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빌립보서 2 : 5-11
제목: 그거 예수님의 마음입니까?
일시: 2015. 1. 4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작년의 표어는 들려지는 하나님 보여지는 하나님 느껴지는 하나님이었다.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했는가? 이제 2014년도와 함께 과거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을 듣고 보고 느끼면서 살 것이다. 올해의 표어는 “그거 예수님의 마음입니까”이다. 이 표어는 이미 올 여름에 생각한 것이었고 지금까지 비밀로 하다가 경배와 찬양팀과 아내에게만 지난 주와 어제 말했을 뿐이다. 아내에게 말했더니 아내는 “그거”라는 단어가 좀 별로라고 한다. 하지만 나의 포인트는 “그거”이다. 이미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한지 잘 알고 있다. 혹 잘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봐 예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이 시간 확인할 것이다. 그리고 이 한해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그거”라는 것이 내 생각인지 예수님의 생각인지, 내 마음인지 예수님의 마음인지를 계속 검증받고 살아갈 것이다. 그 생각 그 행동 그 말... 예수님의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까가 나 자신에게와 다른 형제자매들에게도 계속 물을 질문이 될 것이다.
II.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한 마음인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한다. 예수님의 마음이라고 하는 “이 마음”은 어떤 것인가? 그 마음은 “자기를 비우는 마음”이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7절). 주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 사람들은 주님의 수준으로 올라올 수 없고 주님이 비우고 우리에게로 내려 오셔야 한다. 예수님의 마음은 비울 줄 아는 마음이다.
사람들에게 뭘 기대하냐! 그럴 줄 몰랐는가? 그러려니 하라. 주님은 사람들이 보좌의 수준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고 계셔서 비우셨다. 하나님이라면 기대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무슨 말씀을 하셔도 그대로 행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믿을 수 없고 기대할 수 없다. 주님이 자기를 비우시고 내려오신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 마음을 비우고 다가가야 한다. 사람들을 너무 믿지 말라. 올해도 실망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은 사람들에게 기대하지 않는 마음이다.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눈높이와 수준에서 용납하는 마음이다. 사람에게나 일에나 마음을 비우라. 어떤 경우에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되고 어떤 경우에는 기대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기도 한다. 그러면 그러니까 한번 기대하지 말아볼까 하면 그것도 기대한 것이니 무효이다. 미리 실망을 하고 처음부터 신뢰하지 않았는데 잘하는 경우도 본다.
그런데 주님이 자신을 비우신 것은 불가항력적으로 어쩔 수 없이 코너에 몰려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다. 당신 스스로 그렇게 하시겠노라고 자원하신 것이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6절). 주님은 보좌에서 쫓겨나신 것이 아니라, 일부러 보좌를 버리고 내려오신 것이다. 못하냐 안하냐 라는 말을 구분할 수 있는가? 못하는 것은 능력의 문제이다. 누군가 “못한다”고 할 때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불쌍한 생각이 든다. 못하는 사람은 최선의 노력을 했는데도 아무런 것이 없는 경우이다. 그런 사람은 위로를 얻는다. 안하는 것은 의지의 문제이다. 자신이 자발적으로 하지 않는 것이다. 안하는 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인격의 문제이다. 주님께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신 것은 당신의 무능함을 드러낸 것이 아니요 당신의 인격을 드러낸 것이다. 보좌에 그냥 계시면 편한데 우리를 위해 오셨으니 그분의 사랑과 은혜의 인격이 드러나는 것이다. 주님이 자기를 비우신 것은 불쌍한 것이 아니라 귀한 인격을 드러낸 것이다. 자기를 비우라.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이다. 자기를 비우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 아니요 위대한 사람이다. 자기를 비우고 그 자리에 주님의 인격을 채우는 것이다.
자기를 비우는 그 예수님의 마음을 갖는 것이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라, 축복임을 기억하라. 주님은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셨다고 한다. 비울 게 있다는 것은 가진 것이 있다는 말이다. 주님은 보좌를 가지셨으니 버릴 게 있었다. 높은 곳에 계셨기에 낮추실 수가 있었다. 그것은 멋진 일이다. 가진 게 없어 낮으면 불쌍하다. 버릴게 없어 빈손이면 슬픈 일이다. 그러나 주님은 보좌를 버릴 수 있었고 하나님과 동등되는 자리도 버리신 것이다. 그러기에 주님의 마음은 멋진 것이다.
선교사로 나간 사람들과 선교지에 있는 사람들은 뭐가 다른다. 선교지에 있는 현지인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사는 사람이고 선교사로 나간 사람은 모든 것을 버리고 의도적으로 그렇게 된 사람이다. 따라서 전자는 불쌍한 사람이 되고 후자는 멋지고 존경받을 사람으로 여겨진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사람은 좌절하고 실망한다. 그러나 일부러 그렇게 된 사람은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고 보람과 기쁨 속에서 산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를 비우는 사람이고 자기를 비우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맞출 수 있다.
우노카드들은 이미 숫자나 모양 색깔등이 이미 뚜렷하게 나와 있어서 사용이 제한적이고 사용할 수 있는 경우가 정해져 있다. 그러나 와일드 카드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언제나 빼어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매 순간 우리는 카드를 꺼내든다. 와일드 카드의 사람이면 언제나 예스할 수 있는 긍정의 사람이다. 속에 모든 것이 다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색깔과 번호와 모양이 뚜렷하면 예스가 되지 못한다. 언제나 이유가 많은 사람은 함께 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숫자와 하트모양인지 클로버 모양인지 다이아몬드 모양인지 그에게 맞추어야 한다.
목회자는 말씀의 진리는 타협하지 않아도 그 진리를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맞춘다. 배운자나 못배운자 젊은이나 나이든이나 돈있는자나 없는자에게 비운 마음으로 다가간다.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새같이 머리를 돌리는 기분을 갖는다. 딱딱 돌아가는 절도있는 닭과 같이.. 권사님에게 형제에게 자매에게... 왜냐하면 서로 겹치면 안되기 때문이다. 종종 예배 후 인사를 할 때 얼굴 따로 손 따로 마음 따로 갈 수 있다. 그거 조심하려고 무척 노력한다(또 그럴지 모른다).
III.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자신을 비웠다면 땅에서는 무엇을 하셨을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 비우시고 하신 일은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그거 예수님의 마음입니까?”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죽기까지 복종하는 “십자가에 죽으심”이다. 그분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죽을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주님이 역사를 이끄시고 우리를 인도하실 때 그분의 리더쉽은 “죽음”을 불사하는 리더쉽 이었다. 주님은 많은 일을 하셨다. 사람들을 고치고 먹이고 위로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것을 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분 사역의 최고봉이요 하이라이트는 십자가였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완성이다.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편지하면서 어떻게 교회가 세워지고 있는지를 말하고 있다. 빌립보서 4장 2절을 보라.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이 두 여인들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이 없지만 빌립보교회에서 열심있고 활동적인 여성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부녀들이 교회 안에서 갈등을 야기시켰다. 바울은 이 두 여인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 즉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한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일을 얼마나 잘하는 것이냐가 아니라, 좀 마음 좀 맞았으면 하는 것이다. 일을 하다보면 성격이 강하고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이 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함이 중요하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갈등과 분열이 아니요 이해와 사랑으로 세우는 사람이 된다.
일은 능력 있는 사람이 모여서 이루는 것이 아니다. 일은 옳은 사람이 모여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지혜와 기술 혹은 세상의 원리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며 행음하여도 수효가 늘지 못하니 이는 여호와를 버리고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니라”(호세아 4:10). 잠언 11장 24절을 보라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하나님의 원리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일하는 것이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모든 일을 이루신 것처럼 죽는 자가 있어야 일이 되는 것이다. 낮아진 자가 있을 때 일이 된다. 희생되어진 자가 있어야 일이 된다. 양보하는 자가 있어야 된다.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있을 때 일은 되는 것이다. 다 죽는 것 같고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없어지는 것 같아도 되는 것이다.
조현아대한항공부사장의 땅콩리턴일로 인해서 많은 이야기들과 패러디들이 생겼다. 스튜어디스가 “감정노동”의 1위라고 나왔다. 그들에게는 “스마일마스크증후군”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어떤 경우에도 웃어야 하고. 힘들어도 웃어야 하고. 그런데 왜 그런가? 돈 때문이다. “내 참 더러워도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서 이렇게 하지”하는 직장도 있지 않는가! 돈 때문에 부끄러움도 참고 일하는 사람을 본다. 그러면서 목회자는 살펴보았다. 웃어야 한다. 목회자는 웃어야한다. 감정노동이 필요한가? 인내해야 한다. 낮아져야 한다. 왜? 돈 때문이 아니다. 오직 이 마음 즉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기 때문이다. 감정노동 1위는 그리스도인들이다. 만일 그렇지 못했다면 그리스도인들이어야 한다. 그러나 돈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인격이 있어서 비울 수 있는 사람이요 죽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1-3일까지 청소년 수련회를 했다. 다 손해보는 사람들이다. 한상회김성민선교사 부부는 자신들의 것을 죽였다. 시간, 에너지, 물질... 물론 권목사는 벌충해 줄게 없을까 고민이다. 자신들의 방을 내어 주었다. 자신들의 시간을 주었다. 불편해도 다들 참아주었다. 우리는 우리의 건물을 다른 이들에게 주었다. 주방봉사는 너무 훌륭했다. 다들 이래가지고 남아요 라고 한다. 남는 장사를 위한 것이라면 손해이다. 그러나 돈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으로 살기에 비우고 죽는 삶의 현장이었다. 손해 보는 자들 같았지만 은혜 충만이다. 교회안에서도 손해보고 바보같이 죽어지는 자로 인해서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
IV.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 마음은 하늘보좌를 비우는 마음이고 십자가를 지는 마음이었다. 결과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주었다. 그래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었다. 예수의 이름 앞에 모든 무릎이 꿇었다. 한해의 일이 되게 하고 싶은가?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갈등을 해결하기를 원하는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내가 하는 생각과 내가하는 행동에 대해서 “그거 예수님의 마음입니까?” 그것을 스스로에게 질문하라. 다른 이들에게 질문하라. 그것이 이 한해를 결정하고 추진하는 동력이 되기를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