 믿습니다.
첫댓글 시민들의 알 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