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김남주 시인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70년대말,박정희 유신독재가 마지막 발악을 하던 때, 수원에 있는 크리스찬 아카데미 농촌지도자 교육에 참가하게 된 후였다.
뜬금 없이 이 교육에 참가하게 된 사연을 먼저 얘기해야하겠다. 충주의 김상덕 형님(현재66세)이 당시 추풍령 계룡리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나를 찾아 왔다. 우리 마을에 살고 있던 천주교를 다니는 후배와 함께 와서 10여살 아래의 나와 인사를 나누게 되었고 밤을 세우며 대화를 나누었다. 주로 농촌의 농사와 농민들의 어려운 처지를 얘기했다. 여름이었다.
이 해 마지막 농한기에 김형으로부터 「농민교육」을 한번 갔다오라는 연락을 받고 난생 처음 수원의 교육장소를 찾아갔다.<내일을 위한 집>이었다. 여기서 3박4일 농민교육을 받았는데 내용은 농촌현실 문제를 끄집어내고, 분반토론을 벌이고, 발표를 하고,<농협문제>를 강사가 강의를 하는 빡빡한 일정이었다.
이 교육을 맡은 여러 강사중 대표적으로 기억에 남는 분이 지금은 부산대학교에서 몸담고 있는 경제학자 황한식 교수이시다. 그 당시 듣기로는 서울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바로 삼성 이병철의 비서를 하다가 집어치우고 이 교육을 이끌어 가던 갓 서른의 혈기왕성한 강사였었다. 일단 크리스천아카데미 교육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이 글의 원래 줄기로 돌아와 김남주 시인이 영동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또한 내가 본 김남주 시인이 어떤 분이었는지 독자들에게 얘기해야 하겠다.
농민교육을 받은 후, 그 교육기관인 서울 장충동의 경동교회 부속건물에 자리잡고 있던 크리스천아카데미 사회교육관으로 갔었다. 여기에는 (오늘날 열린 우리당의 이우제 의원, 항한식 교수, 진주 경상대의 장상환 교수 등)이 근무하는 사무실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대화>라는 월간잡지 지난 호를 10여권 얻었다. 이 잡지 속에서 김남주 시인의 시를 처음 읽은 것으로 기억한다. 우선 어렵지 않은 시로서 농촌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감동을 주었다. 도대체 김남주가 어떤 시인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가 쏜 총탄에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광주사태가 일어났다. 이즈음 나는 서른세살 노총각 소릴 듣다가 결혼을 한 터였다. -나의 결혼이야기는 <시골로 가는 길>(풀빛 출판사)이라는 책 속에 「연애편지」로 수록되어있다.
이러한 80년대 초, 김남주의 옥중시집이 나온 것이다. 우연히 오다가다 들른 어느 서점에서 이 시집을 발견하고는 어려운 형편이지만 책을 구입해서 보았다. 옥중에서 쓴 구구 절절한 얘기들이 모두 시라는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내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시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시는 시인들이나 쓰는 것이고 나같은 사람은 읽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우선 나는 한글 받침이나 띄어쓰기를 제대로 할 줄 모르는데 어찌 감히 시를 쓸 수 있을까, 시를 쓰는 시인들은 천재적인 사람이나 쓸 수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광주사태」를 전후한 어려운 시대상황 속에서 농민교육을 받은 우리들은 스스로 「농민운동 조직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카톨릭 추수감사제 농민행사에 참석하러 충북 음성의 천주교회를 가게되었다. 이즈음 한국의 농민운동 거대산맥을 이루는 「기독교농민회」조직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내 스스로는 카톨릭농민회는 형이고, 기독교농민회는 아우라고 생각했다.
이 농민운동 '형제조직'의 배경과 활동경위에 관해서 여기에서 논할 바가 아니다. 이 부분은 다음에 <농민운동가 최종진 장로>편에서 다룰 것이다.
80년대 말이었다. 김남주 시인이 옥중에서 석방되었고, 그리고 마침내 어느 날 김남주 시인이 영동 땅에 입성하듯 나타나 처음 나와 악수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자리는 영동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시를 쓰는 양문규 시인이 남주형을 모시고 와서 소개를 한 첫 만남의 자리였다.
곁에는 신춘문예에 소설로 당선하여 문단에 갓 발을 들여놓은 경희한의원 김혁 원장도 함께 있었다. 영동 중심지 어느 술집에서 밤늦도록 김남주 시인이 들려주는 '현대사'는 감동적이었다. 이렇게 영동에 첫발을 딛게된 김남주 시인은 황간면 용암리에서 농사를 짓고 시를 쓰는 박운식 농민시인을 만나 월류봉 아래 물 맑은 강가에서 개고기를 먹어가며 여름밤이 새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다.
앞으로 한사골 칼럼에는 <박운식 농민시인이 본 김남주 선생>이 독자들에게 감동을 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양문규 시인이 본 김남주형>이란 글 속에서 김남주 시인이 내 고향 같은 영동을 얼마나 사랑했던가를 보여줌으로서 독자여러분들의 심금을 울려 줄 것이라 고 확신한다.
내가 사랑했던 김남주 시인이 내 또래로서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게 된 것을 가슴아파 하면서 눈물이 핑 도는 심정으로, 마지막 병상에서 본 얼굴을 기억하면서 얘기를 이어 가리라.
88년 한겨레신문이 창간되면서 사명감 같은 신문배달에 「노예처럼」끌려가면서 김남주 시인을 만날 기회가 멀어 져만 가서 나의 시혼은 외로워져만 갔다. 김남주 시인이 작고하기 얼마 전이었다. 한겨레 지국장 세미나가 제주도에 있는 YMCA수련원에서 개최되어 난생 처음 제주도여행을 하게 되었다. 가난한 우리들 신문 배달하는 동지들은 호텔에 갈 형편이 못되었다. 뜻밖에도 이 날 참석한 자리에서 모범 지국장 상을 받았고 상금 몇십만원을 세금을 떼고 받았다. 공짜로 생긴 돈 아닌가. 이 돈을 어디다가 쓸까 고민하다가 그냥 봉투를 호주머니 속에 넣고 다녔다.
그때 마침 문익환 목사님이 갑자기 작고하셨다. 70년대 말인가, 문 목사님도 영동의 시장 통에 있는 제일교회에 와서 강연을 한 적이 있는데, 이 문 목사님을 처음 만난 자리는 장준하선생의 장례식 날 장지의 식당에서였다. 목사라는 분이 내게 소주잔을 내밀면서 술을 부어 주시는 것이 아닌가. 아들 뻘 되는 내게 말이다. 이 때만 해도 나는 목사는 술을 마시면 큰 일을 저지르는 것으로만 생각했었다.
수유리 한신대학 교정에서 열린 문목사님의 영결식에는 영동고등학교 미술교사로 근무하다 청주로 떠난 이종관 선생도 고무신을 신고 참석했다. 참 오랜만이었다. 이선생이 영동에서 총각선생 시절의 자취방을 간혹 들랑거렸는데, 라면도 끓여 먹고, 찬밥도 얻어먹곤 했다. 물론 양문규시인이 문학청년시절에, 농민운동 한다고 쏘다니는 나를 만나게 되었고, 이선생을 소개시켜 알게 된 것이다. 아마도 이선생이 엄숙한 장례행사 현장을 마음속에 새겨 스케치해두기 위해서 왔으리라......
통일운동가 문익환 목사 영결식장은 만장의 깃발이 숲을 이루었고, 식이 끝나고 오후부터 진눈깨비가 내리고 바람도 찬 날씨였다. 동대문까지 걸어서 장례행렬을 따라 갔다. 더 이상 장지인 경기도 마석 공원묘지까지 따라갈 수 없었다. 밤차로 영동엘 내려와야만 새벽에 일어나 신문배달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장례행렬에서 이탈한 나는 문득 김남주 시인이 떠올랐다. 동대문에서 서대문방향 시내버스를 타고 서울고등학교 앞을 지나 내렸다. 지금은 이름이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서울제일병원」인가로 기억되는 병원을 찾아갔다. 나는 낯설고 큰 병원엘 가면 주눅이 든다. 그러나 김남주 시인이 입원한 병실 문 앞에 다가섰을 때는 친근감마저 들었다.
병실 문에는 면회사절이라고 씌여있었다. 막연히 머뭇거리고 있는데 마침 문이 열렸다. 이때다 싶어 재빨리 들어섰다. 젊은 부인이 초면의 나를 보고 초면의 어디서 오셨냐고 묻는다.
"영동에서....."라고 대답했다.
남주 시인은 걸어서 내 옆으로 천천히 지나가는 남편을 향해 아는 분이냐고 물으니까
"영동"
이라는 모기소리만큼 작은 목소리다. 간신히 화장실 향해 걸어간다. 정신력만큼은 나를 알아보고 기억하고 있었다. 아! 김남주 시인이 이렇게 췌장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하며 쇠약해져 있다니. 바늘로 피부를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마른 수수깡 같은 손가락과 얼굴은 살이 없어 광대뼈만 보였다. 영동에 왔을 때의 모습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낯선 사람이 되어 있었다.
영동에 자주 왔을 때는 눈에서 광채가 빛났었다.
영동고등학교 정문 앞에서 황간행 버스를 올라타는 건강한 뒷모습이 생생히 떠오른다. 황간의 박운식 농민시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내가 함께 가지 못한 것은 그 곳까지 따라 들어가면 새벽에 읍내로 나와 신문배달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병상의 김남주 시인은 정신은 영동을 기억하고 있지만 말 한 마디 하기가 힘겨운 상태였다.
나는 간호를 하고 있는 부인에게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10만원이 든 봉투를 건네주고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영동으로 돌아왔다.
그 후 작고하셨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고도 장례식에 갈 수 없었다. 신문배달에 몸이 매여있어 토요일에나 외지에 출타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김대중대통령이 당선 뒤 「광주항쟁」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되고, 광주 5.18민주영령 추모식에 가서 김남주 시인의 묘소를 참배하러 갔다. 고등학생인 아들의 손을 잡고서.... 그 때 비석 앞에서 찍어 온 사진을 요즘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김남주 시인이 영동을 사랑했고, 그토록 염원했던 조국통일을 잊은 채 10여 년 전에 저 세상으로 떠났지만, 그의 시집과 추억은 내 가슴속에 남아 희망의 등불이 되고 있다.
시집 <조국은 하나다>(남풍,1988) 속에는 " 감을 따면서"라는 58행의 긴 시는 노동의 신성함과 가치를 쉽고도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다.
이 시 '감을 따면서'는 내가 엮은 < 감나무 잎에 쓴 시> 모음집에도 들어 있다.
첫댓글 김남주님은 지금 광주 구묘역에 그림처럼 누워계십니다. 너무 잘 알고 있어 언급회피 할뿐 입니다.. 고은님, 그분과도 술잔을 꽤 기울이기도...
흰머리소년님의 고향 영동은 시인, 문필가들의 마음의 고향인듯도 하군요, 그러기에 흰머리소년님 같은 농민운동가 시인이 출현한것 이겠지요, 아픈기억이 아니라 아름다웠던기억으로 간직하십시요 아침이슬님도 함께 ! 추억은 늘 아름답게 떠올라야 하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