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따뜻한 눈빛(요 5:1-9)
2024.1.28 김상수목사(안흥교회)
눈빛에도 온도가 있고, 말에도 온도가 있다. 사람은 감정 상태에 따라 눈빛의 온도나 말의 온도가 변한다. 동일한 사람의 눈빛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때는 섬뜩할 정도로 차갑고, 또 어떤 때는 달콤한 꿀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독사같은 눈빛을 보면서 따뜻함을 느끼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눈빛에 위로도 받고, 상처도 받는다. 말도 그렇다. 이 세상에 서릿발 같은 차가운 눈빛이나 불친절하고 퉁명스러운 차가운 말투를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따뜻한 눈빛과 친절한 말투를 원한다. 설령 100% 그러한 눈빛이나 말투를 내가 하지 못하고, 타인에게도 기대할 수 없을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늘 변함없이 나를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보시고, 진심이 느껴지는 따뜻한 말로 우리의 마음을 만져주시는 분이 계시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우리들이 좋아하는 찬양 중에 다윗과 요나단이 부른 “주만 바라볼지라”라는 찬양에 이런 가사가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중략)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 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 주만 바라볼지라 찬송 동영상(다윗과 요나단) - https://youtu.be/gW7SgFG5rgc?si=g_PS4QyEn2Hq2DAb
이 찬양의 가사 중에 특히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라는 가사가 마음에 특히 와 닿는다. 설령 내가 어두움에 있을 때에도, 작은 신음소리를 내면서 아파할 때도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신다. 예전에 힘들 때, 이 찬송을 반복하면서 위로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왜 이 찬송의 가사에 그렇게 눈물이 났을까? 이 찬양의 가사에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의 온도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일하다고 확신한다. 그렇기에 우리도 어느 곳에 있든지 주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오늘 설교본문인 요한복음 5장 1-15절 말씀에 보라. 이 말씀은 주님께서 서릿발같이 차가운 고통의 현장에서 찾아가셔서 무려 38년 동안이나 질병으로 신음하는 한 병자를 고쳐주시는 장면이다.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요 5:5)
오늘 본문에 보면, 이 병자가 있던 베데스다 연못 주변에는 이 사람 말고도 또 다른 병자들이 많이 있었다. 왜냐하면 예로부터 이 연못에는 천사가 가끔 내려와서 물을 움직이는데, 그때 가장 먼저 물속에 들어간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는다는 말이 이야기가 전해왔기 때문이다. 만약 물이 움직이는 소식이 전해진다면, 그 곳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짐작이 된다. 그러니까 이곳은 그야말로 남의 사정이나 상태를 배려줄 틈은 바늘구멍만큼도 없는 치열한 경쟁의 현장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38년 된 병자는 38년 이라는 시간 동안 육체의 질병이 낫는 것은 고사하고,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냥 혼자다. 연못이 움직이는 것은 둘째치고라도, 움직여도 넣어줄 사람이 없다. 가족도 친구도 다 떠났다. 심지어 고독사를 해도 시신처리해줄 사람도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는 오직 낙망과 좌절과 외로움과 배신감과 거절감만 마음에 남아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이 자기에게 왔을 때 이렇게 말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요 5:7)
38년 된 병자의 이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을 이겨낼 가능성이라고는 1도 없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절규(絶叫)이다. 연못의 물이 움직이고, 다른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면서 달려갈 때, 이 사람도 소리치면서 “누가 나 좀 도와줘요”, “제발 나 좀 데려가 줘요”라고 절규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38년 동안 늘 그랬듯이 자신을 짓밟고 달려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반복된 좌절과 고통뿐이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이 시대 우리들이 발을 딛고 있는 삶의 현장이 바로 또 다른 베데스다 연못이 아니겠는가? 그 속에서 돈 없고, 힘없고, 빽 없고, 삶의 해답을 찾지 못해서 좌절하고 방황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또 다른 형태의 38년 된 병자들이다. 그들 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어디서 무슨 정보를 전해 듣고 지원이라도 하려 하면, 이미 다른 사람들이 먼저 손을 써서 상황이 종료되어버린 경우도 많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 절망감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 사회는 돈 없고, 빽 없는 사람을 보면, 그 생명을 천하게 생각하고 무시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근성이다. 어떤 때는 친구들 사이에서나 집 안 또는 교회조차 좌절과 고통의 현장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런데 이처럼 비참하고, 비굴하고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보이던 그 절망의 현장에, 어둡고 긴 지하 감옥 같은 차가운 좌절의 현장에 어느 날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Jesus saw him lying there)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요 5:6-9)
고통의 현장에서 찾아가신 주님의 모습이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 왜냐하면 주님은 38년 된 병자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나)에게도 동일하게 손을 내미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 병자를 찾아갔다. 그리고 누운 것을 보셨다. 주님의 이 눈빛은 따뜻한 사랑의 눈빛이다. 더 나아가 주님은 존재감이라고는 1도 없던 병자에게 따뜻한 음성을 들려주셨다. 이 따뜻한 주님의 사랑이 38년 동안 얼었던 마음을 녹여내었다.
이것은 오늘 우리(나)에게도 동일하다고 확신한다. 지금도 주님은 변함없이 내 곁에 오시고, 애절하고 간절한 사랑의 눈으로 나를 보시고, 따뜻하게 말씀하신다. 본 설교자도 극한 한 겨울에 구정물 속에 빠졌던 시절이 있었고, 인간적으로는 견딜 수 없는 모멸감과 배신감을 느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도 주님은 온 몸이 얼어붙었던 그 비굴의 현장에 찾아 오셨다. 그렇다! 주님은 나(우리)를 일으켜 주시는 주님이시다. 그렇기에 지금 여러분들이 서있는 베데스다 연못은 절망의 현장이지만, 동시에 주님을 만나는 희망의 현장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내 삶의 유일한 희망인 것이다.
여러분이나 이 설교문을 읽는 분들 중에 혹시 이런 생각이 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나는 믿음이 별로 없으니까……. 예수님은 나를 잘 모르실거야”
“내가 지금은 교회에 안다니고 있으니까, 예수님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관심 없을 거야”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놀랍고 충격적인 점이 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는 믿음이 약한 정도가 아니라, 본래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그는 고침 받은 후에도 자신을 고쳐준 사람이 누군지 조차 몰랐다. 나중에 예수님을 다시 만났을 때야 비로소 자기를 고쳐준 사람이 예수님이셨다는 것을 알았다(요5:13-14).
“13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요 5:13-14)
무슨 말인가 하면, 지금 이 순간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든, 아니면, 탕자처럼 주님을 멀리 떠나 있든 심지어 타종교나 미신에 쪄들어 있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것들을 가리지 않고, 여러분 모두를 동일하게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주님의 사랑은 차별이 없다. 오히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모든 영혼들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셨고(요3;16),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우리는 단지 거절하지 않고, 믿기만 하면 된다. 두 손들고 주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복음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들이여, 그러므로 38년 된 병자가 단지 주님의 따뜻한 눈빛과 말씀에 순종하여 일어나 걸어갔던 것처럼, 주님 앞에 나아가자. 다함께 주님 손을 굳게 잡고, 천국 가는 그날까지 주욱~ 여주동행하자.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주님을 대신하여 또 다른 추운 사람들에게 따뜻한 눈빛과 말과 사랑의 손을 내밀자(찬송, “탕자처럼 방황 할 때도”).
“탕자처럼 방황할 때도 애타게 기다리는 부드런 주님의 음성이 내 맘을 녹이셨네.
오 주님 나 이제 갑니다, 날 받아주소서. 이제는 주님만 위하여 이 몸을 바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