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도정치를 꿈꾸는 이 시대의 수 많은 사대부들에게 드리는 글>
- 이부탐춘(嫠婦耽春) 해설
계절은 만화방창하는 봄. 소복(素服)을 입은 사대부집의 여인이 뒷뜰에서 몸종과 함께 소나무에 걸터앉아 짝짓기를 하는 개와 참새 한 쌍을 보고 있는 그림이다. 높다란 담벼락에는 개구멍이 있고 그 개구멍으로 들어 온 듯 보이는 여염집 개인 누렁이와 사대부집 개로 보이는 얼룩이, 담장 밖의 벚나무마저도 담을 넘어드는데 담장 안의 소나무는 겨우 가지하나 남겨 두고 말라 비틀어져 죽어가고 있다. 그 소나무를 방방한 엉덩이로 깔고 앉은 두 여인의 자태를 보라! 성을 경험한 소복한 여인의 가랑이는 활짝 열린 여덟팔자이고 아직 성을 경험하지 못한 몸종은 가랑이를 안으로 조이면서 애써 표정을 감추려 하는데 자신도 모르는 발끝은 살포시 열려 있다. 과부의 왼 발끝은 몸종의 열린 발끝을 향하고 몸종은 얼굴이 붉어지며 무의식중에 과부의 허벅지 치마폭을 움켜쥐는데 두 여인의 얼굴 표정이 야릇한 흥분에 젖어있다. 벚나무가지에는 또 다른 참새 두 마리가 눈을 맞추는 중이고, 짝짓기에 몰입된 두 마리 참새 위로는 다른 참새 한 마리가 날개 짓을 하며 짝짓기 중인 수컷을 밀쳐내고 암컷을 차지하려는 중이다.
이 그림을 보이는 대로만 보면 춘화도이지만 “해학적이면서도 여필종부(女必從夫)를 강요하는 조선의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읽을 수 있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이 그림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다양할 것이다. 그 다양함도 다 공감할 만한 이야기다. 나는 이 그림에서 혜원이 숨겨둔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혜원에게 화폭은 하나의 세계다. 그는 화폭의 대각선을 따라서 높다랗고 두터운 담을 침으로서 그가 속한 당시의 세계를 과감하게 둘로 나눈다.
“담 밖의 세계와 담 안의 세계”
그렇게 구분함으로써 그는 조선 사대부들이 목숨을 걸고 벌여온 복잡하고 머리 아픈 성리학의 세계 곧 理와 氣에 대한 논쟁을 단숨에 정리해 버린다. 나는 이 점에서 혜원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깊은 성찰과 그것을 표현해내는 단순 명쾌하고 활달한 기상과 자유성에 대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조선 성리학은 인간심성(心性)을 밝히려고 형이상학적 존재론의 주(主)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주리론(主理論)과 주기론(主氣論)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다투었는데 그 공리공담하는 폐쇄성이 담 안쪽에 갇힌 사대부들의 세계와 같이 죽은 세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소나무는 사대부들이 시서화에서 송백의 절개와 지조니 하면서 자주 등장시켜 읊조리는 소재인데 혜원의 눈에는 그게 말라 비틀어져 다 죽어가는 생명력을 상실한 늙은 소나무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왕성한 생산능력을 가진 여인의 엉덩이를 받쳐주는 쉼터 노릇이라도 할 수 있다면 다행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혜원이 본 인간의 본성은 무엇일까? 우리 인간의 본성은 이발기발 (理發氣發)같은 문자에 치중된 윤리와 이념의 세계가 아니고 삶을 사랑하고 노래하고 즐기는 자유로운 실존의 세계라는 것이다. 담 바깥의 세상은 다들 그렇게 자유롭게 살아가는데 담 속에 갇힌 너만 모른다는 것이다. 아니 알면서도 “에헴!”하며 이중적인 틀을 구축하고 그 틀로서 힘 약한 백성(몸종이나 과부로 표현되는 계층)을 지배하고 구속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개와 참새가 짝짓기 하는 모습은 어릴 때 흔히 보던 풍경이다. 소 먹이러 들과 산으로 가면 발정 난 암소의 뒷 꽁무니를 미친 듯이 따라다니는 황소를 일상으로 만난다. 짝짓기 하는 개가 얄밉다고 지게 작대기로 가운데를 내려치던 악동들도 있었는데, 이 그림을 보고 음심의 뿌리까지 이발기발(理發氣發)해버리는 사대부들의 심성이 오히려 고상하지 못하다 하겠다. 한마디로 이 그림은“성리학에 목을 매는 너희들이 진정한 성(性)이 무엇인지 알기는 알어?”하는 혜원의 조소이자 가르침인 것이다.
<후기>
혜원은 영조시대에 태어나 정조시대에 크게 활동한 인물인데 그가 작심하고 조선 지배 이데올르기의 이중성을 고발하는 그림을 그린 100년 뒤 나라는 일본에 합방되고 국권을 상실한다. 사대부 양반중심으로 짜인 저 폐쇄된 담을 허물지 못했기 때문이다.
1758년생인 혜원은 1813년의 작품까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대략 그 즈음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 사망일과 사망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철저한 당시의 신분 사회에서 지배계급을 우롱하는 그림을 그리고서 살아남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혜원은 신숙주 후손이지만 서얼 가문출신이다. 임병 양란 이후 신분질서가 붕괴되고 새로운 세상이 올 것으로 백성들이 갈망했으나 사대부의 세계는 변화되지 않는다. 숙종의 아들인 영조는 무수리의 몸에서 태어난 천민신분으로 왕이 되었지만 탕평책을 정책으로 삼았을 뿐 사대부 지배 세상을 개혁하지는 못한다. 정조 사후에는 더욱 암울한 안동김씨 세도정치 시대로 빠져들고 마는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예술가가 버티기에는 무척 힘이 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관점에서 해설을 써 보았다.
사대부 중심의 세계관은 트라우마처럼 우리 영혼에 아주 깊이 뿌리박혀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의식 속에서 지금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금 현재의 우리사회가 민주 시민 사회인지 산업화 이후 새롭게 등장한 신흥 사대부 사회인지 되돌아보는 게기가 되었으면 한다. 다음 대선은 우리사회의 주류정신(mainstream)이 민주시민사회로의 진화를 열망하는 의식이 되어야 마땅한가? 신흥사대부 중심의 신분세습세상을 유지하려는 의식이 되어야 마땅한가를 두고 내리는 결정이라고 보면 될까? 우리 국민들의 의식이 어느 방향을 선택 할까?
공산주의도 사회주의도 타락한 자본주의도 아닌 "건전한 민주시장경제원리를 따르는 시민사회, 국민행복사회" 한마디로 말해서 "갑질이 없는 사회(=신분에 따라서 차별받지 않는 사회)"가 좋은 세상이겠지. 작가의 상상이지만 모든 특권 의식을 내려놓는 정치세력이 국민의 지지를 받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인간의 거대한 욕망의 흐름인 이 의식의 물줄기를 돌려 놓을 용기있는 지도자가 있기나 할까?
방금 대구에서 아파트가 좌우가 아닌 상하로 크게 흔들렸다. 놀란 마음에 티브이를 트니 울산 동쪽해상에서 진도 5의 지진이 일어났다 한다. 우리나라도 지진 안전지대가 아닌 것 같다. 필부의 걱정거리가 하나 더 늘게 되었다.
즐거운 밤 되세요^^
* 세도정치시대: 국가권력이 일개 가문에 집중되어 사유화되는 시대
(세도부린다는 말은 우리 어릴 때도 통용되던 말이다. "저놈아 저거 돈 좀 벌었다고 유세떤다!" "조카가 판검사라고 삼촌까지 세도부린다." 국가권력은 물론이거나와 거대 집단의 의사결정권의 사유화 세습화가 세도정치다. 일제 강점기때는 순사만 되어도 칼을 차고 세도를 부렸다. 눌린 백성들은 윤흥길의 소설처럼 <완장>차고 세도 한번 부려 보는게 평생의 소원이었다. 요즘 말로는 갑질인 샘이다. "여염집 개인 누렁이와 사대부집 개로 보이는 얼룩이가 출신성분을 따지며 짝짖기하지 않고, 진보니 보수니 좌파니 우파니 하는 말라 비틀어진 이념 논쟁이 생명을 말라 죽게 만든다"는 혜원의 날카롭고도 예리한 통찰과 시대 비판을 이 그림에서 읽어 낼 수만 있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야 하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금방 알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