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놈’과 ‘님’의 상관관계를 까발린 발칙한 뉘우스 외 4편
김홍조
“유추란 둘 혹은 그 이상의 복잡한 현상들 사이에서 기능적 유사성이나 내적 관련성을 알아내는 것을 말한다. 많은 철학자들은 유추가 비논리적이라서 판단을 그르치게 한다고 폄하하지만, 오히려 불완전하고 부정확하기 때문에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 사이의 다리가 될 수 있다. 유추는 우리가 기존 지식의 세계에서 새로운 이해의 세계로 도약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외 지음 『생각의 탄생』
<앵커> ‘물곰(water bear)’이란 별명으로 유명한 ‘독한 벌레’가 다시 우주여행을 떠났다고 합니다 이 생물은 물이나 산소가 없어도 생존하고 영하 273도 영상 151도에서도 살아남는다고 하는데요
보도에 ○○○기자입니다
<기자> 번데기 같은 몸체에 여덟 개의 다리를 가진 느림보인 녀석의 이름은 타디그레이드입니다 다 자란 성체의 크기가 고작 1.5밀리미터에 불과하답니다 5억 3천만 년 전 캄브리아기에 출현한 생물로서 6천 미터 이상의 히말라야 산맥이나 깊이 4천 미터 바다에서도 발견되고요 전 세계에 1천여 종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네요 먹이는 이끼 같은 식물의 세포액입니다 이번 여행은 2007년에 이어 두 번째인데요 당시에도 진공 상태의 우주 공간에서 열흘간 멀쩡히 살다가 돌아왔습니다 이번엔 6명의 미국 우주인과 함께 당당히 인데버 호에 동승했는데요 녀석들의 생존 메커니즘 연구가 여행의 목적이라고 합니다 상상조차 하기 힘든 불사의 생명력과 적응력! 과연 이번 실험이 인간의 탄생과 죽음에 관한 비밀을 밝히는 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국내에서 유일하다는 전문가 한 분을 어렵게 만났습니다
<인터뷰> △△△/지속생존전략연구소장
아, 그 독한 놈이요? 하늘이 무너져 오존층이 사라져도 종말을 고하지 않는 종족입니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극한 상황에 노출되면 엷은 투명막이 피부로 흘러나와 몸 전체를 보호한다는 사실 외엔 알려진 게 없습니다 아마 ‘DNA 복원 시스템’ 비슷한 게 있지 않을까 싶어요 만약 이번에 그 구조를 밝혀내면 인간의 수명 연장에 관한 획기적 단서를 얻게 되는 겁니다
(이 대목에서 그는 잠시 숨을 고르는 듯 눈을 감았다 뜨며)
매우 조심스런 접근이긴 한데… 혹시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앞마당에 가 보셨어요? 지금 제2의원회관 신축공사가 한창인데요 소식통에 의하면 의정 사상 초유의 전원 합의로 공사 안건이 통과됐다고 합니다 사사건건 상대를 물고 늘어지는 동물적 본능을 지닌 그들임을 감안할 때 한 사람의 반대도 없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 아니겠어요?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성희롱 발언으로 코너에 몰린 동료를 따뜻하게 감싸는 것도 대단합니다 어쨌든 안 되는 일도 되게 만들고 위기에 몰리면 면책 특권으로 스스로를 감싸는 특수한 DNA를 가진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어떤 악조건에서도 살아남을 뿐 아니라 종족 번식을 한다는 점에서 ‘물곰’의 생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기자> 그러니까 소장의 말씀은 ‘인간인 국회의원과 한낱 벌레에 불과한 미물이 동질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된다는 건가요?
<△△△/지속생존전략연구소장>
아~니, 그건 아닙니다 기자 분, 누구 밥줄 끊어지게 할 일 있어요? 지나친 비약 하지 마세요 유추하건대 그렇다는 겁니다 한번 ‘놈’과 ‘님’을 직접 비교해보세요 세포의 원형질이 확연히 다릅니다 현미경으로 확대시키면 전자는 꿈틀대는 ‘생각’이 보이지만 후자는 숨죽인 ‘기회’가 보입니다 이번엔 망원경으로 보세요 한쪽은 상상력이 확장되고 다른 쪽은 본능이 확장되고 있지요? 그 벌레는 지금 신을 두렵게 하고 있고 선량은 다른 인간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 뉴스는 특별한 이유 없이 보도되지 않았다)
마음에 이런 감옥 있다니
육류라면 자폭도 불사한다고 외치는 채식 근본주의자
댄스 음악과 사교춤에 체질적 거부 반응을 보이는 율동 알레르기 환자
넥타이는 맬 줄도 모르면서 남자들을 옥죄는 올가미라는 돼먹지 않은 정의로 스스로를 구속하는 바보
어쩌다 비싼 음식점에 초대 받으면 처자식 생각이 나 음식에 젓가락이 잘 가지 않는다고 착각하는 거룩한 위선자
술자리에서 안주를 많이 먹는 건 사치라는 평생의 고집을 사수함으로써 한쪽 자아가 다른 쪽 자아를 사정없이 내몰게 만드는 비정한 분열주의자
─타인의 신장을 이식받고 모발도 옮겨 심는 좋은 세상인데 아직 마음을 이식하는 기술은 개발 안 됐느냐고 천연덕스레 묻는,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소중한 사람 귀하게 여길 줄 아는 건강한 마음 기증하실 분 어디 없느냐고 묻는─
자신은 자유인이라면서 시시각각 탈옥 시나리오를 짜고 있는 영원한 현행범
백사마을, 오늘 같은 날은
늑대가 먹을거리 찾아 내려오던
44년 전 비탈길 그대로예요
청계천서, 용산서, 안암동서 등 떠밀려
노원들판 건넌 유목민들
세대 당 8평씩 배정받아 낮은 지붕 얹었다지요
절집, 교회당 들어선 골목마다
이주민 어깨 다독이던 말씀 지금도 낭랑하고
샤넬클럽, 계룡산박수, 백성세탁소, 슈퍼
간판도 깐깐하게 살아남았어요
중계동 104번지 백사마을,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는
손찌검하는 아빠 안 보겠다고 보따리 싼
엄마가 보고 싶어
수업료 못내는 학교는 뭐하러 다니냐며
애기똥풀 꺾으며 집 나갔던 딸
타지에서 중년 넘기는 일이 그리도 힘들었는지
며느리밥풀꽃 되어 돌아온다는
안타까운 소식 종종 들린다지요
오늘같이 바람 부는 날은
한 장에 6원 50전 하던 연탄 못 사
웃풍 매서워도 불구멍 막고 살았더랬어요
연탄은행 생겨 하루 3장 나눠 주지만 아까워 못 때고
재개발 바람 불어 춥기는 매한가지
철거 시작되면 이제 또
어디로 가야하나요
인생의 종점에서 돌아보자고
작심하고 들어온 산비탈인데
마을 입구 종점의 마지막 버스 출발하듯
그렇게 떠나야만 하는 걸까요
오늘같이 바람 부는 날은
앞날 걱정 연대기처럼 길게 드리운
수고하고 짐 진 자들의 마을에
추억의 인증샷 건지겠다며
은퇴한 여배우 축 처진 젖가슴 보여달라고
생떼 쓰는 고급 카메라들 셔터소리가
철없이, 철없이
진상손님 같은
밤의 플랫폼
밤 열 시 라디오는 약속처럼 기적 울리고
폴 모리아의 ‘이사도라’ 플랫폼 적셔오면
안녕하세요 김세원입니다
낮게 깔리는 첼로 음색
간이역에 비
안개 부르는 주술에
유령처럼 누워 있던 영혼 벌떡 일어나
공포가 옹립한 죽음의 상징체계
의 난수표 같은 암호 풀어
식은 피 흐르는 심장 떼어내고
온갖 불온한 혁명의 베이스캠프인
봉인된 골방
의 창백한 공기 위무하는 살풀이, 쿨럭이며
떨어뜨린 흰 수건 들어 올리면
이국의 항구 뒷골목 수은등 아래
배회하던 집시 가수
두고 온 과거와 화해하기 위해 귀향길 오르는,
다시 떠나는 삼등 열차 꽁무니로 긴 여운 남기는
애수의 트럼펫
각혈하던
멜랑꼴리
*밤의 플랫폼: 지금은 없어진 동아방송의 70년대 인기 프로그램. 간단한 에세이와 연주곡 몇 곡을 소개했다.
사진사 K의 지극히 사소한 이중생활
사진관 주인 K의 낮과 밤은 대조적이다 햇빛이 있을 땐 포지티브 필름의 세계를 살지만 어두워지면 네가티브의 세계로 옮겨간다 낮의 행동 양식은 양각화의 모습이지만 밤엔 음각화의 형태를 띠고 있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면 가게 문을 닫고 거리의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이는 디카와 DSLR의 대중화에 밀려 고전하는 그의 생존 전략인 동시에 자신의 또다른 초상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행위이다(의도적이든 아니든)
“인물사진 전문작가 K입니다. 유명인들의 표정이 담긴 작품을 십수 년 찍어온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귀하를 한층 돋보이게 해 줄 격조 높은 사진이 필요하시면 곧바로 전화주세요. 거장 카쉬를 연상시키는 ‘사람이 아름다운’ 예술품을 만들어 드립니다. 번호는…”
찌라시를 돌리는 건 한두 시간이지만 바쁜 대중의 손길을 붙잡는다는 일은 피곤하다 배도 고픈데 집에 가기 전에 목이라도 축일까? 가장 대중적으로 보이는 음식점을 골라 문을 연다 한 잔, 두 잔… 소주를 넘기는 손놀림이 점점 빨라진다 교만이 분노로 바뀌고 다시 자학으로 돌아선다 돌리다 남은 찌라시를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활자가 흔들흔들, 왔다갔다하면서 문장이 바뀌고 새로운 세계관이 열린다
“사진사 K입니다. 직장서 나온 지 십 년 가까이 됐는데요. 사진관은 마누라 눈치가 임계점에 달해 어쩔 수 없이 집 담보로 개업한 거구요. 장사가 안 돼 이젠 굶어 죽게 생겼어요. 늦게 낳은 딸아이 팬티가 찢어진 것도 모르고 유치원에 보낼 정도에요. 작가 꿈은 벌써 접었어요. 앤디 워홀이요? 어휴, 그런 말 마시고 제발 나 좀 살려주세요. 싸게 해드릴게요. 전화주세요. 꼭, 꼭!”
그날 밤 그는 CT영상처럼 몸속의 뼈와 장기가 모두 드러난 오드리 헵번, 아인슈타인, 마릴린 먼로와 모택동, 글랜 굴드, 리즈 테일러를 차례로 만났다 ‘대변’을 ‘똥’이라 말하는 표현 양식… ‘스타’를 반전시킨 ‘인간’을 초대한 것이다 실물의 ‘본체’를 제거한 ‘본색’을 밤새워 현상하고 인화하자 네가티브에서 막 포지티브로 건너가려는 새벽이 뻘쭘하게 서 있었다
그의 하루는 모던이 포스트 모던으로 넘어가고 그것이 다시 모던으로 되돌아오는 순환의 과정이다 주체인 동시에 객체며 갑(甲)도 되고 을(乙)도 되는 삶이다 그의 렌즈는 가짜가 진짜고 진짜가 가짜며 약과 독이 중첩되는 세상을 정면으로 쏘아보고 있다 K는 낮엔 살아있는 타자를 경배하고 밤이면 죽은 자아를 경배하는 셔터를 날마다 누른다
─문학 무크 『시에티카』 2011년 · 하반기 제5호
김홍조
경남 마산 출생. 2009년 『시에』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