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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상 글 >
사랑과 침묵과 기도의 사순절에...
글 : 이 클라우디아(해인) 수녀
<성 베네딕도 수녀회>
주님,
제가 좀 더 사랑하지 못하였기에
십자가 앞에서 사랑을 새롭히는 사순절이 되면
닦아야 할 유리창이 많은 듯 제 마음도 조금씩 바빠집니다...
"올해에도 우선 작은 일부터 사랑으로"
이렇게 적혀 있는 마음의 수첩에
당신의 승인을 받고 싶습니다, 주님...
화분에 물을 주는 것과 같은
저의 조그만 행위를 통해서도
당신은 끊임없이 찬미 받으소서...
주님,
제가 좀 더 침묵하지 못하였기에
십자가 앞에서 침묵을 배우는 사순절이 되면
많은 말로 저지른 저의 잘못이
산처럼 큰 부끄러움으로 앞을 가립니다...
매일 잠깐씩이라도 성체 앞에 꿇어앉아
말이 있기 전의 침묵을 묵상하게 하소서...
제가 다는 헤아리지 못하는
당신의 고통과 수난, 죽음보다 강한
그 극진한 사랑법을 침묵하는 성체 앞에서
침묵으로 알아듣게 하소서...
그리하여 주님,
제가 먼 광야로 떠나지 않고서도
매일의 삶 속에 당신과 하나 되는
즐거운 사순절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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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영적지도신부 묵상 훈화 >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글 : 윤 클레멘트(양호) 신부님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복음을 선포하시며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 1,12~15)
어느 날 마귀들이 대토론회를 가졌습니다. 먼저 재물 마귀가 제안했습니다. “하느님보다 돈이 재미있고 위력이 세다는 것을 보여주면 됩니다.” 많은 마귀들이 “그 방법에 속아 넘어가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요즘 사람들이 현명해져서 결국은 실패하고 만다.”라고 하면서 반대했습니다.
무신론 마귀가 의견을 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지, 하느님이 있기는 어디 있느냐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을 멍청이라고 을러대면 됩니다.” 그러나 “자기가 잘난 줄 아는 사람들은 속아 넘어갈지 모르나, 훌륭한 사람들은 속지 않는다.”며 반대했습니다.
이때 한 마귀가, “내가 지금까지 성공한 경우는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짓고 괴로워할 때 ‘그래 맞아. 그러나 너만 그러는 게 아니데 뭐. 그리고 이번만 그렇게 하고 다음부터 잘하면 되잖아’하고 뒤로 미루게 할 때 제일 많이 속아 넘어갔답니다. 우선 세상살이부터 정리해 놓고 하느님한테는 차차 가도 되지 않겠느냐?’하고 했더니 사람들이 제일 많이 따르더군요.”라고 하자, 마귀들이 만장일치로 그 의견이 가장 훌륭하다고 박수를 쳤습니다. 이 의견을 낸 마귀의 이름을 물어보니, “제 이름은 차차 마귀입니다.”라고 대답했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성령의 이끄심으로 어려움이 많고 유혹이 몰아치는 사막에 갔습니다. 하느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사막에서의 시련과 유혹들을 이겨 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다가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사람들이 영원한 불빛 같은 하느님의 말씀 속에서 힘을 얻고 용기를 얻어 희망적인 삶을 살게 말입니다.
사순 시기는 예수님이 수난과 고통, 죽음을 통해 우리 자신의 믿음을 더욱 키워야 하는 시기입니다. 차차 마귀의 꿰임에 빠져 하느님을 뒷전에 두고 그럭저럭 살아온 우리의 삶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들로부터 힘을 얻으면서, 진실한 회개와 참회의 실천으로 하느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그분의 부활에 온전히 동참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순[四旬]시기는 ‘재의 수요일’부터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날인 ‘주님 만찬 성 목요일’ 전까지입니다. 이 시기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슬픔의 때이면서, 동시에 영혼의 죄를 씻고 새 사람이 되는 은혜의 때이기도 합니다.
사십일(사순) 40 이라는 숫자는 성서에서 중대한 사건을 앞두고 준비하는 기간을 상징하고 정화하는 데 필요한 기간으로 나타납니다. 노아 홍수로써 새 세상을 준비하는 데 40 주야 비가 내렸고(창세 6,5-7.22), 이스라엘이 약속된 복지에 들어가기 위해 40년간 광야에서 준비해야 했고(신명 29,4), 모세가 하느님께 계명을 받기 전에 40주야 단식하였고(신명 9,18), 예언자 엘리야가 하느님의 산 호렙에 가기 위해 40 주야를 걸었고 (1 열왕 19, 7-8),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40 주야 단식하셨으며 (마태 4, 1-11), 승천하시기 전 40일 동안 지상에 머무셨다 (사도 1, 3). 그러므로 40 이라는 수는 참회와 속죄로 생활의 혁신을 촉구하며 하느님과 만나기 위해 필요한 준비를 하는 기간입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최후의 만찬, 예수 수난, 부활에 이르는 ‘파스카 3일’만을 지냈으며, 오늘날처럼 40일의 기간이 결정된 것은 니케아 공의회(325년) 때의 일입니다. 전통적으로 사순 시기는 예비신자들이 세례를 준비하는 최종기간이었으므로 더욱 경건하게 지냈습니다. 옛 사순시기 성가의 한 구절은 이러한 정신을 잘 보여준다.
“말과 음식과 음료를 삼가고, 잠과 놀이를 더 줄이세. 늘 깨어 지키세 ...”
사순시기에 사제는 회개와 속죄의 상징인 자주색 제의(祭衣)를 입습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09년 사순시기 담화를 통해 “모든 가정과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영을 어지럽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영혼을 살리는 모든 것 안에서 자라나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갈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교황님의 2008년도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2코린 8,9) 라는 제목의 사순시기 담화말씀을 들으면서 오늘의 말씀묵상을 가름합니다.
해마다 사순 시기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깊게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고, 하느님의 자비를 재발견하게 하여 우리가 형제자매에게 더 자비로울 수 있게 합니다. 교회는 사순 시기에 신자들이 내적 쇄신의 과정에서 단식과 자선과 기도와 같은 과제를 제시할 의무가 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지상 재물을 소유하면서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하는 사람에게 경고하십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1요한 3,17)
요셉 베네딕토 코토렝고 성인은 다음과 같이 충고하였습니다. “당신이 내어준 동전의 수를 세어두지 마십시오. 내가 항상 말하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자선을 베풀 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몰라야 한다면 오른손도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몰라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사순시기는 우리가 사랑을 키우고 가난한 이들 가운데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단련시키도록” 초대합니다. 우리는 이 사순시기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 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 다가가기 위해 개인과 공동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의 어머니요 충실한 종이신 마리아께서 신자들이 단식과 자선과 기도들로 무장을 하고 사순시기의 ‘영적 전쟁터’에 나아가, 영적으로 쇄신하고 부활축일을 맞이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
신부님의 '영성의 물가‘ 中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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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2주일
2015. 3. 1
마르 9, 2 ~ 10
♠ 복음 연구
* 2~4절 : 높은 산 위에서의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의 세례 후에 일어난 사건들이지만, 그분이 호수 위를 걸으신 사건처럼 초자연적 일화 중의 하나인데, 이러한 것은 역사가들의 비판적 조사로써는 접근할 수가 없고, 오직 신앙에 의해서만 그 의미가 밝혀진다. 여기에 천상적 두 인물이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 하고 있는데, 그들은 구약성서의 하느님의 사람들로서 역사의 여러 단계를 거쳐 그리스도에 이른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역사성과 연대성을 엿보게 해 주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위대한 분으로서, 고대된 분으로서, 희망을 잃지 않게 해주는 분으로서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과 이야기하고, 그분과의 특별한 친교를 보여주고 있다.
* 5~6절 : 베드로는 놀라운 광경에 매료되어 세 개의 초막을 짓고 그 빛나는 인물들과 머물기를 청하고 싶었다. 그는 이 순간의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으로, 이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것을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행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예언하신 이후에 그가 보인 태도와 아주 유사하다. 그때 그는 그러한 과정과 목적을 단념하시도록 예수께 간청하였고, 여기에서는 그 빛나는 인물들이 머물도록 권유한다. 마르코는 이것을 온당치 못한 것으로 여기고 있지만, 제자들을 사로잡았던 거룩한 두려움으로 그것을 설명한다.
* 7~8절 : 바로 이때,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하신다. 그들을 덮었던 구름은 신적인 현존, 구원의 현존의 표지이며 그것은 동시에 계시이고 약속이며 훈계이다. 하느님의 음성은 예수님을 엘리야보다 위대하고 모세보다 더 위대하며 기대된 메시아와도 다른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계시하신다. 세례 때의 음성과 대조적으로 이때의 말씀은 예수님이 아닌 제자들에게 주어지고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는 말씀이 덧붙여진다.
* 9~10절 : 그들은 영광스러운 변모를 체험한 산에서 내려오고 있는 순간에도 사람의 아들의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더러 침묵하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숙고하도록 촉구하시는 말씀이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정녕 죽음의 영역에 들어가시고 하느님에 의해 거기에서 나와 다시 살아나실 것임을 보다 강력하게 드러내기 위해 사용된 표현일 것이다.
♠ 복음 요약 : 숨겨져 있던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잠깐 제자들에게 드러난다. 이 사건은 당신의 죽음 후 받게 될 시련과 박해 속에서 제자들이 좌절하지 않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는 보장이다.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최고의 행복임을 느낀 베드로는 초막을 지어 그곳에 머물고자 하나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세상으로 내려와 죽음의 길, 즉 인류 구원의 현장을 향해 가신다. 하느님 나라는 그저 신앙 안에 안주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고통을 함께 나누고 진리를 향한 투쟁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 대화 방향 : ① 나는 나의 삶에서 진정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서 받아들이고 그분의 메시지를 귀담아 들으며 살고 있는지...
② 그로 인해 하느님의 자녀로서 변모되어 가며 살고 있는지 돌아보며, 서로의 체험들을 나누는 귀한 시간을 가져 봅시다...
♠ 참고 문헌 : ▪ 영적독서를 위한 마르코복음 <성요셉출판사> ▪ 말씀의 두레박 <생활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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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3주일
2015. 3. 8
요한 2, 13 ~ 25
♠ 복음 연구
* 13~17절 : 예수님은 공적 활동 초기에 과월절이 가까워지자 산 위의 도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그분은 성전 바깥마당인 ‘이방인들의 마당’에서 소와 양을 파는 상인들을 짐승들과 함께, 환전상들을 돈과 함께 내쫓으셨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의 재물인 비둘기를 파는 이들에게는 걷어치우라고 이르기만 하셨다. 예루살렘 성전 경내에 소와 양이 있었다는 것은 허용되기 어려운 예외적인 현상이다. 그들이 성소를 더럽히기 때문이다. 최고의회와 알력관계에 있던 가야파 대사제가 자기의 적수들인 최고회의 의원들에게 호의를 베푼 상인들에 대한 보복으로 그들의 경쟁자들인 다른 상인들에게 성전 경계선 안까지 마구간을 세우는 것을 허락한 것 같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성전을 정화하신 첫째 동기는 당신 아버지의 집을 시장터로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바빌론 유배 이후에 쓰인 즈카르야 예언서를 보면, 예루살렘에서는 모든 것이 거룩해지고 성전에 장사꾼이 없는 날이 올 것이라는 예언이 있다. 예수께서 메시아로서 장사꾼들을 성전에서 쫓아냄으로써 이 예언을 실현하셨다. 예수님이 성전을 정화하신 둘째 동기는 아버지의 집인 성전을 향한 열정이 예수님을 집어삼켜버릴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예수께서 처형되신 실제 이유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뒤 이 예언이 실현되었다고 믿었다....
* 18~22절 : 유다인들은 예수께 성전을 정화하시는 권한이 있음을 기적으로 증명하라고 요구했다. 예수님은 그들이 성전을 파괴한다면 삼일 안에, 즉 짧은 기간 안에 예루살렘 성전을 대체하는 성전을 짓겠다고 대답하셨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사흘 안에 재건하시겠다는 뜻으로 오해했다. 이와 달리, 그분은 당신의 신비스러운 몸을 성전으로 여기고 그들이 이 몸을 파괴하면 다시 세우겠다고 하셨다. 그들이 파괴하려는 성전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 이 성전은 그들이 예수님을 죽임으로서 파괴되고, 새로운 성전은 그분이 사흘째 부활하여 세우시는 것이다. 장사꾼들이 시장으로 퇴색시킨 예루살렘 성전을 당신의 부활하신 몸으로 대체하신다는 뜻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성전파괴와 성전 재건에 대한 예언을 실현하신 메시아이다. 부활하신 주 예수님은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곳이고, 그분께 올리는 예배의 중심이며, 생명수가 넘쳐흐르는 영적 성전이다. 하느님이 영광스럽게 현존하시는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예수님과 이분을 믿고 따르는 교회이다.
* 23~25절 : 예수님이 과월절에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 시민들은 그분이 행하신 표징 때문에 그분을 믿었다. 그러나 그분은 그들의 믿음을 신뢰하지 않으셨다. 그들의 믿음은 표징의 뜻을 파악한 것이 아니라 표징의 기적적인 측면에 집착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표징을 보고도 참된 믿음에 이르지 못했다. 그분은 그들이 진심으로 당신을 믿고 따를 의지가 없음을 간파하셨다. 사람의 속마음을 꿰뚫어보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고 사람들의 증언이 필요하지 않은 분이시기 때문이다...
♠ 복음 요약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신다. 제사가 봉헌되는 거룩한 곳,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을 만나는 결정적인 장소인 성전이 불의가 저질러지는 장소가 되었고 예식은 천박해졌다. 제물을 성전에서만 사도록 유도함으로 폭리를 취한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해야 할 성전이 성전답지 못함에 진노하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계시하신 말씀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은 영과 진리 안에서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중심이요, 하느님 현존의 장소이며 생명수가 넘치는 영적 성전이 되신다. 성체가 모셔지고 하느님의 성령이 머무시는 나 또한 성전이다...
♠ 대화 방향 : ① 주 예수님의 몸이 곧 성당이다. 따라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 자신은 하느님의 성전이 된다. 이처럼 고귀한 우리의 품위를 이기심과 세속의 온갖 허영으로 더럽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봅시다.
② 성당을 향한 열정이 내 마음 속에 있는가? 성당을 자기 가정만큼 중요하게 아끼고 가꾸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 참고 문헌 : ▪ 말씀의 등불(가톨릭 신문사) ▪ 말씀의 두레박 (생활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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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4주일
2015. 3. 15
요한 3, 14 ~ 21
♠ 복음 연구
* 14~15절 : 광야에서 하느님께 반항한 대가로 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 뱀을 봄으로써 다시 살 수 있었던 것처럼, 하느님께 반항하여 죄의 노예가 되어 죽어 가던 인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다시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음을 가리킨다.
* 16절 : 성경 한 구절 한 구절이 다 중요하고 의미가 있지만 특히 요한복음 3장 16절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 할 구절이다. 이 구절이 얼마나 중요한 지, 어떤 성서학자들은 성경에서 오직 한 장을 가져야 한다면 루카복음 15장 (되찾은 아들의 비유)이고 한 구절 밖에 가질 수 없다면 요한복음 3장 16절이다 고 한다. 인류가 지금까지 들어 본 많은 신 가운데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신은 하느님 아버지 단 한 분뿐이시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지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오 9,13). 이런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한계와 못남을 기꺼이 인정할 수 있다. 우리의 어둡고 죄스런 모습까지도 솔직히 내어 놓을 수 있다. 성경에서 외아들이란 표현은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고 오직 요한복음에서만 나온다.
* 17~19절 : 구리 뱀을 바라보기만 하면 무조건 살았듯이,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면 무조건 살 수 있게 해 주고 싶어 하시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가 극명히 드러나 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그렇게 했듯이, 이 세상을 사랑하시어 예언자를 보냈다면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성모 마리아에게 그러하셨듯이 이 세상을 사랑하여 천사를 보냈다면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하지만 하느님이 외아들을 보냈다면 이것은 그저 감사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예언자나 천사는 피조물이지만 외아들은 태초부터 존재하시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이 아들을 보냈다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보냈다는 것이다
* 20~21절 : 빛이신 주님 앞에서 우리가 내린 선택이 그대로 우리를 심판하는 기준이 된다. 빛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인 이들은 그 선택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받고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선택으로 스스로 멸망으로 인도된다. 그렇지만 언제라고 어둠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빛이신 주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가리켜 심판주가 아니라 구세주라고 부른다.
♠ 복음 요약 : 드멜로 신부님이 말했듯이 우리 삶의 최대 전환은 하느님이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시작되나, 그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자녀 된 특권을 마음껏 누리며 순례의 사람을 힘차게 살 수 있게 된다. 3장 16절은 하느님이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분명히 알려 준다. 복음의 진리를 가장 핵심적으로 담고 있는 이 구절과 루카복음 15장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마음을 열고 깊이 묵상해 볼 것을 권한다...
♠ 대화 방향 : ① 신앙생활은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의 인격적 관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하느님을 심판과 진노의 하느님으로 여긴다면 그런 관계가 불가능하다... 하느님이 자비와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믿지만, 하느님이 바로 자신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실제로 받아들이지 못한 적은 없는가?
② 있다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효과적인가 서로 나누어 보자.
♠ 참고 문헌 : ▪ 요한복음 산책<송봉모신부> ▪ 삶의 우물가에 오신 말씀<바오로딸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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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5주일
2015. 3. 22
요한 12, 20 ~ 33
♠ 복음 연구
개괄적 이해 : 요한복음 12장부터 펼쳐진 사건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 일주일 내에 발생한 일들이다. 특히 사순절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 파스카에 대한 고통스러우면서도 기쁨에 찬 묵상이 요구되는 사순절의 근본적인 주제들이다. 먼저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을 계시하는 “영광”이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1.14)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2.11) 그 다음 낮춤과 들어올림으로 영광을 수난에로 집중되기 시작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높이 들리는 것은 왕위에 오르는 행사도 된다. 왕이 옥좌에 앉아 백성에게 시선을 보내 듯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이끌어 당신에게 오게 하신다. 따라서 요한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얼마나 오래, 얼마나 오래 깊이 명상했는지를 보여준다.
※ 수난의 서곡
* 20~22절 : 예수님은 당신 생애의 마지막 파스카를 위해 성대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12,12-19) 이방인인 그리스인 몇 명이 그리스식 이름이며 12제자 중 한 명인 벳싸이다 출신 필립보에게 가서 예수님을 뵙게 해달라고 청한다. 예수님을 찾게 된 이유에 대해서 G.H.Bernard는 그들이 예루살렘을 찾아 이방인의 뜰에서 성전정화의 장면을(2,13-22) 목격한 후, 예수님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 싶어 찾아 온 것이라고 말한다. 필립보는 안드레아에게 가서 말했고, 그는 어떤 사람도 물리치지 않은 예수님을 익히 알아 그분께로 인도한다. 이는 11장 32절에 언급된 예수님께서 모든 민족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죽임을 당하신다는 구원의 보편성을 말하기 위한 신학적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 23~26절 : 영광의 때 - 이방인이 찾아 온 것은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상징적 사건으로 이제 하느님이 정한 영광의 때, 예수님 자신이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실 죽음의 때가 온 것을 공개적으로 예고하신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아버지 사랑의 계획에 순종하여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치겠다는 “때”의 확신이며, 본문에서 십자가에 대하여 직접 말씀을 않하셨지만 한 알의 밀알이 죽는다는 것은 주님 자신의 죽으심을 가르치는 비유인 동시에 제자도(Discipleship)에 적용시켜주셨다. 즉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 또한 주님처럼 희생해야 하고, 주님을 섬기는 삶은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따르는 삶으로(마태 10.38-39)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 27~33절 : 예수님의 죽음-높이 들어올림으로 영광을 나타낸다. 27절에서 예수님의 영광의 신비가 번민과 피하고 싶은 혼란 속에서 걷잡을 수 없는 가운데서 그 괴로움을 떨치고 아버지의 뜻을 행할 것을 결의한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28절) 그때 하늘의 아버지 음성이 들려온다. “나는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했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 바로 이 영광이 예수님의 수난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들일 것이다.”(32절)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당신께서 어떻게 죽임을 당하실 것인가를 가리킨 것이다.(33) 그러고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높이 들리는 것은 왕위에 오르는 행사로 옥좌에 앉아 백성들을 모아들이듯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모든 사람들을 이끌어 당신에게 오게 하신다. 이는 마치 구리뱀이 모세의 손에 의해 높이 올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올려야 한다.(3,14-15) 이 신비는 8,28에서 현저하게 부각되어 있다.
♠ 복음 요약 : 예루살렘의 입성은 곧 죽음을 의미하며,예수님께서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한다. 요한에 의해 비쳐진 수난의 서곡이 되는 오늘의 복음에서 그리스도의 신비를 관조하는 주제로 “때”라는 개념이다. 공관복음에서는 고뇌에 찬 모습을 중점적으로 보도하지만,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결단으로 죽음을 받아들이셨다는 주도권을 가진 것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27절) 그는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고, 아버지께서 정해주신 사랑의 계획에 전적으로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는 아들. 당신 죽음을 언급하시면서 “사람의 아들이 큰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23절) 그리고 그가 처형당할 때 사람들이 그가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했고,(8.28) 모든 사람을 이끌어 오게 할 것이라 한다.(32) 수난과 죽음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결코 요한에게 예수의 죽음은 영광이다. 이때야말로 예수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이 세상에 통치자는 쫓겨나고 그 통치권이 그리스도의 왕권으로 교체되며, 그 순간 그리스도가 세상을 심판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심판의 기준은 사랑임을 예수님 그의 정체를 분명히 드러낸 때이다.
♠ 대화 방향 : ① 어떤 방법으로 예수님의 죽음이 어떻게 영광이 되는가 묵상하여 기도를 봉헌하고, 내 생애에 죽을 것 같은 고통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또는 도저히 사랑 할 수 없는 사람이나, 하기 싫은 일을 신앙 안에서 해냈던 경험을 나누어 보세요.
② F.B가 “영광을 받을 때”가 되었고, “모든 사람을 이끌어 오게 할 것이다” 지금이 아닌가요? 어떻게 주님께 영광을 드릴까요? <권순(토마) 형제의 글 참조>
♠ 참고 문헌 : ▪ 성서묵상 요한복음 <C.M 마르티니 지음, 성염 옮김 / 성바오로출판사>
▪ 복음서 발견하기 <마가릿 누팅 랄프 지음. 임숙희 옮김 / 바오로의 딸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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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수난 성지주일
2015. 3. 29
마르코 15. 1 ~ 39
♠ 복음 연구
* 1~5절 : 빌라도는 26-36년에 걸쳐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의 총독을 제직했다. 그는 지중해변 항구도시 가이사리아 총독부에 상주했으나 큰 축제 때에는 예루살렘 헤로데 궁전에서 기거하며 정무를 보았다. 예수님께서 하신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호한 답변이다. 예수님은 메시아 자아의식을 지니셨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종교적 차원에서지 정치적 차원에서가 아니었으므로 막연하게 답변하셨을 것이다.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냐?’ 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최고의회 의원들이 나를 대역죄로 고발한 것이지 총독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겠다. 여하튼 예수님은 이제부터 운명하실 때까지 애원 기도를 제외하고 내내 침묵을 지키신다.
* 6~15절 : 반란군이란 민족독립을 위해서 무력을 행사한 열혈 당원들이었던 것 같다. 바라빠는 그들의 두목이었을 것이다. 빌라도가 상경하여 기거하고 정무를 보던 헤로데 궁전은 예루살렘 서부 언덕 위에 있었다. 그러므로 시민들이 ‘올라가서’ 해방절 사면을 청했다. 태형은 로마인들이 경범죄를 저지른 노예나 속국인들에게 가한 형벌이었고, 십자형은 대역 죄인에게 내린 극형이었다. 그런데 죄수를 십자가에 처형할 때는 우선 편태로 기운을 빼어 십자가에서 되도록 빨리 죽게 했다.
* 16~20절 : 지금까지 빌라도의 재판은 총독 관저 바깥 광장에서 열렸다. 부대(스페이라)는 대부대(레기온)의 십분의 일 규모, 대부대는 육천 명에서 만 명 정도였고 , 부대는 600-1,000명으로 편성되었다. 알렉산더 대왕 이후 헬레니즘 임금들은 자주색 옷을 입었다. 실은 로마 군인들이 예수께 자주색옷을 입힌 것이 아니고 자기들의 군복 진홍색 망토를 입혔다. 당시 임금들은 황금 입사귀로 만든 왕관을 썼다. 마태 27/29에서는 군인들이 예수로 하여금 오른손에 갈대를 잡게 했다고 한다. 왕홀을 흉내 낸 것이다. 로마인들과 유대인들은 도시나 마을 밖에서 사형을 집행했다
* 21~25절 : 알렉사드로스는 그리스식 이름, 루포스는 로마식 이름이다. 시몬에 관해서 이처럼 자세한 기록은 시몬의 가족이 나중에 예수를 믿고 예루살렘 모 교회에 그 사실을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시몬의 가족은 예루살렘의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교에 소속되었을 것이다. 처형 장소는 골골타인데 그리스어로 음역하여 ‘골고타’라 했다. 수난사화 전승자 아니면 마르코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을 위해 ‘골고타’는 ‘해골’의 뜻이라고 의역해 놓았다. 그곳은 바위 언덕으로 된 지형이 해골모양 같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었던 모양이다. 지금의 무덤 성당이다. 몰약은 아리비아산 값진 향유다. 혼례 때 옷에 뿌리기도 하고 장례 때 시신에 바르기도 했다. ‘몰약을 탄 포도주’는 마취제였다. 예수님은 맑은 정신으로 임종하시고자 마취제를 사양하셨다. 형장에 도착하면 사형수의 옷을 벗긴 다음, 팔을 벌려 수평대에 고정시켰다. 이때 끈으로 묶기도 하고 손목에 목을 박기도 한다. 예수님의 경우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손발의 못자국을 보여 주신 것으로 미루어 손목에 못을 박았다. 그리고 형장에 미리 세워둔 수직대에 수평대를 얹는데 수직대 꼭대기에 또는 위에서 좀 내려온 곳에 수평대를 얹었다. 그러나 나서 수직대에 발을 묶거나 못을 박아 고정시켰다. 마지막으로 십자가 위에 죄목 명패를 붙였다. 십자가형을 집행하는 군인들이 관례에 따라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 옷감이 무척 귀했던 시대였던 만큼 수고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두고 시편 22장 19절을 연상했다. 여기에는 원수들이 주사위를 던져 고생하는 의인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는 내용이 있다.
* 26~32절 : 마르코 복음서에 의하면 아홉시(이스라엘 시간 3시)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열두시(이스라엘 시간 6시)부터 온 땅이 어두워지고 오후 세시(이스라엘 시간 9시)에 예수님이 돌아가셨다. 이처럼 세 시간 마다 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서술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경륜에 따라 수난하고 운명하셨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요한 19/14에 의하면 열두 시경에 빌라도가 사형을 언도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더 역사적 신빙성이 있다. 형장으로 갈 때에는 죄목 명패를 가지고 갔는데 사형수가 목에 걸고 가거나 다른 사람이 들고 갔다. 그리고 죄수를 처형한 다음에는 누구나 잘 볼 수 있게 십자가 위에 붙여 놓았다. 요한 19장 19절에 의하면 히브리어. 라틴어, 그리스어로 죄목 명패를 썼다. 여기 강도 두 명은 그냥 강도이거나 민족독립을 위해 투쟁한 폭도들, 곧 열혈당원들이다. 후대사본에는 28절에 이사 53/12의 인용문을 삽입했다. ‘지나가는 자들이 머리를 흔들며’는 시편 22/8에서 인용한 것이다. 두 강도 가운데 하나는 예수를 모독하고 또 하나는 그분을 변호했다고 루카는 고쳤다.
* 33~39절 : ‘어둠이 온 땅을 덮었다’는 것은 아모 8/9-10에서 따온 인용문으로 옛날 사람들은 큰 인물의 죽음을 서술할 때 흔히 쓰는 소재다. 시편 22/2 아람어 역으로 이는 곤경에 처한 의인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야훼의 도우심을 간청하며 마침내 구원을 확신한 나머지 미리 감사드리는 시편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 시편을 당신모국어 아람어로 바치셨다. 하느님에게서조차 버림받은 것 같은 고독감과 아울러 그래도 하느님께 의탁하는 깊은 신뢰감이 엿보인다. 수난사화의 전승자 또는 마르코 복음작가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을 위해 시편 22/2를 그리스어로 번역해 놓았다. ‘엘로이, 엘로이 …’라고 외치신 것을 유대인 및 몇 사람이 듣고서 엘리야에게 구원을 청하는 줄로 착각했거나 아니면 일부러 곡해했다. 엘리야는 곤경에 처한 사람을 구해 준다는 민간 신앙이 있었다. ‘신 포도주에 … 갖다 대며’은 시편 69/22를 연상시킨다. 실신한 사형수가 식초를 마시면 다시 정신을 차리는 수가 있었다. ‘큰 소리를 내시면서’가 ‘큰 소리로 부르짖으시며’(34절)와 비슷한 점으로 미루어 예수님은 시편22를 계속 바치시면서 운명하셨을 가능성이 있다. 지성소와 성소 사이의 휘장을 생각한 것 같다. 옛 사람들은 큰 인물이 죽을 때 이변이 생기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38절 역시 역사적 사실이기 보다는 의도적으로 꾸민 상징적 서술이므로 무엇보다도 상징의 뜻을 밝히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상징에는 한 가지 뜻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뜻이 복합적으로 들어 있을 수가 있다. 지성소와 성소 사이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상징적 의미는 예수의 죽음으로 성전과 그 종교의식은 소멸되었다는 것이요, 이제 하느님은 지성소에 숨어 계시지 않고 만백성에게 당신의 정체를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방인 백인대장조차 올바른 신앙고백을 하게 된다. 1세기 교회의 신앙 고백문은 두 부류로 대별된다. 첫째 부류의 고백문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나아가서는 재림 같은 구원사건을 믿는다는 것이다. 둘째 부류의 고백문은 예수의 정체를 밝히는데 이는 신도들이 예배 때 다 함께 외친 고백문이었기 때문에 歡聲이라고도 한다. 두드러진 예로 ‘예수는 그리스도다’, ‘예수는 주님이시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같은 것이다. 백인대장의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역시 예수의 정체를 밝히는 환성이다. 마르코복음서에서는 이제 처음으로 한 인간이 그것도 이방인 백인대장이 고백한 때가 예수께서 운명하신 다음이라는 점을 유의할 것이다. 예수는 수난하고 돌아가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마르코의 기독관이 분명히 드러난다.
♠ 복음 요약 : 금주는 주의 성지주일과 주의 수난주일이 겹치는 주일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주님께 대하는 시민들의 태도의 변화되어가는 과정을 우리는 분명히 목격하게 됩니다. 장문의 말씀은 마치 주님 성삼일을 예고라도 하는 냥 하고 있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성지주일의 의미도 되새겨봐야 할 것이지만, 복음은 주의 ‘수난주일’을 묵상한다. 하느님의 연약함 하느님의 무능력함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송두리째 내주신 철저한 자기 포기, 낮춤을 낳은 그분의 사랑이었다. 사람이 되시고 종이 되시고 밥이 되신 사랑, 몸소 죽으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신 사랑이었다. 평생을 일관했던 그분의 사랑과 순명, 봉헌과 희생은 십자가위에서 절정에 달했으니 십자가는 겉보기엔 실패이지만 실상은 위대한 승리요 새로운 시작이었다.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셨고 왕이셨고 생명이셨다.
♠ 대화 방향 : ①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에 해명하기 보다는 침묵 중에 하느님의 뜻을 찾음으로써 오해를 풀었던 일이 있습니까?
② 당신이 원하지 않는 짐을 지게 되었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들어드리는 것으로 생각하고 기쁜 마음으로 돕습니까?
♠ 참고 문헌 : ▪ 새 성경 주해서 <한국천주교 중앙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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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원 기고 >
부부(夫婦)
전주 효자우림성당 파티마 팀 FB
이 사비나 (진재)
부부란 둘이 타는 2인용 자전거
남편이 앞바퀴라면 아내는 뒷바퀴
안장과 페달이 두 개 달린 2인용 자전거를
몸과 마음을 합쳐 굴리면서
이 세상 끝까지 달려가는 2인용 자전거 타기
가다보면 자갈길도 만나고 미끈한 도로를 만나는
2인용 자전거 타기는 구부러진 길은 반듯하게 펴고
반듯한 길은 구부리기도 하면서
이 세상 모든 길을 두 바퀴에 감으면서 함께 타는 것이다
가끔은 체인이 벗겨져 자전거를 멈추고
나무 아래서 이마의 땀을 씻기도 하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달려가는 2인용 자전거
앞바퀴가 끌고 가고 뒷바퀴가 밀고 가는
2인용 자전거 타기는
다시 태어나도 함께 타야하는 부부라는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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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7기 국보문학 시 부문 신인상’ 당선 소감 ◈
내게 산행은 고향을 찾아가는 것이다. 포근하고 아늑한 산은 마치 어머니의 품과 같이 넉넉하다. 남편과 한해를 돌아보고 싶어 익산 미륵산에 왔다. 여기저기 쌓인 눈이 아이젠을 착용할 정도는 아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앞서 가는 남편의 뒤꿈치에 시선을 맞췄다. 한 걸음 한 걸음 밟을 때마다 남편과 오르는 산은 고요해서 행복하다.
약수터에서 바위쉼터로 들어설 때였다. 국보 문학으로부터 신인상에 당선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순간 성호를 긋고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머물렀다. 놀라운 것은 7년 7개월(2007년 4월 8일~2014년 11월 9일) 동안 산행을 하면서 썼던 글들이 국보문학 77기에서 열매를 맺은 것이다. 충만한 숫자 7,7,7,7이다. 남편은 교회력으로 새해의 시작인 12월에 주신 이 설렘을 은총이라며 쥐었던 주먹을 펴서 기도 손을 한다. 다섯 딸들이 기뻐할 모습을 떠올리며 눈뭉치를 힘껏 날렸다.
이제 ‘시’의 길에 첫발을 내디뎠다. 누군가는 끝까지 가 봐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끝까지 가다 보면 보이는 것이 ‘시’라 말하며, 내려놓으면서 쉼 없이 갈 것이다. ‘돌 뚫는 화살은 없어도 돌파는 낙수는 있다.’는 말이 있듯이 말이다.
미륵산 정상에 서니 발 아래 시시詩詩한 시들이 쫙 깔려 있다. 모두 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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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 봉사자 월례회의 스케치 >
춥지 않은 겨울 속에서 2월 서울 당산동을 보다...
안산 원곡동 세르브스 팀 FB
기록원 : 권 토마 (순)
+ 찬미 예수님
아침 일찍 안산역에서 만난 4명의 안산 천사들이 서둘러서 출발해서 영등포구청에 무사히 도착했다.
약간의 혼선으로 그 동네를 샅샅이 관찰하느라고 시간이 다소 걸렸다. 골목 안을 들어간 지 꽤 되었는데 도무지 그 큰 성당이 눈에 보이지가 않는다. 한 블록 더 올라왔음을 느끼자, 그 자태가 모습을 들어낸다.
우리의 수호천사를 부르고, 1층에 마련된 커피샵에서 커피를 뽑고 있는 중에 효주아녜스(향자) 자매님이 날라왔다. 그 이후 보나벤뚜라 조정말씀봉사자가 오시어서 지하실로 인도하신다. 조금 있다가 여러 곳에서 오시는 분들이 점차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거울이 한 벽면을 이루는 묘한 방에서 시작한다. 전주와 안산서 4분이 오셨고, 인천과 수원에서 귀한 한 분이 참석하셨다. 그리고 나머지 서울서 순차적으로 들어오신다. 다 합쳐서 거의 20여분이 되시는 것 같았다.
1부 시작은 묵주기도 ‘빛의 신비’로 시작한다. 그리고 금주 복음인 연중제6주일 ‘마르코복음 1,40~45’ ‘나병환자를 고치신 예수님’을 봉독한 후, 복음나누기는 이어진다. 의족환자 얘기며 복음화에 대한 이병호주교님의 말씀이 인용되기도 한다. 어떤 이는 45절 '널리 알리고 퍼트리기 시작했다'는 말씀으로 묵상한다. 그리고 ‘어머니 죽음과 작은 유산’이 반성으로 이어지는 계기로 몇 사람의 묵상나눔 중 제 귀에 들리는 것을 적어보았다.
가까운 곳에서 당산동공동체가 마련한 점심을 해결했다...
2부는 주모경으로 재개한다. 지구별 또는 코이노니아 팀별 월례보고서를 현장에서 급히 작성하여서 조정봉사자에게 제출하면서 개략적으로 보고한다. 3명의 신입회원이 들어온 당산동팀, 지도신부님의 큰관심으로 작년에 수원교구 성경경시대회에서 동상을 받은 계기를 소개한 원곡동팀, 그리고 안식년을 맞이하신 지도신부님 소식과 여러 가지 성서프로그램 (성서 40주간)에 참여한 모습, 가정회합, 새벽미사 후의 특이한 코이노니아에 대해 전주팀에서 보고했다.
이어서 가장 중요한 2015년 묵상회의 프로그램 정리, 빠른 시일 내에 참가자 명단을 제출해달라는 조정말씀선포자의 안내가 있었다. 첫날의 다미아노 신부님, 둘째날의 빈첸시오 주교님이 다녀가신 이후의 성체조배 준비에 관해서 의논했다. 선서 부분은 지도신부님이나 주교님 앞에서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조정말씀선포자가 일정과 상황을 좀 더 확인하기로 했다. 그리고 매번 묵상 이후에 묵상내용을 정리하여 묵상노트에 적기로 하였다.
1,2강의 토크 형식의 테마강의 등은 여러 가지 안건이 나왔으나, 강의하시는 신부님과 수녀님과 봉사자가 서로 상의해서 준비하는 대로 맡기기로 하였다.
첫날, 인사소개 그리고 일정안내 및 중간중간 조금씩 하게 되는 유흥은 아나스타시아 자매님이 담당하기로 했다. 묵상회 내내 쉬는 시간 등 자투리 시간을 내어서 언제든지 묵상할 수 있는 ‘묵상의 방’을 마련하기로 의결했다.
아주 열정적인 나눔은 3시의 기도로 마감을 하고, 차기 월례회의는 3월 2째주 토요일 ‘안산 원곡성당’ 에서 하기로 하면서 서로의 수고에 위로의 인사를 아끼지 않는다. 묵상회에 하느님 일로 참여하시지 못할 지도신부님에 대한 아쉬움과 그 동안의 일로 고마움을 표현하면서, 에쿠아도르를 다녀온 안나 수녀님의 소중한 보고는 아껴서 묵상회에 참석하시는 귀한 공동체 몫으로 남겨두기로 한다.
시종일관 간식을 준비해주신 전주팀과 당산동팀에게 감사드립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가방에 먹을 것을 잔뜩 집어 넣어주신 전주팀에게 특별히 감사드린다. 문뜩 처가집의 장모님께 다녀온 기분이 든다...
다시 밖으로 나와서 단체사진을 찍고, (이사진은 제가 안 찍었기에 누군가가 올릴 것입니다) 1층 ‘아베마리아 까페’ 에서 당산동팀이 준비한 아메리카노와 요상한(?) 과자를 곁들어 먹고 각자의 터전으로 돌아갔다.
안산팀은 안산역 앞에서 참석자4명과 요세피나를 불러내어서 저녁을 해결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주님께서 전국 서기가 기록하지 못한 수많은 표징을 우리공동체에게 보여주셨다.
‘주님께서 이 상에서 손수 마련해주신다.’ 라는 말씀이 제 머리를 때린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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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재정 회계 보고 >
☧ 매월 FB본부로 보내주시는 의연금은 본당별로 보내지 말고, 각 팀별로 회계 정산하시어, 금액이 크든 적든 매월매월 꾸준히 보내주셔야 합니다...
✟ 2015년 1월 1일 ~ 31일 수입 지출 내역
< FB 소식란 >
♠ <코이노니아 팀 월례보고서> , <지구 월례보고서> 양식 활용 소식
모든 지구 봉사자와 코이노니아 팀 봉사자들은 매월 월례회의에 참석할 때 ‘월례보고서’ 작성하여 보고한 후 본부에 제출 바랍니다... ( FB 홈페이지의 ‘공지사항’란과 ‘FB 행사자료실’에서 다운 받으세요.)
♠ 2015년 전주교구장 이 빈첸시오 주교님과 함께 하는 ‘FB 묵상회’ 안내
※ 주 제 :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마르코 9장 7절 -
※ 일 시 : 2015년 2월 27일(金) 오후 5시30분 ~ 3월 1일(日) 오후 3시30분 / 2박3일
※ 장 소 : 김제 수류성당 피정의 집(교육관) (☎ 063-544-5652 / 전북 김제시 금산면 화율리 223)
☞ 가능한 한 <위의 성당 주소>로 네비게이션을 이용하여 성당까지 오신 후, 교육관은 성당에서 약 500m 정도 위로 거슬러 올라 이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올라오는 길이 매우 어둡고 좁으므로 매우 조심스럽게 서행해야 합니다.
※ 시작기도 및 저녁식사 : 2월 27일(金) 오후 5시 30분 (늦지 않도록 미리 도착 바람)
※ 참가 대상 : 각 지역, 각 팀 모든 형제자매님과 비회원도 대환영
※ 참가비 : 일반 회원 – 66,000원 / 청소년 – 30,000원 / 1박2일 참가자 – 50,000원 / 장애우 – 무료
※ 준비물 : 성경, 미사준비물, 묵주, 필기도구, 여벌옷, 세면도구, 개인 비상약 등....
☞ 각 팀봉사자께서는 묵상회 날짜를 미리 공지해서 많은 회원들이 참가하도록 안내 바랍니다...^-^
※ 봉사 담당 계획
- 미사전례 및 촛불묵상시간 담당 : 전주 지구 F.B (주무 : 이 말가리다)
- 참가자 접수 및 안내 담당 : 전주 지구 F.B
- 묵상회 장소 시설 담당 : 서울 지구 산상수훈 F.B
- 의료 담당 : 안산 지구 F.B
- 다과 배식 담당 : 안산 지구 F.B
- FB 행사자료 기록 담당 : 권 토마 (순) 형제
- 프랫카드 설치 및 묵상회 장소 정리정돈 : 서울 지구 산상수훈 F.B
- FB 행사 영상 / 사진 촬영 담당 : 서울 지구 산상수훈 F.B
※ 팀봉사자 협조 사항
- 이번 <FB 묵상회>에서는 ‘개인 선서식’ ‘팀 선서식’을 하지 않고, 여름 <FB 연수회>에 실시하니, 회원들에게 양해 부탁드립니다
① <FB 묵상회>를 위한 ‘준비 9일기도’를 바칩시다.(청원기도 : 2월 17~25일 / 감사기도 : 2월 26일)
② 2월 20일까지 ‘참가자 인원수와 명단’ 을 홈페이지의 <FB 자료제출방>에 넣거나, 조정 말씀선포자에게 전화 요망 (☎ 070-4628-9333) (음식 및 명찰, 조편성, 장소 준비에 필요함)
③ 명찰은 만들어오지 마세요... 본부에서 일괄적으로 제작합니다.
④ 각 회원들은 평소 좋아하는 ‘짧은 성경구절’을 하나씩은 꼬옥 암송해오세요.
⓹ 각 팀별로 신앙체험담발표자 1명을 준비해주세요. (발표시간 - 5분 이하 — 가능하면 FB생활을 통한 삶의 변화 위주로...)
⑥ 간식 및 후원금 : 팀 또는 개인별로 후원할 분은 'FB 홈페이지’게시판에 적거나, 또는 김 효주아녜스 (본부 회계봉사자 ☎ 010-3234-4470) 에게 미리 연락주세요...
☞ 추가적인 내용은 추후 별도로 FB 홈페이지에 별도로 공지합니다.
♠ 2015년 3월 FB 전국봉사자 <월례회의> 모임 안내
- 3월 <봉사자 월례회의> 모임을 다음과 같이 갖고자 합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 일시 : 2015년 3월 14일 (토), 오전 11시 , 묵주기도로 시작
※ 장소 : 안산 원곡 성당 (☎ 031-491-2064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원곡1동 844-3번지 )
※ 교통편 : 안산역 또는 초지역에서 하차한 후, 택시를 타고 원곡성당으로 이동.
※ 참가 대상 : 각 지역, 각 팀 봉사자 (지구 및 팀 말씀선포자) 형제자매님 (각 팀 1명 의무 참석)
※ 안 건 : ① 각 지구, 팀별현황 보고 (코이노니아 팀 월례보고서, 지구 월례보고서를 작성, 발표, 제출)
② < FB 묵상회 > 평가회
③ 기타 안건 검토
※ 문의 사항 : 전국조정 말씀선포자 (이 보나벤뚜라/강진) ☎ 070-4628-9333
♠ 영등포 당산동성당 ‘산상수훈 팀’ 소식
- 당산동성당 ‘산상수훈 팀’ 은 2월에 세 명의 자매님들이 ‘정회원’으로 등록되었습니다...
한 가브리엘 형제님이 정회원 축하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신년회를 겸해 식당에서 함께 맛있는 식사를 했습니다...
축복된 자리를 마련해 주신 가브리엘 형제님께 감사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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