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은 고민을 ···
- 이건복 신부-
성지 사목을 하면서 항상 고민하는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순례를 오는 신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순교자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미리 답사를 오시는 분들의 질문을 듣고 나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뭐 다른 볼거리는 없습니까?” 그리고 “밥은 맛있습니까?” 성지 구석구석을 아름답게 꾸미고자 조경도 하고 장엄한 성물을 안치하기도 합니다. 봄이면 꽃도 심고 가을이면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기를 바랍니다. 신자들을 실망시키면 안 되니까요.
이것도 부족하다 싶어 얼마 전부터 순례객이 특강을 요청하면 기타를 치면서 찬양 강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랬더니 성지를 다녀가신 분들이 이런 글을 보내왔습니다. “어농성지 밥맛 좋았습니다”, “신부님, 가수 해보세요. 찬양노래 잘 들었습니다.” 신자들의 반응은 좋은 것 같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하느님께 그리고 순교자들께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성지를 다녀간 신자들이 순교자를 만나고 하느님을 만났다는 이야기가 듣고 싶기 때문입니다. 맛있는 밥이나 꽃이나 단풍이나 성지 신부의 찬양소리를 듣고자 성지순례를 떠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우리가 진정으로 만나고 싶어하는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많은 청소년은 인기 있는 연예인들의 유행어나 옷 그리고 머리 스타일을 따라 합니다.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보다 연예인이 더 인기 있어 보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를 더 많이 따라 살 수 있을까? 청소년 성지에서 일하고 있는 저는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새벽을 열며
어떤 시골 성당의 미사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성찬의 전례에서 사제가 축성 기원을 하는 순간이 있지요. 바로 이 순간에 복사는 종을 쳐서 교우들이 정신을 집중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런데 복사가 종을 치려고 하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글쎄 종이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종을 칠 수가 없어서 복사는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름대로 오랜 연륜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던 복사는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합니다. 즉, 종을 쳐야 하는 순간에 입으로 이렇게 말했지요.
“땡~”
어제 우리 본당 미사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날 뻔했습니다. 종을 쳐야 하는데, 글쎄 종을 치는 채가 사라진 것입니다. 항상 있었던 그 자리에 채가 없으니 종을 칠 수가 없었지요. 그 순간 복사는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고 합니다. 앞선 이야기에 나오는 복사처럼 입으로 ‘땡~’하고 말할까, 아니면 주먹으로 종을 쳐서 소리를 내도록 할까……. 결국 침묵으로 종 치는 것을 대신했습니다.
평소에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으니 종을 치는 채가 그렇게 중요한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 채가 없으면 종에서 소리가 날 수 없기에 종 자체를 무용지물로 만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즉, 종이 종을 치는 채가 없이는 무용지물이 되는 것처럼, 주님을 떠나서는 우리의 존재 자체도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착각을 하지요. 주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오늘 복음에는 세례자 요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삶을 보면서 오시기로 했던 메시아가 아닐까 생각하지요. 그래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요한에게 가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누구요.”
이 질문에, “당신들이 기다리고 기다렸던 메시아가 바로 나요.”라고만 말했어도 아마 팔자가 피지 않았을까요? 메시아라는 사실이 부담된다면, 다음 질문에 나온 ‘엘리아나 예언자가 바로 나요.’라고만 말했어도 모든 사람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면서 편하게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증언을 하면 그 자체로 하느님 곁을 떠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는 기회를 그리고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걷어내고, 대신 철저히 주님을 증거함으로써 하느님 곁을 끝까지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높은 자리, 많은 재물. 우리들을 유혹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것들로 인해서 하느님 곁을 떠날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세례자 요한처럼 용기 있게 거절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떠나서는 우리들은 결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주님 곁에 계세요.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할지는 모르지만, 마음의 행복은 반드시 누립니다.
빠다킹신부
영적 여정
-이중섭 신부-
하느님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에게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 하고
물으셨습니다. 여기서 어디는 장소가 아니라 관계를 묻는 질문입니다.
“시대마다 하느님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느냐? 네게
주어진 몇몇 해가 지나고 몇몇 날이 지났는데, 그래, 너는 네 세상 어디쯤
와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마르틴 부버, <인간의 길> 중에서). 영적 여정은
‘너 어디 있느냐? 너는 누구냐?’는 물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됩니다. 모세는 이집트 왕궁에서 40년을 지내며 자신이 이집트 사람이
아니라 히브리 사람임을 깨닫고 동족을 위해 나섰습니다. 또한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너는 누구냐?’는 질문을 붙잡고 늘어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나는 소리다.” 아담에게 ‘너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 어디 있느냐?’ 세례자 요한에게 물었던
사람들이 오늘 우리에게 새롭게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세례자 요한은
유다 광야에서 ‘너는 누구냐?’는 물음에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임을 깨달았습니다. 새해 벽두부터 던져진 ‘너는 누구냐?’는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라는 초대에 귀를 기울입시다.
거짓의 사람들
-주영길 신부-
그리스도를 기다리던 유다인들이 세례자 요한한테 사람들을 보내면서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이 질문 속에는 ‘세례자 요한이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는 시대적 바람이 들어 있다. 그의 예언자적 삶과 거침없는 선포, 큰 무리의 추종자 등이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서슴지 않고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고백한다. 그들의 기대를 한순간에 꺾어버리고 만 것이다.
과연 우리는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살아가는가? 아니면 포장된 모습, 또는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나’ 아닌 모습으로 살아가지는 않는가? 예수님이 그토록 책망하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가 그랬다. 그들은 율법주의라는 틀 속에서 남에게 경건한 이로 비춰지며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살아간다.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모진 질책은 ‘거짓’을 깨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남을 속이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마저 속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바로 ‘거짓의 사람들’이다.
얼마 전 방송을 통해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절규’라는 프로그램을 보았다. 사이비종교의 실상을 보도한 것이다. 일흔이 넘은 고령의 목사가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신도들을 집단 농장에서 부려먹으며 폭리를 취하고 있었다. 목사는 자신이 하느님의 계시를 직접 받으며 머지않아 세상의 종말이 다가온다고 설교했다. 목사 개인을 하느님과 같은 위치에 놓고 성경을 함부로 해석하는 이는 전형적인 ‘거짓의 사람들’이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세례자 요한의 솔직한 대답은 끊임없이 ‘거짓’으로 포장하려는 우리 자신을 성찰하게 한다. 그런데 가면을 벗기기는커녕 오히려 씌우려 하니 삶의 진지한 성찰과 변화가 있을 리 없다. 무엇보다 사제를 예수님처럼 대하는 신자들 앞에서 점점 익숙해 가는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다. 나도 어느덧 ‘거짓의 사람들’ 무리에 속해 살아가지는 않는지….
그분을 찾는 여정
-오상선신부-
<그런데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 한 분이 당신들 가운데 서 계십니다.>(요한 1,26)
1. 사람들은 요한을 찾아서 "당신은 누구요?"하고 묻는다.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면 "당신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는 그리스도요?"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무자년 올 한해
또 다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바로 요한을 찾아온 사람들처럼
<그분>을 찾아 헤메는 길이다.
지난 해
나는 그분을 찾았던가?
그분을 어디에서 찾았던가?
혹 그분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계신 것을 알아채리지 못한 것은 아니었던가?
2. 요한은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우리가 그분을 어디서 찾아야 할 지를 잘 말해준다.
확실한 것은
그분은 분명 우리들 가운데 계신다는 것이다.
다른 데 계신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가운데 계신다>는 것이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장,
내가 만나게 될 모든 인연들 가운데 계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헛군데서 그분을 찾는 우를 올해는 범하지 말아야 하겠다.
3. 그런데
우리들 가운데 계시는 그분인데도
왜 우리는 그분을 만날 수 없는 것일까?
그분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잘 모르는 사람 가운데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보통 우리가 잘 아는 사람과 친분을 맺고 산다.
가족, 친지, 친구, 동료들과 붙어다닌다.
그러나 우리의 폭을 넓혀서 우리가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의 친교에 우리 자신을 열어 놓지 않으면
우리 가운데 계시는 그분을 놓쳐버리게 된다.
금년에는 내가 잘 아는 사람만이 아니라
내가 잘 모르는 사람에게로 눈을 좀더 돌리자.
그래야만 <그분>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바로 우리가 잘 모르는 그 사람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지금,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내가 모르는 사람이 누군지를 한번 둘러보자.
그냥 무시하는 눈으로
그냥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으로
그냥 귀찮은 사람으로 바라보지 말고
예민한 눈으로 한번 바라보자.
그들 가운데서
숨어 계시는 <그분>을 느껴보자.
아, 주님!
거기 계셨군요...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 보는 나(我)...
-오창근 신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바실리오 성인의 축일입니다. 동방교회 전례의 아버지로 불리는 바실리오 성인은 동방교회 수도자의 창시자로서 이단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옹호하다가 오히려 이단으로 몰리기도 하여, 좌절과 실망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더욱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고, 교회 역사상 가장 뛰어난 스승들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바실리오 성인이 어려움에 처해서도 실의에 빠지지 않고 또 다시 일어섰듯이 여러분들도 닥치는 어려움에 좌절하지만 말고 또 다시 용기를 내어 일어날 수 있는 그런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는 세례자 요한이 등장합니다. 사람들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요!” 하고 대답합니다. 그 당시 유다인들은 요한으로부터 “나는 여러분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할 메시아요!” 라는 대답을 듣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너나 없이 구세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강대국 로마에 짓밟혀 백성들은 굶주림과 억압에 시달리고 있어서 자신들을 그 압제에서 구해줄 혁명가, 군대를 끌고 와서 로마의 식민지 살이에서 해방시켜줄 그런 구세주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사람들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자신이 구세주가 아님을 분명히 말하고 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 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라고 말입니다. 이 얼마나 확실한 표현입니까? 신발 끈을 풀어드리는 일은 바로 종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그런 종의 역할마저도 할 자격이 없다라는 것은 자기 뒤에 오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크신 분인가 하는 것을 확실하게 이야기 해 주는 것입니다. 당시 세례자 요한의 자리는 상당히 큰 자리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을 추종하였고, 세리와 군인들까지도 와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하고 말할 정도로 요한은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만일 요한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에게 누군가가 와서 “당신은 누구요?”한다면, “나는 여러분들을 구해줄 메시아요”, “나는 잘났기 때문에, 똑똑하기 때문에, 능력이 있기 때문에, 여러분을 구해 줄 메시아요” 라고 하지는 않을는지요?
그러나 요한은 여기서 자신을 낮춤으로써 자신의 위대함을 더 한층 더러 냅니다. 자기를 낮출 줄 안다는 것은 정말 큰 덕입니다. 요한은 이 큰 겸손의 덕 때문에 예수님께로부터‘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이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라는 칭찬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자신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남들보다 더 좋게 자신의 모습을 포장하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학식을 자랑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많은 재산이나 권력을 자랑하기도 하고, 또한 남을 무시하면서까지 자신이 최고라는 것을 자꾸만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자신이 아니면 안 되고, 자신의 의견만 옳고, 자신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결사라고 떠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최고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남을 짓밟고, 비방하고, 헐뜯고, 중상모략 하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들은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가정 안에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이비 종교에서는 교주가 자신을 두고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내가 바로 하느님이다." "내가 바로 재림 예수다." "나는 하늘에서 신으로부터 직접 파견된 구세주다." 한마디로 자신이 바로 '신'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바로 '절대자'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바로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얼마나 세례자 요한처럼 자신을 낮추고 하느님을 사람들 앞에 들어 높이고 있습니까?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님을 밝혔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버려야겠습니다.
나아가 세례자 요한이 자신의 모든 삶에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였듯이, 우리도 이웃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힘차게 선포해야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도 예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랑 받는 하느님의 아들, 딸들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하루도 건강하고 활기찬 하루가 되시기를 빕니다. 아멘...........◆
자신을 낮추는 모습으로 한해를 살자.
-김재호 신부-
찬미예수님!
여러분 새로운 한해를 잘 맞이하고 계십니까?
지난 한 해를 주님 안에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한번 반성해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시작되는 한 해를 또 다시 주님께 봉헌하며 우리의 생활을 주님께로 이끌어 갈 수 있게 해주는 알찬 계획들을 잘 세워 나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느님께서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직접 인간이 되어 오신 것을 경축하는 성탄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셨다는 것, 그것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우리 인간들에게 깊이 반성하게 하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해주게 됩니다.
우리는 한 번이라도 높은 자리에 올랐거나 권력을 손에 쥐어봤다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옳지 않은 방법이라도 서슴치 않고 행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면 자기보다 낮은 사람에게 함부로 대할 때가 많습니다.
부끄럽지만 사실 제가 그랬습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내가 신분데...’라는 생각으로 교사들이나 청년들에게 함부로 대할 때가 더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었습니다.
어떤 신부님이 자신을 당나귀에 비유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필 왜 당나귀에 자신을 비유하셨을까요? 그 신부님께서 자신을 당나귀에 비유하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당나귀를 타고 오시는 장면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그동안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수많은 기적들과 행적들, 그리고 권위 있는 말씀들을 들어왔고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땅에 깔기도 하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다 길에 깔기도 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본 당나귀가 착각을 하게 됩니다.
즉 당나귀는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좋아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우쭐거립니다. 자신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구나! 라고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 신부님은 이렇게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잘나서 그런거라고 착각을 하는 당나귀와 자신이 같은 처지라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저 또한 그 말씀에 공감을 합니다. 제 자신이 착각하고 있는 그 당나귀와 같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났기 때문에..’, ‘내가 신부니깐..’ 사람들에게 함부로 해도 된다라는 착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스승이고 내가 그 일을 잘 아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자처할 때가 많았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잊고 내가 잘나서 여기 이 자리에 와 있다는,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착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저의 그런 생각이 잘 못되었음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다시 한번 일깨워 주십니다. 우리의 스승은 한 분 뿐이시고 아버지도 한 분 뿐이시고 선생님도 한 분 뿐이시라는 것을... 또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라는 말씀을 통해 높아지려고만 하는 저에게 충고의 말씀을 던지십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혹시 저처럼 자신을 낮추기보다 자신을 높이고 있지는 않은지요?
다른 사람보다 돈이 조금 더 있다고 해서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착각한 적은 없으셨습니까? 다른 사람보다 명예나 권력이 조금 더 있다고 해서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존경을 받아야하고 다른 사람보다 좀더 특별한 혜택을 누려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보신 적은 없으셨습니까?
우리는 지금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한없이 자신을 낮추셔서 인간이 되어 오신 주님의 탄생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정말 진정으로 낮은 자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우리는 본받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정말 주님 앞에서 한없이 높은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아멘..........◆
광야
-이철구 신부-
우리는 광야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광야에선 자신의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바라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인간적인 욕망과 위선적인 허식에
쌓여 있었는지를 보게 되고, 나를 중심으로 움직일 것 같은 이 세상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 비로소 홀로 고독함을 체험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침묵 속에서 창조주 앞에 발가벗겨진 피조물로서의 자기성찰의 시간입니다.
광야에서의 체험은 혹독할 수밖에 없지만 그 시간을 통해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며
우리 인간 실존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깨닫게 되는 은혜로운 시간이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우리에게 인간존재의 본질을 어둡게 만드는 휘장을 벗겨버리라고,
그래서 내가 진정으로 만나야 하는 이를 반갑게 맞이할 수 있도록
지난날의 거짓된 삶에서 벗어나라고 외칩니다. 내가 즐기며 맛들였던
세상의 온갖 우상에서 벗어나라고 말입니다.
요즈음은 ‘돈’이라는 우상이 하느님의 자리를 넘나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고 죽어가는 생명도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이 점점 커져가고 있고요.
광야의 시간, 나와 이웃의 참된 존엄성은 바로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깨닫도록 합시다. 세례자 요한은 그것을 알았기에 자신을 단지 ‘소리’로,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이 없는 이로 여겼어도 당당함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다.”
-김태오 신부 -
◆두 분 성인, 바실리오 주교와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주교는 초대교회의 주교들인데, 이 두 분은 여러 면에서 공통점이 있기에 교회는 이 두 분을 같은 날 함께 기억한다. 두 분 모두 훌륭한 저술가로 그리고 설교가로 같은 지역에서 태어났고 가까운 친구 사이였으며 공부도 함께하셨다. 나는 이 두 분을 기억할 때마다 늘 따뜻한 우정을 그리워한다. 서로를 위해주고, 격려하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그러한 우정. 심지어 서로 만나지 못하더라도 존재 그 자체로써 힘이 되어주는 그러한 우정. 바실리오와 그레고리오 주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정을 나눈 분들이다. 그들은 신앙 안에서 서로에게 큰 힘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나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함께 기념하고 있는 이 두 분의 모습을 모범으로 삼아 모든 사목자·수도자 그리고 교회가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따뜻한 우정을 나누었으면 한다.
오늘 복음의 중심인물은 세례자 요한인데, 아마도 요한은 만나지는 못하였지만 예수님과 영적인 친교와 우정을 나누었다고 본다. 요한은 예수님을 신앙 안에서 체험했기에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대사제들과 레위지파 사람들 그리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에 자신있게 대답한다. 요한은 사람들의 질문에 두 가지로 답한다. 하나는, 자신은 사람들이 기다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며, 예언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인가? 이에 대해 요한은 두번째 답을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한다. 자신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는 것이다. 멋진 말이다. 요한복음의 시작에서 요한은 그 빛을 증언하러 왔다고 하였는데, 소리도 이와 비슷한 개념이다. 왜냐하면 말씀이 사람이 되셨고, 소리는 말씀을 전하는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한편 세례자 요한의 신앙고백과 같은 예언의 말씀, “나는 이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몸이오”는 묵상할 때마다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한다. 나는 주님을 어떻게 섬기고 있는지? 혹시 주님의 일을 한다면서 내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양승국신부-
<광야에서>
당시 세례자 요한이 벌인 세례갱신운동은 백성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던지는 말 한마디 한 마디에 집중했습니다. 또 열광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례자 요한이 보여주었던 청빈한 생활, 말과 행동의 조화, 호소력 있는 외침,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사람들은 지금까지의 예언자들과는 격을 달리하는 세례자 요한에게 홀딱 반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추종자들은 날이 갈수록 불어나기만 했습니다.
군중들 사이에서 이런 말조차 퍼져나갔습니다.
“혹시 세례자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그 정도 인물에다, 성품에다, 정직함에다, 탁월한 언변...아마도 가능성이 농후할거야”
사람들의 초점이 온통 세례자 요한에게 쏠리다보니 이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찬밥신세가 된 사람들, 갑자기 파리 날리게 된 유다 지도층 인사들, 유다 최고의회 사람들은 은근히 심기가 뒤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두려움도 느껴졌습니다. ‘혹시라도 세례자 요한이 메시아라면 우린 어떻게 되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줄을 설려면 확실히 서야지’ 하는 마음에 세례자 요한이 정말 메시아인지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세례자 요한의 메시아 진위 여부를 가리기 위해 사절을 보낸 것입니다.
조사관이 세례자 요한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세례자 요한에게나, 예수님에게나, 그 누군가에게 줄을 서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유다인들에게나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그간 세례자 요한의 위치나 입지는 자신도 모르게 아주 높이 올라가 있었습니다. 추앙과 숭배의 대상으로까지 올라가 있었습니다. 스스로도 무척 부담스러웠겠습니다. 본인은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 메시아가 아니라면 적어도 엘리야 정도 되는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단 한 번의 단답식 대답으로 지금까지 자기도 모르게 쌓아올려진, 그리고 꽤나 부풀려진 자신을 일거에 허물어트립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엘리야도 아니다.”
“예언자도 아니다.”
사람들은 조급한 마음에 재차 묻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겸손하게도 세례자 요한은 솔직히 자신의 신분을 드러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신원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뒤에 오실 메시아에 비교하면 광야에 떠도는 소리, 허공에 맴돌다 사라지는 소리에 불과하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아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절대로 그리스도가 아니요, 단지 그리스도에 앞서서 파견된 ‘소리와도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잘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본의 아니게 사람들로부터 집중적인 시선을 받았지만 그 어떤 환상에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스스로를 향해 주인공이 절대로 아님을 명백히 밝히면서 주인공은 오직 예수님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고백합니다.
요한이 조금이라도 덕이 덜 닦였더라면, 준비가 좀 덜되었더라면 군중들의 환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서 덜 닦이고 덜 준비된 수도자나 성직자들이 자신의 삶을 그렇게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가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따라 사람들의 시선집중을 뒤로 하고 다시금 황량한 광야로 나아가는 세례자 요한의 쓸쓸한 뒷모습이 정말 멋있어 보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광야,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오직 ‘광야에 메아리치는 소리’ 역할에 만족하는 세례자 요한의 바람 같은 삶의 모습이 눈물겹도록 존경스럽습니다.
말씀의 힘과 능력으로 오신 주님
-경규봉신부-
요한은 그리스도에 대해 장엄하게 선포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천지창조 이전부터 계신 말씀이시다. 그 말씀은 우주의 원리이며 법칙인 동시에 하느님의 권능과 계시로서 곧 하느님과 같은 분이시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창조되었고, 말씀 안에 생명이 있으며,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악하고 어두운 세상에 오시어 끊임없이 세상을 비추신다. 그런데 악하고 어두운 세상은 영적으로 무지하여 강생하신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처형했다. 그러나 어두움의 세력은 결코 빛의 세력을 이길 수 없다. 또한 어둠의 세력에 휘말린 세상은 재림하실 그리스도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이다.
말씀은 참 빛으로서 세상에 오셨고, 종말에 어두움의 권세를 종식시키고 빛의 왕국인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이다(묵시 21,9-27). 세상은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창조되었지만,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부패되어 어두움의 세력이 지배하고 있다. 참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강생하시어 각 사람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시지만, 세상은 창조주이며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 그리스도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세상의 창조주요 주인이신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당신 백성으로 선택된 이스라엘까지도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배척하였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형에 처했다. 이리하여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백성이라는 특권을 상실하였다. 이제 그 특권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로 넘어갔다. 이 영광스런 특권은 영원하다(묵시 20,6). 그분께서는 당신을 주님으로 믿고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이는 혈연이나 인간의 욕망 또는 인간의 수고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으로 오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을 이미 보았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이시며, 하느님과 동등하신 분으로서 이 세상에 하느님을 완전하게 계시하신 분이시다.
하느님의 은총은 그리스도 안에 충만하여 그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까지 넘쳐흘렀다. 율법은 피조물인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 주는(로마 3,20), 후견인(갈라 3,24)의 역할을 할 뿐이다. 그러나 은총과 진리는 하느님과 동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으며, 그로 인하여 그리스도교가 시작되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지만 아버지와 깊은 관계를 가지신 외 아드님이시오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주셨다.
말씀은 곧 힘이며 능력이다. 인간사에서도 무엇인가를 가진 사람의 말은 가진 만큼의 힘과 능력을 발휘하지 않는가? 인간이 그럴진대 하물며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말씀은 얼마나 큰 힘과 능력을 가지겠는가!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은총을 베푸시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강생하셨다. 그 은총을 받고 구원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고백해야 한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은 참으로 쉽다. 왜냐하면 주님을 믿고 고백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구원은 참으로 어렵다. 왜냐하면 인간은 주님을 믿지 않고 주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믿음으로 사는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하자. 우리 모두가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사는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하자.
소리꾼
-이인옥-
옛날 로마제국 때의 일이다.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서 승전한 개선장군들이 로마로 입성하면
백성들이 모두 몰려나와 연도에 늘어서서 환호성을 지르며 맞이했다.
그때 로마로 입성하는 장군들은 노예 한명을 마차의 뒤에 숨겨 들어왔다.
그 노예는 백성들이 환호할 때마다 장군의 뒤에서
"너는 신이 아니다! 신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역할을 하게 했다는 것이다.
실제 있었던 일인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어제 한 FM 음악 방송 프로에서 들은 말이다
백성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신이 된 듯한 착각에 빠져 잠시 도취되어있는 사이
환호를 지르며 박수를 치던 대중은 언제라도 변하여 돌을 던질 수 있고
개선장군의 공로를 치하하던 황제도
바로 그를 경계 1호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사실을 그들은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요한을 찾아온다.
요한에게 백성들이 몰려가는 현상이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니다."
"나는 ....아니다."
"나는 ....아니다."
이 세 번의 부정 "나는 ......아니다"는 요한복음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드러낸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나는 ....이다"라고 여러번 당신을 계시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살아있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포도나무이다."
"나는 문이다."
"나는 목자이다."
"나는 생명이요 부활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생명의 물이다."....
"나는 ....이다"라는 말은 원래 구약성경에서
야훼 하느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실 때 사용하시던 정식 문구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나는 ...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바로 당신이 그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요한 세례자가 말하는 "나는 .... 아니다"는 말은
단순한 겸손의 의미만 들어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요한 세례자는 그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또한 모세와 같은 '그 예언자'(신명 18,18)도 아니라고 확신한다.
그는 '엘리야'도 아니라고 말한다.
공관복음에서는 요한 세례자가 '엘리야'였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마태 11,13-14)
그런데 여기서 '엘리야'가 아니라고 하니 어떻게 된 일인가?
복음서끼리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렇지는 않다.
요한은 분명 엘리야는 아니었지만, 엘리야의 역할을 하고 있다.
즉 주님의 날이 오기전,
백성들을 회개시키러 올 엘리야(말라 3,23-24)가 해야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뒤에 올 더 훌륭하신 분을 맞이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는 곧 '주님의 길을 곧게 내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
그는 '말씀'이신 분이 아니었다.
누가 뭐래도 자신의 신원을 명확히 알고 있었던 요한 세례자.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역할을 분명히 하고 있었던 요한 세례자.
수레 뒤에 노예를 숨겨두고 외치게 한 로마의 장군들처럼.
백성을 향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인 그도
자신만을 위해 외쳐주는 내면의 소리꾼을 늘 곁에 두고 있었나보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모습
-이기양 신부-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런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합니다. 백성들은 환호하며 올리브 나무 가지를 들고 열렬히 환영합니다. 그러자 놀란 어린 나귀는 어찌할 바를 모르지요. 더구나 지나야 할 길마다 사람들은 옷을 벗어 깔아놓기까지 합니다. 겉옷을 직접 밟은 어린 당나귀는 백성들의 열광에 착각에 빠지고 맙니다.
‘야, 내가 이렇게 대단한 줄은 몰랐네, 내가 이렇게 높은 존재였었나?’
나귀는 자기가 대단한 줄 알고 우쭐대며 앞발을 들고 ‘히히잉’ 소리로 환대에 응답합니다. 안타깝지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가 자기를 향한 것으로 착각한 어린 당나귀의 뻐기며 으스대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가소롭기 짝이 없습니다.
자기를 안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기의 사명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세례자 요한 역시 오로지 하느님과 또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데에만 자기를 쏟아 부은 사람입니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낮춤으로써 주님을 높인 인물, 세례자 요한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은 채 모든 것을 절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을 가르치는 그 모습 속에 인간으로서는 보여줄 수 없는 신적인 권위가 느껴졌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묻게 합니다.
"당신은 누구요?"(요한1,19)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1,20)
세례자 요한은 조금도 숨기지 않고 분명하게 대답했다고 복음이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계속 요한을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요한1,21)
?그러면 그 예언자요??(요한1,21)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요한1,22)
계속 다그쳐 묻는 사람들을 향해 요한은 그제야 대답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1,23-27)
자신의 모든 것을 낮추어 오로지 오실 예수님만을 높이고자 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낮출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반대로 살아갑니다. 나를 높이기 위하여 이웃을 깎아 내리지요. 나의 잘난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 남을 험담하기가 쉽습니다. 이것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남에 대해서 쉽게 말하고 남을 좋지 않게 평가하여 자기를 돋보이려는 행동들은 우리가 빠지기 쉬운 유혹중의 하나입니다. 내가 높아지면 하느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또 높아지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의 평가에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중심을 잃기가 쉽고 평화가 깨지며 하느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작은 것에도 수시로 흔들리지요. 사람에게 기대를 두고 살면 쉽게 상처를 받고, 사람들의 평가에 연연해하며,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게 됩니다. 마음의 중심을 바르게 잡고 쉽게 흔들리지 않으며 참 기쁨과 교요 속에 편안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내 중심에 하느님이 자리잡으셔야 합니다.
이는 사제나 수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들의 평가에 귀를 기울이면 힘들어집니다. 입고 먹고 마시고 꾸미는 세상일에 흔들리는 것과 똑같은 결과가 빚어지지요.
우리는 많은 경우에 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고 은근히 남보다 높아지기를 바랍니다. 어느 때는 하느님보다도 나를 더 앞세우기도 하지요.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만을 높이기 위하여 일생을 낮추며 절제하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을 본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남을 높일 때 나도 높아지는 지혜도 함께 배워야 하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직 주님만을 섬기고 높여드리며 그 안에서 참 기쁨과 평화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에 길이 남는 구세주의 길을 준비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기억되었습니다. 나를 낮추고 하느님과 이웃을 높이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
세례자 요한의 정체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의 프롤로그(서문)에서 이미 언급된 세례자 요한의 증언활동(1,6-8.15)이 본격적으로 보도되는 부분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요한의 활동 자체가 전적으로 이미 와 계신 예수에게 매어있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이미 와 계신 메시아를 알아볼 수 있는 증인과 표징을 주셨다. 그 증인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요, 그 표징은 그가 베푸는 회개의 설교와 세례이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과 표징활동은 우선 세 부류를 향하여 수행된다. 첫째 부류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 즉 대사제, 율법학자, 그리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다. 둘째는 이스라엘 백성이고, 셋째는 요한 스스로가 거느리고 있던 제자들이다. 이 세 부류는 요한이 자신의 임무를 마칠 때쯤 예수께서 직접 관여하여야 할 부류들로 이첩된다. 예수께서도 공생활 한 가운데서 이 세 부류들을 향하여 자신의 육화(肉化)목적을 관철시킨다. 예수는 백성의 지도자들과 "구약"과 "신약"의 표징을 놓고 논쟁을 벌여야 하며, 결국 이들의 모함으로 죽음을 맞게된다. 예수의 구원활동은 요한이 관여한 이스라엘 백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 백성을 뛰어넘어 온 인류와 온 백성을 지향한다.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 중 대부분을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였고, 신분과 출신에 관계없이 새로운 제자단을 구축하여 그들을 사도로 파견하심으로써 자신의 구원활동이 이 땅에 지속되게 하신다.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질문과 세례자 요한의 답변을 들려주는 대목이다. 우선 지도자들의 질문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세례자 요한의 정체성에 관한 심문 성격의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베푸는 표징, 즉 세례의 의미에 관한 질문이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하여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또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어떤 예언자도 아니라고 분명히 밝힌다. 요한의 활동을 지켜본 사람들은 충분히 그가 "그리스도"(메시아)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고, 아니면 메시아 이전에 오게 될 "특사"(말라 3,1)나, 아니면 야훼께서 나타나실 무서운 날을 앞두고 파견될 "엘리야"(말라 3,23-24)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에 요한은 자기가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아니고, 지극히 겸손하게 어쩌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요한은 "나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대로 ’주님의 길을 곧게 하여라’(이사 40,3) 하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 하고 대답한다.(23절) 요한은 이렇게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힘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증언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게 된다. 요한의 증언임무는 자기 자신과 이미 와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명확한 대비구조 안에 성립시키는 것이다. 대비구조는 요한-예수, 소리-말씀, 선구자-메시아, 종-상전, 무(無)-전부(全部) 등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렇게 요한은 자신을 철저하게 비하시켜 이미 와 계신 그리스도를 최대한 앞으로 부각시킴으로써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게 되고, 나중에 예수로부터 엘리야로(마태 11,14; 17,12; 마르 9,12-13)인정받고,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가장 위대한 자로(마태 11,11) 격상되는 등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게 된다.
요한이 베푼 물의 세례는 그리스도교의 세례성사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그는 오직 물로써만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리스도교의 세례는 물과 성령으로(요한 3,5) 이루어진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와 죄의 용서를 가져오는 세례로서 도래하는 하느님나라의 준비를 위한 것이지만, 그리스도교의 세례는 하느님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의미로 발전된다. 아무튼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빛"이신(요한 1,7)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활동하지만,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지도층 부류는 보고도 보지 못한,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반대자의 편에 선다. 이로써 그들과 예수 사이에 벌어질 끊임없는 갈등과 분쟁이 벌써부터 예고된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한 1,19-28)
-유 광수신부-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이다."
1,1-18 절까지에서는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서 말하였다. 즉 말씀으로 탄생하신 예수는 누구이신가? 그분은 하느님이시고 생겨난 모든 것의 생명이시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는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서 밝혔다면 오늘 복음에서는 요한은 누구인가? 라는 요한의 신원을 밝히는 말씀이다.
요한은 사람들의 질문에 세 번이나 "아니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분명히 밝혔다. "아니오"와 "네"를 올바로 대답 할 수 있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아주 대단한 사람으로 또 아주 훌륭한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좋은 기회를 "아니오"라고 말하고 자기 입으로 스스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자신을 말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사람들이"그리스도, 엘리야, 예언자"라고 알고 있는데 그냥 "그렇다"라고 대답하면 존경도 받고 명예스럽고 얼마든지 자기에게 영광스러운 일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오"라고 말하고 겨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말한다는 것이 쉬운 일인가? 요한은 세 번의 유혹을 받은 거이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 예수님이 세 번 유혹을 받으셨듯이 요한도 세 번 유혹을 받았지만 선구자답게 그 유혹을 물리쳤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아니오"와 "네"를 분명히 할 줄 아는 생활이다. 많은 경우 "아니오" 와 "네"를 반대로 하는 경우가 있다. 즉 "아니오" 해야할 경우인데 "네"라고 하고 "네"라고 해야 하는데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대개 이런 경우는 자기와의 관계에서 자기에게 이로울 때는 "네"라고 하고 해로울 때에는 "아니오"라고 한다. 즉 대답의 기준은 자기 신원이 아니라 이해득실에 따라서 하기 때문에 거짓 대답을 하게 된다.
요한 세례자는 이런면에 있어서 우리에게 좋은 모델이시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위대한 인물로 알고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아니오"라고 대답하였고 자신은 다만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대답하였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아는 사람만이 대답할 수 있는 대답이다.
소리란 무엇인가? 소리란 하나의 전달 매체이다. 즉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밖으러 드러내는 하나의 수단이다. 아무리 좋은 소식 좋은 내용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소리가 없으면 내용을 올바로 전달할 수 없다. 할 말은 많은데,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는 얼마나 답답한가? 참 환장할 일이다. 소리가 나와야 무슨 말을 할 것 아닌가? 또 소리는 있어도 내용이 없으면 헛소리만 하게 된다. 헛소리는 아무 가치도 없고 들어 주는 사람도 없다. 이 세상에 헛소리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속에 아무 것도 들어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아무 소리나 외쳐되는 사람이다. 내용은 없으면서 큰 소리만 치는 사람들, 아무 가치도 없는 지저분한 소리를 내는 사람들, 아무리 큰 소리 치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쓸데 없는 소리를 외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좋은 내용이 아름다운 목소리를 통해서 외쳐질 때 아름다운 소리가 나오는 법이다. 멋있는 소리가 외쳐질 것이다.
각자 자기의 고유한 소리를 내어야 한다. 기타는 기타의 소리를 내고 피아노는 피아노의 소리를 내어야 한다. 기타가 기타의 소리를 피아노가 피아노의 소리를 내지 못할 때 기타나 피아노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폐품처리 되고 만다. 좋은 악기의 소리를 낼수록 그 악기의 가치는 높아지고 명품으로 인정받는 법이다. 아무리 겉은 번지를 하더라도 자기의 고유한 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장식품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가 우리 마음 속에 담아야할 내용은 무엇인가?
앞에서 즉 1장 4절에서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고 하셨던 생명과 빛을 담아야 한다. "빛이 비치고 있다."는 말은 말씀을 듣고 "깨달음을 얻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우리가 어둠 속에 있을 때 그 어둠을 비추시는 빛을 통하여 하나씩 깨달음을 얻게 되면 내 안에서 생명이 다시 움틀거리고 그 생명력에 의해 외쳐지는 소리가 있을 것이다. 그 소리는 모든 이들에게 외치는 소리로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찬양드리는 소리이기 때문에 그 어떤 소리보다도 가장 아름다운 소리일 것이다. 누구나 들어서 감동을 주는 소리,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소리, 주님의 길을 안내해주는 소리,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소리일 것이다. 기쁨을 전달해주는 소리, 삶의 의미를 부여해 주는 소리, 용서와 화해를 이끌어 내게 하는 소리는 얼마나 아름답고 가치있는 소리인가?
그리스도 신자의 입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듣기가 쉽지가 않다. 요한이 위대한 것은 그리스도로서가 아니고 엘리야로서도 아니고 예언자로서도 아닌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가 그리스도도 아닌데 그리스도라고 엘리야 예언자고 대답하고서 그리스도의 소리 엘리야의 소리 예언자의 소리를 외치지 못하였다면 그는 결코 위대한 선구자가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요한은 선구자로서 선구자로서의 소리를 외쳤기 때문에 위대한 사람이었고 광야에서 외치는 그의 소리는 오늘도 그리스도의 선구자로 우리에게 들려오는 것이다.
그는 선구자로서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고 하신 대로 "주님의 길을 곧게 내는 소리"를 외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아름다운 심포니 소리가 연주되려면 여러 악기가 각자 자기의 고유한 소리를 내어야 하듯이 우리 각자 외쳐야할 소리가 있고 그 소리를 외칠 때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사제는 사제의 소리, 수도자는 수도자의 소리, 신자는 신자의 소리를 내어야 하고, 부모는 부모의 소리, 스승은 스승의 소리를 내고, 정치인은 정치인의 소리를 내어야 한다. 자기 소리를 내지 않고 다른 소리를 낼 때 아름다운 연주가 되지 못하듯이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소리를 내지 못할 때 불협화음이 되고 난장판 소리만 외쳐질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며 예언자도 아니고 "주님의 길을 곧게 내는 소리"이어야 한다. 나의 소리를 통해서 내 주위의 사람들이 주님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주고 가르쳐 주고 인도해주는 소리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