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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맛 돋우는 보리밥 맛있는 보리밥집
마흔 고개를 넘은 사람이라면 보리밥에 얽힌 이야깃거리를 한두 가지씩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꿀맛 같은 먹을거리라기보다는 서글픈 추억거리로 더 많이 떠올릴 보리밥. 가을에 수확한 쌀이 모두 떨어지고 보리 이삭이 여물 때까지 기다리던 고달픈 보릿고개 시절. 거친 보리라도 배불리 먹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했던 그 시절 보리는 생존의 보리였다. 하지만 이제 보리밥은, 그보다 더 귀한 채소와 화려한 반찬을 곁들여 더위로 잃은 입맛을 되찾아주고 있다. 보릿고개를 거친 어른들이라면 옛 추억을 반찬 삼아, 신세대라면 투박한 우리 맛에 대한 탐험으로 보리밥집을 찾아 떠나보자.
바가지에 꽁보리밥, 열무김치, 고추장만 덜렁 넣고 비벼 먹던 것이 옛 풍경이었다면, 유기 속에 담긴 보리밥과 소고기 무 국, 깔끔한 찬을 곁들인 한상은 현대적인 변모일까? 이 집의 꽁보리밥(9000원)엔 취쌈, 호박쌈의 숙쌈이 나오고 꽁보리 열무비빔밥(9000원)엔 참기름 담긴 비빔 대접과 잘 익은 열무김치 보시기가 나온다. 한 그릇의 보리밥치곤 비싼 편이지만, 도심 한복판에서도 옛 향취를 즐기면서 제법 분위기 있는 접대까지 할 수 있는 집이다. ■ 삼성동 ‘보릿고개’ (02-501-5887) 배고픈 시절의 보릿고개야 빨리 넘어가고 싶었겠지만 선릉로의 ‘보릿고개’는 쉬엄쉬엄 놀다 가도 아쉽지 않다. 콩에서 콩내가 나듯 보리밥에서도 그 나름의 보릿내가 나야 제 맛인데, 여기 보리밥은 항아리 뚜껑 같은 그릇에 강낭콩과 조가 섞여 나온다. 보리냄새가 구수하면서도 차지다. 열무김치, 강된장을 넣고 비벼 먹으면 닥닥 긁는 소리가 토속적인 실내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대표 메뉴인 해초보리밥은 이름만큼 특별한 건 없지만 보리와 해초의 궁합까지 끌어내, 건강에 주목하는 노력이 가상하고 비지·청국장·생선구이도 곁들여지니 6000원의 가격이 결코 아깝지 않다. ■ 광장시장 ‘영암집’ (02-2265-9351) 맛있는 보리밥집 중 시장통 밥집을 빼놓을 수가 없다. 원단 끊으러 왔다가 한 그릇 뚝딱 비우게 되는 광장시장 보리밥골목은 늘 활기 넘치는 명소이다. 앉자마자 “반반? 얹어줄까, 그냥 줄까?”라고 묻는다. ‘반반’은 보리밥, 흰밥을 반씩 줄까 하는 말이고 ‘얹어줄까’는 밥 위에 열 가지 넘는 김치와 나물을 직접 얹어주는 것이고 ‘그냥 줄까’는 본인이 취향껏 반찬을 얹어 비비는 것이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으면 이내 ‘얹어줄까’로 해준다. 집게가 아닌 손으로 각종 찬을 얹는데 양이 딱 맞는다. 아줌마 손이 바로 ‘미다스’ 손이다. 보리밥다운 인심과 푸짐함을 즐기고 싶다면 광장시장 보리밥촌이 제격이다. 단돈 3000원의 가격도 매력적이다.
등산로 초입의 식당이라면, 뜨내기 손님치레로 영락없이 들뜨기 쉬울 맛이라는 게 일반의 상식이다. 하지만 남한산성 초입의 이 집은 나주 출신 아주머니가 직접 담근 장맛과 장에 박은 고추·깻잎 등 밑반찬이 입맛을 끌어 한번 간 사람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쌀이 약간 섞인 보리밥에 콩나물·상추·열무김치 등을 넣고 고추장으로 비빈 뒤, 두부와 호박을 넣은 시원한 된장찌개를 곁들인다. 장맛은 손맛이라고, 가미한 설탕의 맛이 아닌 자연의 단맛들이 음식마다 배어있는 게 이 집의 특징이다. 야들야들한 촉감과 묵향이 올라오는 묵밥(4000원)도 보리밥(5000원) 못지않으니, 보리밥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권할 만하다. 식당 모양새는 별볼일 없으나 모든 음식 맛이 만만치 않다. 그냥 찾아 가기에 먼 길이라면, 나주개미집을 핑계 삼아 남한산성 등산을 해도 좋을 듯하다. ■ 군포 ‘원조옛날보리밥’ (031-424-2515) 보리밥으로 승부수를 던져 성공한 사례이다. 군포시 계원예대 후문 거리가 일명 보리밥 촌인데, 초입 주차 요원의 유혹을 뿌리치고 끝까지 들어가야 이 집에 다다른다. 작은 입구에 비해 들어서면 앞방, 뒷방의 방들이 미로처럼 숨어있고, 방마다 보리밥(6000원)을 먹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고사리·가지·취나물 등을 돌려 담은 비빔용 나물 접시와 한 바구니의 쌈이 푸짐하다. 공장용 제품마냥 누가, 언제 먹어도 무난한 보리밥 맛이다. 관광지 식당처럼 분주한 분위기인 만큼, 보리밥에 어울릴 만한 살가운 친절은 기대하기 어렵다.
군포에 ‘옛날보리밥’이 있다면 인천엔 ‘명동보리밥’이 있다. 이 집은, 보리쌀로만 지은 꽁보리밥(4500원)인데도 차지고 쫀득거리면서 거친 보리냄새가 나지 않는다. 나물은 계절마다 바뀌는데 하나하나가 맛깔스럽다. 특히 돼지등뼈를 넣은 되비지는 콩에 친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쉽게 먹을 수 있고 두부와 무만으로 끓인 청국장도 구수하다. 어린 열무 순을 넣어 비벼 먹는 것과 구수한 눌은밥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저렴한 가격에 한 상 푸짐히 받을 수 있어 만족감이 더한 곳이다. 유명세만큼 아류 명동보리밥도 있으니, 본점의 체인인지 정확히 알고 가야 제 맛을 볼 수 있다. ■ 인천 부평동 ‘꽁보리밥’ (032-528-8230) 테이블 다섯 개가 전부라 문 밖의 간이 테이블까지 꽉 찰 때가 많다. 보리와 쌀이 반반 섞인 밥에, 먹기 좋을 정도로 진한 된장찌개, 잘 익은 열무김치, 무생채, 콩나물, 상추겉절이가 기본이고 꽈리고추볶음, 감자조림 등은 그날그날 바뀌는 반찬이다. 이 집의 반찬은 하나같이 싱싱하다. 감자조림이 떨어지면 버섯볶음이 등장하고 김 무침이 떨어지면 취나물이 무쳐져 나오며 그날 만든 것은 그날 모두 소비한다. 이 동네 사람들은 간식도 보리밥(4000원)인 양 꽁보리밥집엔 식사시간 외에도 보리밥 손님이 계속 이어진다. 싱싱한 나물과 된장찌개의 조화, 거기에 주인장 부부의 넉넉함이 묻어나는 밥집이다. (이윤화·쿠켄네트 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