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한강 소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명희
영혜의 내면
[채식주의자]의 감상은 세대마다 강약이 다를 것이다. 소설 속 영혜는 평범하지만 넉넉하지 않은 아버지 세대에서 섭생을 강요받고, 어머니 또한 가부장의 그늘에서 존재감 없이 살았다. 영혜 언니는 착한 맏딸로 부모와 동생을 위해 희생하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영혜는 자해한 후 입. 퇴원을 반복했는데 부모의 관심이 있기보다 언니의 보살핌을 받았다. 영혜의 환경이 독자들을 우울하게 만든다. 영혜는 폭력적인 아버지와 딸에게 관심이 없는 엄마로 인해 운명이 밝지 않다.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은 성격에서 나타난다. 대개 부모가 강하면 자식들은 그 기에 눌려 내성적인 성향을 보이는데, 첫째들이 그렇고, 둘째들은 위아래로 치어 방어적이고 자기 주관이 뚜렷하다. 영혜의 남편은 결혼생활의 안정을 위해 사랑보다는 처지에 맞는 여자를 선택한 것으로 보아 현실적인 남자다. 보통 남녀들이 결혼 전 배우자에 대한 로망을 갖는 것과 상반된다. 영혜는 안정된 결혼생활 속에서도 어렸을 적 동네 개가 주인의 오토바이에 끌려 살육되는 처참한 기억을 꿈으로 귀환시키곤 한다. 영혜의 남편이 살갑게 구는 남자였어도 그런 악몽을 자주 꾸었을까. 어릴 적 아버지의 폭력과 잔인했던 기억이 신혼 초에 부적응으로 나타나고 정신 분열로 확장된다. 자기 안에 숨겨진 성장기 트라우마는 결혼생활에도 영향을 미친다. 처녀 때 몰랐던 낮은 자존감이나 상처가 결혼한 후 환경에 따라 공황장애로 나타나기도 하고 우울증을 넘어 조울증으로 표면화되기도 한다. 영혜가 꾸는 꿈은 어렸을 적 나쁜 기억의 잔재이고 트라우마다. '꿈에 누군가 목을 자를 때, 끝까지 잘리지 않아 덜렁거리는 머리채를 잡고 마치 칼질을 할 때, 미끌미끌한 안구를 손바닥에 올려놓을 때, 그러다 깨어날 때, 생시에 뒤뚱거리며 내 앞을 걸어가는 비둘기를 죽이고 싶어질 때, 오래 지켜보았던 이웃집 고양이를 목 조르고 싶을 때, 다리가 후들거리고 식은땀이 맺힐 때,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을 때, 다른 사람이 내 안에서 솟구쳐 올라와 나를 먹어버린 때, 그때...'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꿈은 퇴행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깨어 있을 때도 퇴행은 이루어지는데, 이때 퇴행은 기억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으며 지각한 것을 환상적으로 되살려내지 못한다.’ 영혜의 반복된 어릴 적 꿈들은 그녀의 현실을 퇴행으로 몰고 간다. 오래전 캐나다에서도 조현병 환자가 밤 고속버스 안에서 젊은 청년의 목을 베고, 귀를 잘라냈던 끔찍한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퇴행의 예다.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어도 성장하는 동안 억압에 눌렸다면 영혜 형부와 같이 일탈한 예술을 꿈꾸게 된다. 예술에 대한 열정을 핑계로 선을 넘어버린 형부는 영혜가 약자임을 간과한 상태다. 유난히 영혜의 몸에 있는 ‘몽고반점’에 목숨을 걸었던 그의 심리를 자크 라깡의 [욕망이론]에서 ‘환상이 지닌 도착성을 해석하자면 그의 환상은 무의식의 경계 속에 규정되면서 가능해진다.’
프로이트의 [리비도]를 보면 청소년의 사춘기에서 징후를 보이던 욕망이 청년층, 중장년층, 노년층까지 왜곡된 모습으로 표출되는 경우도 있다. 영혜가 이혼당한 것은 냉정한 가족 환경의 사회적 현실이다. 현실적인 남자가 조현병이 있는 아내를 책임질 리 없다. 우리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성경의 모순 속에서 살고 있다.
약한 자와 강한 자
인간의 폭력은 어디까지 허용되는 걸까? 폭력의 강도는? 그것이 평생 상처가 되어 어둠 속에 살 게 된다면 차라리 아버지 부재로 아버지의 기억이 없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든다. 살면서 자기표현을 하고 사는 사람들은 스트레스가 적다고 한다. 영혜 같은 인물은 '지나치게 담담해 대체, 얼마나 지독한 것들이 삭혀지거나 앙금으로 가라앉고 난 뒤의 표면인가, 하는 두려움마저 느끼게 하는 시선이었다.' 그녀의 수동적인 행동들이 병을 키운 근거가 될 수 있다.
나는 성선설과 성악설을 믿는 사람이다. 사람은 악한 자와 선한 자로 태어나 강한 자와 약한 자로 구분되는 것 같다. 태아는 엄마의 배 속에 있을 때 엄마 심리상태의 영향을 받는다. ‘타고난 착한 심성’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영혜가 태아기에 있을 때 아버지의 폭력은 태교에 악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자라면서도 아버지의 폭력에 어머니는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폭력은 폭력을 낳고, 사랑은 사랑을 낳는다는 말이 있다. 영혜는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감성이 없다. 무표정, 담담함, 무감정으로 일관된 것이 섬뜩하다. 감성이 풍부하다는 건 성격이 밝다는 것을 내포하기도 한다. 영혜의 내면 아이는 어른이 되기도 전에 부모나 남에게 마음을 닫아버린 상태다.
언니의 내면
‘병원에 가는 것이 두려워 하루하루 진찰을 미루며 그녀는 생각했다. 기쁨과 자연스러움이 제거된 시간. 최선을 다한 인내와 배려만으로 이어진 시간. 바로 그녀 자신이 선택한 시간이었다. (중략) 그 순간 그녀는 뜻밖의 고통을 느꼈다. 살아야 할 시간이 다시 기한 없이 남아 있었는데, 그것이 조금도 기쁘지 않았던 것이다.’ 영혜 언니는 맏딸로서, 언니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거부할 수 없이 살아왔는데 차라리 병을 얻어 힘든 세상과 작별하고 싶어 하는 그녀의 자조적 회한이 현실 속 우울증 환자처럼 다가온다. 심리학적으로 희생적인 사람보다 이기적인 사람들의 정신건강이 낫다고 한다. 3부에서 언뜻언뜻 작가가 말하고 싶은 의미가 파악된다. 현대의 전문직 여성은 일인다역을 하는 만큼 정신적 병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정신 줄을 놓지 않았을 뿐, 무의식 속에 힘듦이 호소 되고 있다. ‘... 어쩌면 꿈인지 몰라. 그녀는 고개를 수그린다. 무언가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영혜의 귓바퀴에 입을 바싹대고 한마디씩 말을 잇는다. 꿈속에선, 꿈이 전부인 것 같잖아. 하지만 깨고 나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지...그러니까, 언젠가 우리가 깨어나면, 그때는...’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소망 반대의 꿈’에서 ‘첫 번째 내 이론이 틀리기를 바라는 소망이다. 내 진료에 반발하는 환자들은 대부분 이런 성향의 꿈을 꾼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들은 오직 내 말이 틀렸으면 하는 바람만으로 소망 반대의 꿈을 꾼다.’ 실제로 영혜 언니나 세상 사람들은 날마다 왜곡된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영혜의 삶이 퇴행하고 있듯이, 지금이 행복하지 않다면 언제든 ‘소망 반대의 꿈’을 꿀 것이다. 자매의 증세는 종이 한 장 뒤집기의 차이일 뿐, 자기 안에 갇혀있는 정도의 차이일 뿐, 작가는 이 소설에서 영혜 언니를 통해 일상에 지친 인간들의 내면을 보여 주었다. 그것이 곧, 우리의 모습이고 당신의 모습이다.
내 앞에 펼쳐진 [채식주의]라는 소설이 현실의 커다란 바위를 부수는 것 같아 심장이 떨린다. 소설 속 인물들의 약한 캐릭터를 보며 자신을 사랑해야 강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