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본2
대한민국에 개인이 원하는 학교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가?
내가 선택한 학교가 아니었다. “교육”은 나라가 하는 일이라 여겼기에 그냥 초중등, 대학을 다닌 것이다. 그 속에서 사회적 선발을 위해 얼마나 많은 무기력한 정보를 맹목적으로 암기해야만 했던가?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지만 나를 짓밟은 수레바퀴에 올라타서 학생들에게 똑같은 무기력한 지식을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교육”이란 이름이지만, 실상 교육이 아니었다.
교육과 비교육 간의 비교는 체험에서 온다. 나는 운 좋게도 교육대학 다닐 때, 교육대학을 벗어나 이규형 사범님(이후 대학 교수, 국기원 원장 역임)께서 운영하시는 도장에서 교육적인 태권도 수업을 체험할 수 있었다. 물론 당시에는 교육이라는 자각 없이 내 인생에서 가장 활기차게 태권도를 소재로 마음껏 배우고 가르쳤던 것이다. 이것은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 과정에서는 한 번도 체험하지 못한 歡喜환희로 다가왔던 것이다. 교육대학에서 울울답답한 초등학교 교사 직업과정을 밟고 있으면서, 방과후, 방학에는 마음껏 태권도를 소재로 교육을 체험했기에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서도 방과후수업으로 태권도를 지속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교사로서 주어진 다양한 교과 수업과 자유롭게 선택한 태권도 수업 사이에서 점차 커지는 갈등은 교직 생활에서 교사와 수업, 교육의 존재를 짓누르는 질문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도덕 수업에서 교과서를 들고 수업 목표를 유도하고 강조, 확인한다. 언어를 통해서 행동까지 변화시킬 수 있을까? 행동 변화에 주목한다면 태권도 교육이 유효했다. 1993년 초임교사 시절이나 지금이나 도덕 수업은 일주일에 한 시간 정도인데, 언어주의에 매몰될 수 있는 교과서 이용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굳이 도덕 수업과 관련짓는다면 공익에 부합하는 학생의 행동에 대해 칭찬하고, 공익을 해치는 행동을 억제, 야단친 정도일 것이다. 이런 정도라면 학교생활과 일상, 사회에서의 관심사와 일치하지 않는가?
내가 경험한 서울시 초등학교에서 학년별 일제고사가 사라진 것이 대략 2010년 즈음이다. 이전까지 소위 주지 교과라고 일컬어지는 국어, 수학, 사회, 과학, 영어의 경우 일제고사의 단골 교과였다. 학생, 학부모의 관심이 지대했기에 교과서로부터 벗어난 수업을 애초부터 기획하기 어려웠다. 좋건 싫건 교과서를 펴치면서 수업을 시작하고 수업 동기가 움츠러든 상황은 내가 체험한 태권도 수업과는 판이했다. 무엇이 다르기에 동기 유발, 집중, 흥미가 이토록 다르단 말인가? 어느 지경에 가서는 나 역시 포기하고 교과서 중심으로 태권도 수업과 비교하지 않으려고 노력도 했다. 하지만 한시라도 여유로운 순간이 찾아오면 ‘이건 아닌데.....’란 회한을 뱉어내곤 했다. 확신 없이 제도의 나팔수가 되어 끌려가는 기분은 결코 유쾌할 수 없다.
일제고사가 없는 교과(음악, 미술, 실과, 체육, 도덕)의 경우 평가권은 담임교사인 나에게 있었기에 수업을 학생들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았고, 교과서 내용을 하더라도 학생들이 좋아하는 내용을 활동 중심으로 구성하여 교육이라고 자부할 수 없어도 학생 주도의 활기찬 수업을 할 수 있었다. 내가 대학 때 경험한 태권도 도장에서는 사범님의 교육의 수준이 교육여건과 메타교육까지 활성화되어 선후배간의 협동교육이 자연스러웠다. 이런 분위기를 예체능 교과수업에 적용하여 각 분야에 재능이 있고 가르치는 체험을 하고 싶어하는 학생들을 내가 도울 때 꽤나 큰 보람을 느꼈다. 미술 판화에 관심있는 여학생이 서투른 친구들을 지도하면서 힘들어 하면서도 보람을 얻는 모습을 보면서 굳이 내가 모든 교과에서 선생 노릇을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렇다면 내가 힘써야 할 나의 專攻전공은 무엇인가? 이 고민이 깊어서일까? 이후 엄태동 교수가 쓴 『초등교육의 재개념화』에 “메타교육”을 보고 歡呼雀躍환호작약했다. 하지만 교육본위론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에 좀 더 단단한 이해와 실습은 아직도 미지수이다.
나의 열정과 애정, 숭고한 노력과 가치가 담긴 태권도 수업에서는 사범님과 여러 수련생들의 통지표의 몇 줄 같은 기록은 없었지만, 학교에서는 열정과 노력의 유무와 관계 없이 제도적으로 통지표 평가를 교사가 해야하는 상황이라 나로서는 너무나 곤혹스러웠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모두에게 능력 이상으로 잘 주고, 서술식의 경우 학생에게 반 정도는 스스로 후하게 평가하라고 기회를 준다. 어차피 통지표 평가는 장식에 불과하고 실질은 수업에 오고가는 눈빛 속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태권도에서 교육이 이루어지는 상황은 몸(인격적 지식)의 즉각적인 평가이기 때문이다. 교육평가는 진행되는 교육을 가속시키고 거듭나게 한다. 교육평가는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육이라는 특별한 활동과 상황에서 이루어질 때 새로운 꿈을 지향할 수 있다. 스승과 제자 간의 눈빛과 몸을 통해서 이루어지기에 학교 제도의 평가에 대해 겉치레, 장식 정도로만 취급하였다.
태권도 수업과 학교 교과수업 간의 괴리는 끊임없이 교육학의 세계로 안내했다. 지금도 그러하다. 하지만 교육과 교육학의 세계는 범주가 다르다. 교육학을 한다고 교육학이란 분과학문이 필연적으로 교육에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거꾸로 교육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교육학을 잘한다고 보장할 수 없다. 둘을 관련지을 수 있겠지만, 나의 경우 교육학 교육을 통하여 내가 경험한 태권도 교육과의 유사성을 확인하고, 이제는 학교 교과 수업에 교육을 어떻게 적용시킬까 궁리하고 있다.
교육학을 소재로 한 교육 체험은 2011년~2012년 삶과교육연구소 연구생 시절에 淸澗청간 선생님과 질문공탁으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2년 동안 파견교사 신분으로 거의 매일 연구소에 드나들며 청간 선생님과 최성욱 선생님의 말씀도 듣고 일주일에 한두 번 질문지를 써서 1대1로 질문공탁을 진행(때로는 최성욱 선생님께서 참여하심)했다. 이를 교육학 교육이라고 한다면 이십 년 전 이규형 사범님으로부터 받은 태권도 교육과 흡사하여 또 다시 환호작약했던 것이다. 공통 체험은 대체로 이렇다.
1. 막연하게 생각했던 태권도 기술이 좀 더 분명하게 다듬어지듯이, 교육학의 질문이 어떤 문제와 연결되어 있고, 어떻게 해야 풀려나갈지 가능성이 조금씩 보인다.
2. 도전하고자 하는 태권도의 발차기 기술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활동이 필요하듯이 교육학의 문제 역시 궁리하고 관련 자료를 찾는 노력이 중요하다. 최적의 자료를 확인해주시니 사제 관계가 더 깊이 들어간다.
3. 나의 현품을 적절히 감안하셔서 언설을 하시니까 마치 비밀을 나에게만 전하신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하고 구구절절 뼈에 사무치는 경우가 많아 나중에는 자연스레 녹음을 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자주 들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오글거려 듣지 않는다.
4. 내 질문이 미숙(내 현품을 적절히 표현하지 못한 상황)해도 현품이 처한 위기와 과제를 확인하시고 다음 단계의 청사진을 시범하거나 언설로 비유하신다. 언설로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많기에 비유를 많이 드신다.
5. 도장과 연구소에 들어설 때,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 기대하고, 퇴근할 때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가슴 벅차다.
청간 선생님과의 교육학을 소재로 한 교육 체험으로 인하여 나는 2013년 학교에 복귀하여 학생들의 자유질문을 소재로 질문공탁 수업을 진행했다. 교과서 없이 주지교과 수업을 시작한 셈이다. 열광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도무지 어쩔 줄을 몰라 곤혹스러워하는 학생도 있었다. 처음엔 질문공탁 수업에 대해 대부분의 학생이 호기심을 가지지만, 질문을 써내야하는 조건 앞에서 힘들어하는 학생들이 많아서 대개 두 달 이상 지속하기 어려웠다. 한두 달 쉬었다 하든가, 원하는 학생들과 방과 후에 별도로 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