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손가락
김혜숙
한 살 또 한 살 먹을 때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오래 입은 카디건의 헐거워진 단춧구멍처럼 옹졸하던 소갈머리가 조금씩 느슨해지는 것 같아 싫지 않았다. 흑백논리에 눈멀어 중립을 인정하지 않던 나의 편협한 사고도 ‘다 사정이 있겠지’ 이 한마디로 너그럽게 넘길 수 있어 나쁘지 않았다. 미미하지만 분명히 나는 변하고 있었고 보는 눈이 넓어지고 깊어졌다 믿었다. 때론 ‘이 정도면’ 하는 마음에 나 스스로를 토닥이기도 했었다. 그래서인지 나이를 먹는다는 게 분명 아쉬움은 있었지만 안타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었다.
몇 달 전부터 자고 나면 손이 붓기 시작했다. 잠깐 주무르면 괜찮아졌는데 기분은 정말이지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진다. 손가락 마디마디의 통증은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하지만 마디가 붉게 변하고 국물에 불어 터진 어묵처럼 부풀어 오르면 두려움이 엄습했다. 불뚝불뚝 튀어나오는 건 아닌지, 손가락이 비틀어지는 건 아닌지 무서웠다. 의사는 나에게 퇴행성관절염이라 말해줬다. 나이 들면 많이 생긴다며 쓰지 말기를 당부했고, 특별한 치료 없이 아플 때만 먹으라고 친절하게도 보름치의 약을 처방해 주셨다. 더 많이 아플 때에도 씩씩했는데, 퇴행성이라는 말 한마디가 나를 이렇게까지 뒤흔들 줄은 상상도 못했다. 둘둘 감아 담은 약봉지의 이름이 낯선 만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나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 같아 답답하기만 했다. 나이만 먹을 땐 미처 몰랐다. 몸이 아파지니 불현듯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각또각 들리는 키보드 소리. 경쾌함에 매료되어 통증도 잠시 잊었다. 오래간만에 오탈자 없이 줄줄 쳐 내려가는 내 손가락이 기특했고, 술술 막힘없이 써 내려가는 내 이야기에도 신이 났다. 그런데 저장하려는 순간 컴퓨터가 갑자기 멈춰 섰다. 참다 참다 막다른 골목까지 내몰린 사람처럼 순식간에 입을 다물고 돌처럼 굳어버렸다. 어느 것 하나 움직이지 않았고 곧바로 시퍼렇게 질린 듯 모니터는 변해 있었다. 나는 하얘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다 사라진 것만 같았다. 컴퓨터 하나만 정지되었을 뿐인데 나도 먹통이 되어 꼼짝할 수가 없다. 입이 닫히고 생각도 닫히고 한 몸인 것처럼 그냥 앉아만 있었다. 쓰다만 많은 글들과 저장해놓은 사진들, 조금 전 저장하지 못한 글까지 생각나면서 마음이 불안해졌다. ‘과연 되찾을 수 있을까?’ 잔소리처럼 백업을 당부하던 아들의 말을 습관처럼 지나친 것이 한없이 아쉬웠다.
재수 없게도 글쓰기 폴더가 내 실수로 삭제되는 꿈을 꾸었다. 애써 별거 아니라고, 블루 스크린만 해결하면 다 괜찮아진다고 최면을 걸었지만 걱정은 더 커졌다. 사실 내 컴퓨터는 지금 당장 멈춘다 해도 이상할 거 하나 없을 만큼 노쇠했다. 고장이 나서야 낡음이 보였고, 쓸데없는 프로그램과 파일로 버거웠을 그 부담감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준비 없이 맞이한 이별 앞에 마음 하나 숨기지 못하고 나는 질척대고 있다. 완성되지 않았지만 내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내 글과 그동안의 시간이 심하게 아까웠다. 고쳐볼 요량으로 서둘러 본체 버튼을 누르려 하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꺼진 줄 알았던 컴퓨터는 밤새 홀로 애썼던 것이다. 전원을 켰다 껐다 반복하다 지쳤는지 마지막 힘을 쥐어짜듯 거칠게 팬을 돌려댔다. 부팅은 되지 않았다. 나처럼 넘치도록 쓰다가 나이가 들었으니 병나는게 당연한 일일 것이다. 숨차 오르기 전에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이 어쩌면 내게도 필요할지 모른다.
멀리 사는 큰아이는 일주일이 지나서야 집에 왔다. 아들의 말대로 기다리는 일주일 동안 우린 푹 쉬었다. 컴퓨터는 가만히 책상만 지켰고 나는 이참에 살림을 멀리했다. 집안은 어지러워졌지만 딱 그만큼 내 손가락은 덜 아팠다. 큰아이는 한참 동안 뚝딱거리더니 새로 조립한 것처럼 말끔해진 컴퓨터를 내놓는다. 묵은 먼지와 메모리카드만 청소했다며 왜 여태껏 안 열어봤냐고 되묻는다. 평소 같았으면 벌써 뚜껑을 몇 번이나 열고 닫았을 게 뻔 한데 정말 이번에는 왜 생각조차 못 했을까. 너무 오랜 시간을 함께 했고, 내가 너무 거칠게 대했고, 밤새 지치게 만들어서 막연하게 끝이라 단정 지었던 건 아닌지. 살려낼 생각은 하지 못했다. 본체에 불이 들어오고 쌩쌩 돌아가는 컴퓨터를 보고 있자니 내 몸의 피가 새로 도는 것만 같다. 셋업 되어 깨끗해진 모니터를 미안하게 쳐다보다가 마디가 굵어진 내 손가락을 가만히 바라본다.
첫댓글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김혜숙의 수필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