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국새 옥새는 몇 종류가 있었고 어떻게 달랐을까.
조선의 국새 옥새는 몇 종류가 있었고 어떻게 달랐을까.
그 궁금증을 풀어 줄 수 있는 ‘보인소의궤’의 영인본(학연문화사)이 최근 출간됐다. 보인소(寶印所)는 임금의 인장인 보(寶)와 왕세자나 왕비 및 정부기관의 인장인 인(印)의 제작을 위해 설치한 임시기구. 보인소의궤는 이 보인소에서 제작한 보와 인에 대한 기록을 정리한 것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876년(고종 13년)의 기록이 유일하다. 이 의궤는 당시 경복궁 교태전에 불이 나서 보인이 훼손되자 ‘조선국왕지인’과 ‘대조선국왕상상지보’ 등 보 6과와 ‘왕세자인’ 등 인 5과를 49일간 제작한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영인본의 해제를 쓴 손환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에 따르면 국가와 왕권을 상징하는 보는 크게 사용처에 따라 어새(御璽) 어보(御寶)와 국새(國璽) 옥새(玉璽)로 나뉜다. 어새 어보는 임금이 죽은 뒤에 종묘(宗廟)에 모셔져 제의용으로만 사용된다. 국새 옥새는 실무적 국사에 사용됐고 임금의 행차에 이를 실은 보여(寶輿)를 앞세웠고 왕위 계승식 같은 공식 의전에도 쓰였다. 국새 옥새는 다시 인사와 공무 처리 등에 쓰이는 신보(信寶)와 책봉과 외교문서에 쓰이는 행보(行寶)로 나뉘는데 초기에는 3, 4과에 불과했지만 후대로 가면서 수십 과로 늘어났다. 예를 들어 ‘시명지보(施命之寶)’는 종3품 이상에게, ‘유서지보(諭書之寶)’는 그 미만의 관료에게 지시를 내릴 때 쓰였다.
국새 옥새는 6·25전쟁 때까지 80여과가 남아 있었으나 부산 피란 시기 화재로 모두 없어져 현재는 진품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
"조선왕조 국새 모두 사라졌다…13과 분실 확인"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 등 조선왕조 역대 국새(일명 대보) 13과(도장을 세는 단위)가 모두 분실된 것으로 확인됐다.
감사원은 지난해 11, 12월 문화재청과 국립중앙박물관 등 문화재 관련 10개 기관에 대한 관리실태 감사 결과 이같이 나타났다고 24일 밝혔다.
임금의 도장인 옥새에는 왕권 승계 및 외교문서에 사용한 ‘국새’와 대내 공문서에 사용한 일반 행정용 2가지가 있다.
감사원에 따르면 조선왕조에서는 모두 13과의 국새가 제작됐으며 이 중 조선 최초의 국새인 ‘조선국왕지인’ 등 3과가 1971∼1985년에 분실된 것으로 확인됐다. 나머지 10과는 분실 시기와 사유도 밝혀지지 않았다.
모두 26과가 제작된 일반 행정용 옥새는 21과가 분실된 것으로 나타났다.
감사원에 따르면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한 어보(국가 행사 때 주조한 왕과 왕비의 의식용 인장) 316과는 대부분 인면(印面·도장의 찍히는 면)이 녹슬고, 인뉴(印(뉴,유)·손잡이)가 깨져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감사원 관계자는 “문화재청이 옥새와 어보 등을 궁궐 안 행각 등 보존환경이 적합하지 않은 곳에 보관하면서 이상 유무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있었다”며 “국립고궁박물관은 소장하고 있는 ‘대조선국 대군주보’가 국새의 견본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역대 조선 임금들이 외교 문서 등에 사용하던 국새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따라서 실물은 물론 제작 단계에 만들어진 모형도 국보급 가치를 지닌다. 그런데 조선시대 국새 13개 중 하나인 '대조선국 대군주보'의 목제 모형은 국립중앙박물관 지하 유물 창고에서 뒹굴고 있다가 지난해 감사관들의 눈에 띄었다. 발견 당시 이 모형은 '목재 조각품'으로 분류돼 있었다.
감사원은 이 밖에 정조 개인의 인장인 '극(極)' 등 모두 63종의 주요 인장이 각 고궁의 보관창고 등에 허술하게 보관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인장들은 문화재로 지정되기는커녕 보관 상태가 너무 불량해 인면(글자가 새겨진 부분)과 인뉴(손잡이)가 거의 뭉개지고 깨져 있었다고 감사원은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