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9. 17. 주일예배설교(요한복음 강해 75)
요한복음 21장 15~23절
역시 예수님!
■ 야구를 보면 선발 투수가 중요합니다. 선발 투수가 기선 제압을 어떻게 해놓느냐에 따라 경기의 판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발 투수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무리 투수도 중요합니다. 경기를 깔끔하게 마무리하기도 하지만, 경기의 판도를 뒤바꿀 수 있는 역할도 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야구 경기로 볼 수 있다면, 예수님은 선발 투수이시자, 마무리 투수이십니다. 인생의 기선 제압도 하시지만, 인생의 판도를 결정하시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요한복음의 끝자락에 이른 우리에게 예수님은 멋진 마무리를 통해 우리의 인생의 길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마치 요한복음의 시작에서 멋진 기선 제압을 통해 인생이 빛과 생명을 향해 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듯이 말입니다.
오늘은 마무리 투수로서 예수님이 던지신 마지막 투구를 통해 우리의 인생의 길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 겉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가 ‘주님이시다!’라는 요한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급히 겉옷을 걸치고는 바다로 뛰어내렸습니다. 이는 자살 행위가 아니라 민망함과 죄스러움에 의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에 두 귀를 곤두세우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모든 조반을 다 준비하셨지만, 의도를 가지고 153마리의 물고기 중에서 몇 마리 갖고 올 것을 주문하셨습니다. 그때 가장 민첩한 반응을 보인 제자가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두 귀를 곤두세우고 있지 않았다면 취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바다로 뛰어내린 것은 민망함과 죄스러움에 의한 행동이었습니다.
이 마음을 눈치 못 채실 예수님이 아니시죠? 사실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는 ‘영적 채권채무 관계’가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저지른 영적 채무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저 양반을 모르오!’라며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부인한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예수님을 뵐 면목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베드로가 바다로 뛰어내린 것은 민망함과 죄스러움을 극대화한 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이 드디어 말씀을 꺼내셨습니다. 15절 상반절입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와우~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리셨습니다. 이것은 분명 베드로의 부인 사건을 염두에 둔 질문이셨습니다.
이 질문에 당황했지만, 베드로는 즉각 대답했습니다. 마치 지난번 잘못을 만회라도 하고 싶은 듯 즉각, 그리고 명확하게 대답했습니다. 15절 중간입니다.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는 읍소하듯 대답했습니다. 주님께서 알고 계신 것과 같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이 대답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즉각 사명의 자리로 복귀시키셨습니다. 5절 하반절입니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내 어린 양을 먹이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지금 베드로가 와있는 이 자리, 즉 물고기잡이 자리는 베드로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자리는 물고기 잡는 곳이 아니라, 사람 낚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그런데 예수님은 같은 질문을 또 하셨습니다. 16절 상반절입니다.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러나 이 질문 또한 지난 번 베드로의 부인 사건을 염두에 두신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앞의 질문과는 달리 “이 사람들 보다”가 빠졌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앞선 질문에서 이것에 대한 확실한 답을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주님보다 더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대답을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재확인이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여기에는 두 번째 부인에 대한 회개의 기회를 부여하신 것이기도 했습니다. ‘회개하겠니?’
이에 베드로의 대답은 조금 전의 대답과 같이 분명했습니다. 16절 중간입니다.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 흔들리지 않는 대답과 회개에 예수님은 방금 하셨던 부탁을 또다시 하셨습니다. 16절 하반절입니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이는 베드로의 사명을 재확인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확인 질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똑같은 질문을 세 번째 하셨습니다. 17절 상반절입니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에 베드로는 적지 않게 당황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똑같은 질문을 세 번씩이나 하실 것이라고는 예상 못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같은 질문을 또다시 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을 또다시 받는 순간 베드로는 여러 가지 생각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내가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한 전력이 있으니 결코 못 믿으시겠다는 것인가?’ ‘혹시 나를 토사구팽하시려는 결심이신가?’ 별별 생각이 그 짧은 시간에 수없이 떠올랐지만, 베드로는 일단 자신의 진심을 고백했습니다. 17절 중간입니다.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 고백은 진심이었지만 앞의 두 번의 고백과는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자신이 의심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이의 속 깊은 곳까지 아시는 ‘주님의 다 아심’을 들어 고백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오매” 자신의 진심을 더 이상 보여드릴 수 없자, 베드로가 꺼낸 비장의 카드는 주님의 다 아심이었습니다.
이 카드가 통했습니다! 17절 하반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드디어 베드로의 고백은 인정을 받았고, 세 번의 부인 사건 또한 용서를 받았습니다. 3:3! 드디어 거룩한 동점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베드로의 패배가 아니라, 베드로의 고백이었습니다. 베드로의 굴복이 아니라, 베드로의 회개였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 드디어 베드로의 고백과 회개를 받으신 예수님은, 베드로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될지를 말씀하셨습니다. 18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말씀의 요지는 분명했습니다. ‘지금까지는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네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19절은 주석처럼 설명합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께서 마무리 투구를 하고 계시는데 변수가 생길 조짐이 보였습니다. 갑자기 베드로가 뭔가에 심기가 틀어진 발언을 한 것입니다. 20절과 21절입니다.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베드로의 이 질문에서 자신의 통장에 29만원 밖에 없다는 분이 했던 그 유명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왜 나만 갖고 그래?’ 사실 따지고 보면 베드로만 잘못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베드로는 대놓고 예수님을 부인했으니 이 점에 있어서는 그의 입이 백 만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제자들도 십자가를 피해 숨고 도망갔습니다. 그러니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인간적 감정이 올라올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왜 나만 갖고 그러시지? 저 요한은?’ 그래서 요한에 대해 어떻게 하실 것이냐고 여쭌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의 대화 대상은 베드로이지 요한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실을 주지시키신 것이 22절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이 말씀은 매우 냉정해 보입니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 그러나 이 말씀은 냉정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사명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에게는 베드로의 사명이 있듯, 요한도 요한의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사명은 주님의 계획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므로, 베드로는 베드로의 사명에, 요한은 요한의 사명에 충실하면 된다는 의미의 말씀이셨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23절)고 하신 말씀은 각자의 사명을 확실하게 재확인시키신 것일 뿐, 베드로의 질문에 야단을 치신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각자의 삶이 주님의 계획된 은총 가운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드디어 예수님의 깊은 은혜를 깨달은 베드로는, 전설에 의하면, 복음을 전하다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예수님과 같은 자세로 죽을 수 없다며 거꾸로 매달 것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베드로는 19절의 설명처럼, 십자가에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사명에 충실했고,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이를 인정받은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이후의 삶은 어쩌면 지옥과 같았을 것입니다. 결코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했었기에 너무도 괴로웠을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생각할수록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너무도 잘 아시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 괴로움의 문제, 죄의 문제를 회개할 기회를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했을까요? 그래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를 연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역시 예수님은 예수님이십니다! 은혜의 세계로 들어 올 기회를 무수히 만들어주십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부인해도 은혜는 멈추는 법이 없습니다. 세상 모두를 품어주시는 풀가동의 은혜이십니다. 그것도 24시간, 365일, 은혜의 풀가동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은혜는 언제나 어디서나 늘 풀가동 상태이십니다.
■ 이제 베드로와 요한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그들은 대선배일 뿐입니다. 이 시대는 우리가 그와 같은 사명을 이행해야 할 시대입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에서 “너”는 이동춘입니다. 2천년 전에는 베드로였고, 요한이었지만, 지금의 “너”는 이동춘이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너”입니다.
혹시 어쩌면 이 메시지가 두려우실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게 될까 봐 두려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베드로의 몫이었습니다. 순교의 사명은 순교의 시대에 필요한 것이지 보편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순교의 정신은 십자가의 정신이니 이 정신만은 꽉 붙잡아야 합니다.
그러니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에 공포를 느낄 이유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됩니다. 더도 덜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살면 됩니다. 그러면 역시 예수님은 여러분을 제대로 살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요한복음 22장은 여러분이 쓰실 차례입니다. 자, 쓰시겠습니까?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