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추수철에 수확기를 망가뜨린 악한 사람들
- 맥코믹 신학교의 흥망이 주는 경고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마리아 수가성의 우물가에서 제자들을 향해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요 4:35)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 시작된 신약 시대는 곧 영적 대추수의 시대이다. 세계 열방은 성령의 역사를 기다리며 희어져 있으며, 교회가 감당해야 할 최우선적 사명은 영혼을 거두어들이는 영적 추수이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역사 속에서 대추수의 시기마다 신실한 주님의 일꾼들과 신학교, 그리고 영적 기관들을 도구로 사용하셨다. 그러나 만일 한창 곡식을 수확하는 시기에, 수확기의 주요 부품을 부수고 기계를 망가뜨리는 나쁜 사람들이 있다면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이것은 단지 비유가 아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미국 장로교회의 거점이자 한국 선교의 위대한 영적 모체였던 맥코믹 신학교(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실제로 일어난 비극적 역사이다.
1. 맥코믹 신학교의 전신, 하노버 신학교의 출발
맥코믹 신학교의 뿌리는 1829년 인디애나주 하노버(Hanover)에서 시작된 “하노버 신학교”로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 초 미국은 서부 개척 시대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이때 광활한 개척지로 밀려드는 이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개척지 교회를 보살필 준비된 목회자가 턱없이 부족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응답하여 미국 북장로교는 인디애나주 하노버에 목회자 양성기관을 설립했다.
초기 하노버 신학교는 정체성이 명확하고 타협이 없었다. 그들은 성경의 신적 권위와 완전 무오성을 전제로 삼았으며, 인간의 전적 타락,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 이신칭의의 교리, 그리고 성령을 통한 회심과 중생의 절대적 필요성을 분명하게 선포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장로교 정치를 철저히 준수하며 국내외 선교를 향한 뜨거운 열정을 품은 사명자들을 양성했다.
이 신학교는 개척지 선교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중서부 대도시의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인디애나주 뉴올버니(New Albany)로 옮겼다가, 1859년 미국 교통과 산업의 중심지로 급부상하던 시카고(Chicago)로 이전했다. 그리고 명칭도 “북서부 장로교 신학교(Theological Seminary of the Northwest)”로 변경했다. 바야흐로 미국 대륙과 전 세계를 향해 영적 추수꾼을 배출할 준비를 완벽히 마친 셈이었다.
2. 맥코믹의 헌신과 영적 수확을 향한 공헌
이 시기, 하나님께서는 한 경건한 사업가를 준비시키셨다. 그가 바로 사이러스 홀 맥코믹(Cyrus Hall McCormick)이다. 스코틀랜드 장로교 신앙과 언약도의 후예라는 신앙적 유산을 물려받은 그는 1831년, 22세의 나이에 인류 농업 역사에 혁명을 일으킨 수확기(McCormick Reaper)를 발명했다. 이는 수십 명의 농부가 며칠 동안 낫질을 해야만 거둘 수 있었던 곡물 수확을 한 대의 기계로 순식간에 끝낼 수 있게 만든 기술적 도약이었다. 맥코믹은 이 수확기 사업을 통해 세계적인 인터내셔널 하베스터(International Harvester)의 발판을 마련했고, 천문학적인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맥코믹의 위대함은 그의 사업 성공에 있지 않고, 그 재물을 바라보는 청지기 의식에 있었다. 그는 자신이 개발한 수확기로 벌어들인 막대한 재정으로 하나님 나라의 영적 수확에 기꺼이 헌신했다. 1859년, 북서부 장로교 신학교가 시카고로 이전할 때 그는 4명의 ‘교수직 기금’(Endowed Chair/Professorship)을 선뜻 내놓았고, 1883년에는 플러턴 애비뉴 일대의 대규모 부지와 함께 당시 거금인 10만 달러를 아낌없이 기부하여 본격적인 현대식 캠퍼스를 조성하도록 도왔다.
1884년 사이러스 맥코믹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학교 이사회는 그의 지대한 공헌과 신앙적 유산을 기리기 위해 1886년에 학교명을 “맥코믹 신학교”로 전격 개칭했다. 그의 사후에는 아내 네티 파울러 맥코믹(Nettie Fowler McCormick)과 가문 전체가 지속적으로 더 큰 재정을 후원하며 복음주의 신학 교육의 거점을 지켜냈다.
맥코믹 신학교가 이룬 최고의 영적 열매는 단연 조선 선교에 대한 엄청난 기여였다. 188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맥코믹 신학교는 한국 선교의 거대한 공급원이었다.
한국 기독교의 아버지 사무엘 마펫(Samuel A. Moffett, 마포삼열, 1890년 내한), 숭실대학을 설립하여 신학 교육의 신작로를 열었던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 배위량, 1891년 내한), 대니얼 기포드(1888), 윌리엄 스월른(스왈렌, 1892), 그래함 리(이길함, 1892), 사무엘 무어(모삼열, 1892), 제임스 애담스(1895), 윌리엄 블레어(방위량, 1901), 찰스 알렌 클라크(1902) 등 총 22명의 선교사가 바로 이 맥코믹 신학교 출신이었다.
1909년 당시 한국에 파송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40명 중 무려 11명이 맥코믹 출신이었을 정도로, 맥코믹 신학교는 평양, 한성, 대구, 부산 등 한반도 전역에 성경의 신적 권위를 확신하는 정통 개혁주의 신앙을 뿌리내리게 한 영적 모체였다.
맥코믹 가문은 마포삼열 선교사의 요청에 응하여 평양신학교 건립 자금과 기숙사, 채플 건축 비용을 전액 후원하였고, 1916년부터 세계 최대 규모의 장로교 신학교로 성장한 평양신학교의 물적·인적 토대를 일구어냈다. 물리적 수확기로 번 돈이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의 영적 대추수를 이룬 것이다.
3. 수확기를 망가뜨린 성경비평학자들과 배도
그러나 악한 마귀는 하나님께서 가장 강력하게 사용하시는 영적 수확기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가장 크게 번성하고 해외 선교의 열매가 무성히 맺히던 바로 그 시기, 신학교 내부로 가만히 들어온 무서운 암세포가 있었으니, 바로 독일에서 시작된 성서비평학(고등비평)이었다.
19세기 말, 미국 신학계에는 독일 유학을 다녀온 학자들을 중심으로 학문의 자유라는 포장지를 두른 성경비평학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맥코믹 신학교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1881년 구약학 강사로 시작하여 1886년 교수로 부임한 에드워드 루이스 커티스(Edward Lewis Curtis)는 역사적·문학적 비평을 도입한 선구자였다. 1891년 교회사 및 성서신학 교수로 부임한 앤드류 제노스(Andrew C. Zenos)는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하고 고등비평을 강의하며 이를 학내에 제도화했다.
마포삼열을 비롯한 초기 내한 선교사들은 다행히 이러한 비평학적에 물들지 않고 보수적 신앙을 지켜내어 한국에 정통 복음을 전했으나, 맥코믹 신학교 내부에서는 독버섯이 무섭게 번져나갔다. 성경을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이 아닌, 인류의 역사적·문학적 편집물로 격하시키는 독일 신학의 유입은 스코틀랜드 언약도의 신앙 전통을 기초부터 붕괴시켰다.
1900년대부터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미국 교단 전체가 근본주의와 현대주의의 치열한 논쟁에 휩싸였을 때, 맥코믹 신학교는 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외면했다. 성경의 완전 무오성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던 복음주의자들과 달리, 맥코믹 신학교는 교단 중심주의와 온건파라는 명목 뒤에 숨어 성경 비평학자들을 용납하고 타협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1930년대 이후 맥코믹 신학교는 칼 바르트, 에밀 브루너, 라인홀드 니버로 대표되는 신정통주의를 수용하면서 성경의 완전 무오라는 정통 교리에서 완전히 떠나버렸다. 복음의 본질이었던 천국 복음 전도를 통한 영혼의 회심과 중생은 껍데기만 남았고, 에큐메니칼 운동과 사회복음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급기야 1967년, 미국 북장로교가 전통적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유일한 신앙 표준에서 폐지하고 다양성을 명목으로 신학적 기준을 완화한 “1967년 신앙고백”을 채택할 때 맥코믹 신학교 출신 학자들과 교수진들이 그 선봉에 섰다. 1970년대에는 흑인해방신학, 여성신학, 라틴계 및 아시아 탈식민지 신학을 수용하더니, 마침내 퀴어(LGBTQ+) 신학과 종교다원주의까지 전면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성경을 하나님의 절대적 말씀으로 보지 않고 인간의 문서로 전락시킨 악한 학자들의 비평학이, 한창 영혼을 거두던 영적 수확기의 엔진을 완전히 망가뜨려 버린 것이다.
4. 시카고 제4장로교회가 주는 서늘한 교훈
맥코믹 가문의 헌신과 신학적 변질의 비극은 맥코믹 가문이 출석하고 후원했던 시카고 제4장로교회(Fourth Presbyterian Church of Chicago)의 역사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난다.
1871년 출범한 제4장로교회는 사이러스 맥코믹과 아내 네티 파울러 맥코믹, 그리고 그의 아들 사이러스 맥코믹 주니어에 이르기까지 가문 전체가 모든 재정과 삶을 바쳐 섬긴 교회였다. 1914년 시카고의 명소인 미시간 애비뉴에 세워진 아름답고 웅장한 예배당 건축비의 절반을 맥코믹 가문이 부담했다. 이 교회와 맥코믹 가문은 1908년 평양신학교 채플 건립 기금(1만 원)을 비롯해 1910년 기숙사 건축, 1922년 추가 건립 자금(7만 원)을 선뜻 내놓으며 한국 교회의 영적 모태를 구축하는 물질적 통로가 되었다. 네티 파울러 맥코믹 여사가 세상을 떠난 후 1930년에는 그녀를 추모하며 사복음서 기자와 사도 베드로, 바울, 주요 선지자들이 연결된 거대하고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창문(Nettie Fowler Memorial Window)이 교회 동쪽 벽면에 봉헌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시카고 제4장로교회는 어떠한 모습인가? 신학적 파수꾼 역할을 포기하고 세속 사조를 받아들인 그곳은 동성애자 목사와 장로 안수를 적극 허용하고, 동성 커플의 결혼식을 거행하며, 동성 부부 자녀에게 세례를 베푸는 극단적 배도의 현장으로 전락했다.
오늘날 시카고 미시간 애비뉴(Michigan Avenue) 한복판에 서 있는 제4장로교회를 가보면, 맥코믹 가문의 헌신으로 지어진 석조 건물은 여전히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막대한 재산과 유산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안에 거해야 할 성령의 임재와 진리의 선포는 사라졌고, 성경을 대적하고 거스르는 세속적 사조와 마귀의 간계가 왕 노릇하는 비극적 현장이 되고 말았다. 진리 파수 없는 물질적 풍요와 아름다운 건축물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두보로 쓰일 뿐이라는 사실을 역사는 엄중히 경고한다.
5. 싸움을 피한 결과는 완전한 잠식 뿐이다
가장 비참한 결말은 신학을 타협하고 영적 싸움을 회피한 맥코믹 신학교 자신의 물리적·영적 몰락이다.
1920년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J. 그래셤 메이첸(J. Gresham Machen) 박사를 중심으로 복음주의자들이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을 벌이며 피 흘리기까지 성경의 무오성을 지키기 위해 싸울 때, 맥코믹 신학교는 영적 경계심을 완전히 버린 채 “학문의 다양성을 인정하자”, “교단의 평화를 지키자”라며 온건한 용납주의 태도를 취했다. 그처럼 진리를 위해 분립하고 경계하는 일을 외면한 결과, 신학교 전체가 자유주의 세력에 완전히 잠식당하고 말았다.
진리를 잃어버린 신학교의 끝은 부흥이 아닌 황폐함이었다. 신학적 변질은 곧 영적 생명력의 고갈로 이어졌고, 학생 수는 급감했으며 심각한 재정난이 찾아왔다. 급기야 1975년, 맥코믹 가문의 피땀이 서려 있던 링컨 파크의 웅장한 캠퍼스를 드폴 대학교(DePaul University)에 전면 매각하고 떠나야 했다. 한때 임대 주택 수입으로 신학교 운영비를 충당하던 맥코믹 로우 하우스(McCormick Row Houses)와 고풍스러운 도서관, 사택들은 모두 타 기관의 소유로 넘어갔다.
이후 맥코믹은 시카고 하이드 파크로 이전하여 루터교 신학교(LSTC)와 건물을 공유하며 더부살이를 이어갔으나, 영적 몰락의 가속도를 막을 수는 없었다. 학생 감소와 재정 악화가 계속되자, 2023년에는 그 남은 하이드 파크 부지와 건물마저 시카고 대학교에 매각하고 말았다. 오늘날 맥코믹 신학교는 가톨릭 신학대학원(CTU) 건물의 300평 남짓한 공간을 임차하여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성경 무오성을 부정하는 자유주의와 고등비평을 받아들인 대가는 처참했다. 영적 싸움을 피하고 세상 및 비평학자들과 타협한 결과, 영적인 생명력은 물론 하나님께서 주신 막대한 물질적 자산과 역사적 캠퍼스조차 모조리 빼앗긴 것이다.
1978년, 성경의 완전 무오성을 수호하기 위해 R.C. 스프로울, 노먼 가이슬러, J.I. 패커, 프란시스 쉐퍼 등 전 세계 300여 명의 복음주의 학자들이 모여 역사적인 시카고 선언(Chicago Statement on Biblical Inerrancy)을 발표할 때, 시카고를 대표하던 맥코믹 신학교는 그 모임을 주최할 수도, 장소를 제공할 수도 없었다. ‘성경무오성선언’은 신학교가 아닌 하얏트 리젠시 오헤어 호텔에서 발표되어야 했다. 영적 수확기를 스스로 부수어 버린 신학교에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영적 사명을 맡기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맥코믹 신학교의 비극적 역사는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 교회와 신학교, 그리고 성도들에게 엄중한 영적 교훈을 던진다. 영적 전쟁터에서 타협과 온건주의는 평화와 번영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잠식과 멸망을 가져올 뿐이다. 한창 추수해야 할 영적 수확기에, 학문의 자유라는 미명 하에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악한 비평학 사조를 용납할 때, 교회는 영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 위에 바로 서서, 교리의 거룩함을 지키는 영적 파수꾼의 사명을 결코 놓지 말아야 한다. 성경관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첫댓글 맥코믹 신학교가 주는 영적 교훈을 잘 보았습니다. 독일 신학이 무너지면서 전세계에 주는 영적 독극물이 너무 심각하네요.
영적 선한 싸움을 한국교회는 반드시 해야 하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맞습니다.
대다수 교회와 신학교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싫어합니다.
그러면 다 빼앗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