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용상에 오른 석탈해
한편,
석탈해는 가야의 김수로왕에게 자신만만하게 도전장을 내고, 당당하게 제철 술법을 겨루어 보았지만, 김수로왕의 뛰어난 야금술에 깨끗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감히 비교하기조차도 힘들 정도의 현격한 기술의 차이를 보인 것이다.
따라서 첫사랑도 잃고, 권력도 쟁취하지 못하였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세상이 허무하고 자신의 인생이 여기서 끝장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석탈해는 자신의 불운한 처지와 세상을 원망만 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자신의 가족과 동족, 그리고 대 代를 이어가며 수십 년을 함께 동고동락 同苦同樂해온 수 많은 동지 同志가 요하와 대릉하에서 자신의 성공을 기원하고 있었다.
그들의 여망 餘望을 져 버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석탈해는 수로왕과의 대결에서 얻은 것도 있었다.
새로운 야금술 冶金術에 눈을 떠, 단단하지만 인장력이 약해 잘 부러지는 선철 銑鐵의 약점을 보강하여, 강철에서 탄소 炭素를 축출 逐出한 연철 軟鐵을 주조하는 합금 기술 合金技術이 대단한 진보 進步를 이루게 되었다.
수준이 낮은 일반인은 아무리 보아도 모르겠지만,
아니, 가르쳐주어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막바지 고도 高度의 기술에 다다른 장인 匠人들은 제조 과정상의 일부나, 그 자재를 다루는 모습만 슬쩍 보아도, 그 방식과 절차를 깨달을 수 있다.
사로국으로 입국한 석탈해는 이전보다 더 가벼우면서도 인장력과 내구성이 뛰어난 연철을 적절히 합금하여, 단단한 농기구와 우수한 병장기를 제조 생산하게 되었다.
석탈해가 뛰어난 제철 기술과 함께 이주한 동이족들의 응원으로 사로국의 유명인으로 자리를 잡았고 또, 그를 따르고 지지하는 백성들도 차츰 늘어갔다.
남해차차웅은 석탈해의 인품과 대장장이의 휼륭한 첨단기술력 또, 그를 따르는 무리가 상당한 것을 알고 자신의 딸을 탈해에게 시집보내어 석탈해를 사위로 삼는다.
석탈해는 이제 어엿한 사로국의 부마 駙馬가 된 것이다.
2대 남해차차웅의 뒤를 이은
3대 노례 이질금으로부터 석탈해는 보위 寶位를 물려받는다.
처남 妻男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것이다,
기원 57년에 석탈해는 우여곡절 迂餘曲折 끝에 62세의 고령 高齡으로 사로국의 4대 이질금이 된 것이다.
* 쿠시나메
석탈해의 기이한 행적은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만 서술된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멀고 먼 페르시아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대한민국이 동이족의 적통 嫡統을 이어받았듯이
이란은 페르시아의 적자 嫡子라는 사실은 자타가 공인한다.
그 이란에서는 고대부터 ‘쿠쉬나메’(쿠시의 책이란 뜻)란 대서사시가 양피지 羊皮紙에 기록되어 전해 내려온다.
이란인들에게는 자신들의 역사가 기록된 필독서이며, 대중들 사이에도 인기가 좋은 책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 유명한 ‘쿠쉬나메’에서 ‘신라’ 新羅가 등장한다.
800여 쪽의 방대한 분량 중 태반 이상이 신라와 연관되어 있다.
신라를 ‘바실라’(Bashilla) ‘실라’ ‘세일라’ 등으로 표현해 놓았다.
시대 배경은 조금 다르다. 시대는 6세기 무렵으로 석탈해보다 시기가 늦다.
내용은 먼 옛날 페르시아의 ‘아브틴’(Abtin) 왕자가 머나먼 동방의 ‘실라’라는 나라까지 찾아가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바실라의 타이후트왕 (태종무열왕 ?)의 맏공주 公主와 결혼하여 공주를 자신의 부인으로 삼아 실라의 부마가 되었으며, 그 후 공주와 페르시아에 돌아가 왕자를 낳았는데 그 용감한 왕자가 적국을 물리쳤다는 역사기록이다.
1972년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과 이란의 수도 테헤란시가 자매결연을 하였다.
그 기념으로 서울의 서초동과 삼성동을 잇는 간선도로를 ‘테헤란로’로 작명하였듯이, 그 화답으로 이란의 수도에도 ‘서울로’와 서울공원‘이 있다.
현재도 이란의 수도 테헤란의 ‘서울공원’에는 위 내용이 자랑스럽게 비석으로 새겨져 있다.
* 사진 - 이란의 서울공원
7. 석탈해의 정치술
고 기록 古 記錄에는,
처음 사로국 바닷가에 도착한 석탈해는 타고 온 배에서 20자의 큰 궤 안에서 나왔는데, 7가지 보물과 여러 명의 노비를 데리고 나타났다고 하였다.
이 기록을 보면,
석탈해는 경제적으로 궁핍 窮乏하지 않고, 상당히 부유 富裕하게 보인다.
그런데,
석탈해는 사위 詐僞로 호공의 집을 빼앗는다.
‘7가지 보물과 여러 명의 노비’를 데리고 나타나다니, 상당한 재력 財力을 과시하는 석탈해다.
그런데 왜?
호공의 집을 탐내어 사해 詐害 행위를 벌일까?
보물이 많은데 그 정도의 재력 財力이면 다른 집을 사든가, 아니며 좋은 터를 골라 새집을 지으면 될 걸, 굳이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을 탐내어 빼앗아 버릴까?
더구나, 호공은 사로국의 최고위층인 대보 大輔 출신이다.
이해하기 어렵다.
그 답은 석탈해 스스로가 하고 있다.
석탈해의 뛰어난 정치술 政治術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처음 낯선 곳에 정착 定着하려면 여러 가지 난제 難題가 도사리고 있다.
철새처럼 왔다 가버릴 낯선 외지인 外地人에게 친밀감을 보여주는 토착민 土着民은 드물다.
더구나 생김새가 눈에 익지 않은, 낯선 이방인은 더, 더욱 기피 忌避 인물이 될 것으로 우려 憂慮된다.
할아버지 대 代부터 천축국에서 머나먼 중원으로 이주하면서 2~3대 代를 외지인 출신이라는 한가지 이유만으로도 많은 설움을 겪었다. 주위로부터 무시당하는 등 크고 작은 아픔들이 이제는 유전인자로 변모하여 뇌리 腦裏에 깊이 새겨져 있다.
그러니 낯선 이방인 異邦人은 이곳이 예전부터 연고 緣故가 있는 것처럼 먼저, 선수 先手를 치며 토착인으로 행세한다.
석탈해는 호공의 집을 보고는
“옛날에 우리 조상이 살던 집이었는데, 장기간 출타한 후에 귀가하니, 다른 사람(호공)이 살고 있었다”
그 증거로 ‘예전에 자신의 집안이 대장간을 운영했다’라며 담 아래에서 숯과 숫돌을 캐낸다.
석탈해가 말하는 속뜻은 정치적인 성향이 강하다.
첫째, 석탈해는 조상 대대로 이곳에 살아온 토착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외모와는 상관없이 자신은 ‘외지인 外地人이 아니다’라는 의미다.
오히려 호공이 외지인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집주인이 토착인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자신의 조상이 호공보다 더 일찍, 오래전부터 사로국에 살고 있었던 토착 세력임을 알리는 행위다.
둘째, 자신은 사로국 최고위직 출신. 대보 직을 지낸 화려한 경력을 가진 호공을 상 대로도 싸울 수 있는 대단한 인물인 것처럼 과시한다.
그러니, ‘토착인이라고 텃세를 부리며, 더 이상 나를 귀찮게 하거나, 괴롭힐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라는 뜻을 외포 外表하고 있다.
셋째, 자신의 집안이 대대로 우수한 기술을 보유한 대장간의 기술자 집안이라고 숯과 숫돌을 제시하며 넌지시 자랑하고 있다.
초기 철기시대에는 첨단 기술인 철을 다루는 장인 匠人을 모두가 우르러보고 존경받던 시절이다.
그러니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은 조상 대대로 이곳에서 살아온 토박이로서 이곳에 자신이 다시 왔으므로, 이제 다른 곳으로 가지 않을 것이며, 선대 先代 때부터 제철 기술이 뛰어난 대단한 기술자 집안이니, 믿고 앞으로 잘 사귀어 보고, 괜찮으면 정치인으로 추대해 달라는 뜻이다.
빠른 시일 時日 내에 월성에 정착하고 출세하려면 이 방식이 아주 유력하다.
가야국 김수로왕의 왕위 등극 절차를 일부 답습 踏襲한 것이다.
그러니,
사실은 석탈해와 호공은 소위 所謂 말하는 한 통속이었다.
둘이서 짜고 치는 화찰(花札: Go stop)이었다.
이들의 감쪽같은 연출 演出에 속아 넘어간, 나머지 무리는 사로국 월성의 토박이들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지인 사이였으며, 더 나아가 실상을 헤쳐보면 혈맹 血盟의 동지 同志였다.
어느 날,
갑자기 월성 月城에 나타난 낯선 젊은 이방인이 대보 출신 호공을 상대로 싸워 이겨 호공의 집을 차지하더니, 그 자리에 대장간을 운영하며 뛰어난 제철기술을 발휘하여, 질 높은 제철 농기구나 여러 가지 연장을 만들어 주변에 좋은 평판을 얻고, 그 인기가 사로국 전체에 펴지게 된다.
결국 석탈해의 계획은 적중 的中하였고, 야심 野心에 찬 정치술을 발휘하여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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