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호정재 당주님이 제주에서 가져온 금잔옥대(金盞玉臺, 제주 향수선화)를 받아 왔습니다.
금잔은대라고도 불리는 금잔옥대는 꽃 모양이 하얀 옥대(또는 은대) 위에 올려진 황금빛 잔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수선(水仙)은 옥매(玉梅), 납매(臘梅), 다매(茶梅)와 함께 눈 속에서 핀다고 하여 설중사우(雪中四友)로도 불립니다.
입학 다완에 일본 丸久 小山園(환구 소산원) 말차 '大福茶 金印(대복차 금인)'
일본에서 大福茶(대복차)는 1월 1일 새벽 일찍 길어온 정화수로 차를 내어 신년을 축하하고, 한해 동안 가족의 건강을 기원하는 차라고 합니다.
위 달마도는 1976년 여름 석정스님(중요무형문화재 제118호 불화장 ,1928~2012)께 인사드리고 받은 달마도.
화기에 내 이름이 기재되어 있어 소유권이 확실히 등기된...
아래는 달마도 화제로 쓰인 선시입니다.
達摩讚(달마찬) - 서산대사
蘆泛淸波上(노범청파상)
輕風拂拂來(경풍불불래)
胡僧雙碧眼(호승쌍벽안)
千佛一塵埃(천불일진애)
갈대 한 가지 맑은 물에 띄우고
가벼운 바람에 나는 듯이 오시네.
달마의 한 쌍 푸른 눈앞엔
천불도 한 움큼 먼지일 뿐일세.
추사와 수선,
금잔옥대(제주 향수선)는 유배지 제주에서 추사의 절실한 반려가 되었다고 합니다.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수선화를 초견한 것은 선생의 나이 24살 때 부친을 따라 중국의 연경을 방문하였을 때라고 합니다.
그 때 이미 수선화의 빼어난 자태에 반한 선생은
그 이후 생각지도 않게 수선화를 다시 만나게 되는데,
그의 나이 55세 때, 생애에서 가장 힘든 시기랄 수도 있는 제주도 유배지에서 였다고 합니다.
당시 제주도에는 수선화가 지천으로 자라고 있었다고 하며,
알뿌리를 말과 소의 먹이로 사용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현재 제주에서는 수선화 종류로
흰 꽃잎 바탕에 다시 노란 꽃잎과 흰 꽃잎이 섞여 있는 ‘몰마농꽃’과
흰 꽃잎 바탕에 다시 노란색 꽃잎이 금잔 모습인 ‘금잔옥대’를 볼 수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에서 흔한 몰마농꽃만 보았을까?
아니면 금잔옥대(金盞玉臺)도 보았을까?
제주 추사관은 청나라 문인 호경(胡敬)이 짓고 추사가 쓴 ‘수선화부(水仙花賦)’라는 목판 탁본을 전시하고 있는데,
수선화부 내용중 금잔옥대를 묘사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仙花吐馨(선화토형) 신선꽃 향기를 토해내는구나.
籍玉盤之瑩潔(적옥반지영결) 맑고 정결한 옥쟁반에
貯金屋之娉婷(저금옥지빙정) 어여쁘고 아름다운 금잔을 올려놓았구나.
芳心綻黃(방심탄황) 금빛 꽃망울 열어,
위 구절들로 미루어 보면 추사가 청나라 연경(북경)에서 본 수선화는 금잔옥대(금잔은대)일테고,
청나라에서 본 금잔옥대가 각인되어 있었을터이니,
제주에서 몰마농꽃만 보았다면 아쉬움을 표하는 글이 남아 있을법 한데
그런 글은 찾을 수 없으니,
추사도 제주에서 금잔옥대를 보지 않았을까?
수선화(水仙花) - 金正喜(김정희)
一點冬心朶朶圓(일점동심타타원)
品於幽澹冷雋邊(품어유담냉준변)
梅高猶未離庭砌(매고유미이정체)
淸水眞看解脫仙(청수진간해탈선)
한점 겨울 마음 송이 송이 둥글고,
그윽하고 담담한 기품 냉철하고 빼어나구나.
매화꽃 고상해도 오히려 뜨락을 못 떠나는데,
맑은 물에서 진실로 해탈한 신선을 보네.
위 시에서 추사는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매화도 뜨락을 벗어나지는 못하지만,
수선화는 뜨락을 벗어난 ‘해탈한 신선’이라고 예찬하고 있습니다.
순조 12년인 1812년, 자하(紫霞) 신위(申緯:1769∼1847)가 연경[중국 북경]에 사신 갔다가 겨울에 돌아오면서 수선화를 가지고 왔으며,
이후 중국산 수선화의 구근을 서로 나누는 일이 문인들의 운사(韻事)로 되었다고 합니다.
제주에서 나는 수선화는 추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고 합니다.
수선화는 깨끗하고 순수한 이미지 덕분에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빵 두개를 가졌다면, 그중 하나를 팔아 수선화를 사라.
빵은 너의 몸을 살찌게하고, 수선화는 너의 영혼을 살찌게 하리라"고 예찬했다고 합니다.
중국의 문학평론가 임어당(林語堂)은 향기만 따져서 말한다면 수선화를 난보다
위에 놓고 싶다며 극찬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