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6일 현충일, 아침 8시 30분 쯤에 문득 산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서 부랴부랴 차비를 차렸다.
우리 집에서 강화읍까지 거리는 약 15킬로 미터 정도가 된다. 9시 10분 버스를 타고 간다고 했으니 늦어도 8시 50분까지는 집을 나서야 터미널에서 버스를 탈 수 있다.
그런데 카메라 메모리가 가득 찬 게 생각이 났다. 사진을 모두 저장하고 메모리를 삭제해야 한다. 그래서 급하게 일을 서둘렀지만 컴퓨터는 그런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제 할 일을 제 시간에 맞춰 진행해 나간다. 일 분 일 초가 아쉬운데 무려 5분 이상 시간을 허비했다.
시속 60킬로 도로를 80킬로로 달렸다. 혹시 버스를 놓치면 고비고개까지 차를 운전해 갈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산에서 내려와서 돌아올 때를 생각하면 차를 두고 버스로 가는 게 더 좋다. 올라갈 때는 고비고개로 가지만 외포리 쪽으로 내려오니 차를 두고 가는게 여러모로 낫다.
터미널에서 이리저리 둘러보며 아는 얼굴들을 찾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버스가 출발을 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승강장으로 나와보니 막 한 대가 출발을 하고 있었다. 바로 내가 타고가야 할 버스였다.
코 앞에 두고 버스를 놓쳤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택시를 탔다. 기사양반에게 앞의 버스를 타야 되니 강화고등학교 앞까지 태워달라고 부탁을 했다. 택시 기사는 강화고등학교 앞까지 갈 것 없이 축협 앞에 세워줄테니 그 곳에서 버스를 타라고 했다. 축협은 터미널에서 한 정거장 거리다. 마침 버스는 인삼센타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택시는 이미 버스를 추월했고, 나는 축협 앞에서 버스를 잡아탈 수 있었다.
마니산을 비롯한 보통의 산들이 완만한 길을 걸으면서 오르는 것과는 달리 혈구산은 첫 출발점부터 가파른 길의 연속이다. 혈구산은 산길을 걷는 여유를 누릴 사이도 없이 턱에 숨이 닿도록 헉헉대면서 걸어야 한다. 그렇게 약 10분 정도를 올라가면 비로소 완만한 길이 나오지만 또 이내 경사가 급한 오르막길을 허위대며 올라야 한다. 그렇게 몇 개의 등성이를 오르내리다 보면 정상이 보인다. 이렇게 혈구산은 단단한 근육질의 남성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때죽나무가 꽃을 피웠다. 때죽나무를 잘라보면 그 단면의 색이 참 아름답다. 겉은 검은색을 띄고 안쪽은 상아색이니, 겉과 안의 색 대비가 뚜렷하다.
마니산 밑에 있는 심도중학교 뒷마당에는 야생화 화단이 있는데 이름을 새긴 팻말을 일일이 나무와 꽃 앞에 꽂아놓아서 보는 사람의 이해를 도와준다. 팻말을 보니 겉은 검고 안은 희어서 색의 대비가 참 예뻤다. 그래서 물어보니 때죽나무로 만든 것이라고 했다.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현충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을 기리는 날이다. 우리는 모두 경건한 마음으로 묵념을 올렸다.
6월의 산은 온통 연초록빛이다. 그 속에 들면 우리도 연초록빛으로 물이 든다.
혈구산과 함께 달리는 산들이 발 ?으로 내려다 보인다. 내가저수지 뒤로 덕산이 보인다. 덕산 너머는 바다다.
길 한가운데 사슴벌레가 있다. 앉아있는 걸까 아니면 서있는 걸까.
드디어 산꼭대기에 올랐다. 출발점인 고비고개에서부터 약 한 시간 삼사십 분 정도가 걸린 것 같다.
(타박네님 작품임)
먼저 도착해서 말간 웃음으로 우리를 맞아주신 두 분. 부부가 같이 길을 걷는 모습을 보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혈(穴)자는 풍수지리에서 산줄기
헉헉대면서 산을 오르는 우리를 보고 누가 히말라야 14개좌를 오르는 사람들 같다고 놀리며 웃었다. 세 네개의 봉우리만 올랐을 뿐인데도 땀을 한 되나 쏟은 것 같다.
며칠 전에 들은 말씀이 생각이 난다. 괴롭고 힘든 일을 복이라고 생각을 하라는 말씀이었다. 재앙도 복이라니, 말이 안 되는 소리 같다.
짐을 기꺼이 받아들여 지고 간다면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짐이 아니다. 즐거이 받아들이면 그것은 더 이상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짐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금강경에서는 더 심오하게 말씀하셨지만 잘 알지 못해서 내 식으로 이렇게 해석했음)
혈구산에서 퇴모산 쪽으로 난 길로 들어섰다.
(이 사진은 강화나들길 카페 타박네님 작품임)
퇴모산으로 향하는 길에서 만난 이 나무의 이름은 무엇일까. 반대편에서 산을 올라오고 있는 어떤 이가 이팝나무의 한 종류라고 했다. 이팝나무와는 완전히 다른 나무인데 왜 그이는 이팝나무의 한 종류라고 말하는 것일까. 나는 이팝나무가 아니고 다른 나무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 의견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집에 가서 식물도감을 찾아보고 이 나무의이름을 확실하게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에 이름이 없는 것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이름 없는 꽃이니 아니면 이름 없는 새들이니 말하곤 한다. 그것은 자신의 무관심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고 또 무식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에 이름이 없는 것은 없다. 내가 그 이름을 알지 못할 뿐이다.
오랫만에 산을 타서 그랬을까, 허덕이면서 길을 걷는 나를 이렇게 또 담아주셨네...ㅎㅎㅎ (강화나들길 카페의 타박네님 작품임)
땀을 한 되 더 쏟고 퇴모산에 당도했다. 퇴모산에는 '싱아'가 참 많다.
싱아는 박완서 선생님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라는 작품을 통해서 그 이름을 처음 알았다. 싱아는 이를테면 찔레순처럼 어린 순을 잘라서 껍질을 벗기고 씹어 먹는 예전의 주전부리이다. 연해서 씹으면 제법 씹을 맛이 난다. 누군가는 꼭 풋살구를 먹는 맛이라고 했다.
싱아가 뭐 그리 맛이 있겠는가. 그래도 싱아가 보이면 하나씩 꺽어서 맛을 본다.
문학의 힘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변변치 않은 싱이가 박완서 선생님을 통해 우리 곁에 살아남았다. 싱아는 언제까지나 살아 있을 것이다.
으름덩굴이 우거진 원시림 같은 지역도 지났다. 내년에 으름꽃이 필 때, 5월 하순 무렵에 이 곳에 오면 참 좋을 것 같다.
산을 내려오니 양도면 인산2리 동네였다. 인산저수지에서 외포리 방향으로 가다보면 나오는 동네가 바로 이 동네다. 꽃게탕으로 유명한 '서산꽃게탕'집이 있고 또 강원도식 음식을 차려내는 '난향'이라는 식당도 근처에 있다. 오늘 우리는 난향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길에 빨간 열매가 떨어져 있어 주워서 입에 넣어보니 달고 맛있었다. 나는 버찌라고 했는데 누가 체리가 아닐까 했다. 버찌는 먹고나면 입 안에 보라색으로 물이 들지만 이 열매는 그러지 않으니 체리일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체리인가 보다.
나무잎의 생김새를 보니 벚나무와 비슷하다. 그렇다면 꽃도 역시 벚꽃처럼 생겼을 게다. 체리나무를 심으면 꽃도 보고 열매도 얻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나는 또 언제가 될 지도 모를 먼 훗날을 그려본다. 붉게 익은 체리를 따먹는 어린아이들과 그 모습을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바로 내 미래 모습이다. 집에 체리나무를 심어야겠다. 나무를 심는 봄은 다 가버렸고, 갑자기 내 마음이 급해졌다.
집에 돌아오니 태극기가 반겨준다. 평화로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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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초록 바람 부는 집 원문보기 글쓴이: 미감
첫댓글 조금은 힘드셔도 함께 하시길 잘하셨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네, 나서길 잘 했어요.
덕분에 좋은 하루를 보냈습니다.
맨 위의 묵념하는 사진과 맨 아래 태극기를 보니 뭉클해 집니다.
저도 어제 일부러 강화 평화전망대에 가서
북한땅과 625 전시관을 둘러 보며 현충일의 숭고한 정신을 기렸습니다.
일부러 평화전망대를 가셨군요.
북한에도 우리와 똑같이 현충일이 있겠지요?
심도학사의 길희성 선생님이 최근에 한겨레신문에 올리신 「하느님은 누구 편인가」 라는 칼럼이 참 의미심장 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편이냐 아니냐보다 우리가 하느님 편이냐를 묻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답은 우문에 현답이었습니다.
미감님과 걸으면.. 엔돌핀이 마구 나옵니다 ㅋㅋ
ㅎ, 제가 좀 어설프고 또 나대지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엔돌핀이 ㄴㅏ온다면 앞으로도 계속 그리하겠습니다.ㅎㅎ
뱅기님, 잘 계시지요?
언제 같이 나들길 걸으면서 많이 웃고 그럽시다~~~.
미감님 글은 참 편안해요~ 저도 함께 걸어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여름에는 산길을 걷는 게 우선인 것 같습니다.
그늘이 없는 길을 걷는 건 고행 비슷하지요?
그래서 혈구산에 갔는데, 힘들었지만 좋았어요.
혈구산가는길이 넘 힘들었는데 지금보니 멋있네여....그래도 조았씀다 홧팅~
힘들었지만 그래도 좋았어요.
포비님, 열심히 길을 걷는 모습 보기 좋아요~~~.