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선 교수의 우리 성인을 만나다] 17.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최경환 성인, 기도하고 일하며 가난한 이웃에게 자선 베풀어
- 윤영선 작,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출 생 1805년 충청남도 청양군 다락골
순 교 1839년(34세) 포도청 옥 / 옥사
신 분 회장
성실한 노동자 성 요셉 닮은 최경환 성인
5월 1일은 노동자 성 요셉 축일이다. 목수였던 요셉 성인은 일생 노동하면서 성가정을 돌보셨다. 하느님을 찾고 천상의 삶으로 인도되는 데는 기도하는 것만큼 노동이 중요함을 요셉 성인의 삶에서 느끼게 된다. 베네딕토 성인의 가르침에서 유래했다는 수도자들의 좌우명도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이다. 즉 노동과 기도의 조화를 강조한 것이다.
그들은 노동의 품위를 경건한 기도에 버금가는 가치로 인식하고 있었다. 신앙 때문에 이리저리 떠돌며 스스로 나그네 신세가 된 선조들 역시 힘겨운 일상을 거룩한 경지로 끌어올린 주인공이다. 먼 산중에서 화전을 일궈 담배를 심고, 옹기와 숯을 만들며 생계를 이어갔다. 고단한 삶에도 그들은 기도하고 애덕을 베푸는 데 게으르지 않았다. 베네딕토의 좌우명을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들의 노동은 수도자의 품위를 능가했다. 경건히 기도하고 고되게 일하는 가장(家長)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에게서 성실한 노동자 요셉이 보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기해박해 때 가혹한 옥고 치르다가 순교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청양 다락골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이성례 마리아와 혼인하여 6형제를 두었다. 장남은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다. 박해가 일어나자 신앙생활을 위해 가족을 이끌고 경기도 안양의 수리산 골짜기로 들어왔다. 그는 척박한 땅을 일구고 담배를 재배하면서 새로운 교우촌을 일궈 나갔다. 또한 공소 회장직을 맡아 항상 종교 서적을 읽고 가난한 처지에도 자선을 베풀었으며, 새 신자들을 환영하고 그들이 생활 터전을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신앙공동체로서 함께 일하고 함께 모여 기도하였다. 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봐주고 순교자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도 그들의 몫이었다. 1839년 기해박해에 체포된 프란치스코는 아들을 신학생으로 보냈다는 이유로 남들보다 더 가혹하게 옥고를 치르다가 1839년 9월 12일 옥에서 숨을 거뒀다.
아들 최양업 신부 비롯해 많은 성직자 배출
은행잎과 단풍잎으로 곱게 단장된 수리산성지를 방문하였다. 미사를 드리고 고택 성당을 둘러보고 성인의 가묘가 있는 산길을 올라갔다. 어느 봄날 방문했을 때는 온갖 봄꽃들로 꽃비를 내려주시더니 지금은 하늘에서 금싸라기 나뭇잎을 뿌려주셨다. 성모님도 옆에서 지켜봐 주시는 가운데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은 담배를 재배하는 노동 중에도 섬김과 겸손의 마음으로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묵주 기도를 올리고 계셨다.
성인들의 초상화를 그리려고 마음먹으면서 가능한 한 성인의 후손들을 뵙고자 했었다. 그러던 차에 뜻밖에도 성인의 후손인 최기식 베네딕토 신부님(원주교구)의 사제 수품 50주년 기념 미사에 참석하는 영광을 가졌다. 기념 미사에는 최경환 성인의 후손이 많이 참석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성인의 노동과 기도, 그리고 순교가 후손 성직자들을 이리도 많이 배출하였으니, 주님의 약속이 실현된 것이리라.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4월 28일, 윤영선 비비안나(강동대 건축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